현대인의 교사 루소 - 루소는 에밀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김상섭 지음 / 학지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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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에 대해 생각하면 보통 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인권을 주장한 사상가로 생각해왔다. 물론 그는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와 <인간불평등기원론>으로 통해 인간사회가 가진 억압과 고통에 대하여 진지한 비판과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문장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곧 하나의 철학이 되었다면, 카를 마르크스가 제기한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오 담로시의 <인간불평등발견자, 루소>를 읽게 되면, 루소는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드,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사상가와 혁명가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런 루소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경우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에 나온 이 문장에서 이때까지 철학은 세상을 계속 해석해 오는 것에 충실했다면, 그 해석을 하는 철학이 결국 탐구하고 보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탐구대상의 영역이 무언가 오류나 잘못된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거기서부터 단순히 비판하여 고찰만 해야할 철학에서 실재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실천철학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소의 철학은 당시 사회인 프랑스 계몽주의 물결에서 볼테르나 디드로 같이 단순히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기보단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계몽주의 철학자와 달리 루소는 엘리트이면서도 엘리트인 것에 치중하지 않았다. 사실 볼테르와 루소가 프랑스 파이에 있는 팡테옹이란 신사에 나란히 묻혀 있다고 해도 두 사람의 계몽주의적인 요소를 그 만큼 달랐다. 볼테르는 지식인 중 뛰어난 사람들에 대한 우월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면 루소는 그들과 달리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결국 마르크스가 제기한 것처럼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위에 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이 세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서 핍박받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에서 변증법적으로 물질이 사회구조를 변화한다는 것처럼 당시 프랑스 사회는 빈곤한 하층민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했던 것이다. 루소의 사상이 왜 그렇게 변화를 주었는가? 사실 왕정사회에서 국민이란 그저 왕에 의해 통치를 받는 사람이고, 그들의 재산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왕으로부터 얼마든지 수탈당할 수 있는 위치였다. 심지어 목숨조차도 왕이나 귀족의 노여움에 의해 보장받지 못할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은 단지 권력자들에 의해 모조리 박탈당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루소의 <에밀>을 읽게 되면 그가 본 사회는 참으로 위태로운 것은 분명했다. 왜냐하면 <에밀>이 발간된 시기는 1762년 당시 유럽 어느 사회든 왕이 통치하지 아니한 국가는 거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프랑스 루이16세가 지배하던 왕정국가에서 그 이전의 루이14세는 태양왕으로서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왕권신수설까지 도래한 시기다. 무너지지 않을 듯한 철벽같은 왕정시대에서 <에밀>에서 이제 곧 혁명이 도래할 것이란 위험한 말이 등장한다.

 

