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서 어떤 마음이나 감정을 담아 부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음악으로 가요가 있지만, 대중가요의 한계는 가사소재 대부분이 연인간의 사랑, 이별 등과 같은 연애 요소가 많다. 하지만 대중가요라고 해도 모든 곡이 연애문제가 아니다. 블랙홀 4집에 수록된 마지막 일기는 광주에 사는 어느 고등학생의 일기를 본 후 블랙홀 리더 주상균 씨가 만든 곡이다. 가사를 보면 못 다한 나의 숨결은 오월의 늘 위에 붉게 떠 있는 부신 큰 빛이 되어 리운 모든 사랑을 바라 볼 거야.’라고 나온다.

 

가사의 의미를 본다면 그 학생은 결국 살아 돌아오지 못한 운명의 강을 넘은 것이다. 물론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그 학생뿐만 아니다. 수많은 광주의 학생들이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차가운 시신이 되었다. 518에 대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대학생 정도 될 정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518의 진상은 7~8년 전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광주 망월동에 위치한 518묘역은 4~5년 전에 가본 것 같았다. 사진으로 찾아볼 수 있으나, 518의 참혹한 기록을 간직한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의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잔인하게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계엄군에게 살해당한 사람은 노인, 여성, 어린이 할 것 없이 몽둥이로 때리고, 칼로 찌르고, 총으로 사격까지 가했다. 인터넷 사진을 보면 어떤 여성이 하체가 다 벗겨진 채 목 위로 머리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성폭행 후 살해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518기념관 옆에 있는 희생자 영정이 모셔진 곳에 가면 더 놀라운 모습을 본다. 영정사진 중에 아직 돌 전후의 어린 아이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이다. 실제 인터넷에 찾아보면 4~5세 정도의 어린아이가 살해당해 거리에 그대로 방치된 사진도 있다.

 

518을 두고 많은 의견을 분분하다. 어느 누구는 광주의 민주화 운동이라 하고, 누구는 북한군 개입설을 말한다. 하지만 최근 미국 국방부 비밀문서 해제에서 북한의 개입은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미국은 이런 상황을 두고 지켜보려 했다. 미국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게 아니라 한국이 자신의 우방국으로 배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전략적 판단이 중요했다. 만일 북한이 개입했더라도 한국의 20사단이 아니더라도 미군의 첩보로 통해 사전조치를 했을 것이다.

 

계엄군에 대항한 시민군이 가진 무기는 겨우 파출소에서 탈취한 구형소총이고, 계엄군은 신식 소총인 M-16에 기갑탱크부대를 끌고 올 정도이니, 전략상 처음부터 이기지도 못한다. 설사 그런 작선을 실행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이 상대 진영에게 대놓고 보여준다면, 그런 작전을 세운 장교부터 총살될 확률이 높다. 최근 미군의 기록만이 아니라 당시 국방부 자료를 찾고, 사격탄알 흔적을 찾아 분석하니 군부가 무리하게 진압했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

 

광주의 민주주의 운동이라 하나, 사실 서울도 민주주의 운동이 계속 진행되었고, 서울에서 5월의 봄이 스쳐간 것 같으나, 광주에서 그런 비극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광주의 5월은 민주주의 운동이라고 말하기 전에 제노사이드라고 먼저 칭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자국민의 저항에 총으로 사격하는 행위가 지역적 갈등을 이용한 점에서 본다면, 집단살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계엄군 부대 병사들은 주로 경상도 권역, 장기복무 부사관 미 장교들은 베트남전쟁 경험자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자국민을 대하는데도 몽둥이로 무참하게 때리고, 칼로 배를 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시신의 사진을 보면 얼굴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격당한 피해자가 있고, 머리를 전기톱으로 자른 것도 있다. 차라리 총으로 사격하여 즉사했다면, 장례식을 치룰 때 시신을 온전하게 모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시신도 있었다. 이 모든 비극이 일어날 때 광주 밖에 있는 한국사람들은 모두 모르고 있었다. 방송국에서는 오히려 광주에서 일어나는 일이 북한군의 개입 내지, 불량 조직폭력배가 개입했다는 식으로 왜곡했다.

 

광주에 전화선로가 끊기고, 모든 교통이 통제되어 있으니 아무도 그들의 비참함을 알지 못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위르겐 힌츠페터(피터) 기자이다. 독일인이던 그가 일본에서 외신기자로 활동할 때 한국의 극한 상황을 듣고 김포공항으로 입국한다. 기자이던 그는 저널리즘 정신으로 들어왔지만, 문제는 광주에 어떻게 가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문제였다. 이때 개인택시 운전사인 만섭이 사글세를 벌기 위해 피터를 데리고 광주로 간다. 영어도 되지 않고, 오로지 먹기 살기 위해 택시를 모는 만섭에게 서울 오월의 봄과 민주주의 운동보다 석가탄신일의 손님이 더 관심이었다.

 

보통사람 모두나 만섭 같이 가난한 서민이고, 만섭은 아내를 사별한 후 낡은 택시를 몰며 돈을 벌어 외동딸을 힘겹게 키우고 있었다. 택시 주행거리가 60, 지금 나온 차들도 30가까이 되면 무리가 오는데, 옛날 차가 60이면 움직이는 것도 용하다. 만섭이 원하는 것은 다른 것 없이 딸 은정이가 자신과 같이 살아가는 게 유일한 삶의 낙이고 행복이다. 사우디에서 5년동안 고생하여 귀국하여 아내를 잃고 좌절한 그에게 단 하나의 희망은 은정이었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만섭의 중심으로 클로즈업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만섭의 얼굴에서 표정과 눈빛, 눈물과 입술의 주름까지 모든 게 작품의 주제와 연결된다.

 

평범한 가장, 그리고 세상의 문제보다 자신의 가정에 충실하던 만섭의 모습은 송강호 씨가 전에 촬영한 <변호인>과 비슷하다. 변호인에서 송우석 변호사는 세무전문 변호사로 돈을 벌고 좋은 아파트에 가서 가족과 편안한 삶을 사는 게 목적이다. 그런 그에게 과거 우연히 만난 국밥집 주인과 그 아들을 만나면서 인생을 변했다. 만남은 우연이나, 만남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인연이 되어 운명으로 되었다.

