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체에 대한 권리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진태원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인간들이 누리는 권리라는 것이 무엇일까? 혹은 그 권리를 당연한 것이고, 만약 당연하다면 과연 그것이 나만 우리만이란 슬로건을 내세우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주는 책이었다.

이 책을 지은 저자는 “에티엔 발리바르”로 프랑스 파리10(낭테르)대학의 교수로 재직한 사람이다. 번역자는 이전에 자크 데리다가 저술한 마르크스의 유령을 번역한 진태원 교수이다. 진태원 교수가 주로 프랑스 사회학, 철학, 정치학 등 다양한 도서를 번역하는 것으로 아는데, 여기서 진태원 교수의 연구목적을 이 책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아니 애초부터 진태원 교수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참고로 역자후기를 유심히 보면 2011년 9월에 번역을 완료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갈등과 원인들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체에 대한 권리라는 책으로 통해 과거 프랑스에 있었던 일들과 그리고 그 일들을 서술하는 발리바르의 연구에서 과연 무엇이 문제이고, 그것의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을 할 수 있다.

다소 철학적인 범주라기보다는 정치학 범주에 가까운 이 책은 정치라는 것 역시 철학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들을 나에게 부각시켜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발리바르는 프랑스란 국가에 대한 문제점을 소개했다. 그 문제점이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는 자유와 평화 등 같은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를 잘 지키고 보전한 국가로 알고 있다.

게다가 루이16세 국왕과 마리 앙투와네트 여왕을 날카로운 단두대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만든 국가이다. 그 후에 자코뱅파, 왕당파, 나폴레옹, 독일과의 전쟁, 세계 제1차 및 2차 대전 등등 그 만큼 많고 많은 전쟁과 혁명, 사건들이 늘 존재했던 나라이다.

또한 위대한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프랑스 혁명 전에 있다가, 20C에 도달해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 문학자 롤랑 바르트, 실천하는 철학자 미셀 푸코, 프로이트를 이은 정신분석학의 권위자 자크 라캉 등 이른바 프랑스에서 등장한 구조주의와 그 뒤를 이은 후기 구조주의는 21C에 살아가는 지금 현실에서도 그들의 철학과 사상들은 위대한 업적으로 남겨져 있다. 또한 프랑스는 철학과 더불어 피카소를 배출한 예술의 명국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자유와 평화, 철학과 예술이 발전한 나라에도 멍은 있었다. 아니 확실히 정말 이런 문제는 잘못되었다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것은 오래전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고,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가 알제리에 가한 행동들 역시 과연 자유와 평화를 외친 국가라는 슬로건에 부합되는가이다.

이전에 다른 도서에서 paris-match 즉 파리의 마치라는 사진을 보았다. 이 사진에는 어느 흑인 소년이 프랑스 국기를 보며 경례를 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 의미는 과거 프랑스에서 알제리 독립전쟁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전쟁이 합당하고 정의롭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하나의 광고인 것이다.

흑인소년이 프랑스 국기를 보고 경례한다는 의미는 결국 흑인소년은 알제리 국가국민이고 그들은 프랑스에 충성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흑인의 선택 범주에서 어른이 아닌 소년의 의미는 아직 그들은 어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어리고 미숙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지배하여 올바르게 그들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서양이 동양, 아프리카, 혹은 문화적 수준이 자신들보다 미개한 나라와 민족들은 문화적으로 우수한 국가와 민족에게 통치를 받는 것이 합당한 파시즘이 이르게 된다. 그런 파시즘을 이 책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다루고 있다. 파시즘은 상당히 무섭다. 과거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파시즘적인 정치노선으로 통해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자국민들을 전체주의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히틀러의 나치즘은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더불어 잔인한 반인륜적 행위를 저질렀다. 문제는 이런 파시즘에 대항하는 여러 연합국 노선이 당시 그들의 투쟁은 옳으나 그 후가 문제다. 그들 역시 파시즘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파시즘을 척결한 순간부터 자신들은 파시즘이 아니라고 하는 안일한 의식구조다.

