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남한산성>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으로 봐서는 안 된다.
문학가 김훈의 원작소설 <남한산성>이 추석연휴를 맞이하여 극장에서 개봉했다. 사극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2007년 초반에 하던 <대립군>과 비교하여 흥행한 편이다. <대립군>과 <남한산성>의 흥행도와 작품의 완성도에서 후자가 우월했다. 연기자들을 봐도 후자 쪽이 더 높은 수준을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도 실력이 좋은 배우가 나온 것은 분명하나, 후자 쪽에 더 연기력과 수준이 높은 배우들을 중역으로 내세운 점이다. 영화의 메시지를 본다면 <대립군>은 임진왜란 당시 영웅을 이순신과 같은 장수가 아니라 이름도 없이 가난을 이기지 못해 군역을 대신 복무하는 민중이었다.
영웅주의를 소재로 한 서사에서 민중주의 서사로 넘어가는 점에서 영화의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무리한 소재나 상황연출이 한계로 나타났다. 그러나 2작품을 보면 확실히 생각해야 한다. 광해군이 분조를 지휘하던 왕세자로 활약한 시기는 임진왜란이고, 인조가 청국의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올릴 때는 병자호란이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군사, 정치, 경제, 문화적인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진 시기이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의 활약을 생각하나, 당시 조정에서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의병들, 그리고 분조를 맡으면 목숨을 내건 광해군보다 명나라 군대를 더 우대했다.
사당은 죽은 이를 기리는 주술적 공간이다. 명나라가 왜군을 치는데 도와준 이유로 그들의 장수를 기리는 생사당을 만든 지경이니 얼마나 한심한가? 선조는 알고 있었다. 도성을 떠난 자신보다 왜란의 위기를 모면하고 수습한 이순신과 광해군의 활약을 말이다. 선조는 백성에게 원망은 대상이나, 이순신과 광해군은 백성에게 큰 덕망을 보였다. 이게 화근이었다. 영화 <남한산성>을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으로 보는 게 참 위험한 이유는 바로 여기부터이다.
정묘호란 이후 병자호란이 발생된 시기는 인조가 군림할 때이고, 인조가 군림 전에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켰다. 광해군의 정책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관계성을 긴밀하게 유지하여 전쟁에 최대한 휘말리지 않는 것이다. 인조반정 명분이 폐모살제, 국정운영의 부패가 있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명나라의 사대정신이다. 광해군의 중요 집권세력은 북인이고, 그 중에서 대북이었다. 북인이 가장 광해군을 따르는 이유는 임진왜란의 활약이다. 북인의 이이첨은 임진왜란 때 임금의 어진(초상)을 수습한 덕분에 출세했으나, 북인의 학문적 정통성을 받은 정인홍은 경상도에서 곽재우와 함께 활약한 의병장이다.
남명 조식 아래 실천적 도학을 추구한 그들은 다른 사림세력과 달리 직접적으로 왜란을 억누르는데 활약했다. 북인과 남인이 분당 전, 동인이던 그들에게 조식의 영향은 막대했으며,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이 광해군 집권 시기 중요한 인물이었다. 선조가 북인 이산해를 이용하여 남인의 영수 류성룡을 탄핵시키고(이날 이순신 장군이 서거하심), 다시 북인과 서인이 조정을 움직이고 있으나, 북인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광해군이 북인을 손잡은 것은 결국 명나라를 절대적 지존으로 보는 퇴행적 성리학자들에게 큰 반발을 주었다.
서인이 반정을 일으킨 이유는 광해군의 정책이 아니다. 그가 명나라를 섬기지 않은 이유고, 명나라를 섬기지 않은 이유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거부하는 것이다. 명나라가 왜란을 종식하는데 도움을 준 것도 맞으나, 한편으로 방해도 많이 했다. 이순신과 권율의 군사작전수행 과정에서 트러블이나, 민가의 약탈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서인이 재조지은을 노려야 하는 이유는 지배이데올로기의 명확성이다. 만일 임진왜란을 조선민중의 힘으로 했다면, 자신들의 통치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관계에서 트러블이 많았고, 명나라가 청나라를 공격할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은 부분 역시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나라는 조선이 하던 외교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나라는 이미 첩자를 풀어 조선의 현실부터 시작하여 내부 정치적 상황까지 모조리 알았다. 청나라가 조선을 집어삼키는 일은 이미 정해진 일이다. 문제는 우리는 그 침략에 어떻게 대응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전쟁의 깊은 상처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이 심각했다.