 

<택시운전사> 만섭이 피터를 만나 광주까지 들어갈 때까지 그저 골치 아픈 외국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광주에 가서 광주시민들을 보고, 광주에서 택시를 운행하던 운전사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어 갔다. 송강호 씨의 연기가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 민주주의 운동을 하던 학생을 부정적으로 보던 사람이 이제는 그들을 이해하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버리게 된다. 송강호 씨의 연기는 마치 스펀지와 같이 모든 것을 빨아들인 후, 어느 일정 선을 통과하면 모든 것이 폭발한다.

 

서울에서 택시를 몰던 서울시민 만섭이 이제는 불의를 세계에 알리는 광주시민으로 변한다. 폭도라고 여기던 사람들이 알고 보니 정 많고 다정한 이웃이었다. 기름을 무료로 넣어주고, 주먹밥도 그냥 주는 인심, 만섭이 차를 고치기 위해 순천에 가면서 그의 마음을 되돌린 것은 주먹밥이었다. 아무 것도 넣은 것도 없이 쌀밥을 모아 만든 주먹밥은 참 맛이었다. 옥상에서 맛있게 주먹밥이 순천 시내 식당에서 국수를 시키면서 서비스로 나온 주먹밥을 먹으면서 만섭이 고뇌한다.

 

게다가 옆 자라의 손님은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신문에서 폭도라고 하니, 만섭의 마음은 서울과 광주 사이에서 갈등한다. 기자 피터는 택시운전사 만섭을 두고 진정한 영웅이라 말한다. 하지만 영웅이 되어주던 만섭은 처음부터 영웅이 아니라 소시민이었다. 영웅은 만섭만이 아니다. 광주시내에서 부상당한 시민을 데리고 병원에 옮겨주던 광주의 택시기사와 시민, 병원에서 환자를 돌봐주던 의사와 간호사, 그들을 위해 밥을 내어주던 동네 아낙네까지 모두가 영웅이었다.

 

그러나 영웅이란 언제나 영광만이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지금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하여 나라에서 법으로 국가유공자로 기리지만, 가족을 잃고 몸을 다친 그들에게 국가유공자란 법적인 대우보다, 당시 급박한 상황과 비참한 죽음, 억울한 누명을 알려 다시 재조명을 받는 것이 목표이다. 최근까지 518비하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37년 동안 상처를 받은 그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진실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기록이다. 나도 이번에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지 않았다면 당시 택시운전사들의 활약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피터가 어떻게 외국에 무사히 필름을 전달할 수 있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영화는 영화로서 재미도 있지만, 영화라는 매체로 통해 충분히 사회적 함의를 이끌어내 수 있다. 영화라는 것은 대중문화이고, 대중문화는 기득권, 정치세력 혹은 거기에 대항하는 세력에 의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부여할 수 있다. <택시운전사>의 대중문화에서 보는 관점은 영화라도 단순히 영화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소가 있다. 영화 <변호인> 역시 부림사건을 소재로 했기에 그 잔혹한 역사를 보고 우리는 영화관을 나오며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다.

 

<택시운전사>에서 518의 참혹함을 담아내던 피터의 이야기이기에,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면이 잔인할 수 있다(어느 어린 아이의 어머니는 계엄군이 광주시민에게 사격을 가할 때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택시운전사>518운동에서 피터의 여정을 그리지만, 피터는 518의 광주사람의 있는 그 모습을 담아내었다. 피터를 안내해주던 재식은 대학생이다. 그가 대학교에 간 이유는 대학교를 가야할 곳보다 대학가요제를 가고 싶어서 갔다고 한다. 광주에서 총을 맞고 쓰려진 그 많은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피터가 광주에 간 이유는 자신이 기자이기에 간 것이고, 만섭이 나중에 피터를 끝까지 책임지고 공항에 데리고 간 이유는 그가 택시운전사이기 때문이다. 기자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공정한 시각에서 기록하는 것이고, 택시운전사는 손님이 무사히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요한 순간에 그들은 서로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무시할 수 있다. 피터나 만섭이나 모두 돈을 벌기 위해 기자가 되고 택시를 몰았지만, 거기서 모든 것이 결정된 게 아니라 또 다른 하나의 출발점이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광주시민과 적대하던 계엄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행위는 차마 용서할 수 없는 잔인한 집단살인을 저질렀다. 그러나 계엄군 속에서도 양심이 있는 자가 있었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피터와 광주를 떠나던 만섭은 계엄군 감시를 피해 산길로 돌아가나, 그 곳에서 검문을 당할 때 어느 중사가 그들의 정체를 알면서도 보내주려 했다. 이때 검문소로 전화 온 명령이 모든 외국인을 포박하라고 했기에 만섭은 택시를 급하게 몰며 간다.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을 들지만, 영화는 광주시민을 학살하던 계엄군 그 자체를 악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연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화 제목처럼 <택시운전사>이고, 택시운전사들이 활약하던 장면은 보안사령부 비밀요원들이 만섭의 택시를 추격하는 장면이다. 위기의 순간, 광주의 택시운전사들이 목숨을 걸고, 만섭을 무사히 보내주는 장면이 나온다. 광주택시가 앞에 있는 만섭의 택시 뒤에 따라오는 보안사 지프차량의 추격으로부터 막아준다. 예상외의 차량 추격전에서 광주택시의 희생으로 무사히 필름은 지킬 수 있었다. 광주택시를 몰던 그들은 영웅심리로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영웅이 되고자 했다면, 피터의 도주를 도운 재식의 죽음이나 총알이 빗발치는 거리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옮기려다 죽고 다친 광주시민들의 의지를 비웃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진보성향과 보수성향의 영화에서 서로 스토리나 흐름이 비슷하거나 목적하는 바가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진보든 보수든 영화의 재미를 기대하더라도 모든 영화는 시나리오라는 이름 아래 서사구조를 가지고, 그 서사구조에서는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긴 이데올로기 매체이다. 이데올로기란 틀에서 영화서사 내 의미하는 바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이순신 장군은 민족의 성웅이고, 한국과 조선의 역사에서 무의 완성인 분이다.

