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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광해군 1
박혁문 지음 / 늘봄 / 2011년 3월
평점 :
조선의 임금 중에서 가장 칭송을 많이 받은 인물은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다. 세종대왕은 문의 극치로 훈민정음을 반포했다면, 정조대왕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만든 문무를 겸비한 군주이다. 그러나 2사람의 조건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세종의 아버지는 태종 이방원이고, 그는 강력한 군주세력을 만든 장본인이다. 결국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으며, 권력을 조금이라도 이용할 가능성이 농후한 척신과 고관대신을 숙청했다. 심지어 형제의 목을 내치니 그의 잔혹함에서 다들 너무한 임금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백성의 입장에서는 성군이라 볼 수 있다.
권력이 세분화된 가지로 집중되면 결국 이권이 몰리며, 그 이권의 토대는 백성의 노고로 이루어진 것이다. 임금은 피로 이어진 세습제이나, 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의 삶이다. 백성을 해롭게 하는 인물이라면 형제라도 아내라도 내쳐야 한다. 임금은 왕자에게 하나뿐인 아버지이나, 임금은 만 백성의 어버이여야 하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는 임금이 진정한 군주이듯이 그 시기가 잘 맞으면 성군으로 기록으로 남겨지나, 그렇지 못하면 평생 폭군이란 명칭이 남아 전해진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할아버지로부터 임금을 승계 받은 군주이다.
영조는 처음에 사도세자를 죽일 때 그 자신의 입장과 노론의 정치적 입장이 어느 부합되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정조가 올라갈 때는 그 시점이 달랐다. 사도세자는 죽어도 사도세자의 아들은 살아있고, 사도라는 이름도 결국 영조가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에 대한 슬픔과 후회로 이어진 것이다. 조선의 왕조는 최고 권력자라고 하기엔 너무 힘들었다. 조선은 역대 한국의 왕조국가와 다른 형태의 정치구조이다. 고구려와 발해, 고려 같은 경우는 북방의 중국에서 독립하여 자치적으로 세운 국가이다.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해도 결국 고구려는 고조선의 영토를 중심으로 활동한 점, 발해는 고구려와 말갈부족의 후예들이 건국한 점, 고려 역시 내분에서 시작했으나, 북방 중국과 외교적 분쟁이 있었다.
중국대륙과의 종속관계는 몽골의 침입에서 시작했고, 몽골이 원나라로 이어진 후 명나라에 뒤에 명나라에 삼켜진다. 명나라가 새로이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무신이면서 반정으로 조선을 만들었다. 결국 조선은 반정의 국가이고, 반정 무신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세력이다. 반정의 역사는 세조와 중종, 그리고 인조에 이르게 된다. 조선의 왕은 순탄하지 못한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중종은 이복형 연산군의 눈치를 보고, 명종은 후사가 없어 대비의 의지에 따라 조카 선조에게 인도된다.
선조가 오르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선조는 원래 왕세자가 아니라 조카인 점에서 권력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대신들은 동서로 분당될 시기이다. 붕당정치를 만든 폐단 제공자 중 단연히 책임자는 선조이다. 선조는 두 당으로 갈라진 신하를 보고 서로 죽이기까지 하던 정치적 음습을 고려하여 정쟁에 참여했다. 왕권을 살리기 위해 신권을 죽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신권을 키우게 되었다. 왕은 강해도 왕자들은 여럿이 있기 때문이다. 불운의 화는 광해군에게 미친다.
소설 <대왕 광해군>은 바로 동서분열과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질 때,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를 다루는 소설이다. 소설에서 광해군의 역할이나 모습은 그래 대두되지 않는다. 오히려 실존했던 김류나 신경진, 혹은 가공의 인물 이혼 등과 같은 인물을 내세운다. 그리고 마부태라는 청국의 장수는 진짜 조선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들을 보는 조선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광해군이 등극하여 폐군이 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광해군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 정말 광해군이 인조와 그의 계모대비를 향한 말이 사실인지 아니나,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광해군이 그린 외교적 판단은 정확했다. 역사학자 이덕일이나 오향녕 같은 사람 말고 한명기 교수의 서적을 보면 대충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 전후의 세계정세와 조선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전쟁의 의도에서 많은 것을 내포하니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광해군을 오점으로 볼지 아니면 다른 관점으로 볼지는 많은 여지가 남아있다. 알라딘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조선의 임금에서 세종과 정조가 있었으면, 나머지 1명은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을 우리가 왜 알아야 하는가?
세종은 태평성대의 시대고, 정조는 르네상스시대였다. 세종은 서구사회에서 르네상스가 도래한 시기이고, 정조는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시기이다. 서구사회는 동양의 세계에 눈을 돌리기보단 내부갈등과 식민지정책이 아메리카로 향하고 있었다. 동양이 평온한 시기란 중국의 정치적 세력이 변하지 않은 점이다. 세종은 명국이 안정된 시기고, 정조는 청국이 안정된 시기이다. 태조 이성계가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시기 명나라를 따라 조선을 건국했지만, 광해군 시기는 명나라가 여진족에게 밀리던 시기이다.
