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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 - 청빈한 대쪽 선비
허찬무 지음 / 진한엠앤비(진한M&B) / 2013년 2월
평점 :
추석을 이용하여 이래저래 시간을 보내기 전에 제대로 시청하지 못한 드라마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 드라마는 <불멸의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을 다룬 작품인지라 우리 민족이 겪은 최대 위기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 7년의 고통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이순신 장군이라 강직하고 지혜가 넘치는 명장으로 기억된다. 어린 시절 이순신에 대한 위인전을 읽으면 가난한 사대부집안에서 태어나 무관시험 도중 말에서 떨어져 낙방하여, 이후 다시 합격 후 수군 장수가 되어 왜군을 물리치고, 노량해전을 마무리하여 서거한 것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막상 이순신 장군의 일기를 재구축한 <불멸의 이순신>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은 달라진다. 20세기 이순신과 21세기 이순신은 다르다. 2세기 모두 이순신은 성웅이고 명장이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인 것은 분명하다. 전자는 영웅주의에 대한 모습만 강조했다면, 후자는 고뇌하는 인간, 그리고 성찰하는 인간, 모두와 뜻을 나누는 인간 이순신을 다루었다. 이순신 장군은 신은 아니나, 우리 민족이 망하는 그날까지 바다의 신이 되어 줄 것이다.
이순신의 죽음을 보면서, 그의 죽음은 교전 중에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때를 맞추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순신의 심장을 멈추게 한 것은 왜군의 조총이나, 이순신이 심장을 멈추고자 결심하게 만든 것은 조정의 권력다툼이었다. 이순신은 이미 조선의 영웅이었고, 당시 군왕인 선조보다 더 높은 존재였다. 선조는 그가 자신보다 우월하고 뛰어난 영웅임을 알고 있었고, 그가 조선에서 가장 필요한 인재라는 사실도 알았다. 또한 선조는 이순신이 자신에게 가장 필요 없고, 지금 당장 제거해야할 역적으로 삼았다.
이순신의 친구 서애 유성룡은 말한다. 진실로 말했는지 모르겠으나, <징비록>을 저술하면서 끊임없이 조선의 백성을 걱정한 그의 태도를 보자면 충분하다. 드라마에서 선조에게 이르길 나는 군왕을 섬기지 않으며, 내가 섬기는 것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기는 군왕을 섬기고 싶다고 말한다. 드라마에서 가장 미화(美化)될 수 있는 인물은 광해군이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다. 선조 내지 조정대신과 같이 회의석상에서 그가 전하는 말이 실록 내지 사료에서 충분히 기재될 수 있으며, 심지어 <난중일기>에도 이순신 장군이 광해군을 걱정했다고 하니 말이다. 광해군은 민심은 천심이고, 백성을 무시하는 자신이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을 질투하는 아버지 선조 앞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수군지휘관 선발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하는 장면도 그렇다. 조선시대 반상의 차이로 과거는 사대부만 할 수 있으나, 일개 군졸이 지휘관으로 삼으려 하는 이순신의 정책은 선조나 조정대신에게 큰 반발심을 일으켰다. 모두 반대할 때 광해군은 세종대왕 때 장영실을 당상관을 임명할 사례를 말하며, 이순신의 정책을 지지한다. 반상의 양천에 얽매이지 않고, 백성 그 자체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광해군이 얼마나 백성을 사랑했는지 몰라도, 적어도 선조나 인조 이상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태조와 태종을 제외한 나머지 군왕과 달리 직접 전쟁을 수행했으며, 전쟁에서 함께 뜻을 나눈 자와 관련하여 태조와 태종은 장병과 소통했다면, 광해군은 백성과 소통했다. 광해군이 모든 것을 잘 한 것은 아니나, 그가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란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권력과 백성의 관계는 다르다. 권력을 사랑하는 자는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권력으로부터 소외받기 때문이다. 힘을 가져야 백성을 사랑할 수 있다고 여긴 선조도 결국 백성보단 권력을 선택했다.