 

그분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 때, 보수는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영웅적인 요소를 찾는다면, 진보는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같이 활약하던 이름 없던 수군과 민초를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영화 <대립군>에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인물 중에 하나인 광해군의 청년기를 보여준다. 정실부인 출생도 아니고 장자도 아닌 광해군이 분조의 수장이 되어 고난을 겪을 때 광해군에게 자신의 소임을 일깨워준 것은 조선의 백성이었다. 돈이 없어서 남의 군역을 대신하던 대립군과 그들의 가족을 보면서 삶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영화 소재나 장르는 언제나 형식이나 틀에 얽매일 수 없다. <스펙타클의 사회>를 제작한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기 드보르의 <사드를 위해 절규>란 영화를 1번 아닌 2~3번 이상 볼 수 있다면 말을 조금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른다. 영화라는 그 자체를 해체 내지 부정하지 않은 이상 어느 영화든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하면 아무리 빤히 보이는 내용이라도 그 내용이 의미하는 바가 중요하다면 어떻게든 보여주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택시운전사>를 보면 518 자체를 모르는 사람에게 상당히 낯설지 모르나, 518에 있었던 사람을 보면 전혀 낯설지 않다. 다들 꿈 많고 정 많은 소시민들의 이야기이다. 지금 그런 사람들을 두고 다소 바보로 취급받아 무시당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과 정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에 있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현실적으로 보이는 실사에 가려진 허구의 세계이다. 허구의 세계에 현실과 더불어 현실을 초월한 그 무엇인가를 넣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택시운전사> 현실과 허구의 재구성에서 현실에 있었던 사실 그 자체를 약간의 허구를 가미하여 재구성했기에 대중영화의 영역에서 일반영화와 르포르타주영화 영역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일반 대중영화지만, 영화전개는 르포르타주의 재구성으로 조합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장면은 피터가 죽기 전에 인터뷰한 모습이 나온다. 피터는 자신을 광주까지 태워준 택시운전사를 보고 싶다는 말을 하며 눈물을 흘린다. 피터는 결국 광주까지 태워준 택시운전사를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영화 속의 피터는 19805, 그 비참하고 아름다운 5월의 택시운전사를 만나 우리에게 안타까운 사연을 보여준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신파적인 요소를 최대한 억제하고, 있는 그 자체를 보여주려 한다. 영화서사에서 목적지는 광주518이지만, 영화에서 카메라의 관점이 되어주는 인물은 피터와 만섭이다. 처음에 광주시내로 가는 것을 반대하던 만섭이 뒤로 가면 병원에서 주저앉은 피터를 일으켜준다. 기록하고 기억해주게 하라고 말이다. 이 글의 윗부분에 블랙홀의 노래 <마지막 일기>가 소개한 것처럼, 가사의 주인공인 광주의 고등학생 518 당시 죽는 것이 무섭고 어머니가 그립지만, 그래도 그곳을 찾아간다. 만섭 역시 피터를 데리고 가려면 목숨을 잃을 수 있고, 만섭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의 딸은 고아가 된다. 그래도 손님은 끝까지 목적지까지 모시고 가는 게 택시운전사의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성적 판단을 내린다. 만섭이 내린 판단은 이성의 논리보단 인간의 도리에서 나온 행동이다. 인간의 도리는 이성의 판단보단 감정의 판단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보다 감성적인 존재인 게 더 나은 것이다. 인간이 사상을 만들었지만, 인간을 지배하는 사상이다. 그러나 감정이 없다면 인간의 사상은 그저 말뿐인 단어에 불과하다. 옳은 일이란 머리로 움직이는 것보다 마음으로 먼저 움직이는 것이 정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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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8-06 1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만화애니비평님의 닉네임은 아무래도 너무 짧습니다. 만화애니도서영화비평으로..... 알라딘은 20바이트 닉네임 용량을 보장하라.

만화애니비평 2017-08-06 17:42   좋아요 0 | URL
보장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20177월이 마무리가 되어가는 시점에 나는 영화 <군함도>를 보았다. 군함도란 이름을 이전에 몇 번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3~4년 전 조선의 근대사를 공부하면서 일제침략 시절 강제징용 역사에서 군함도에서 일어난 일들이 엄청난 만행이란 것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 것일까? 류승완 감독이 영화 <군함도>를 제작한다는 말에 군함도에 대한 역사학자의 도서 내지 소설가들의 이야기도 나왔다. 아마 이전에 역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군함도가 소개된 것이 있을 것이다. 군함도 이야기가 20177월 한국을 강타하기 전 시골에 있는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올해 연세가 99세이다. 조만간 100세를 향해 가는데, 외할아버지가 태어난 시점은 일제강점기가 한참이던 시절이다. 외할아버지가 예전에 징용을 끌려간 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 어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만나보면서 일본에 징용을 갔는지 물어보니 끌려갔다고 했으며, 징용피해자에겐 1년마다 소정의 보상금이 나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외할아버지가 징용을 가면서 엄청나게 많이 맞았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계신 노인복지센터에서 나온 후 이제는 아버지가 태어난 시골집으로 갔다.

 

본래 친할아버지가 살던 곳이나 친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으나, 작은 아버지가 시골에서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징용과 관련하여 이래저래 이야기하니, 우리 할아버지는 4형제 중 3번째인데, 4형제 중 제일 큰형과 막내가 징용에 끌려갔다고 했다. 그리고 작은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 잠시 봤을 정도로 어느 정도 천수를 누렸지만, 제일 큰형이던 큰할아버지는 징용을 다녀온 후 병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집안에 일제에 의한 징용피해자가 3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일본이란 나라에 그렇게 적대심은 없고, 일본인에게 그래 나쁜 감정은 없지만, 일본정부와 기득권에 대한 분노는 강하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 일제 앞잡이들이 다시 광복 후 권력을 잡았는데, 아버지나 작은아버지가 군사정권 시대의 기득권에게 상당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독재정권 시절, 독재정부에 이익을 보던 자들 대부분이 친일파들이었고, 친일파들은 남성들은 강제징용으로 여성들은 위안부로 강제로 보내는데 일조를 했다.