<남한산성>을 두고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을 보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인조를 중심으로 의견이 2가지로 나눈 최명길과 김상현이 같은 서인이었기 때문이다. 모두 인조방정을 통해 조정에 큰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고, 모두 서인이다. 서인이 분당한 것은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구분된다. 노론과 소론은 같은 서인의 뿌리지만, 숙종부터 시작하여 영조까지 피로 피를 씻는 붕당정치의 모순을 보여준다. 노론이 보수고, 소론이 진보라면 그럴 수 있다. 사도세자를 옹호한 소론이 시파계열이고, 사도세자를 부정한 노론이 벽파계열이니 말이다.
하지만 인조는 오로지 서인만 존재했고, 고관대신이 인조를 두고 서인이 만든 임금이라 당당히 말한다. 보수라고 해도 국제정세가 어두운 법이 없고, 진보라고 하여 국제정세에 모두 밝은 것은 아니다. 정치적 권력에서 추구하는 방향성이 차이가 있고, 가치관이 다르다. 단지 <남한산성>의 2가지의 조류는 국제정세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현실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탄핵되어 파면될 때, 진보정당만 탄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보수에서도 탄핵을 추구했다. <남한산성>을 두고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으로 보는 것은 어리석다. 만일 우리나라가 전쟁 나서 불리한 상황이 온다면 끝까지 항쟁할 것인지 아니면 더 나은 좋은 조건으로 협의할 것인지에 대한 차이점이다.
(2) <남한산성>, 국제 정세를 모르는 이들의 권력지향
<남한산성>은 소설이고, 다소의 실재 사료기록과 차이점이 있지만, 병자호란을 조금 더 자세히 알려면 한명기 교수의 서적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광해군>, <병자호란> 등을 말이다. 청나라가 조선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던 계기는 명나라의 장수들 덕분이다. 명나라는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빚었고, 무능한 임금에 부패한 신료들이 뇌물로서 정치를 움직이고 있었다. 명나라의 영웅에게 모반죄로 무고하여 죽게 만들고, 전방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장수를 없애려 했다. 자국의 주군에게 충성할 이유를 잃은 명나라 명장들은 청나라에 투항하여 이신(貳臣)으로 활동하여 명나라의 군사를 격파하는데 도움을 주고, 게다가 조선의 군사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청나라는 주로 기마부대를 운용하기에 수군은 매우 약했다. 조선은 수군이 강한 편이기에 인조와 조정대신을 그것만 믿다가 봉변을 당한다. 명나라 장수 중에 수군을 다룰 줄 아는 자가 있기에 강화도를 점령하고, 많은 문제를 이겨낼 수 있었다. 청나라는 모든 정보를 모았을 뿐만 아니라 전쟁능력을 완벽히 수행할 수 있는 인재까지 포섭했다. 많은 조선인들이 청나라 군세에 붙은 점도 그렇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의병장이 사대부들이 차지했으나, 병자호란 시기 의병활동이 너무 잠잠했다. 명나라에 대한 무조건 충성심이 권력을 정당화의 수단이 되었지만, 권력의 몰락도 되었다.
하지만 웃긴 점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보이게 만든 것은 서인인데, 나중에 그 책임을 인조에게 미루고, 인조가 죽고 효종이 등극하자 효종조차 무시했다. 인조의 수치와 봉림대군 효종이 청국에 끌려간 이유가 서인의 무능함인데, 스스로의 문제를 왕에게 전가한 것이다. 효종이 서인도 한당보단 산당에 눈을 돌린 이유는 명나라 붕괴이후 조선이란 국가가 중화주의를 계승한 유일한 조정이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청나라를 욕하던 서인이나, 추후 서인들이 가장 청나라의 권력에 충성한다. 하지만 청나라로 유입되는 신문물을 제대로 찾지 않았다.
<남한산성>을 보면 최명길은 외로운 전쟁을 한다. 그의 목을 치라는 유생의 상소가 매일 어전에 올라오고, 내부 고관대신도 최명길을 파직하라고 한다. 그러나 인조는 최명길을 버리지 못한다. 최명길만 오직 청나라와 소통할 수 있는 외교라인이기 때문이다. 최명길이 청나라 장수를 만나 외교문제를 논하고 오자, 오랑캐와 내통했다고 난리치는 인간을 보면서 정치적인 본질보다 권력의 정당성을 찾는 행위만 보여준다. 이런 한심한 행동에 누가 죽어 나가는가?