혹은 그런 의식구조가 자기들에겐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고, 그런 자유와 평등이 없는 국가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최근 들어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이른바 자본주의국가와 대립되던 (스탈린주의적인) 공산주의의 몰락은 탈이데올로기와 탈냉전으로 이어지겠지만, 그런다고 하여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프랑스는 아주 잔인한 법을 시행한다. 어떤 정치인 법을 발효한다. 문제는 그 법에서 프랑스의 외국인들을 강제로 비행기로 태워 추방하는 것이다. 그들의 인권과 의식에 대한 눈곱만큼의 인정도 없이 보냈다. 게다가 비행기 안에는 산통으로 괴로워하던 임부도 있었다. 임산부가 그 긴 시간동안 비행기 안에서 산통으로 괴로워하면 임산부와 태아의 생명이 위험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강제출국을 시켰다. 이게 과연 인권적이란 말인가? 그러나 프랑스에선 오히려 이것이 인권적이라 말한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인이 프랑스어로 프랑스 안의 모든 것을 누려야 한다. 이른바 국민사회국가라는 것으로 자기 자신들이 파시스트로 변모한 것도 모른채 파시즘에 빠진 것이다. 또한 유럽에서 극단적인 극우들은 유대인들의 묘지를 훼손하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네오-나치즘이라고 했다.

이미 죽은 자들의 무덤인 묘지를 훼손할 필요가 없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애국주의를 외친다. 타자와의 경계선을 정하여 자신들의 가치가 옳다고 폭력적인 행동이 결국 애국이란 단어로 연계되는 게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태이다. 최근 얼마 전에는 어느 극우인물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사람 100명 정도가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과연 이런 행동들이 왜 일어나는가?

이른바 국민을 위해서라는 슬로건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혹은 그 국민이 구성하는 국가를 위해서라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불안함과 불편함을 자기 스스로 개선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아닌 타자들에게 전가하여 자기비판에서 도피한다. 이런 방법은 프랑스에서 우파나 좌파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국가경제를 위해서라든지 혹은 노동자를 위해서라든지 어느 쪽이든 파시즘으로 빠진다.

그러나 본인들은 파시즘이 아니라고 한다. 파시즘은 계속 가속화되어가고 있으나, 그 주범들은 각성하지 못한 채 계속 자신들의 파시즘을 정당화할 희생양을 찾는다. 특히 그것이 외국인이란 존재에 가장 부합된다. 초기 그들이 유입될 때에는 식민지정책으로 인한 노예일수고 있고, 혹은 아메리카 드림처럼 해외이주로 통한 성공을 꿈꾸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처음 낯선 타국에 와서 제대로 기반을 갖출 리가 만무하다.

그들은 최하의 조건에서 시작하여 갖은 허드렛일이나 위험한 일들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들도 점차 교육을 받고, 주변 현지인과 교류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사회에서 새로운 존재로 등장한다. 문제는 그들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내치는가?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즉 인종차별적인 행위들은 여지없이 터진다.

그런 행위를 저지르는 국민들은 자신들이 과연 자유와 평등에 의거한 인민주권을 외치는 것에서 과연 옳은가?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만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들을 몰락시키려 한다. 방법은 많다. 법적으로 강제퇴거와 출국시키거나 또는 사회구조적으로 견디기가 어렵게 하던가? 그러나 그런 일들은 아주 쉽게도 혹은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그렇게 만들고 실행하는 이들은 자유와 평화를 외치고 있다. 프랑스에서 바로 그 무섭고도 잔인한 파시즘이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 되어가고 있는 셈인 것이다.