이순신의 죽음과 유성룡의 파직, 그리고 수많은 의병장의 몰락은 그 증거이다. 조선시대 역사에서 권력의 패자들은 정말 많다. 말도 안 되게 파직, 장형, 유배, 사사, 참수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피의 역사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조선이 대한제국을 걸쳐 대한민국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이고, 왕조시대는 아니나,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대한제국의 한 글자의 차이다. 대한의 나라는 주인이 왕에서 국민이 되었을 뿐이다. 조선이란 역사와 문화가 대한민국의 모습을 갖추게 한 원동력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은 정말 많았다. 권력의 패자는 비참하게 운명을 맞이했다. 권력의 승자와 후예들은 일제강점기 시대를 넘어 현대사회에 와서도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까지나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없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어도, 민심 그 자체를 움직이는 것은 무리이다. 역사의 기록에서 권력의 패자가 이제는 영원한 승자가 되었다. 이번에 읽은 서적이면서 그 인물인 <미수 허목> 역시 그렇다. 가난한 선비고, 늙은 나이에 벼슬에 올랐지만, 조선 역사에서 위대한 정승으로 이름을 남겼다.
물론 그는 숙종 시기 경신환국으로 벼슬을 잃었다. 자신과 같은 당인 남인은 사사 내지 유배, 장형을 당해 죽거나 몸을 상했다. 정조에 이르러, 정조에게 깊은 존경심을 받은 인물이 되었고, 정약용 선생에게도 큰 감명을 주기도 했다. 가난하지만 대쪽 같은 선비, 조선은 유학 성리학을 토대로 국가가 돌아가는 세상이다. 성리학으로 시작한 조선이 성리학으로 망한 이유는 성리학의 기본적 학문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철학이 부족했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이 보수보다 더 보수적인 수구형태로 될 수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진보적 성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도를 말하고자 하는 점에서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기본 진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 책에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으로부터 하며, 하늘이 듣는 것도 우리 백성으로부터 한다.” 지금은 국민이나 그 당시에는 백성이다. 백성은 군왕의 하늘이어야 존재이고, 민심을 뒤로 하는 군왕은 폭군(暴君) 내지 혼군(昏君) 같은 어리석은 임금이다. 백성이 삶에 힘들어 곤충을 말하는데, 나라님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 없다. 만일 그 원망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으면 성군이 되나, 그 말을 듣고 증오하여 칼을 휘두르면 수 천 년의 역사가 그를 손가락질 한다.
서양의 근대 민주주의를 성립하게 만든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미수가 말하는 국가관은 “다스려진 나라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쇠퇴한 나라는 대부를 부유하게 하고, 망하는 나라는 정부를 부유하게 한다.” 루소 역시 민주정, 과두정, 군주정에 대한 정치제도를 <사회계약론>을 통해 설명했으며, 참주정과 과두정에 대한 문제를 잘 설명했다. 폭군은 참주가 아니나 참주는 언제나 폭군임을 말하듯이 말이다. 왕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신하들끼리 당파싸움을 통해 서로 피를 물들게 하고, 자신의 권력의지와 신하들의 권력의지가 일치하면 동조하기도 했다.
고관대신들은 사대부들이다. 미수 허목은 사대부라는 선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 이유는 “천하에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덜어주고 재앙을 없애주며 다툼을 풀어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이것은 장사꾼의 행위이다.” 하지만 자칭 선비라는 사대부들은 걱정거리와 다툼을 풀어주어 보상받는다면 다행이다. 아무 것도 하지도 않고 보상을 바라니 참으로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가 없다. 이미 황구첨정과 백골징포는 시작되고 있었다.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아이가 군적에 오르고, 시아버지 죽은지가 몇 해가 지나도 군포를 내고 있다.
세금을 내지 못해 이웃에 세금을 내게 하거나 그들의 친척에게 물리도록 하여, 어떤 마을은 아예 사람조차 살지 않는다. 모두 가렴주구라는 관리들의 횡포에 참지 못해 고향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진다. 병으로 죽고, 굶어 죽고, 매에 맞아 죽는 이 원통한 비극에서 선비들이 해야 할 임무는 그들을 마을에 다시 모여들게 하여 생업에 힘쓰도록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겁박하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허목이 가난하게 살고, 직접 몸소 근검하여 절약하는 이유는 권력자가 하나를 더 가지면 누군가는 하나를 내어주어야 하고, 가난함을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버림받은 백성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비들이 부에 집착하면 농민의 농지를 빼앗고, 백성의 딸과 아내를 빼앗아 간다. 백성은 글을 모르며 고을사또가 있는 관아의 담장은 높고 문 앞의 포졸은 성난 이리와 같다. 하소연하지 못하고 그저 신음하며 세상을 원망하니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겠는가?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권력을 잡고 이권을 챙기는 자들과 대적해야 한다. 허목이 반대당인 노론에게 상당히 좋지 못한 자로 낙인이 찍힌 이유는 바로 그러하다. 권력의 패자로 될 수밖에 없었지만, 죽어서 칭송받는 이유는 바로 그런 연유이다.