 

가끔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대해 과거 징용 내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피해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점이고, 피해 받은 자들이 겪었던 슬픔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앙금이기 때문이다. 영화 <군함도>를 보기 전에 집안 상황을 다시 확인한 나로서는 군함도가 가진 의미가 단순히 지나간 일보단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현재형이란 사실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영화 <군함도>를 보면서 고증의 절차를 다시 생각했는데, 광부들이 지하 1,100m 정도 내려가면 더위도 문제지만, 산소도 부족하고, 게다가 석탄가루가 내려오니 폐병에 잘 걸렸고, 음식이나 휴식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으니 영양실조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사람들이 병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으면 그들에겐 별 의미는 없다. 다시 새로운 조선인을 데리고 와서 죽음의 섬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영화 <군함도>를 그런 시점에서 보고 나니 조선인들의 비참한 모습이 다시 스크린 위로 올라왔다. 영화 속에서도 비참함이 그대로 전해지지만, 실제 상황은 더욱 참혹하고 비참했다. 누구는 이 영화를 두고 너무 국뽕에 취해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도 드나, 영화로서 재미보단 이런 일이 있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슬픈 영화라는 점은 분명했다. 영화에서는 그동안 짓눌린 억압에 대해 다시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군함도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자, 광복군 소속 장교가 군함도에 잠입하여 친일파를 제거하고, 모두 탈출하려 했다.

 

일본 입장에서 군함도에서 고생하던 조선인이 탈출하면 모든 만행이 드러나고,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게 되어 끝내 전쟁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자료를 모두 없애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증인이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 일본은 징용을 끌려간 조선인을 살해하거나,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했다. 역사에 가려진 조선인들의 원한은 21세기에 되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어질 것처럼 보였다. 20세기 대한민국은 징용피해자들의 원한을 대중에게 노려지는 것을 꺼려했다.

 

만일 일본이 그랬고, 그런 자들이 고생했다면, 중간에서 누가 그들을 죽음의 절망으로 떠밀었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그 사실을 드러내기 싫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영화 <군함도>가 많은 논란에서 시작된 원인도 그렇고, 또한 영화 내용조차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상당히 어두운데도 나름 유머를 잃지 않고 있다. 배우 황정민 씨의 연기력이 발휘하는 것은 아무리 절망의 나락에서도 어떻게든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 자신의 딸과 같이 탈출하기 바라는 아버지로 나오나, 뒤에는 자신이 죽더라도 딸의 미래를 걱정하며 눈을 감는 아버지가 된다.

 

조선인들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기에 처음에 어려울 것이다.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조건 아래에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일본이 증거와 증인을 없애려는 그 마지막에도 일본의 인텔리적 요소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운명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옳다. 단지 그 선택의 조건과 상황이 어느 정도 부합되어야 성립된다. 영화 <군함도>에서 그런 상황이 주어진 게 특징이고, 그 상황을 맞추어 살아남았다는 게 특징이다.

 

단지 영화연출 요소에서 지나친 슈퍼히어로 요소가 가미되었기에 아쉬웠다. 광복군 장교라면 분명 뛰어난 두뇌와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다. 총을 관통하고 며칠도 되지 않은 상태에 과감한 전투장면, 부소장이 불에 타고 있을 때 한 손에 일본도를 가지고 목을 잘라 내버리는 것은 너무 지나친 설정이 아닌가 싶었다. 이런 점이 국뽕적인 요소로 보일 수 있으며, 연애적인 요소에선 억지로 맞추어 넣는 신파적 요소 역시 없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영화 <군함도>1번을 봐야 하는 이유는 그때 살아가던 조선인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죽어갔는지, 또한 거기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군상과 다양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 마지막에서 일본이 군함도를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했고, 거기에 있었던 잔인한 만행을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 근대라는 역사적 유산에서 우리 인류는 발전이란 이름을 전쟁과 착취 그리고 파괴를 일삼아왔다. 근대와 현대는 연결되나, 근대에 새겨진 상처의 얼룩을 지우려 하면, 그 겉은 보이지 않아도, 속은 곪아 썩어가게 된다.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상해임시정부로 통해 광복 후에 정식으로 가진 이름이지만, 광복 전에 우리 한국인은 여전히 조선인이다. 군함도에 끌려가거나 그밖에 많은 죽음의 땅으로 끌려간 사람 모두 조선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한국인이라고 말해도 조선인이라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인이란 이름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의 상처 입은 과거를 망각하고,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영화 <군함도> 작품보다 그 영화를 통한 수입배급 체계나 혹은 작품 내 지나친 설정은 문제가 있지만, 영화 소재로 본다면 반드시 보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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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잠깨어 - 한시로 읽는 다산의 유배일기
정약용 지음, 정민 엮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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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에 잠이 들어 아침까지 일어나는 것도 참 행복이다. 늦은 밤까지 잠을 청해도 오지 않고, 눈을 감아 잠이 들었다고 여기다 갑자기 눈을 뜨면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아직도 컴컴하기만 하다. 인간의 잠자리에서 보통사람도 그러하나, 가끔 집에 우환이 있으면 어떠하랴? 한밤중에 잠을 깨면 이렇게 할 것도 없이 잡념만 무성하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상황이 제법 길지 않아도 답답한데, 만약 집에 우환이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처지가 곤란한 지경에 있다면 어찌 해야 할까?

 

20177월 초반에 나는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에 위치한 다산초당에 다녀왔다. 다산초당이라고 하면 한국 대표 실학자이면서도 유학자, 그리고 민족의 등불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기거하신 곳이다. 다산초당이 문화관광지로 유명하나, 막상 가면 화려하지 않은 곳이다. 시골에 한적한 만덕산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산초당의 주인이던 윤단의 후손은 아직도 거기서 선조의 땅을 지키고 있다. 정약용 선생이 여기 유배오면서 많은 혜택을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혜택을 입어도 하더라도 그런 일들은 차라리 겪지 않을 것이다. 정약용은 1801년 신유사옥으로 인해 장기현으로 유배가고, 형님의 사위인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다시 의금부로 끌려와서 모진 형을 받아야 했다. 백서사건에서 둘째 형인 정약전을 마지막으로 보고 그는 먼 강진 땅으로 다시 유배를 가야했다. 신유사옥에서는 셋째 형과 매형을 잃고, 자신의 친구와 동지들을 잃어야 했다. 조선사에서 천주교박해사건인 신해사옥은 단순히 가톨릭 교회사로 보는 게 아니라 조선 붕당정치에서 상대진영을 몰살시키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었다.