아마 그런 내용을 진태원 교수가 이 책을 번역하여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한 것이라면 우리 역시 그런 파시즘에 빠져있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파시즘에 대항하여 생긴 대항세력 역시 파시즘화되어 간다면 결국 파시즘끼리 싸움이다. 그래도 문제는 먼저 파시즘으로 무장하여 파시즘을 만들게 한 원인부터 찾아가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 주요 본문에 대한 해설.번역.주석
조대호 역해 / 문예출판사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시작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 알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은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이란 철학, 미학, 신학, 자연과학 등 많고 많은 분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 형이상학을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사유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들의 출발을 찾아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어보며 생각한 것은 형이상학이란 정말 어려운 학문이나, 그 학문적 영역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내용이나 또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분야에서나 흔히 겪을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일단 meta-physics라는 것은 physics의 물리학적인 범주에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장 인가의 눈에 보이는 것이든 혹은 보이지 않은 것에도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이 형이상학이었다. 지금은 자연과학이란 분야는 형이상학적보다는 형이하학적에 가깝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갖가지 풀리지 않은 분야나 또는 새롭게 정립되는 분야 때문에 자연과학이 고대그리스에선 철학자의 영역인 반면 지금은 과학자 또는 그 과학을 실용적으로 이용하는 공학자의 영역가지 올라갔기 때문에 자연과학은 철학에서 가장 멀어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현미경의 발달이 아주 크지 않았나 싶다. 현미경의 발달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에는 형이상학 영역에서 인간 그 존재에 대해 연구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해 연구하면서 인간 신체와 관련된 의학이나 또는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기상학, 천체학, 생물학에서 당시 인간들에게 볼 수 있는 대상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은 인간의 세포가 보이고, 인간 주변에 있는 미생물들이 보이며, 지구 멀리 존재하는 태양계 행성까지 보게 되었다. 게다가 인간 신체구조와 작동원리, 해부학적인 학문발달은 인간 그 자체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진 사고와 다른 것을 증명했다. 물론 과학기술 발달은 인간의 인식을 변화할 수 있으며, 그 인식의 변화에서 인간 사고영역까지 변모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그런 인간의 존재론, 인식론, 마지막으로 신학 영역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이란 학문으로 심리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 철학 등의 영역으로 다룬 것이다. 단지 조금 내가 생각을 달리하게 된 부분은 형이상학에서는 물리, 논리, 윤리 3가지로 알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윤리학을 다루지 않았다. 아마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윤리학 교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간간히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자료언급과 주석이 달리기도 하였다. 일단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그 서적 원본은 번역하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형이상학을 연구한 철학교수가 연구한 내용으로 적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이 들어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형이상학이란 학문영역은 인간의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영혼적인 부분이 많기에 쉬운 도서는 아니다.

단지 그 다루는 내용들이 너무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너무 많이 접한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지나가는 생활 속을 다루는 형이상학에서 인간의 사유라는 것에 대해 단지 사유할 것인가? 아니라면 그 사유에 대하여 다시 더 사유를 하여 그 사유의 존재 근본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점에서 어떻게 본다면 우리 인간들은 어떤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단순히 일정한 틀에서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다고 하여 이 도서를 읽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100% 옳다고 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와 현대사회는 당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신학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아테네의 민주사회라는 것을 자신의 스승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노예와 동물에게 사고할 능력도 없거니와 그들은 어떻게 해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그리스 시대엔 노예사회가 존재했고, 지금은 존재하지 - 일부는 존재하겠지만 - 않는 것이 당연하다. 노예라는 존재도 결국 인간이고, 노예 역시 인간으로서 가지는 감정과 이성을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러면 노예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면 그가 세운 형이상학에서 아무리 논외로 설정해도 그가 세운 학문적 뿌리에서 명백한 오류를 저지른 점은 분명하다.

그래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하면 재미는 장면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같이 있는 그림을 본다. 플라톤을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며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보면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다. 진리는 플라톤에게 이데아 세계에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있다. 어떻게 보면 형이상학이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일 수 있겠지만, 결국 눈에 보이는 존재에 대한 존재에 다가가니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현실에서의 존재들에 대한 사유적인 사고에 대해 분명 사유의 대상은 눈에 보이나 사유 그 자체는 눈에 보일 리가 없다. 그런다고 하여 그것을 그저 있다고 하여 거기서 끝나기만 한다면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왜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라는 질문처럼 있음에 대해 탐구하고 사유하는 형이상학은 여전히 인간의 인식론과 존재론 그리고 영혼에 대해 묻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
김윤아 지음 / 일지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내가 보고 있던 어느 도서 한 부분에 이런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언캐니 밸리 이펙트(uncanny valley effect)"이다. 예전에 내가 은근히 생각해보고 영상관련 학문 도서 및 애니메이션 관련자료에서 조금 연계된 내용이 있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일본의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발표한 이론이다. 인형이나 만화 캐릭터, 로봇과 같은 인공체들이 인간을 닮아 갈수록 호감이 상승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정도가 특정 시점을 넘어서면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플라 익스프레스>를 보고 어린이 관객들이 공포를 느낀다거나 <파이널 판타지>의 너무나 인간 같은 캐릭터들이 무섭고 징그럽다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감정이입이 안되는 상황 등이 그 예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픽사의 <인크레더블>이나 <슈렉>같은 애니메이션들은 오히려 2차원의 평면적 캐릭터를 만들거나 완전히 인간과 다른 초록 괴물을 창조한다. 애니메이션에 있어 인간 형상 언캐니 효과에 대한 논의는 서울시립박물관 연국논문집 <현대미술과 미술관>의 수록 논문, 김윤아, 「그것은 영화인가 애니메이션인가: 인간의 형상을 중심으로」, 서울시립미술관, 2009년 참조] 