허목은 세종 때 황희, 선조와 광해군 시절의 오리 이원익과 더불어 임금에게 직접 집을 하사받은 정승이다. 게다가 허목은 오리 이원익의 손자사위였다. 이원익은 이 글의 초반부 이순신 장군을 위해 목숨을 걸고 선조에게 충언을 드린 인물이다. 백성을 사랑하고, 언제나 검소하며,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과 벼슬자리가 박탈되어도 소신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원익은 가난하지만 영민한 허목을 아껴 제자를 삼고, 그에게 손녀를 주었다.
그들은 청백리로 인정받고자 선비의 정신을 보여준 게 아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비로 살아온 것이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오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양반이 되었다. 그 성씨가 원래 반가의 집안도 있지만, 너나 나나 연애는 서로 간 자유이다. 여자가 반가의 후손이든, 남자가 반가의 후손이든 모두 반가의 후손이다. 하지만 선비의 정신을 그대로 가진 자는 얼마 없다. 고리타분한 시대착오적 발상만 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제를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개선하고자 하는 인물이 선비이다.
허목은 예라는 것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효종과 헌종 시대에 예송(禮訟) 논쟁은 조선 성리학의 큰 당쟁 중 하나였다. 예송에서 상복의 착용기간이 얼마나 중요 하겠는가 라고 말하지만, 군왕을 사대부와 동일하게 보는지 아니면 그 이상으로 보는지에 따라 왕권과 신권의 권력관계가 성립된다. 허목은 왕권을 추구했다. 왕의 권력을 높이고자 할 때 개혁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서로 간의 당파적 이익도 있으나, 당론의 채택되지 않으면 정책의 실현이 어렵다. 남인의 반대세력인 노론 역시 대동법을 두고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으로 나누어 대립했다.
대동법이 도입된 이유는 정치 권력가와 상인들의 농간을 막기 위해서이다. 백성에게 요구되는 진상품을 상인에게 억지로 사게금 만들고, 그 상품의 가격을 너무 높이게 되면, 백성에게 따르는 생활고는 당연히 힘들어진다. 그래서 일정한 세금납부 방법을 정하여 세금을 부과한다면 백성에겐 그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거기에 두고 노론 내부에도 서로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같은 당 내에서 당론이 대립되니, 다른 당끼리의 당론은 더 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론을 두고 조정과 군왕, 조선의 종조를 논하는 자들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며, 당론을 두고 백성의 기근과 고충을 걱정하면 충신이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는 언제나 권력을 원한다. 조선 백성이 당해온 그 억압의 시간이 사라질 수 없는 것은 결국 시스템의 문제였던 것이다. 미수 허목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치적 대안이 필요했고, 남인의 영수로 활약한 것이다. 물론 제일 중요한 시작은 인사이고, 인사의 시작은 과거이다. 과거에서 이루어진 부정부패는 광해군 시절보다 심하다고 한다. 물론 광해군 이전인 명종시대의 부정 과거는 더욱 심각했다. 조선은 척신과 권신들의 농간을 피하지 못해 망했다.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자신의 기반이 되는 자들을 뽑아 올려준다.
그들의 능력과 성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 얼마나 충성할 수 있는지에 따라 성과가 달라진다. 이런 자들이 올라오니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에서 사라질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허물이 없을 수만은 없을 것이나, 적어도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현실이 가진 문제의 본질을 안다면 그 역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나. 그조차 반성하지 못하고 부와 권력을 탐닉하고 스스로 붕괴하는 권력가의 마지막을 종종 본다. 미수 허목은 그런 본질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살아왔다. 허목은 인자한 늙은이의 눈썹처럼 미수(眉叟)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 미수(米壽)의 인생으로 살아갔다. 그의 길고 긴 하얀 눈썹이 그려진 초상화는 국가의 보물이 되어 우리 삶에 새로운 감동으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