(3) <남한산성>, 백성이 녹아 없어지네.
조선은 왕조시대지만, 사대부들의 도움 없이 절대로 운영될 수 없다. 왕 혼자서 정책을 내리지 못하며, 정책을 수행할 인재도 필요하다. 신권이 지나치게 강하면 왕은 정사를 주도하는 자가 아니라 이끌려가는 보조자에게 불과하다. 인조가 무능하지만, 서인의 무능함은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영화에서 김상현은 우연히 알게 된 남한산성의 대장장이의 청을 국조에 언급한다. 급하게 조달된 군사들이 추위에 떨고 있으니, 그들을 위한 볏짚을 바닥에 깔고 몸에 걸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말의 먹이가 부족하자, 농사보병의 볏짚을 빼앗아 말 먹이로 주고, 그것도 모자라 초가집을 헐어 그 짚을 말 먹이로 준다. 땔감을 위해 짚이 없는 집의 나무를 헐어 연료로 사용한다. 무능함 정치가가 군림하면 그 문제는 그대로 피지배계층인 백성에게 돌아간다. 영화도입부 김상현은 인조가 계신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이때 산성 아래 강을 건너는데 뱃사공의 도움을 받는다. 뱃사공은 임금을 피신시킬 때 자신이 길잡이를 했는데, 김상현을 도와주면서 당시 아쉬움을 토로했다. 원래 이 일을 먹고 사는 자이니 임금을 피신할 때 좁쌀 정도 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청나라 군세가 오면 길을 건너게 해주어 식량 정도 얻고 싶다고 한다.
김상현은 노인을 죽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군사적 전략을 고려하여 노인을 죽인다. 임금이 도망치고, 백성이 굶주리는 이유는 조정의 문제지만, 그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보단 단지 눈 앞의 화근을 없애고 싶은 심정에 칼을 휘두른다. 그 이후 산성으로 뱃사공의 손녀 나루가 찾아오고, 그 아이를 인조에게 알현 후 김상현이 거두어 키우게 한다. 김상현은 어린 소녀를 보고 갈등을 느낀다. 나루를 보호하고 조선의 백성으로 살게 해줘야 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나, 오히려 그 나루의 명줄인 뱃사공을 죽였다. 김상현은 처음에 최명길과 반대의 각을 세우나, 이후 다른 관점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뱃사공 손녀 나루가 보여주는 희망의 봄을 들었기 때문이다. 뱃사공은 나루를 위해 강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음식을 해준다. 그 생선 맛이 좋아 눈이 녹고 개나리가 피는 봄날이 오면 나루는 김상현에게 그 물고기를 잡아 대접해주고 싶다고 한다. 김상현은 실제 정사에서 청국으로 끌려간 후 병으로 죽지만, 영화에서 자살을 한다. 그의 자살은 무엇인가? 최명길이나 김상현은 인조반정이 신세계를 열어 나가지만, 결국 자신들이 늙은 시대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리뷰 서두에 위치한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으로 <남한산성>을 나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21세기에 와서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전쟁을 수행하거나 계획할 경우 그 정권을 바로 망한다. 국가가 당장 망하는 게 되었는데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20세 초 조선이 멸망할 때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 진보와 보수가 나누어져 있었던가? 자유주의 내지 사회주의자들은 진보라면, 성리학자들은 보수주의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프레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다.
(4) <남한산성>, 임금은 어찌 되던지 백성은 살아간다.