평소에 애니메이션 관련 글을 적는 입장에서는 이 말은 상당히 인상이 깊다. 이른바 애니메이션 캐릭터라는 존재들은 현실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현실에 없는 허구의 존재이다. 문제는 실제 존재들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담고 있으므로 그들이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문제로 인해 삶의 에로스와 죽음의 타나토스가 교차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라는 것은 실사영상으로 통해 삶의 모습과 더불어 죽어있을 그들을 불려오는 하나의 환영소환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실사 안에 찍혀 있는 피사체에서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들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허무의 공간이란 것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죽어있는 자를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자들을 만드는 것으로 이른바 죽음의 각인을 새겨주는 영화와 달리 영원성을 부여한다. 

원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원래 없어질 수가 있다는 소멸의 현상을 변증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영상에서는 빈 공간조차도 하나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존재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들어있는 것이 아닐런가?
 

죽음이 원래 없던 이들을 탄생하는 것에서 우리는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고 말할 수 있는가? 그냥 TV나 영화관에서 보이는 유치하고 저속한 수준의 미디어로 비추어 볼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편견과 오류와 자만에 불과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말하려면 우리가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관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오락과 재미로 부여하기 보다는 그 이상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살펴본 도서에서 애니메이션에 얼마나 높은 가치가 있는지 어떻게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지 기술한 도서가 있었다. 
 

그 책은 바로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이란 도서이다. 이 도서의 큰 특징은 이른바 장인-작가주의적인 작품을 다룬다는 점과 상업적인 요소를 지닌 대규모 자본집약적인 제작방식보다는 1인 내지 소주정예로 이루어진 개인 중심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제작방식이 대규모 노동보다는 감독이 직접 모든 것을 구상하고 그리고 제작하므로 애니메이션이 모두 만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작품에서 보이는 가치관과 예술성은 매우 뛰어나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한편의 미학강의를 받는 것과 같다. 미학은 미(美)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그 미라는 것이 단순히 예쁘고 화려하고 멋지게 보이는 모습보다는 그 내적인 가치와 담론을 어떻게 보여주고 표현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예술이라는 인간 내부에 있는 하나의 억압 내지 표현욕구가 타인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을 때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게 하는가에서 미학의 가치를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미학은 예술에 대해 철학이란 칼로서 광학적으로 본다는 말처럼 애니메이션 내에서도 예술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가를 안다는 것은 애니메이션 미적 가치를 올리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단순히 우리의 인식 속에 있는 고정된 관념보다는 그 이상의 이상과 사유로서 보여줄 필요가 있다. 특히나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이라면 그런 고정된 관념과 인식에 대해 확실하게 해체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이 있어야 한다. 책의 본문에서 이런 문구가 나온다.  

<아도르노는 “타락한 세계를 고발하기 위해서, 능욕당한 미의 명예를 위해서 예술은 추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도르노는 예술은 잔혹해야 하고 혼돈을 가져다 주어야 하며, 고통스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의 공범자가 되어 화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기만하는 것은 진정한 예술이 아닌 것이다. 예술은 삶에 대한 부정성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하며 그 방식은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일 때만, 자신의 타자성을 내세우고 모순과 불협화음, 비동일성, 분열 속에서 스스로를 지킨다고 역설한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애니메이션 및 영화 각종 이야기를 가진 서사구조에서는 평화로운 세계 내지 혹은 원만한 공간에서 하나의 침입자 및 원인제공자가 그 세계와 공간을 위태롭게 한다. 그리고 그 세계와 공간이 위태롭게 됨에 따라 불안정한 구조로 빠지고, 이에 대해 영웅이나 대항조직이 생기며 이들은 다시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이것이 보통 narrative의 정해진 간단한 패턴공식이다.
 