명나라는 중국 한족이 한고조부터 시작한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 유학사상이 성리학을 중시하고, 조선 역시 성리학이 통치이념이 되었다. 공자의 사상과 달리 성리학은 지배계급 통치이데올로기를 중시한 학문이다. 어머니가 첩이면 태어난 아이는 양반이 아니라 서자로 평생 썩혀야 한다. 이런 사회적 모순은 능력이 있어도 신분제의 한계로 좌절을 맛본다. 광해군이 겪은 임진왜란과 광해군 이후 병자호란은 바로 이런 문제에서 조선을 후퇴시킨 문제였다. 책은 소설이나 서애 류성룡에 대한 연구서적을 보면, 류성룡 역시 정치적 문신이라도 현실을 제대로 인식했다.
명나라를 의지해서 임진왜란을 종결할 수 없는 점, 명나라는 자신의 국경에 조선을 두고 왜국으로 침범 받지 않으려 한 점, 막상 명군이 파견와도 전투에 참가하기보단 눈치만 본 점, 명국이 상국인 점에서 무리한 요구를 계속 하는 점에서 자주국방이 중요했다. 왕권은 추락하고, 입만 놀리면서 권력을 탐하는 신료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조선의 백성은 굶주려 죽거나 말굽에 밟혀죽는데 말이다. 류성룡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무관의 자질이 있는 자가 공을 세우면 벼슬을 내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꿈은 좌절되었고, 왜란 이후 탄핵되어 안동 하회마을로 내려가 평생을 마감한다. 그의 탄핵은 남인의 몰락이었고, 광해군 이전은 북인들이 득세하고, 북인은 광해군을 중심으로 대북, 영창대군을 중심으로 소북으로 갈라진다. 임금이 의지를 가져도 양반 사대부 신료들이 지지하지 못하면 임금의 결정도 결국 무마될 뿐이다. 소설의 시작 전에 이미 소설의 주인공 이혼의 한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혼을 보자면 북인이나 서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탄금대전투에서 최초로 승리해도 군령을 어긴 죄로 상관이 참수되고, 가상의 이야기지만 이이첨의 무리에 의해 가족은 몰살되었다.
명나라는 지고 여진은 올라오는데, 한양의 고관대신은 외교적 군사적 판단 내신 내부총질만 일삼고 있다. 권력을 가질수록 더 원하는 바고, 권력은 더 높은 권력을 위해 행사한다. 내외부의 위기를 넘어 더 나은 세계로 가기보단 그것을 찬스로 여겨 권력을 차지한다. 광해군 시절 북인들의 행동은 한심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멍청하기 짝이 없다. 세계정세를 읽지 못한 점, 명나라를 위해 출병할 때 자국의 백성에 대한 안위를 생각하지 않았다. 광해군 말대로 4만의 병력을 출전시키면 그들을 위한 국고와 식량은 둘째 치고, 나라의 백성이 없어져 큰 위기에 봉착한다.
만일 가족이 타국에서 잃게 되면 그 가족들의 원한은 어떻게 헤아려 볼 수 있는가? 광해군은 분조 당시 찬 바닥에서 잠을 자고, 전장에서 굶주리면서 백성과 같이 왜란을 이겨내었다. 광해군이 무리한 정책을 한 것도 있고, 그가 실책을 한 것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이룩한 일들도 많다. 업적으로 따지면 선조와 인조하고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의 대신은 재조지은이란 이름 아래 명국을 무조건 따랐다. 재조지은이란 이름으로 변방에서 고생하던 전쟁영웅은 조연에 불과했다.
전쟁영웅은 선조에게 미움 받아 죽음을 당해야 했다. 소설에서 인목대비 역시 선조 옆에서 한몫을 거둔다. 인목대비는 광해군 즉위를 반대한 세력이었고, 광해군이 선조와 인목대비에게 문안드릴 때 문전박대를 했다. 광해군이 선조에게 문전박대 당하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는 기록도 있다. 그것도 임진왜란을 거친 후이다. 아들에게 분조를 내려 전쟁을 책임졌는데도 말이다. <대왕 광해군>은 그런 광해군 시대의 명암을 가상의 인물로 통해 보는 책이다. 허균은 유용한 인물이나 역성혁명으로 사라진 자이다.
현재상황을 파악하고 지난 과거를 분석하여 앞으로 방침을 정해야 하는 것이 국가의 대사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권을 위해서라면 만 백성의 목숨도 아깝지 않은 자들이 결국 득세하는 역사의 일례를 보자면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나, 다행히도 승자도 그 당시의 승자이지, 먼 후예들에게 승자들은 백성을 팔아먹을 무뢰배에 불과했다. 인조는 홍타이지 앞에서 머리를 박으며 패배를 시인했고, 많은 조선인들은 청국에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다. 앞날을 대비하지 않은 덕분에 백성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왕은 수모를 당했다. 그런 것을 보고도 반성하지 않은 조선은 계속 되었다.
소설에서 인목대비가 화가 나서 광해군을 꾸짖는다. 인륜을 말하면서 말이다. 소설이니 그렇지만, 적어도 광해군은 맞는 말을 한다. 인목대비 한 사람이 백성보다 위에 있지 않다는 발언이 말이다. 동생 영창대군과 형 임해군의 죽음이 비극이지만, 그들의 죽음이 없다면 만 백성은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는 점을 말이다. 광해군의 몰락 그 스스로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광해군의 몰락으로 조선의 굴욕을 광해군을 몰락시킨 자들의 몫이 되었다. 그들은 알아야 했다. 조금 더 조선의 백성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