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쓰기 딱 좋은 날 - 정끝별의 1월 시의적절 1
정끝별 지음 / 난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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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와 산문이 담겨있는 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는 고요하게 읽기 좋은 시리즈다.

- 내게 밀려오는 것들이 벅찰 때, 내게서 떠나가는 것들이 아릴 때, 떠올려보는 장면이기도 하다. 제 소중한 걸 부려놓고는 홀연 거두어 제 습성에 맞는 곳으로 자리바꿈을 한, 나의 너와 너와 너를 풀어내 여기 두서없이 앉혀놓는다. 내게 잠시 머물렀다 이만 총총 사라지는 숱한 나의 너들의 목록이랄까. - 9

- 그래, 지나가고 지나가는 건데...... 어차피 지나가고 지나가는 것일 뿐인데 그것도 성큼성큼...... 이렇게 되뇌로라면 몸속에 가득찼던, 날 선 분노나 갈애, 쪼잔한 근심들이, 싸- 하니 빠져나가곤 한다. 지나가는 것들에 의지해 나는 간혹 철이 들기도 하고, 끝인 듯 지나가는 것들과 함께 문득 가벼워지기도 한다. 물론 순간이다. 순간이 아니라면 나는 철이 너무 들어 무거워지다 못해 땅에 묻혔을지도 모른다. - 50

-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앙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111

2025. may.

#시쓰기딱좋은날 #정끝별의1월 #정끝별 #시의적절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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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0 - 5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20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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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대들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희망차지는 않다.
막바지에 이르러 기력을 다한 듯한 서희에 대한 서술이 고통스러운 세월이 흘러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막상 한 권을 남겨두고 나니 읽기가 더뎌진다.

- 그래 맞다, 맞어. 일본인에게 항복이란 있을 수 없지. 정복, 정벌이라는 그 달콤한 말에 길들여져 왔으니까, 정말 일본인들은 모두 죽을 각오가 돼 있는 걸까?
천만에요. 다만 죽을 각오를 강요당하고 있을 뿐이지요. 죽음을 강요하는 그 열렬한 분자야말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 할걸요? 국민을 제물로 삼으려는 의도가 ㅜ멉니까? 바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본능 아니겠어요? 그 본능 때문에 눈이 어두워 이미 사리판단을 못하고 있어요. 만일 자신들이 죽겠다 한다면 국민은 살릴 수 있겠지요. 군부나 황실이나. - 91

- "굉장해요. 모든 게 다 넓어요. 굉장히 넓어요."
"그래 모두가 다 넓지. 생각이 아득해질 만큼 만주벌판은 넓어. 일본의 국토도 이렇게 넓고 섬이 아니었던들 좀 더 멀리 세상을 내다볼 수도 있으련만."
"그렇지만 일본은 이 넓은 대륙을 정복하지 않았습니까."
쇼지의 그 목소리는 일본인의 목소리였다.
"이 땅의 사람들은, 그러나 결코 정복되지 않았다."
"어째서요? 일본의 지배 밑에 있는데도."
"일본은 다만 왔다가 가는 사람이야. 이 땅의 임자는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 이 땅에서 태어난 민족이지. 그것은 쇼짱도 알아두어야 해." - 134

2025. jul.

#토지 #5부4권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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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창비시선 427
김사이 지음 / 창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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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서술들...
가난한 노동자의 쓸쓸한 시선.
건조하고 무덤덤하여 더욱 그렇다.

<거리에서>
문을 열고 나가니
안이다
그 문을 열고 나가니
다시 안이다
끊임없이 문을 열었으나
언제나 안이다
언제나 내게로 되돌아온다
문을 열고 나가니
내가 있다
내게서 나누어지는 물음들
나는 문이다
나를 열고 나가니
낭떠러지다
닿을 듯 말 듯 한 낭떠러지들
넋 나간 슬픔처럼 떠다닌다
나는 나를 잠그고
내가 싼 물음들을 주워 먹는다
(전문)