보통 이런 공식들은 자기반성보다는 외부의 인자를 찾아오기 때문에 그 갈등의 시발점이 정말 외부의 존재들이 의도적으로 했는지 아니라면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게 했는지가 알 수 없다. 가령 우리가 자주 보는 영화 중에서 베트남전쟁 영화가 있다. 거기서 베트남은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 갖은 음모와 위협을 제공하고, 미국군은 여기에 대해 매우 어렵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오고가면서 관객의 긴장감을 도모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승리에 맞이함에서 영화는 안정된 공간을 찾고 세상은 평화가 다시 찾아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세상 베트남전쟁은 통킹만 사건으로 통한 첩보자작극이란 폭로로 통해 베트남전쟁은 정말 세계 평화의 - 악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 위협을 저지함에서 모든 것이 마친다. 이것이 보통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식, 혹은 영화관에 보러 가면서 미리 시나리오를 예상하는 관객의 틀이다. 그렇지만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은 이런 고정된 인식이나 일반 대중들의 사고를 가진 관객의 생각들을 오히려 전복시킨다.
 

영화로 통한 장치가 아니라 영화로 통한 정치적인 강조로 변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들이 기용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보기가 참 좋다는 것보다는 보기가 그다지 좋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준다. 정해진 방식과 모습 그리고 연출로는 기존 사고의식에 빠져 있는 인간의 한계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허나 무조건적으로 이런 과격하고 전도적인 방식으로만 관객들을 자극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프리데릭 벡이란 감독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제작기간이 5년이란 시간을 소요되었는데, 막상 상영시간은 단 30분 내외이다. 그는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혼자 작화작업을 하였으며, 작품 내의 마치 몽상의 세계를 꾸미기 위해 화학약품으로 펜이 묶은 셀을 닦음으로서 한쪽 눈을 잃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어려움을 겪은 만큼 그의 작품은 전 세계의 관객들을 사로잡게 되었고, “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 나무를 심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감독이 주지하고자 하는 의도나 가치가 그대로 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작품들에 우리는 과연 예술적 가치를 배제하고 그대로 넘기야 하는 것일까?
 

때로는 이런 작품적 가치를 이해하고 논하기 위해서는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게다가 예술 애니메이션에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여 다른 애니메이션에도 예술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애니메이션인지 혹은 애니메이션을 위한 예술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을 위한다고 하여도 애니메이션에 예술적인 가치가 있고, 그것이 미학적으로 풀어가서 철학적인 사유로 논한다면 애니메이션 과연 그저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ps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이 책을 저술한 김윤아 교수님에게 직접 서명을 받아 기분이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논증의 탄생 - 글쓰기의 새로운 전략
조셉 윌리엄스.그레고리 콜럼 지음, 윤영삼 옮김, 라성일 감수 / 홍문관(크레피스)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논증이 탄생은 논리적인 증명만을 원하는 도서가 아닌 듯하다. 오히려 논증으로 탄생하는 것은 언어로 통하여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이 그 말로 통해 활자라는 매체로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단순한 자기가 하고 싶은 주장만 제기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 주장과 거기에 동반되는 의견, 그리고 여러 가지 부분에 대해 서로 토의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즉 이것은 단순히 자신만의 논리만 내세운 것이 아니라 그 논리로 통해 어떻게 상대방과 관계와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것이냐는 것이다. 진정한 논증은 자신과 우리만이 아니라 상대편과 타인의 발전을 같이 고민해야할 숙제인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 이외의 모든 상황을 지혜롭게 넘길 수 있는 하나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이 무기는 총과 칼처럼 남을 다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자신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핸디캡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상대방에게 자신의 뜻을 알릴 수 있는지 혹은 그 뜻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지는 대화로 풀어가는 현대인들의 큰 과제이다. 그런 점에서 논리정연하게 글을 적어서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도록 유도해야 하며, 거기에 대해 상대방에 대한 입장 역시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그런 글의 대화로서 풀어가는 그 과정을 3가지 단어로서 전제를 세운다. 그것은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이다. 즉 논리, 입장, 감정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에토스다. 분명 책 제목이 논증의 탄생이나 논증이 탄생하는 것에서 로고스보다는 에토스를 중시한 점에서 나는 조금 놀랬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말하고픈 내용을 글로 적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고를 남에게 전달한다는 전제 아래서 시작일 것이다.

내 생각을 전달함에서 상대방이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의 글을 적는다면 그것은 상대방이 잘못된 것보다 글을 적은 본인들의 잘못이 크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글을 잘 적을 것인가? 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하지만 단순히 어떻게 글을 잘 적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만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고민이 될 것이다.

