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물림 되는 능력.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는 꿈.
스스로 그 단 한 사람을 선택할 수도, 모든 꿈을 거부할 수도 없는 숙명을 짊어진 여러 세대의 여성들 이야기.

감당하기 어려운 능력을 지닌 인물들에 대해 생각하다 그 막막한 죽음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무척 우울해진다.

- 두 나무 근처까지 그들이 왔다. 두 나무는 기다렸다. 사람은 날카로운 도구로 한 나무의 줄기를 찍었다. 찍고 또 찍었다. 나무는 점점 기울었다. 나무는 나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무가 쓰러졌다. 강렬한 고통의 냄새가 나무를 에워쌌다. 사람들은 쓰러진 나무의 가지와 잎을 대충 잘라 낸 뒤 줄기를 수레에 싣고 떠났다.
홀로 남은 나무 주변을 뒹구는 푸른 이파리와 나뭇가지.
수수께끼처럼 남은 그루터기.
그와 같은 죽음은 처음이었다.
그처럼 강제적인 죽음은.
세월에 순응해 쓰러지거나 비바람에 뿌리째 뽑히거나 속부터 썩어 마침내 부러지는 나무는 숱했다. 쓰러지고 뽑힌 뒤에도 나무는 그 자리에서 숲이 되었다. 그루터기만 남기고 줄기는 통째로 사라져버리는 기괴한 죽음은 300년이 몇 번씩 거듭되는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 숲에서 보고 들은 죽음과 완전히 달랐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이별 또한 아니었다. 훼손이었다. 파괴였다. 폭발이자 비극이었다. - 18

- 저렇게 많은 사람이 죽는데 어째서 나는 살아 있지? 수많은 죽음 앞에서는 살아 있음 자체가 비정상이었다. - 65

- 미수는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천자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했다. 목화가 보기에 모두 감정이 섞인 해석이었다. 감정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는 목화는 자기 역할을 중개인이라고 정의했다. 나무와 사람 사이의 중개. 나무가 사람을 살리려고 해도 목화 없이는 살릴 수 없다는 점이 중요했다. 목화는 자기 몫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건조하고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이었다. - 99

- 처음에는 목화가 직접 기록하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중개에서 깨자마자 기록할 힘이 없기도 했고, 말하는 것과 글자로 적는 것은 무척 달랐으니까. 글자는 확연했다. 기억을 선명하게 덧칠하고 감정을 증폭시켰다. 때로 목화는 “많이 죽었어”라는 말 외에는 꺼내지 못했다. 그럴 때 목수는 “한 명을 살렸다”라고 기록했다. - 100

- 중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알아?
목수는 짐작하여 대답했다.
글쎄, 살려달라는 말?
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
그날 목수는 그 말을 기록했다. - 104

2023. nov.

#단한사람 #최진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바이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이미의 평생을 좌지우지하는 우연으로 조우하는 찰스 제이컵스.
목사로, 떠돌이 장사꾼으로, 사이비교주로, 미치광이 과학자로 존재하는 찰스.

인생의 여러가지 비극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찰스 제이컵스라는 광인이 어디까지 흘러갈지가 흥미진진하다.

- 우리의 인생을 집필하는 작가는 누구일까? 운명일까 우연일까? 나는 우연이라고 믿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싶다. - 12

- 나는 옛날 같았으면 우리가 걷는 길은 무작위로 선택하는 거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있고 나서 다른 일이, 그러고 나서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 이제 나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세상에는 어떤 기운이 있다. - 130

- 호기심은 끔찍한 것이지만 인간적인 것이기도 하다.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기도 하다. - 533

2023. dec.

#리바이벌 #스티븐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습관성 겨울 민음의 시 148
장승리 지음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당신이 내 손을 잡고 싶어 했을 때 난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가신 후 보는 책 족족 밑줄을 그었을 뿐입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내 온몸에 밑줄을 그어 주세요 그 계단을 밟고 내려와 내 손을 잡아 주세요 - 또, 봄입니다 중

- 거대한 꽃상여에 치여 죽고 싶어 하던 너, 떨어지는 나를 붙잡기 ㅟ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수 있겠니 - 웃으면서 자는 죽음 중

- 살아 있는 것들의 들숨과 날숨으로
하늘은 저렇게 어두워지는데
숨의 총량은
어둠의 총량을
넘어서는 법이 없다 - 키스 중

- 우리가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바다는 없다
눈먼 등대가 되어
더 밝은 어둠 속으로 그대를 몰아내는
내 눈동자의 침묵에 대답할 수 없다면
그대,
더 이상 그대 몸속에 그대 키 이상의 파도는 만들지 말기를 - 우리 중

- 난 지쳤어
더 이상 요동치지 않는 방의 심장에 돌을 던지자
잔물결이 밀려왔고
물결 하나를 관 뚜껑처럼 덮고
점점 더 방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난 한 마리의 하혈하는 파랑새가 되고 싶었어
하늘에 걸려 있는 교수대의 목줄을 향해 돌진하고 싶었지 - blue day중

- 가려워서 긁는다 긁다 보니 긁는다 가렵지 않아도 긁는다 눈보라처럼 버짐이 일어난다 창문을 긁고 가는 바람의 메마른 웃음을 분석하고 싶은 밤 네가 내 앞에 서 있다 거울을 통해 자기 등 뒤를 살피던 고양이의 매서운 눈매를 하고 있는 너 네 앞에서 나는 왜 거울인가 - 습관성 겨울 중


2023. nov.