- 지독하게 살았으나
지독하게 죽어가겠구나 - 고시원, 아름다운 날들 중

- 내가 여자를 입었는지 여자가 나를 입고 있는지
나를 찾아 출구를 더듬거리며 오늘을 걷는다만
여자의 시간은 어디쯤에 머물러 있나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 내 죄는 무엇일까 중

- 그늘의 딸로 태어나 그늘진 몸에 알록달록한 무늬들
나를 걸어 잠근 이번 생은 글러먹었다
오롯하게 내 죽음을 누리는 것
스스로 죽어가는 시간에 내가 마침표를 찍는 것
글러먹은 생에 대한 저항으로 - 저항의 방식 중

- 아이는 한발짝 한발짝 어른이 되어가지
색이 다르고 성이 다른 것을 차이라 말하고 차별하지 않는
고운 네가
내 죽음을 네 죽음처럼 보살피는 사랑이지
절망으로도 살아야 하는 이유이지 - 사랑 중

- 깊은 바닥 검은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심장을 찌른다 폭발하는 내가 툭 튀어나와 익숙하게도 가장 약한 것을 물어뜯는다 시시때때로 폭주하는 나와 나와 나로 가득하다 도처에 사람이 위험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위험하다 - 생각도 습관이 된다 중

- 더는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늙는다는 것 늙었다는 것
몸도 마음도 다 내주고 아무것도 없는
삼류들에게 추억은 왕년의 젊음은
쓸쓸함을 더하는 독주
그저 독주를 들이켜며 시들어가는 현실은
도대체 예의가 없다 - 보고 싶구나 중

-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자본과 노동이냐고 심드렁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오늘의 자본과 노동이 지난날의 자본과 노동이 아닌 것은 맞지만, 자본과 노동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맞는다. 자본은 너무 화려하게 전면적이어서 오히려 보이지 않고, 노동은 바닥으로 버려져 그림자가 되었다. - 해설 중

- 아직 할 말이 많은가보다
아직 반성할 기회가 있는 것이겠다
아직 길은 있는 것이다
그 믿음으로 아직 산다 - 시인의 말 중

2024. dec.

#나는아무것도안하고있다고한다 #김사이 #창비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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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예쁜 비치 타이피스트 시인선 10
오영미 지음 / 타이피스트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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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판타지 애니메이션 같은 시들.
엽편 소설처럼 여러 이야기들을 읽은 기분이다.

가상의 인물과 설정이 가미된 시의 형식이 이전에는 크게 감흥이 없었는데
이 시집은 이상하리만큼 흥미롭게 읽었다.
소재나 시어들이 친밀해서 일까.

마녀 같은(positive) 시인이 만들어낸 세계,
세상의 모든 것이 권태롭고 가소로운 정신 나간(positive) 화자가 펼치는 원맨쇼 같기도 하다.

너무도 마음에 들어버린 시집. 강추한다.

- 아무 데도 가지 마, 곁에 있어
그리고 견뎌
이런 우리를 끝끝내 견디란 말이야 - 시인의 말

- 06:17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이 나네요 저는 이 시절을 살아 보지도, 겪어 보지도 못했는데...... 근데 댓글 상태 왜 이럼? 님 뭐 시인...... 그런 거임? - [playlist] 세일러복과 문학소녀 중

- 그 자리에서 뒈져 버려라, 중얼거리고 싶은데 이미 뒈져 버렸으니 그럴 수도 없군요. 이딴 소리를 지껄여 나를 구역질 나게 하지 마십시오. -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중

- 어째서 제 시 이야기로 갑자기 화제가 바뀌는 거죠? 제 시에 대해서는 솔직히 하고 싶은 말도 없고, 깊이 생각해 본 적은 더더욱 없는데...... 이제 그만하세요. 제 시는 후후, 불면 구멍이 뚫리는 솜사탕처럼 달짝지근한 감상을 받을 주제가 못 되고, 무엇보다 이런 대화, 사실은 자기 손톱에 낀 때만큼의 관심도 없는 서로의 작품을 향해 의미 없는 칭찬을 핑퐁처럼 주고받는 그치들의 대화와 다를 바 없잖아요. 저는 그런 거 무지무지 싫어한단 말이에요. 정말이지......
(...)
나는 중얼거렸다. 하릴없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것 말고는 달리할 수 있는 게
...... 여보세요? 어머, 어떡해. 전화 끊으셨나 봐. 아니면 나를 영영 차단하신 건가? - 이 이야기는 명백히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사건 모두 가공된 것입니다 중

2025. sep.