 

장기와 강진이란 곳에 가면서 땅과 물이 몸에 맞지 않았다. 그나마 강진은 농촌과 어촌이 같이 있지만, 장기현은 전형적인 동해바다가 인접한 마을이다. 장독이 언제나 밀려오고 음식 맛도 맞지 않았다. 찾아온 이도 없고, 찾아갈 이도 없이 하랄 것 없이 방안에서 슬픔에 젖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인간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이 온다면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미치고 만다. 가족과 친구들이 몰살당하고, 자신 역시 고문에 지쳐 폐인이 되었다.

 

먼 길을 떠날 때 가족을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으며, 늙으신 집안어른들은 죽기 전에 볼 수 있을까 하는 슬픔으로 눈물을 훔친다. 유배가기 전에 떠오른 풍경에서 정약용 선생이 느낄 앞날이란 어떤 것일까? 조선시대 유배에 대해 생각하면 한양에서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 죄가 크다. 게다가 유배는 사형의 아래 단계에 위치한 형벌이다. 죽을지도 모르는 운명 앞에서 겨우 명줄만 보존했다. 게다가 천주학쟁이란 오명을 받아 시골오지로 내려가니 동네주민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괴물 1마리가 마을을 덮치는 것과 같았다.

 

슬픈 일에 힘든데, 외로운 시간은 더욱 괴롭다. 마재에 있는 집안에 가족들의 얼굴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니 그 슬픔 어찌 하면 좋을까?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를 머물면서 잠들지 못해 남긴 시들을 모아 만든 <한밤중에 잠깨어>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살아오면서 느낀 감정과 회한을 엿볼 수 있는 서적이다. 개인의 심정을 바라보면 그 안타까움 마음과 슬픔을 200년이 지난 지금도 느낄 수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사람들은 민족의 위대한 인물이라 하나, 그가 겪은 아픔과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한밤중에 잠깨어>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유배생활을 할 때 남긴 시들이다. 다산초당에 기거하게 되면서 그나마 힘든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다. 강진에 오면서 바로 다산초당으로 가지 않았다. 사의재에 머물면서 초라한 주막에 외로움을 달랬다. 우연히 아버지 친구인 윤광택이 자신의 조카 윤시유에게 명을 내려 은근히 찾아와 위로해주었다. 강진에 머물면서 외가의 친척이 다산초당 주인이기에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다산초당은 강진군 도암면에 위치하고, 도암면에서 서측으로 가면 해남군이 위치해 있다.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는 녹우당이 있고, 거긴 다산의 외갓집이다.

 

다산초당, 녹우당, 그리고 친구 겸 사돈인 윤서유의 도움으로 다산은 적막한 외로움과 슬픔에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한밤중에 잠깨어>를 읽은 후 다른 시집을 읽으면 기분이 다르다. 특히 다산초당에 머물면서 남긴 시들은 그나마 낙천적 요소를 읽을 수 있다. <한밤중에 잠깨어>는 오히려 그가 제일 힘든 시기에 남긴 글들이다. 가장 찐한 글은 집에 하인이 찾아와 물품을 전달할 때, 정약용 선생의 어린 아들이 밤을 넣어 보낸 것이다. 많은 자녀를 낳았지만, 남은 자식은 31, 그나마 막내아이조차 유배지에서 부고를 접한다.

 

먼 지역에 있으면 가장 그리운 것은 가족과 친구들이다. 나도 군대 훈련소에서 밤늦게 혼자 보초를 서면서 집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몇 개월 동안 보지 못해도 그리운데, 18년 동안 강진에 머문 정약용 선생은 오죽할까? 자신을 아껴주던 학자군주 정조대왕, 그리고 많은 동지들까지 생각하면 마음속에서 한탄만 더해간다. 자신이 원한 이상적 유학이란 백성들이 배고픔에 괴로워하지 않고, 세금이 무서워 가난에 찌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백성들이 가렴주구한 관리로 인해 고통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며 다산의 가슴은 타들어간다. 그냥 잠을 청해도 오지 않으니 나그네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자신의 불평을 시로 옮기는 일밖에 없다. 당시에 남긴 시조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마음이나, 후대에 내려온 이 글귀들은 아주 훌륭한 한국 문학 자취들이다. 내년 2018년이면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서 해배되신지 200년이 된다. 다산이 떠난 지 200년이 넘은 강진을 돌아보면 여전히 다산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지키려고 한다. 그런 아픔을 겪은 다산이기에 <한밤중에 잠깨어>에서 보인 그분의 마음은 아련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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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조선사 - 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오백 년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1
조윤민 지음 / 글항아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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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초반에 재미있는 2명의 유학자가 나왔다. 하나는 우암 송시열이고, 다른 하나는 백호 윤휴이다. 윤휴는 그가 죽은지 350년 넘게 세상에 나와서 안될 인물이었다. 주자의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군림하던 조선, 그 조선이란 국가에서 윤휴는 주자학의 절대적 관점을 다르게 보는 학문적 자율성과 개방성을 추구했다. 그 덕분에 주자의 성리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송시열에게 공격당했고, 윤휴는 서인들의 집권전략에 따라 사약을 받들고 그 운명을 달리했다. 윤휴가 왜 이렇게나 안타까운 죽음을 당해야 했는가?