지금에 와서 역사적인 흐름을 본다면 혁명이란 것은 최근에 한국에서도 일어난 운동이고, 세계적으로 혁명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혁명의 원인을 찾아보면 민주주의 국가체계에서 헌법을 명시한 국민이 곧 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이란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소가 살던 시대에는 국가의 주인은 곧 왕이었다. 왕이 모든 것의 주인이던 시기에 루소의 발상은 그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상이었다. 바로 그런 사상이 세계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18세기를 지나 21세기까지 그의 사상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고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정치철학 내지 사회혁명으로서 루소의 가치를 보는 것에 대해 내가 개인적으로 주안을 두었다면, 이번에 읽은 도서는 조금 다른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자연적이고 그 존재는 자유로우나 이미 세상 도처에 널려 있는 사슬에 의해 억압의 사슬로 묶여 버린다. 인간이 태어나는 이상 사회화라는 것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이다. 인간이 사회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인간은 또 다른 야만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야만의 세계란 무지몽매하고 물리적 폭력이 난무하는 미개한 야생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잔혹한 야만성이 가득한 사회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에서는 폭력에 의한 물리적 타격은 없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말과 그리고 오묘하게 숨어있는 질투, 시기, 모함 등이 존재한다. 루소가 왜 그토록 인간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을까? 루소가 말한 자연이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장 자크 루소의 <식물사랑>을 보듯이 루소가 아주 평화로운 들판을 걸으며 발견한 식물을 채집하여 그 식물이 무엇인지, 그 식물의 외형은 무엇인지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편지처럼 자연 그 자체가 존재하는 세계 1가지가 있다. 이에 반해 다른 1가지는 인간 사회의 자연성이었다. 인간에게 수렵이나 채집과 같은 농경산업 이전의 비문명사회로 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마음에 접근하여 인간 그 자체로서의 본질에 다가가는 자연성이었던 것이다. 가령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물들여 살아가고 있다. 세속에서 하나의 도덕으로 작용하여 그게 가끔 좋은 것으로 비추어질 때도 있겠지만, 대부분 세속적인 가치가 인간에게 유용한 게 아니라 하나의 허례허식 내지 남을 깔아뭉개거나 혹은 차별하는 도구로도 사용된다. 루소는 바로 그런 세속적인 인간에서 인간의 사회성이 결국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본 것이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인간이 가진 잔잔한 재주는 어쩔 수 없더라도 자신이 가진 재주 내지 재산, 권력을 뽐내기 위해 억지로 자신만을 돋보이려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재물과 재화를 소모시키는데, 그로 인해 많은 가난한 농부들이 밀가루를 구할 수가 없어 빵을 먹을 수 없는 것도 지적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밀가루는 당장 급하게 구입해야 하나, 그들에게 가진 가난함은 오히려 절실하지 않으나 얼마든지 밀을 살 수 있는 자에 의해 그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밀이 절실하게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만큼 밀이 아니더라도 다른 것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여유가 넘치기 때문이다. 그런 여유만큼 얼마든지 구매하고 소모시킬 수 있으므로, 절실하게 원하는 자에게 밀이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사회에서 인간이 가장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나, 인간이 가장 필요한 존재가 인간이므로 결국 가장 비참하고 저렴한 존재는 인간으로 되는 것이다. 루소가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본 것은 어린 시절 농부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던 때이다. 굶주림과 긴 여행으로 허기진 루소는 어느 농부의 오두막에 가서 먹는 것을 달라고 하자, 농부는 아주 형편없는 빵과 음식을 내어주었다. 그런데 루소는 그것을 아주 맛있게 먹어치우자, 농부는 자기가 숨겨둔 좋은 치즈와 음식을 내어주었다. 루소가 보통 농민과 달리 좋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자신의 재산을 빼앗으려 온 줄 알았지만, 루소가 단지 배가 고픈 사람이란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경험으로 루소는 자신의 인생가치를 바꾸게 되고, 후에 가서는 귀족적인 의상에서 아주 간편하고 소박한 의상으로 바꾸게 된다.

 

루소가 경험한 사회에서 이런 농부들의 행동, 파리 도시에 가서 본 비참한 거지와 빈곤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결국 루소는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점과 거기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루소가 그것을 인지한 지점에서 인간은 어떻게 하면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게 바로 <에밀>인 것이다. 이미 그가 추구한 자연적인 인간들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신이 자연적인 인간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문학적 요소로서 만든 교육철학 도서가 <에밀>이고, 그것은 프랑스대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혁명이 되게 하는 큰 구심점이 되었다.

 

에밀은 어느 귀족의 아들로서 부모는 없고, 오로지 에밀의 후원자 한 사람인 장 자크가 맡게 된다. 에밀에 대한 교육방법은 지금과 다르게 매우 혁명적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인 현재에서 에밀에 대한 교육방법은 민주주의적인 요소가 매우 잘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계성은 에밀을 두고 일대일이란 교육시스템은 어려우나, 그런 시스템적인 요소를 조금 다르게 해결한다면 인간을 두고 새로운 가치관을 부여할 수 있던 것은 분명했다. 가령 20세기부터 경제성장과 물질문명의 지나친 발전은 인간이 가져야할 인간성을 파괴하고, 가족관계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이어지고, 가정환경은 자녀들에게 학교라는 단체교육기관에 위탁하도록 만들었다.