#모두가예쁜비치 #오영미 #타이피스트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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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히지 못한 자들의 노래
제스민 워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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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에 '시적이며 강렬한 로드 소설이자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가족 서사의 탄생'이라고 적혀있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시적인데 지루하기도 하고 강렬한 로드 서사지만 갑갑하고 충돌만이 예상되는 이야기이고

뇌리에 떠나지 않을 가족이긴 한데 비문명과 심리적인 폐쇄성, 개선의 여지없는 현실에 좌절한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미도서상도 수상하고 온갖 매체에서 추천한 책이지만

지극히 미국적 서사이기도 해서 크게 와닿지 않았다.

흑인들의 핍박과 한의 역사들을 환상적인 요소로 덧붙여 풀어나갔지만 그 지점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초반부터 너무 성숙해져버린 소년 조조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던 탓에

조조의 부모 레오니와 마이클만 등장하면 답답한 심정이 된다.

모성의 결핍이 오직 레오니 탓만은 아닐지라도, 이 캐릭터의 모든 변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 마이클 보다도 레오니를 더 미워하는 마음이 들게 되는지는 좀 생각해 봐야겠다.

그런 부모에게서 동생 케일라를 지켜줘야 하는 조조의 심리적 중압감 때문일까...



그리고 대를 이어 등장하는 미시시피 주립 교도소 파치먼이라는 공간이 주는 심리적 거부감이 이야기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영혼으로 등장하는 기븐과 리치의 존재도... 원인.



새삼 느끼지만... 마약과 총기가 미국을 망쳤구나 싶다. 이 이야기가 그 지점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인상만 남았네.





- 케일라는 앓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레오니가 케일라에게 저걸 먹이지 않으면 좋겠다. 레오니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엄마가 아니다. 그녀는 아빠가 아니다. 그녀는 살면서 그 무엇도 낫게 해본 적도 길러본 적도 없었건만, 본인은 그걸 몰랐다. - 157



- 내가 열세 살이었을 때 나는 그보다 아는 게 훨씬 많았다. 나는 쇠고랑이 살갗을 파고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죽에 살점이 버터처럼 썰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허기가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내 속을 움푹 파내 조롱박처럼 텅 비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내 형제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내 다른 부분 역시 움푹 파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심장이 필사적으로 가슴을 뚫고 나올 것 같을 수 있다는 것을. - 260



- "넌 내 아기잖니." 엄마가 숨을 몰아쉬었다. 쇠살대가 부서지며 녹슨 침묵으로 떨어져 내렸다. "내가 장막을 걷어서 네가 이 생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처럼, 내가 다음 생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네가 장막을 좀 걷어다오." - 304



- 난 지금은 엄마가 될 수 없어. 난 딸이 될 수 없어. 난 기억할 수 없어. 난 볼 수 없어. 난 숨 쉴 수 없어. 그리고 마이클은 그 말들을 들었다. 같이 천천히 일어나 나를 안아 들고 차로 데려 가줬으니까. 그는 나를 조수석에 앉히고 문을 닫고 운전대 앞에 앉았다. 차에 타니 세상은 한층 가벼워졌다. 이 둥근 유리창 안의 나와 마이클로, 저 가증스러운 환한 빛과 주춤거리며 도랑으로 사라지는 개들과 유순한 소들과 빽빽한 나무들로, 내가 뱉은 말들과 엄마의 회색 종이 같던 얼굴과 내게 따귀를 맞은 조조와 미카엘라의 얼굴과 움츠러들던 아빠로, 그리고 두 번이나 떠난 기븐의 기억들로 쪼그라들었다. 우리의 세상은 수족관이었다. - 385



2025. aug.



#묻히지못한자들의노래 #제스민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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