 

시작은 기축옥사부터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임진왜란부터일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가장 활약한 인물은 바다에서는 충무공 이순신, 육상에서는 권율 장군이었다. 이순신의 평가는 지금에 따지면 국가를 살린 성웅으로 묘사되나, 조선시대 중 선조 때는 그야말로 최악의 무관이었다. 그가 최악인 이유는 다른 것은 없다. 임금인 선조보다 백성들에게 더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고문을 당하고 3군 통제사 신분을 잃은 채 백의종군할 적에 많은 군인들과 백성들이 이순신의 귀환을 보면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백성들에게 나라를 버리고 간 선조보다 같이 옆에서 같이 싸워준 이순신이 더 높은 인물이었다. 역사적 자료에서 이순신은 회의를 할 때 무관직 참모 외에도 일반 사병과 백성들조차 발언권을 주면서 전략을 짰다고 한다. 이순신을 인재로 발탁한 인물로 대부분 이순신의 친구 서애 유성룡만을 생각하나, 그 이전에 영의정 동고 이준경의 안목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준경은 남인의 영수로 있었고, 명종시기 을묘왜변 때 직접 해남일원을 방문하여 왜적을 격파했다. 그때 그가 추천한 전략을 현직 무관보다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많은 조언을 받았다.

 

남인의 활약은 바로 붕당정치에서 다른 당파에게 눈에 거슬린 행위였다. 이준경은 율곡 이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이 죽기 전 율곡 이이 때문에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 예견했다. 이이와 많은 조정대신들은 유언을 남기는 이준경을 탓했으나, 후에 진짜 붕당정치로 고역을 치룰 때 이이는 이준경의 교훈을 뼈저리게 새기고 붕당의 폐단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왜 붕당정치가 문제이고? 임진왜란이 어떤 발화점이 되었고, 윤휴의 죽음은 왜 다시 재조명된 것인가?

 

조선의 사대부는 진실한 유학자가 있다면 거짓으로 물든 유학자가 있다. 유학자(儒學者)는 정치인 이전에 철학자이며 사상가이다. 철학사상에서 정치적 판단은 곡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연마하고, 그것은 곧 백성의 생활이 안락할 수 있어야 한다. 공자의 유학정신은 그랬다. 하지만 양반이란 계급, 사대부란 이름을 가진 자들은 백성에게 좋은 선정을 베풀기보다 오히려 폭력을 합법화하여 통치했다. 유학이란 시스템은 충효가 중요하고, 이 모든 것은 정치적 맥락에서 연계된다.

 

물론 충효는 중요하다. 나라가 위기에 빠져 아무도 나서지 않을 경우 지난 일제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부모를 업신여기면 그 당사자의 자녀 역시 그 이상으로 업신여기게 될 것이다. 인간의 도리와 가치관에서 충효는 중요하나, 그 근본은 인간의 도리로서 여길 것이지 그 자체로 모든 이데올로기를 결정한 순간 나라는 망하고 만다. 양반 사대부 통치이념은 충효사상이고, 그것은 조선의 명나라 숭배사상이다. 사대주의는 강자에게 약자는 머리 숙이고, 그 약자에 속한 약자는 또 다시 머리를 숙이어야 한다.

 

만일 나라가 잘 운영되면 무슨 문제인가? 그러나 그게 되지 않아 문제이다. 윤휴의 죽음은 바로 여기서 부터이다. 효종임금은 아버지 인조가 겪은 수모, 자신이 청나라 볼모로 잡혀 간 것에 원한을 새기며 평생 무력을 연마하고, 여색을 멀리했다. 먹는 것도 검소하고, 평소 양반이란 것은 문무의 일치를 몸소 실천한 임금이다. 효종의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지 않으나 적으나 다른 임금에 비해 총명하고 의지가 있던 군주였다. 하지만 그는 30대 되는 나이게 병으로 죽고 만다. 그가 평생 걸쳐 하고픈 업무란 청나라를 치는 것이다.

 

북벌론, 명나라는 이미 기운 달이나, 그래도 매달리는 모습은 다소 한심하더라도, 지금과 당시 국가적 가치관이 달랐다. 효종의 북벌론에 우암 송시열이 집중적으로 헌신했다고 하나, 다시 사관의 실록과 당시 기록들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백호 윤휴가 북벌에 목숨을 걸었고, 그가 북벌을 완수하기 위해 문과에 충실한 조선에 무관정치인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백호 윤휴는 무관을 당상관으로 당겨오고, 무관을 많이 뽑기 원했다. 여기까지 다소 당파의 소음이 있으나, 결정적인 문제는 병사와 하급무관의 발탁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가장 많이 재산을 불린 방법은 농지를 수탈하고, 주변 양민이나 농민을 종으로 삼아 곡식을 불려가고, 게다가 환곡을 빌려주면 2배 가까운 이자를 붙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반 사대부도 아닌 왕족의 후예까지 그러니 그 폐단이 얼마나 심각했을까? 윤휴는 평민을 늘리야 하고, 세금의 납부를 농민이 아니라 양반까지 늘려야 한다고 했다. 평민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군역을 한다. 만일 군복무를 하지 않으면 군포를 내야 하나, 노비가 늘어나는 평민이 줄면 국고가 부족하다.

 

무관을 임용하기 위해 국고를 채워야 하나, 양반들은 군포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내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집안의 족보를 보니 나의 직계 할아버지는 군역과 관련하여 실제 무관직을 수행하여 변방에서 수명이 다해 순국했다. 나이가 70중순을 넘겨 변방을 지킨 것도 있지만 군역과 관련하여 보인(保人)까지 맡았다. 군정의 의무에서 이미 무관직을 맡았고, 거기에 군정의 병역에 필요한 군포도 제공한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도 군포를 낸 기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에 군포를 내는 자는 농민이고, 농민 대부분이 수탈로 인해 노비로 되자, 국고를 거두어야 할 재원이 부족하게 되었다.

 

윤휴는 바로 저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문제는 저기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으면 반대로 이익을 얻는 자들도 있다. 이익을 받는 자들은 산림에 거주하는 사대부들이고, 그들은 거대한 벌열세력으로 권력과 재력을 누렸다. 그들에게 노비 숫자를 줄이고, 평민을 늘리며, 농민이 내던 군포를 줄이는 대신 양반에게 전가시킬 경우 많은 반발이 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윤휴는 사문난적이란 이름 아래 역사에서 사라져갔다.