문건을 작성할 때 어떤 명확한 주장과 전제를 정했는지, 그 주장과 전제를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 이유와 근거를 찾아내는지? 정확한 이유와 근거도 있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문장을 꾸며서 간단명료하면서 상대방이 납득하기 쉽게 적을 수 있을까 등 다양한 언어기술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처음 읽은 나는 겉으로 읽기만 해서는 분명히 어려운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것이 어렵지 않더라도 이 책에 적혀 있는 안내들을 따라 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는 글을 적어가는 방법과 기술 그리고 많은 사례를 통해 추후 글을 적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도서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그 글을 적는 것은 기술과 방법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논리적인 사고로 통해 상대방과 대화로서 풀어갈 수 있지만, 그 논리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 그리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논리를 이끌 수 있는 감정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글의 요소라는 점이다.

어떻게 보자면 지나치게 논리적인 글을 상대방에게 차가운 칼날을 들이대는 것과 같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글은 너무 뜨꺼워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글을 적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다. 단지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내용과 자신이 내세우고 싶은 전제가 자신에게 모두 합당할지 모르나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떻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납득시키어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할까? 단어 위치나 문장구조나 어휘구사 하나하나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하는 언어라는 마술에서 이 책에서는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이 책에 적혀있는 부분만 매달리면 안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에토스는 이 책을 읽어서 얻어지는 보물이 아니라 평소 글을 적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 그 자체에서 생기는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증의 탄생이란 이 책에서는 그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충분히 그런 부분을 숙지하고 있다면 언제가 글을 제대로 적고 싶어 하는 미숙한 나에게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쉰P 2017-01-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또 놀람 ㅋ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인 강원국 샘이 이 책이 추천을 하셨어요 그래서 리뷰를 보니 만화애니비평님의 리뷰가 퐉!감탄하고 있어요 법학 답안지를 쓰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젤 중요한 점이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부분을 논증하는 법이에요 ㅎ 이 책이 도움이 될까 고민은 하지만ㅋ 함 읽어볼라구요 ㅋ 제가 질문을 좀 못 알아듣고 글을 잘 못 쓰는 경향이 있어서요 ㅠ 눈이 많이 옵니다 길 조심해서 다니세요!!!

만화애니비평 2017-01-23 13:41   좋아요 0 | URL
추운데 잘 지내고 있나요?
이 책을 국문학도에게 소개받아 읽어보았습니다.
아직 비문이나 문맥오류가 많으나, 그래도 이 책 덕분에 많은 교정과 실력을 늘리게 되었지요. 전 남부권이라 눈발을 봐도 눈쌓인 것은 보기 힘드네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文藝理論)을 처음 접할 때 나는 그의 존재에 대해 그렇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보았다. 사실 나는 발터 벤야민이란 이름을 본 것은 작년 진중권 씨의 “미학 오딧세이” 3번째 편과 그리고 같은 저자의 “숭고와 시뮬라크르”라는 도서였다. 전자의 책은 미학에 대해 전무한 상태에서 읽은 책이라 발터 벤야민이란 인물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나온 서적은 상당히 읽기에 어려운 도서였기 때문에 그 책 초반에 나온 발터 벤야민이란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역부족였다.

나의 발터 벤야민이란 이름이 다가온 것은 작년이었다. 그런 직후 책을 이래저래 조금씩 읽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도서를 통해 나의 사고력을 증가할 것이 필요하여 도서 추천을 기거저기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추천받은 것이다. 예전에 들어온 발터 벤야민이란 사람이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 직후 도서를 찾아보고 구매하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눈이 조금 아파왔다. 책에 읽혀지는 글씨 크기가 너무 작았다. 특히 각주에 달린 글자의 크기는 모니터에 보이는 글자를 읽는 것보다 더욱 난해(難解)했다. 게다가 책도 제법 페이지 수가 있었으므로 보통 양장본 서적을 보급판으로 내어 책의 크기도 글자의 크기도 미니멈하게 낸 도서같이 느꼈다. 그런 발터 벤야민 하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 사람들은 아우라(Aura)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에서 내가 아직 그렇게 깊은 통찰력을 가지지 못함에 유감(遺憾)스럽게 느끼지만, 그래도 발터 벤야민의 엄청난 업적은 이른바 기술복제시대(技術復除時代)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들은 엄청난 과학기술과 문명발달로 통해 많은 물질적 혜택(惠澤)을 받는다. 물론 그 혜택은 자본주의사회구조(資本主義社會構造)에서 재력(財力)에 의해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하나, 적어도 최소한으로 도로, 전기, 상수, 하수 등의 인프라 - 이것 역시 재력이 작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나 - 등으로 통해 그 편리함을 누린다.

