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하
이기담 지음 / 창작시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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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을 소재로 하던 소설에서 <대왕 광해군>은 광해군 이혼보다 어느 서얼이던 동명이인 이혼을 중심으로 내려간다. 물론 한자로 이름은 다르더라도 이혼이라는 맥락일치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목표로 하는지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이번에 읽은 그냥 <광해군>이란 소설은 주인공 자체는 광해군으로 둔다. 우리가 아는 광해군이란 조선임금 중에서 연산군과 더불어 종조를 붙이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가 대부분 아는 것은 광해군이 명나라가 지고 청나라가 오를 때, 중립외교를 했다는 점, 그리고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죽인 것, 인목대비를 폐서인으로 하여 불효를 했다는 점이다.

 

하늘의 도를 내세워 광해군을 비판하면 어느 모순이 생긴다. 태종 이방은 형제와 사촌을 죽이고, 세조는 단종을 죽였으며,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뿐인가?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 안에서 죽도록 만든다. 그냥 편하게 독약을 내리는 사사(賜死)가 좋다. 반란이 있거나 예상되는 인물 그리고 정치적 숙적들은 항상 죽음을 당한다. 왕가의 친척들은 든든한 아군이기도 하나 절실한 적이기도 하다. 모든 일이란 전후맥락이 존재하고, 원인에 대한 결과에서 그 원인에 대한 근원이 있다.

 

광해군을 본다면 정말 난해한 인물이다. 혼군(昏君)이라 하나, 조선시대에서 내려온 유산 중 그가 만든 업적은 탁월하다. 궁을 복위하고, 전쟁으로 사라진 도서를 재편찬하고, 지금 한국의 의술 한의학을 정립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게 만든 인물이다. 동의보감의 가치는 현대의학에서 그대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외의 서적도 역시 한국의 중요한 유산이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두 소실된 서적을 복원하고, 실록도 1곳에 보관한 것을 4곳으로 늘려 보관하게 한 것도 광해군의 업적이다. 실록을 현대 한국에서 국가의 보물로 삼았고,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었다. 400년 전 그가 하던 일들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었는가?

 

E.H Carr<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에 있던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재 사회와 끊임없이 대화를 하고 있다고 한다. 광해군 시대는 북인과 서인이 공존하고, 서인이 열세하자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한다. 서인이 주도로 작성한 광해군일기나 서인에서 노론이 중심이 되던 조선의 정치사에서 광해군의 존재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소설 <광해군>에서 어느 정도 실화이고 어느 정도 가정인지 모르나, 적어도 실록의 기록을 많이 차용하고 있다. 광해군의 말이나 강홍립의 의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적어도 강홍립이 없었다면 병자호란 이전 정묘호란에서 큰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전쟁영웅이 모두 제거되는데, 그 대부분은 선조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이나 영원한 해군제독인 이순신 장군을 봐도 그 죽음이 부당하기 짝이 없다. 전쟁에서 주요활동인물은 동인세력이 주축이 되는데, 동인도 남인과 북인이 나누어져 남인 유성룡 세력이 퇴각이 북인이 급성장한다. 북인이 다시 소북과 대북으로 갈리고, 대북은 다시 또 분당한다.

 

광해군은 붕당정치가 시작될 때 그 당쟁의 희생자였고, 폐위와 그 이후의 삶 역시 당쟁의 희생자였다. 당쟁의 문제는 유학이 백성을 도학으로 치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론의 이익을 따라 모두 따른다는 점이다. 당쟁의 문제는 전쟁의 대응력까지 문제되고, 임진왜란 당시 순국지사 학봉 김성일은 분명 훌륭한 유학자이나, 일본 왜국 방문 시 서인과 반대되는 당론을 추구하다 전쟁의 화를 만들었다. 전쟁이 나면 가장 문제인 건 전투보단 국민, 백성의 안위다. 선조는 혼자 살기 위해 도망치고, 그 아들인 광해군을 남겨 분조를 이끌게 했다.