 

옛날 교육체계는 학교나 혹은 학교 이전의 교육기관이 있더라도 집안 자체가 대가족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심지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 고모 등이 같이 살았기에 얼마든지 교육의 경로가 존재했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이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배워야 하는 교양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적 요건의 변화는 모든 가족의 해체로 이어지고, 아이들은 더 이상 가족의 보호가 아니라 타인의 위탁으로 이어진다. <에밀>에서 에밀은 자신의 가족이 아닌 가상의 후원자에게 맡겨지나, 적어도 그들은 피가 이어지지 않을망정 하나의 가족과 같았다.

 

가족의 중요성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심리적인 안정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심리적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뭔가 집착하거나 또는 불안해진다. 우리 사회의 교육은 그런 불안한 아이들에게 계속 억지로 주입하거나 틀에 맞추어지는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은 청소년들의 비행이나 왕따, 그리고 소외다. 그런 청소년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면 그들이 경험한 것에 의해 새로운 고통이 반복되고, 그 영원한 고통과 고뇌의 순간을 단절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대안적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의 자연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 회복은 인간이란 비록 완전하지 못해도 그 인간성 자체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학교생활은 그저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와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할 수 없이, 그저 주어진 것만 받아들이어야 하고, 그것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면 처벌로 이어진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처럼 이미 우리 인간은 학교라는 공간조차도 수용소의 한 자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인간에게 그런 사회화란 것은 누구에게 속박당하고, 거짓과 위선으로 상대방을 속이는 기술만 배운 것이다.

 

정작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말이다. 단지 사회에서 정해져 준 가치란 결국 성공이란 것인데, 그 성공은 출세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삶에서 우리의 성공의 가치는 결국 인간이 가진 재력과 권력으로 측정되어 버렸다. 루소가 가장 안타까워한 것은 결국 재력과 권력이 중심이 되면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오늘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그 <레미제라블>의 정신적 토대가 되는 루소의 사상 역시 지금도 묻고 있다.

 

<레미제라블>에서 비참한 사람들은 단지 자신만 비참한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그 비참함은 대를 이어 계속 물려주고 언제 끝나지도 않을 것만 같은 시간지옥 같았다. 인간은 자신을 누군가에게 팔리지 않을 정도로 가난하면 안 되는 것인데,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언제라도 버려야 하는 그런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루소는 그런 사회가 결국 인간의 자연성을 찾지 못한 것이라 보았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자연성이란 숲과 강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본연의 마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누가 아프거나 다치면 그것을 보고 당연히 도움을 주어 그가 제대로 생활해야 한다는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는 점이었다.

 

<에밀>에서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에밀이 사랑하는 여인 소피가 에밀을 기다리고 있는데, 에밀과 에밀의 스승이 약속시간까지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아본 바, 어느 누가 심하게 다쳐 도저히 몸을 가누지 못할 때, 에밀은 그를 간병하고, 의사를 부르러 갔으며, 그의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위로한다고 늦었던 것이다. 결국 타인이 처한 어려운 처지를 보고 당연히 도와주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좋아하는 즐거움조차 포기했다는 점이다. 그런 판단력을 갖출 수 있는 인간, 그것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라 보는 인간이 루소가 추구한 <에밀>의 내용이었다.

 

물론 이런 내용이 아니더라도 <에밀>에서 보여주고 들려주고 생각해야 할 내용들은 너무나 많다. 에밀은 자신이 부유한 재산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마을의 이웃과 즐거움 삶을 살기를 택했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삶을 정하고, 때로는 타인을 위해 같이 힘을 합치며 모두와 조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루소가 바라는 이상적인 삶이란 바로 저런 것이 아닌가 싶다. 단지 루소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본연의 자연적 모습이라면, 더 나아가 칸트와 롤즈는 이성적인 요소로서 사회적 자유를 본 것이다.