#습관성겨울 #장승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사유 재산 - 메리 루플 산문집
메리 루플 지음, 박현주 옮김 / 카라칼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년의 성찰.
여성의 노화에 대한 다소의 불쾌함에 대해 각성하고 있는 요즘, 메리 루플의 세계가 다가왔다.

젊음이나 늙음이나 어떤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그저 경계없는 경계에 대해서.
조금은 울적한 나날에 다양한 색깔의 슬픔과 안도를 생각한다.

- 그래서 경찰들이 내게 달리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지만 자기 자신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러다 우리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될 때면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들은 그 말에 만족한 듯 보였다. 경찰들도 참, 그들은 모두 젊다. - 14

- 궁극에는 그들 사이에 진정성있는 감정이 오고 갔기를. 이것이 나의 가장 깊은 바람이다. 비록 그 감정이 일종의 패배감이었다 할지라도. - 17

- 가끔은 완곡어처럼 들리는 ‘삶의 변화’라는 단어도 보았지만, 실은 완곡어법도 아니다. - 35

- 행복한 노년은 맨발로 다가오며, 그와 함께 우아함과 상냥한 말들을 가지고 온다. 음울한 청춘은 절대 알 수 없었던 방식으로. - 42

- 그 모든 실패에 대해 생각했다. 파케트 선생은 프랭크에 대해, 허먼 멜빌에 대해, 바틀비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안타까운 기분을 느꼈다. 자기 잘못이 없다고는 해도 세계를 구해야만 했으나 구할 수 없었던 문학에 대해서. - 50

- 나는 결코 외롭지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 내가 나 자신을 지루하게 할 때를 제외하고는. 이것이 외로움에 대한 나의 정의이다. 자신을 지루하게 하는 일. 한 신체를 쓸쓸하게 하는 일, 바로 그것이다. - 65

- 가을의 이 페이지들을 책장을 넘기듯 넘겨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책의 맨 아래에 이를 때마다 페이지를 응시하며 넘어가! 넘어가, 넘어가란 말이야, 넘어가, 라고 하는 것처럼. 그는 저녁의 무감각 속에서, 절망 속에서 울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120

-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작가들에게는 대부분 하인이 있었다. 그들이 셀제로 설거지를 해본 적이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건 참 안된 일이다. 그들은 설거지를, 특히 저녁 식사 후의 설거지를 재미있어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동작은 다른 것들로부터 정신을 돌릴 수 있도록 해준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것들’이란 이 세계의 걱정거리를 뜻한다. - 128

- 덧붙이는 말 : 색깔을 다룬 각각의 글에서, ‘슬픔’이라는 단어 대신 ‘행복’이라는 단어를 넣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 153, 감사의 말 중

2023. oct.

#나의사유재산 #메리루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민음사의 유튜브 채널에서 노벨문학상에 대한 라이브를 했는데, 노벨상 발표를 기다리며 진행된 라이브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제 더이상 노벨 문학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업었지만, 라이브를 보며 한참 웃고 수상자 소식까지 전해듣고나니 왠지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바로 주문한게 이 책이었다.

길고 긴 문장이 이어지고, 그것이 마치 끊어지지 않는 생명력같이 느껴졌다. 그 여운이 좋았다. 마치 대자연속에서 당연한 흐름처럼 흘러가는 생명.

연극적이고 고요하고, 독서지만 명상같은 독서.

- 그리고 그 아이가 이제 곧 나온다, 마르타, 아이의 어머니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른다, 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 - 15

- 그럼 마음 아픈 일이지, 레이프가 말한다
그래도 닥칠 일은 닥치는 법이야, 그가 말한다
사람이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언젠가는 우리 모두 차례가 오는걸, 그가 말한다
그런 거지 뭐, 그가 말한다
싱네가 그의 팔을 놓는다
그래 이제 아버지도 돌아가셨어, 그녀가 말한다 - 124

- 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
없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한가? 요한네스가 묻는다
위험하지는 않아, 페테르가 말한다
위험하다는 것도 말 아닌가, 우리가 가는 곳에는 말이란 게 없다네, 페테르가 말한다 - 131

2023. oct.

#아침그리고저녁 #욘포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