 

<광해군>에서 광해군은 분조를 기회로 보나, 최근 개봉한 영화 <대립군>에서 광해군의 모습은 그저 힘없이 내몰린 희생양이었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의지가 없다가 전쟁이 나자 신성군을 마음에서 버리고 광해군을 선택한다. 전쟁을 지휘하라 하나, 막상 전쟁터에서 언제 참극을 피할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광해군은 임금시절만 보나, 사실 광해군의 탁월함은 전쟁이었다. 분조를 이끌며 의병을 독려하고, 전쟁을 지휘했으며, 한양을 되찾은 후 남쪽으로 내려가 다시 백성들은 다독거렸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저잣거리에서 형편없는 밥상을 백성과 같이 먹어주던 임금은 오로지 광해군이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올라가 도망치기만 바빴다. 결국 체면과 생존에서 체면을 버리고 삶을 택했다. 대신 백성 수십만명이 청국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하거나 평생 돌아오지 못했다. 설사 돌아와도 수많은 돈이 지출되고, 아녀자들은 환향녀가 화냥년으로 바뀌어 창녀 취급을 받았다. 어찌 슬프지 않을 수가 있을까?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추구한 것이 드러나는 것은 곧 지배계층이 어리석다는 것은 반증하고, 임진왜란 당시 명의 황제가 칙서를 선조가 아닌 광해군으로 내린 것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여 조선을 흔드려 했다.

 

소설에서 광해군은 선조에게 명군을 파견하지 말 것을 청하는데, 유성룡도 그런 말을 한 것을 보면 그 고증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단지 명이 오는 이상 조선은 그 이상의 대가를 줘야할 것이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오면 큰 빗으로 쓸고 간다면, 명나라는 참빗이 쓸고 가는 형국이라 했다. 가는 길마다 강간, 살인, 약탈이 끊이지 않으니 천군이란 명성은 그저 강도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선조가 재조지은을 내세우고, 대신들도 광해군에 이르러 그 뒤에도 재조지은을 말하는 이유는 지배계층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사실 임진왜란은 명군의 도움은 초반에 없었고, 전쟁의 승리가 눈에 보이자 공을 내세우기 위해 움직인다. 후에 명군을 분명히 왜군을 소탕하였지만, 임진왜란의 승리는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의 장수와 의병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선조와 인조반정 세력은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광해군이 분조를 지휘한 것은 만 백성이 알고, 거기에 의병이 나와 왜군을 격퇴한 것은 타국도 알았다. 영화 <광해>에서 광해군의 가슴에 흉터가 있는데, 그것은 전쟁 중 활에 맞은 상처이다. 가슴이 활에 공격당했다면 죽을 공비를 넘겼다. 일국의 왕자가 죽음을 당할 뻔 했는데도, 그는 도쿠가와 막부와 외교를 맺었다.

 

전쟁을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소설 <광해군>은 오로지 백성의 편을 생각하는 군주로 묘사된다. 실제 한명기 교수의 연구도서를 보면 광해군이 폐위될 때 백성들은 모두 놀라워하고 두려워했다. 이때 오리영감 이원익이 한성부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진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무리수는 내부 권력의 다툼이었고, 백성들은 궁궐의 권력암투는 일상화가 되었기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토목공사로 재정을 많이 낭비했지만, 명나라에 군을 파견하여 여진족에게 몰살당하는 것보다 났다. 만 명 중 7000여명이 살아왔다면 오히려 그게 더 큰 이익이다.

 

궁궐 토목공사 자체를 긍정적이지 않으나(물론 현대 한국인들은 이런 것이 있기에 즐겁게 한양나들이를 돌아보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많은 장정을 잃는 게 국력의 훼손이 크다. 광해군은 역대 임금 중 태조와 태종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전쟁을 수행한 군주이다. 그는 직접 백성들 상대하고, 그들의 원한을 들었다. 아니 들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백성을 지켜주지 않으면 전쟁에서 광해군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탐관오리에 의해 배를 굶고, 포악한 사대부에게 딸을 빼앗기며, 그 원통한 사연은 어디 가서 호소조차 못한다.

 

파주현감 조명식이 실존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대동법 초안이 임진왜란 당시 백성을 만나 그 의미를 찾았는지 알 수 없다. 단지 대동법이 김육이 제안했다고 하나, 사실 남인영상 이원익이 시작했고, 이원익은 광해군 북인시대에 초라한 남인세력이다. 그는 성격이 워낙 온순하고, 백성들에게 친절한 청백리였으며, 전주이씨 후손으로 종실이었기에 그만큼 추종을 받았다. 하지만 권력과 무관한 인물이었기에 단순히 이원익이 주장한다고 하여 그 세에 따라 대동법 시행이 되었다면 논리가 서지 않는다.