 

물론 루소 역시 이성을 중시했다. 그의 저서인 <사회계약론>은 인간은 동식물이 위치한 자연에서 살 수 없기에 사회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이 그 주인이 되어 일반의지로서 자신의 자유를 찾아가는 것을 원했다. 결국 인간의 교육은 사회화라는 흐름에 가겠지만, 그 사회화에서 자연적 본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타인의 평가로부터 관찰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로서 평가하여 판단하는 게 타당했던 것이다. 이성을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그게 결코 이성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성을 활용하는 방법에서 자신의 이기심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 대다수 군중의 이기심은 전체의지로 변하여 일반의지를 대체하게 된다.

 

일반의지란 결코 모든 것을 바꾸는 절대적 힘이 아니라 어느 방향을 향하여 길을 제시하고 안내해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전체의지로서 일반의지를 파괴하고, 그것이 하나의 도덕적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그런 전체의지를 두고 니체는 군중의 허상으로부터 벗어나기 바란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실존주의적인 인간상은 니체 이전에 이미 루소가 정립하였으며, <에밀>을 읽더라도 인간은 자연 그 자체로서 살아가는 것조차가 실존주의적인 인간상이었다. 실존적인 존재이므로 자신의 판단력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하지만 그런 인간을 만드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다.

 

그런 점에서 루소는 인간을 만드는 것은 타인의 손에 의해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찾아가도록 길을 제시해야 주는 것이었다. 그 경로에는 처음에 인간은 자기애에 의해 이기심이 발동하지만, 그 과정조차도 타인에 대한 배려로 이어지도록 유도한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본인이 가장 소중하다. 이런 자아와 타인에 대한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에서 인생의 참모습 그리고 더 나아가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있다. 그 작품에서 주인공 이카리 신지는 14세의 중학생으로 아직 개인의 자아가 확립되지 못한 채,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무관심, 어른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만 강요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언제나 자신을 스스로 몰아넣고 외로움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본다면 우리 사회의 청소년과 이카리 신지의 모습은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인간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사회라는 전체적인 구조가 인간을 형성하게 만든 것이다. 에밀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던 계기는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자 하는 어른이 존재이고, 그 존재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지난날의 모습이 옳지 못한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소의 서적에 나온 문구들은 너무나도 훌륭하여 <현대인의 교사 루소>에 나온 루소의 글들을 보는 내내 나는 감탄을 마지못했다. 왜 칸트가 매일매일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는데(칸트 동네 사람들은 칸트가 산책 나오는 시간을 보고 현재 시간을 알았을 정도였다.), 루소의 <에밀>을 읽는 것 때문에 몇 번 그 산책하는 시간을 깜빡했다고 한다.

 

<에밀>만 아니라 다른 서적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구와 너무 인상 깊은 단어는 내 가슴을 움직인다. 루소는 다른 철학자와 달리 그의 서적을 읽으면 마음에서 뭔가 불타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철학은 차가운 이성으로 볼 것으로 여길 수 있으나, 루소는 뜨거운 영혼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저자는 교육철학자이기에 다소 책 내용이 어려우나, 제4장에 나온 그의 테제는 아주 인상 깊었다. “사상가 루소는 유명한 제자 에밀을 창조했지만, 학습자 에밀은 휼륭한 교육자 장 자크를 창조했다.”

 

우리는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단지 교육자란 이유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려고 하지만, 사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 역시 학생들로부터 충분히 교육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직 학생들의 이성적 수준과 지성의 범위가 넓거나 깊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나, 그들이 품고 있는 상상력과 창의력은 교사보다 더 월등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죽이는 것만 권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적인 모습을 파괴하고 억압하고 파멸시키고 있다. <현대인의 교사 루소>처럼 루소가 현대인들의 교사가 되어야 할 점은 인간이 인간처럼 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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