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단편 빛의 호위가 장편으로 거듭났다.
분쟁지역의 상흔들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한반도에서는 직접 느끼기 어려운 아픔들을 보여준다.
멀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생각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일들이다.
- 태엽이 돌아가는 동안 멜로디가 흐르고 눈이 내리고 둥글고 투명한 세계에서, 그 세계의 유일한 주민인 양 늘 혼자서......
"태엽이 멈추면 빛과 멜로디가 사라지고 눈도 그치겠죠." - 9
- 나는 가엾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 위험하게 살았고 결국 그 위험을 피하지 못해 다리 하나를 잃었지만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그녀는 하고 싶었다. - 33
- 임신 육 주 차에 접어든 여성이 공습이 이어지는 도시에 남겨진 현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아이가 아이일 동안에는 좋은 것만 감각하고 싶다는 당신 혼자만의 생각이 대체 왜 중요한데? 인내심을 잃고 그런 질문을 쏟아낸다면 오늘 저녁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되리라. - 40
- 살마를 만난 뒤부터 그녀는 사람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다.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사진이 옳은지에 대해, 가령 배고픈 사람이나 다친 사람에게, 혹은 가족이나 연인, 이웃이 죽는 걸 목격한 적 있는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이 과연 맞는 지에 대해...... 각자의 공간과 시간에서 그 사진을 접하게 될 익명의 사람들이 사진 속 고통을 미술작품처럼 관람하는 것에 그치거나 총알과 포탄이 부재한 자신의 현실에 오직 안도할 뿐이라면, 그런 사진이 과연 이 세상에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더 이상 판단할 수 없게 됐다. 사진 한 장을 제대로 찍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했던 고생 - 분쟁 지역으로 가기 위해 지난한 절차를 밟으며 여러 번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던 것이나 예고 없이 수도와 전기가 끊기는 열악한 환경에서 잠을 설쳤던 것, 무엇보다 언제라도 치명적으로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는 원초적인 공포를 이겨내려 애썼던 그 모든 지난 시간들이 결국 타인의 고통 위에 세워진 모래성 같은 자기 만족에 불과할 수 있다는 허무를 알게 해준 피사체가 그녀에게는 살마였던 셈이다. - 55
- 피사체와의 거리가 유지되어야 거리낌없이 촬영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거리는 결국 냉정함의 거리라고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그런 생각은 셔터를 누른 이후 피사체가 살아갈 실제 삶에는 무심했다는 가각,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사진을 위해 한 사람의 고통을 이용해온 건지도 모른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구원이 불가능한 세계를 편집한 것에 불과한 사각형의 파일 하나, 혹은 종이 한 장...... - 60
- 그 후로 가자 지구는 한 번 더 갔고 시리아는 세 번을 방문했어. 레바논과 남수단도 한 번씩 갔지. 폭격이나 포격의 순간은 찍지 않았어. 대신 사람을 찍었어. 게리 앤더슨이 내게 가르쳐 준 방식대로 말이야. 그 시절, 아는 정말이지 사는 것 같았어. 사람을 살리는 사진이라니, 그건 오만한 생각이었어. 사진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이전에 매번 나를 먼저 살게 했지. - 89
- 사람들이 노먼을 시대의 양심이니 유대인의 마지막 희망이니 하는 수식어로 포장하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런 거창한 수식어 뒤에 숨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정의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건, 뭐랄까, 나에겐 천진한 기만 같아 보였죠. 알려 했다면 알았을 것들을 모른 척해놓고 나중에야 자신은 몰랐으니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홀로코스트의 잔인함에 경악하며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려 했던 그 수많은 비유대인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어요. 화가 나진 않았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무기력해졌을 뿐이에요. 무기력한 환멸 같은 거, 그런 거였죠. - 125
- 자신을 꿰뚫고 지나갔던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애통하다고.
애통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고, 우리는 그를 오래 기념할 거라도고......
당신은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군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 죽음의 가치에 대해 멋대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였다.
그녀는 그 모든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대신 질린 얼굴로 그 말을 한 사람을 응시했다. 상대가 흠칫할 때까지 집요하게. - 159
- 외로웠지만, 아직은 견딜 만했다.
다만 알 수 없었다.
숱하게 찍어온 사진들이 과연 단 한 사람에게라도 의미 있는 말을 걸었는지, 전쟁이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형벌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낯선 사람의 손가락이라도 힘껏 잡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아기의 절박함을 기억하게 해주었는지......
알 수 없어서 그는 새벽까지 뒤척였다. - 178
- 지유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민영이 상체를 숙여 그 손바닥에 손가락 하나를 가만히 올려놓자 힘주어 잡아주었다. 민영은 순간 삶이라는 높은 대지에 손가락 하나를 걸치고는 힘껏 매달려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지유가 민영을 붙들었다. 삶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말을 대신하며, 우리가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 듯......
그래, 알아.
숭준이 지유가 깨지 않도록 그 머리를 조심조심 쓰다듬는 걸 바라보며 민영은 속삭였다.
이제야......
조금은 그걸 알 것 같아. - 214
- 건물 주변을 서성이다가 미용실 출입문에 기대어진 거울을 발견한 그녀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거울 앞에서 카메라의 전원을 켠 뒤 조리개와 감도를 조절하고 앵글을 맞췄다.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철로 된 무기와 무너진 건물을 지나, 올리브나무와 묘비 없는 무덤을 지나, 총성이 울리는 도시 한가운데 설치된 임시 병원에서 절망하고 흐느끼는 사람들과 그들의 상처를 봉합하고 소독하는 누군가의 손길을 지나, 살겠다는 의지를 포기한 적 없는 아기의 악센 손가락을 지나,
한 아이가 들여다보던 스노볼 안의 점등된 세상을 지나,
그 아이를 생각하며 잠 못 들고 뒤척이던 또 다른 아이의 시름 깊은 머릿속을 지나,
거울 속 세상과 그녀를 위해,
영원에서 와서 영원원으로 가는 그 무한한 여행의 한가운데서,
멜로디와 함께......
빛이,
모여들었다. - 250
- 누군가는 비웃을지라도,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다시,
믿고 싶었다.
사람들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일이란 것을,
권은에게 증여된 카메라가 이 세상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 작가의 말 중
2025. jun.
#빛과멜로디 #조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