그렇지만 당시 발터 벤야민의 사회상은 그렇지 못하다. 1920~30년대 주요 활동과 저술을 맡은 발터 벤야민의 시대에서는 이제 막 기술복제로 통해 특히 영상이미지가 복제되는 것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영상이란 것은 마치 신기한 도구와 같았다. 예전에 사람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은 오로지 미술가들의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상당히 많은 노력과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많은 시간을 고정된 자세로 유지해야만 했다.

또한 그림이라는 것은 화가의 관점에서 시작되므로 화가가 눈에 보이는 것이기 보다는 화가의 눈 이외의 내부의 관념적인 부분까지 더해지면 조금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가령 어느 인물화에서 그 인물에 대한 특징적인 부분을 강조하거나 의미를 둘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진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기구의 등장은 기술복제시대에서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영상의 잔상이 그 때 그대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에서 그런 사진의 역할은 그림에서 보이지 못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보았으며, 또한 사진은 이때까지 우리가 보이지 않은 표상까지 잡음으로 그것이 새롭게 보아야 한다는 사고까지 추가했다. 특히 나같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발터 벤야민의 사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애니메이션이라 하여 실사영상이 영화(映畵)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오히려 애니메이션으로 깊이 파고들어 가면 결국 영화의 세계와 조우(遭遇)하게 된다.

그런 영화세계에서 기술복제로 통한 이미지 재현에서 같은 작품을 토대로 영화와 영화 이전의 서사(敍事)를 보여준 연극(演劇)과의 사이를 밝힘은 참으로 놀라웠다. 사실 영화와 연극을 2가지를 놓고 실제 진행 시간은 2시간이라고 치자. 그런데 연극은 그 연극이란 공간 속에서 2시간을 그대로 Running Time으로 통해 다 보여준다면 영화는 2시간이란 시간 속에서 그 공간적인 영화관에서 보여주는 것은 2시간만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2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2시간의 백배 혹은 천배 이상의 들어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연극의 2시간은 무대감독, 연출, 소품담당자 등과 같은 스텝들이 2시간 동안 연속적인 행위로 이루어진다. 즉 일련의 시간과 공간이 인물에 의해 연속적인 모습이 연출되는 시퀀스는 무대 위의 연기자들이 연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연기자들의 모습에서 막과 극과 같은 시간, 공간, 상황적 배경 및 사건 등이 서로 나누어져 보인다면 무대 위에는 분명히 시퀀스가 이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무대 위가 아닌 무대 밖의 세계는 시퀀스가 연속적이다. 영화는 이런 시퀀스를 모두 해체해 버렸다. 영화의 시퀀스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화관 안에서 계속 화면을 바라보는 영화관객과 영화 상영을 위해 기계를 조작하는 영화관 직원 정도일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모든 것을 분리하여 하나의 조각을 모아 거대한 틀로 만들 수 있는 재구성력을 소유한 것이다. 또한 영화는 필름을 복제할 수도 혹은 하나의 필름을 가지고 계속 상영할 수 있다.

따라서 연극은 한 번의 쇼로 마무리 짓는 것이라면 영화는 한 번의 쇼로 보여줄 뿐이다. 여기에 연기자들의 반응도 달라진다. 가령 연극무대 위의 연기자들은 관객을 직접적으로 의식해야만 하고, 그들은 그들의 연기에서 일순간의 실수조차 수정할 수 없다. 그들의 연기 자체가 완벽은 때와 시간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반복되는 행동이나 실수를 편집하여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로 구성한다. 따라서 연기자는 연극무대의 긴장감을 놓치기가 쉬울 것이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관객이 아닌 단지 카메라맨이 들고 있는 카메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카메라를 통해 비추어지는 모습을 관객이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가 연기하는 그 짧은 순간에는 관객들은 그를 보지 않는다. 단지 그 카메라의 영상이 복제되어 하나의 영화라는 예술 혹은 상업적 매체로 탄생할 때만 가능해진다. 지금의 이런 글들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과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나의 지식으로 적은 글이다.