 

이순신 역시 남인이란 점에서 정치적인 압력을 받았다. 이순신 장군이 서거한 날은 친구 유성룡이 탄핵을 받아 실각할 때이다. 자신을 구원할 친구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그 친구는 임진왜란 그렇게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정치적 당략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 남인의 대착점에 서인과 북인이 있었고, 서인들은 대부분 선조와 함께 갔다면, 북인들은 주로 의병활동, 남인들은 무관으로 전장에서 많이 싸웠다. 이순신의 공을 올리기보단 선조는 오히려 명나라의 구원군에게 더 큰 공로를 치하했다. 이여송 장군이나 진린 장군에게 더 큰 치적을 남기고, 살아있는 사람을 배향하는 사당까지 만드니 그 어리석음을 어디 말할 수 있을까?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책임지어야 할 왕과 사대부들은 모두 피신하고, 대부분 백성들이 당했다. 그나마 백성과 같이 싸우던 사대부들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전쟁 후에는 유성룡의 실각으로 남인들은 소외되었다. <두 얼굴의 조선사>에서는 이런 역사적 형태를 사대부의 관점보단 일반 민중, 백성들의 시각에서 봤다. 조선의 역사를 우리가 버릴 수는 없지만, 그런다고 무조건 옳다고만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권력층이 피지배계급에게 향한 폭력과 억압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종이란 이유로 때려죽여도 죄가 없고, 종이 상전에 욕을 했다고 교수형에 처했다.

 

조선 최고의 명군주인 세종대왕 집권 당시 능지처사가 가장 많았다고 한 것은 충격이다. 능지처사, 능지처참은 말이나 소를 이용하여 억지로 사람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아주 고통스러운 형벌이기에 극단적인 역모가 아닐 경우 실행하지 않는다. 백성들의 양반에게 대들면 참형은 기본이고, 장형으로 몸을 불구로 만든다. 형조에서는 백성의 문제를 다루고, 의금부만이 사대부 관료를 다룬다. 형조와 의금부의 분리로 계급적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한계성은 백성의 고통을 잘 기록하고 연구한 것은 좋으나, 몰락한 양반세력이나, 백성의 고통에 동조한 양반에 대한 관점이 많이 부족한 점이다.

 

의금부에 갇힌 양반이 형조에 갇힌 평민에 비해 대우가 좋은 것은 분명하나, 그것은 권력을 가진 집권세력일 경우이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한 지식인은 옥중에서 사망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 사화나 옥사의 경우 그 피해는 말로 할 수 없다. 책에서 소개한 정개청의 서원철거 문제가 나오는데, 정여립 모반사건이 사실이 아닌 조작에 의한 옥사이다. 당시 사대부들이 1,000명 정도 화를 당해 죽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권력층 비리를 비판하던 많은 선비들이 장형으로 맞아 죽었다.

 

유학자의 이름 아래 통치하던 예절의 나라 조선은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폭력을 정당화한 국가였다. 부정과 부패가 들끓었고,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귀양을 가거나 보복을 당했다. 국가의 문제를 비판하는 자들의 상소가 사라지면,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은 늘어만 갔다. 여성의 인권에서도 조선 초기 딸도 부모의 재산에 대해 공평하게 받을 수 있었고, 그들도 부모의 제사에 관여하여 재산권을 실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을 겪을 후 장자중심으로 이끌어갔고, 장남 이외 아들은 그나마 유산을 받을 수 있지만, 딸은 출가외인이 되어야 했다.

 

한명기 교수의 서적에서도 환향녀의 운명은 더욱 가혹하다. 열녀문화에 미친 듯이 집착하여 죄 없는 여성이 스스로 자결하고, 때로는 집안에서 죽음을 재촉하니 그 폐단이 얼마나 골수에 미친 것인가? 책 후반에 갈수록 조선사회 문제점을 거론하기보단 조선시대 향촌문화를 중심으로 말하는 부분은 아쉬운 것 같으나, 서원의 설립과 운영은 폐단 중에서도 심각했다. 중앙권력층과 지방 세력의 가교 점은 서원이고, 특히 제일 심한 곳은 우암 송시열을 기리는 화양서원이었다.

 

이 책의 읽을 때부터 내가 서평을 적을 시점부터 우암 송시열을 언급하나, 그는 성리학자로 보자면 매우 탁월하고 훌륭한 인물이나, 백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나쁘고, 폐단 그 자체를 종속을 시킨 인물이다. 송시열의 정치적 입지는 노론과 소론의 붕당세력으로 나뉘게 만들고, 송시열 사후에 송시열의 이름을 들먹이며 지주사대부들의 횡포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사적이익 당론이 그렇게 만들었다. 물론 노론만 아니고 남인과 북인 세력들도 백성에 대해 횡포를 부린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나, 신하의 권력이 왕권을 넘어 가면서 왕도정치는 이미 기울여졌다.

 

왕권강화는 곧 정치적 개혁시도이고, 백성에게 유일한 소망은 암행어사가 출도 하여 탐관오리를 붙잡아 형벌을 처하는 것이다. 왕권이 약하고, 그 암행어사조차 비리에 눈을 감는다면 답이 없다. 심지어 그 비리를 고발한 암행어사가 후에 정치적 보복까지 당하니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있어도 어찌 풀어나갈 길이 없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조선시대 이야기라고 하나,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일부 잘 나가는 사대부집안은 친일파세력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해방 후에는 재산을 모아둔 자본으로 쌓아 이윤을 챙겼다. 돌아보자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작가는 조선이란 나라 자체를 모두 부정할 생각이 없으나 이렇게도 적나라하게 양반을 비판한 이유는 그 시대의 오류가 아직도 한국을 지배한다. 한국사회에서 말대꾸는 용서되지 않으며, 이른바 답정너(답을 이미 정해졌으니 너는 대답만 해!)라는 방식의 기원은 조선 사대부들의 권위의식에서 시작된다. 공장에서 일하거나 농사짓는 것을 하잖게 보는 것도 사농공상의 시점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법의 집행은 위에서부터 가장 엄하게 해야 하나, 조선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를 느낄 수 없으니 왜 이리 씁쓸한가?