영화 <남한산성>은 비참한 조선의 운명을 보여준다. 인조가 청나라 칸에게 패배를 시인한 후 청국에 끌려간 조선인은 50만 명이다. 이중 일부는 다시 돌아오지만, 여성들은 청나라 놈에게 몸을 팔았다는 누명을 받아 환향녀가 되어 비극의 삶을 마감하고, 청국의 문화를 영향을 받아 간첩으로 취급당하는 남자도 많았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가서 성실히 몸과 마음을 다스려 백성을 두둔하고 조선에 돌아와 새로운 문물을 전파하려 했지만 인조의 질투심에 온 가족이 몰살한다. 인조는 수치를 겪고, 조선은 전쟁의 피해로 큰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을 보면 뱃사공 손녀 나루는 대장장이 집에서 같이 살면서 봄을 맞이한다. 대장장이는 정묘호란 시기 가족을 모두 잃었고, 나루는 할아버지 손에서 외롭게 컸다. 김상현은 나루를 대장장이 날쇠에게 부탁한다. 가족을 모두 잃은 날쇠와 나루, 그들은 부녀가 아니나 부녀가 되어 남한산성에서 다시 봄을 맞이한다. 나루는 동네친구와 화창한 봄을 맞이하며 놀러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남한산성 내 어전에서 인조와 고관대신의 고민과 방황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봄을 맞이한다. 최명길이 말한 그 수치는 결국 백성의 삶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고, 패배자의 굴욕을 받아들이는 것은 만 백성을 지켜야 하는 임금의 책임인 것이다. 처음에 작은 것을 내주기 싫다가 점차 큰 위협으로 오자, 비로소 조선은 청나라에 굴복한다. 남한산성 내 피신한 자들의 기록을 보면 사실 비참하다. 먹을 것도 없고 추위는 여전히 온 몸을 얼게 만든다. 고립되어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강화도에서 들려온 포로가 된 왕세자 가족의 기별은 인조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지경이 된다.
국가에서 살아가는 것은 백성 혹은 국민이나, 어떻게 국가적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가의 일이다. 정치가가 어떤 상황에 문제가 발생하여 자신의 입장이 난처할 때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자신에게 더 큰 장애물이 다가오고, 국민들은 매우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남한산성>에서 서인들은 무능했지만, 그들의 눈에서 광해군 역시 무능한 임금이고, 광해군 시절 사대부가 아닌 천민들도 벼슬자리를 준 것에 대해 매우 거슬리게 생각한다. 어느 누구는 돈을 주고 관리직을 받았다고 하나, 그런 점은 명종시대가 더 심각했다.
백성들 입장에서 왕이 누가 되는지가 관건이 아니라 전쟁이 나지 않고 세금을 마구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좋은 것이다. 때로는 자신들의 말이 위로 가서 언로가 막히지 않은 것이 중요했다. <남한산성>에서 보면 백성의 언로가 철저히 막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솔직히 인조와 조정대신, 유생이 없어도 백성들은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의 사소한 자존심이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가장 한심한 장면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류가 청나라 군대를 습격하라고 지시하는 장면이다. 자신의 불찰을 부하에게 떠맡기는 모습이다. 실제 정사에서 김류는 청나라 군대가 매복 유인을 위한 보급물자를 군사를 풀어 가져오게 하다가 모두 몰살시켰다고 한다.
병자호란은 결국 명나라의 재조지은에 대한 충성심에서 자초한 사건이고, 청국과 전쟁을 피하기 위해 국제정세를 판단한 광해군을 폐위한 것은 김류이다. 김류를 비롯한 많은 조정대신은 백성의 삶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전쟁에 내몰린 것은 백성으로 이루어진 병사이지 자신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조 이후 효종과 헌종, 숙종과 영조로 넘어가면서 정치권력이 누가 되던 백성은 상관이 없었다. 단지 그 권력자들이 백성의 삶을 좀 먹는 자가 아니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권력자가 없으며, 그런 짓을 저지하려던 정치가들은 모조리 숙청된다.
영화 <남한산성>을 두고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풀이하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사실 역사를 두고 비슷한 사례로 들어 이야기하는 것은 자유이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어느 하나에 매몰된 이유는 없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작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역사는 2번 반복된다. 1번은 비극으로 1번은 소극으로” 말이다. <남한산성> 영화는 그 영화 자체로 본다면 비극이나, 이미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의 입장에서 소극에 불과하다. 정치적 상황과 배경, 인물만 다를 뿐 반복되는 역사는 늘 우리 앞에 등장했다.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을 논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두고 <남한산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당한 착오일 것이다. 최명길과 김상현의 대사에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김상현은 과거에 불과한 인물이고, 최명길 역시 그런 과거와 함께 퇴장해야 할 존재이다. 최명길이 진보이고, 김상현이 보수라고 프레임을 나누고, 보수와 진보의 눈으로 모든 것을 정하는 순간, 그 담론조차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물론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을 넘어 진보적으로 갈 수 있지만, 그 진보적인 성과란 나루와 날쇠의 삶이다. 삶이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를 말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들 입장에서 과연 그것이 올바른 답을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