물론 내가 적은 지식은 일반 대중들이 지닌 상식보다 더 깊이 있게 논의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특별히 누군가에게 통제된 지식이 아니다. 단지 통제되지 않은 것을 대중들이 스스로 통제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당시 발터 벤야민은 적으려고 했다. 이제 그 시대의 영상문화는 막 태동했다. 그러나 영상문화는 하나의 대중예술로서 자유로운 담론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이용당하는 객체적인 존재였다. 정치도구로서의 영화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상 안의 텍스트는 일반 서적 안의 텍스트와 비교하여 우리가 책을 읽을 것들을 더 이해하기 쉽고도 혹은 더 작은 시간으로 통해 어떤 사람 내지 단체가 의도하는 바를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파시즘에 대한 비판에서 영화 즉 영상이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기술복제시대에는 정보의 전달력을 알리기에 좋은 도구들이 많았다. 혹은 “태초에 말이 있었다”처럼 우리 인간들은 정보의 수용능력을 오랫동안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정보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대한 접근성과 언문능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언어라는 것은 서구사회에서 근대화 이전에는 거의 제한된 존재인 듯하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을 구사하는 사고력이 있어야 하고, 사고력을 뒤받쳐주기 위해서는 언어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하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의 조건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은 일반 프롤레타리아에게 열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기술복제시대에는 다양한 매체에 따라 정보가 복제되었다. 이전의 정보는 한정적이라면 근대시대에는 그 정보가 인쇄술의 발달, 녹음기술 발달, 영상기술 발달로 통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정보력을 누군가가 통제하여 일반적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 정보를 가져다 준 만큼 오히려 대중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그런 점을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발터 벤야민은 이미 스펙타클이란 단어를 여기서 사용했다.

조금 문예이론에서 면에서 이런 사회구조와 역사적 흐름을 잡는 것이 아닐까 하나 사실 문학과 예술 역시 사회적 현상과 역사적 흐름을 무시할 수 없다. 예술에서 역사적인 가치에서 그것이 진정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받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가령 우리는 문화제 중에서 1,000년 전에 귀족이 사용하는 칼이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문학과 예술은 어떻게 본다면 그 때 당시의 인간이 가진 가치관과 상황을 전달하는 매체일 수 있다.

그런 매체를 후대의 인간들이 보는 것은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지금은 내가 뭐라고 할 그런 입장은 아니나 발터 벤야민의 경우 그는 유대교적인 종교적 관념과 마르크스주의적인 유물론을 동시에 무장되어 있다고 이 책 어느 부분에 적혀 있다. 물론 그런 문예의 대한 부분에서 이 책 후반부에 가면 발터 벤야민의 언어철학과 역사철학에 대한 담론이 적혀 있다.

어째든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이나 발터 벤야민이 가진 철학적, 문학적, 역사적, 종교적인 학문적 그릇은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발터 벤야민이 살아가던 시절은 파시즘과 1차 세계대전, 그리고 많은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런 시기에 발터 벤야민은 유럽인으로서 최후를 맞이한다. 발터 벤야민에 대한 소개에서 발터 벤야민은 파리가 베를린처럼 베를린이 파리처럼 여겼다고 한다. 파리는 자유와 혁명이 숨쉬고, 코뮈나르의 영혼이 불탄 채 잠을 자는 영토였다.

그런 영혼을 가진 땅을 사랑한 발터 벤야민이듯이 이 서적 초반의 자전적 프로필에서는 발터 벤야민의 어리고 젊은 시절의 글은 상당히 시적이면서도 아름다우면서도 섬세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문학적인 정보와 접근성이 없는 본인에게 많은 작가를 소개해주었다. 카프카, 프루스트, 보들레르, 그 외의 작가들, 또한 다양한 이야기 소재로 통한 비평적인 글들을 말이다. 서사라는 것은 단순히 외적으로 보이는 이야기이나, 그 이야기 내부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이야기를 보고 그것을 외적으로 읊어주는 해설가인가? 아니면 그 이야기를 통해 안에 들어가 무엇이 있는지 끄집어내려는 비평가인가? 아직 많은 학문적 도전이 필요한 본인이나, 발터 벤야민이 비평에 대한 비평적인 문구는 매우 인상이 깊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