 

인터넷 유머게시판을 운영하는 한 블로거의 게시물을 보았다. 거기에 절도죄를 한 사람의 징역형량이 나와 있는데, 배고픔에 견딜 수 없어 몇 만 원과 라면을 훔친 자는 4, 사기를 친 자는 나중에 특사로 2년 반 정도 복역에서 나왔다. 가진 것이 없어 먹을 것을 훔친 자에게 가해진 형벌의 참혹함이 왠지 비수가 내 가슴을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과거를 보며 현실을 돌아보고 미래를 찾아보는 것은 현명한 인간의 선택이다. 지금 현명한 인간이란 그런 역사적 인식보다 내 수중에 돈이 얼마나 오는지만 본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파멸을 주더라도 나와 관계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조선시대 양반의 두 얼굴이 있다면, 오늘날 자유민주의 대한민국에서도 두 얼굴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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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3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4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7-07-24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조선의 원류가 5백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책으로 보이네요.
독서와 구매를 자극하는 리뷰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국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던
근왕병/의병이 44년 뒤에 벌어진 병자호란 때는
거의 없었던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고 생각
합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조국은 나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는다.

전세계에서 최악의 신분제 국가였던 조선에 대한
생생한 리포트가 아닐까 추론해 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7-24 09:13   좋아요 0 | URL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제가 쓰는 조선사들은 현재의 헬조선 기원을 찾아가는 게 되어버렸습니다. 예전에 이덕일 작가의 <윤휴와 침묵의 제국>,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보며, 저 망할놈의 사대부들이 펼친 행동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X나게 백성걱정하여 정책을 펼친 자는 사약 극딜시키고, 유배를 보내도 최악의 장소로 보내고, 몽둥이로 사람패서 그냥 보내고,

병자호란 시기 의병이 없는 이유는 임진 시기에 기껏 나와 싸웠더니 본인 내지 순국자 후손에게 대해준 일말들은 안봐도 비디오이죠

유성룡이 원래 훈련도감을 별도로 설치해 평민이라도 왜적을 일정수준 처리하면 무관으로 기용하고, 그 공이 높으면 높은 직까지 주자고 하니, 결국 후에 탄핵당해버리죠.

성웅 이순신도 선조시대 봉헌 된 게 아니라 한참 뒤에 봉헌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죠.
 


적당히 인터넷과 뉴스기사를 보고 경제를 말하는 사람과 진짜 경제학 도서를 보고 경제를 말하는 사람의 생각은 너무 다르다.

친구와 통화하면서 임금 최저1000원 넘게 올랐는데, 하루 8시간 1달 24일 1년이면, 일인당 받을 금액은 대략 200만원, 전국 비정규직 내지 알바생 중에서도 최저임금보다 더 받는 분을 제외해도 100만명을 안 될 것이다.

2백만 × 1백만 = 2조 정도 된다.


이런 돈이 화폐로 시중에 나가면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오른다고 보나,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임대료와 부동산이다. 아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마르크스 <자본론>까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대 자본주의에서 케인즈 이론에서도 임금뿐만 아니라 지대도 중요한 화폐공급원으로 본다.

부동산이 미친듯이 상승할 때 몇 년 사이 최고 200~300% 증가했다. 아파트 세대 1당 2억이 오르고, 아파트도 대기입 아파트라도 최소 전국이 몇 십만 세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10만 세대로 하여 2억이 상승했다고 가장하면

2억 × 10만 = 20조 정도 된다.

화폐의 시중유통에서 사람들은 현금 즉 동산의 개념으로 물가를 판단하나, 중요한 것은 부동산 역시 화폐의 기능에 따라 인플레이션을 자극한다. 최근 임금상승율과 원자재 비용이 크게 오른 것은 없는데도 물가는 계속 올랐다. 그러면 나머지 비용은 무엇인가? 알바비도 5000원 내외에 통닭원가도 마리당 1500원이면, 통닭 1마리당 2만원까지 오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학적 구조로 사람들에게 설명하면 나에게 오는 눈빛은 이상한 녀석이라 하거나 너는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냐는 것인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단지 경영학을 경제학으로 여기는 형태일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을 읽으면 경제학에 대한 전반적인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인구와 산업의 관계, 빈곤과 국력의 문제 등등이다. 애덤 스미스가 빵을 파는 상인은 돈을 벌기 위해 빵을 팔아 국가경제가 잘 돌아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지만, 그 빵을 사람들이 제대로 사먹을 수 있어야 가능하지 그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한국의 1980년대 과소비가 문제지만, 지금은 과소소비가 문제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에 물건을 팔면 그것을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본을 회수하여 재생산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적는 내가 바보인지, 국가경제가 어렵다고 하며 서민이 죽겠다고 말하면서 정작하는 행동은 정 반대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가 바보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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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1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1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7-07-21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금의 최저임금 인상과 관련해서 보수 언론에서는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관련되어, 자영업자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식의 아전인수식 해석까지 내놓고
있습니다.

기득권층의 저항은 대단하네요 정말.

만화애니비평 2017-07-21 16:04   좋아요 1 | URL
임대료와 관련하여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웃깁니다.
소상공인들이 그렇게 힘들면 자기 옆에 일하는 알바생은 얼마나 힘들지
생각하지 않은 이중성을 가지고 노는거죠.

자영업 입장에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임대료가 시냐에서 500만원에서 1000만원을 오른 상황에서
알바 1명당 일일(6시간 기준) 3만6천원에서 4만원2천 정도 받으면
알바 4명을 고용하는 식당이라면 70만원이 부담되겠죠.

그러나 막상 임대료 500만원에 대한 부분을 누락하고 인건비만 운운하죠.
알바생들도 교통비나 생활비 문제가 있는데 고려하지 않고
서민의 생계를 말한다면 자승자박이겠죠.


루쉰P 2017-07-2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좋은 글 쓰고 계시네요 ㅎ 너무 오랜만이죠 ㅋㅋ

만화애니비평 2017-07-21 17:03   좋아요 0 | URL
더운날 더위는 잘 피하고 계시는지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