 

당시 양반들은 농지지주가 되어 많은 이익을 차지했고, 김육이 대동법을 주장할 때 산당의 서인들이 모두 반대했다. 광해군이 폭군으로 등록이 된 이유는 겉으로 폐모론과 골육상잔이겠지만, 그 뒤에는 자신의 이익을 원하는 자들의 물밑작업이다. 소설은 그런 광해군의 고뇌가 잘 드러난다. 광해군이 물러나자 정묘호란이 일어날 때 여진족 군사는 협약을 맺지 않을 경우, 남하할 때마다 백성들의 집을 모조리 없애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도륙한다고 했다. 여진족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그들은 항복하지 않으면 모조리 밟아버렸다.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단 일말의 자비를 내리지 않는 것이다. 전쟁을 몸소 겪은 광해군의 입장에서 전쟁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병사로 차출되어 비명을 질렀는지, 하얀 옷을 입은 백성들의 시체가 너무 많아 흰 무덤을 보았다는 말이 나올 때 전쟁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도 한국전쟁을 겪으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지만, 더 슬픈 것은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다. 상대진영에 조금이라도 협력하면 모조리 길가에 끌고 와서 총살시키던 그 사진은 너무 끔찍했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현재 북핵문제로 한국은 전쟁의 딜레마에 빠져있다. 미국에서 연구한 결과, 한국이 전쟁이 날 가능성은 50%이고, 하루 민간인 사망자는 2만명이라 하는데, 사실 2만명은 최소이다. 장기전이 되면 전쟁의 폭격이나 화생방 상황만 아니라 식수와 식량문제, 전염병 각종 범죄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 21세기 전쟁은 16세기 임진왜란처럼 활과 조총, 그리고 칼과 창이 아니다. 20세기 한국전쟁처럼 총과 대포, 프로펠러 전투기도 아니다. 제트전투기가 폭격하고, 지대공 내지 지대지 미사일이 수백 내지 수천를 강타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또 다시 역사의 반복이란 시련에 빠져든다. 광해군이라면 현대의 한국을 어떻게 할까? 외교적으로 어떻게 하고, 전략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대는 대부분 활로 사격을 했으나, 왜군의 조총에 밀렸다. 조선에도 화약제조에 관심을 가진 것과 조총 정예부대를 만들어 전쟁의 불화를 번지지 않게 한 것도 대단한 혜안이다. 국방력은 그 나라의 운명은 좌우하고, 외교에 대한 정보처리는 일각을 좌우한다. 소설 <광해군>은 그런 심정에서 광해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흘러간다.

 

분명 정치적으로 실정이 있었고, 그가 실수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대북 이이첨은 처음에 광해군을 도왔지만, 후반부에는 광해군은 그를 멀리하려 했고, 중국과의 외교문제에서 이견을 보였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것은 노론의 입장에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재조지은의 명나라를 올리지 않은 점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을 파병시킨 자신들의 입지가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명군을 그렇게 올린 이유는 임진왜란의 문제가 정치적 무능함을 상기시키고, 왜란의 해결사가 조선의 백성이라면 사회적 모순에 대한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결사가 명군이고, 그것이 선조와 권력층이고, 의병의 활동이 들러리라면 기존의 정치체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명나라가 존재하기에 그 명분을 들먹일 수 있는 것이고, 명나라가 망하면 자신들의 입지 역시 좁아지는 것이다. 조선 개국 이후 을묘왜변 같은 큰 전쟁이 있지만, 한양이 함락된 사례가 없었기에 섞은 물은 그대로 고여만 갔다. 소설에서 광해군의 말년이 나온다. 늘 우울하고 비참하며 슬픔에 젖은 그는 어느 조정의 신하가 올린 장계처럼 비참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광해군의 비참함 이상으로 조선의 백성은 더욱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대신에게 내 나라 백성이 소중하고, 그깟 사대가 무엇이 중요하냐? 식으로 이야기한다.

 

남한산성에 몰려 척화파와 주화론자들이 분열할 때 조정은 아직도 권력 또는 명분에 집착했다.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 명분은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지 백성의 입장은 전혀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재미있는 사실 1가지를 생각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근왕병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시기 의병과 근왕병이 거의 없었다. 백성들은 왜란에 따른 후유증이 너무 큰 것도 있지만, 그래도 의병이 전국적으로 창궐하지 않은 것은 의아한 일이다. 왜 그럴까? 광해군 분조시기에 의병이 전국적으로 넘쳤다. 광해군의 평가는 모두 긍정적일 수 없다.

 

그러나 민심에 의해 움직이는 의병활동은 생각해볼만하다. 그 이후의 의병은 기존 왕조에 동조하여 일어난 의병보단 항일운동 및 동학운동과 같은 민중봉기가 더 많이 발생된다. 조선이 망하자 조선독립을 위한 의병활동이 있었지만, 조선의 군주보단 조선의 백성을 위한 의병이 더 많이 나온 점을 생각하면 광해군이 보여준 분조활동, 그리고 거기에 얻은 경험을 정치로 활용하는 점에서 그가 혼군이라는 평은 너무 지나치다. 그는 혼군이 되어야 했던 군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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