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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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생 작가. 보다 앞선 시기의 작가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밀란 쿤데라가 연상되는 작가다.

웨이터라는 직업으로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 14세 소년의 성장사고, 그 정체성이 부딪힐만한 세상사, 인간사가 펼쳐진다.
다만 그 마주치는 현재의 윤리관으론 좀 고루하고 부적절하지만, 지난 시절의 낭만들이라고 포장하고 바라보자라는 합의를 종용하는 듯도 하다. 성 인식도 형편없고, 동물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등의 저어하는 지점들이 있긴 하지만..... 화려하고 적당히 속되고, 적당히 귀족적인 풍토가 남아있는 마지막 시절의 단편들이라고 생각하면 어찌저찌 참아진달까.

체코 청년의 친독 행적이라는 건 우리로 치면 친일 같은 걸까? 이야기가 후반부에 커브를 튼다는 생각을 했다.

프라하 호텔에 도착하니 사장이 내 왼쪽 귀를 잡아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넌 이곳 견습 웨이터다. 그러니 명심해라! 넌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복창한다!" 난 이곳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고 따라했다. 이번엔 사장이 내 오른쪽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하지만 또 명심해라! 넌 모든 걸 봐야 하며 모든 걸 들어야 한다! 복창한다!" 난 얼떨떨한 채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들을 거란 말을 반복했다. 이렇게 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 7

바로 그다음 날부터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돈이 내게 라이스키로 가는 문만이 아니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는 문도 열어주었다. 입구에 있던 라이스키 부인이 이백 코루나를 공중에 집어던지는 내 손을 향해 입맞춤이라도 할 듯이 달려들던 모습이 생각났다. 처음엔 그녀가 몇 시인지 알고 싶어서 차고 있지도 않은 내 손목시계를 보려고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입맞춤은 황금 프라하 견습 웨이터인 나를 향한 게 아니라, 바로 두 장의 백 코루나 지폐를 향한 것이었다. - 21

난 미소를 지었다. 무엇이 사람들을 움직이며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지, 몇 푼 안 되는 동전 몇 개를 위해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곧바로 알게 되었다. - 23

여기 호텔 티호타에서 알게 된 사실이 또 하나 있었다. 노동은 고귀하다, 라는 주장이 다름 아닌 우리 호텔에서 예쁜 아가씨들을 무릎에 앉히고 밤새 마시고 먹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바로 어린아이들처럼 행복할 수 있는 부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전에 나는 부자들이란 형편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소박한 오두막집과 작은 방들 그리고 시큼한 양배추와 감자, 이런 것이 사람들에게 행복과 평안을 주는 것이지 돈이 많은 것은 저주받은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가만보니 가난한 오두막집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하여 떠들어대는 이야기도 다름 아닌 우리 호텔 손님 같은 부자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 그때 옆에 앉은 다른 사람은 장작을 패고 있는 우리 호텔 포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저런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지' 하는 몽상에 잠겨 노동을 하고 있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자들은 노동을 찬양하긴 했지만 그들 스스로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노동을 해야한다면 슬퍼하며 불행해할 것이다. - 102

독일 명예-혈통 보호청이 내가 독일 혈통의 아리안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도장을 힘 있게 찍어 결혼허가서를 건네주었다. 반면에 체코 애국자들은 같은 도장을 그렇게 꾹 눌러 사형에 처해졌다. - 206

기차역에서 플랫폼을 따라 걷다가 우연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스스로 낯선 사람인 것처럼 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여러 지역에서 서로 다른 직업과 관심과 병을 가진 독일인들을 쳐다보았을 때처럼 -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셨고, 또한 영국 왕을 모셨던 지배인 스크르지바네크 씨에게서 교육받았던 나는 그들의 차이를 알아맞힐 수 있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예리한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니...... 체코 애국자들이 처형당하고 있는 동안 나치 의사들에게 독일 여자 체육 교사와 성교할 능력이 있는지 검사를 받고 있었으며, 독일인들이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했을 때 결혼식을 올리고 군가 <대열을 바싹 좁혀라!>를 부르고 있었고, 고향에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독일 호텔에서 독일 군인들과 에스에스 대원들의 시중을 들면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쟁이 끝나면 프라하로 더 이상 돌아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아니 나 스스로 첫 번째 가로등에서 목을 매다는 모습이 내 눈에 보였고, 나 자신에게 십 년형 이상을 언도했다. - 224

에스에스 대원들이 나를 그곳에 밀어 처넣으며 혐오스럽다는 듯이 "이 더러운 볼셰비키 종자!" 하고 소리쳤는데, 그 호칭이 내 귀에는 달콤한 음악처럼, 구애의 소리처럼 들렸다. 그것은 내가 프라하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 입장권이자 차표가 될 것이며, 독일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게르만-아리안 여자와 성교할 능력이 있는지 성기 검사를 하며 헤프의 나치의사 앞에 서 있었던 내 인생의 얼룩을 없애줄 유일한 약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시계를 봤다는 이유로 얼굴이 다뭉그러진 것이 내게 정당성을 부여해 어느 날 조사를 받고 반나치 전사가 되어 다시 프라하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 239

그런데도 나는 호텔 사장들에게서 굴욕감을 느꼈다. 여전히 나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들과 같은 신분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들을 능가하고 싶었는데...... - 265

종종 나는 도로를 정비하는 일을 내 인생의 길을 정비하는 것과 비교해보았다. 인생을 돌아보니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인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한 편의 소설이며 내 인생이란 책의 열쇠는 나 자신만이 갖고 있는 것이었다. 내 인생의 유일한 증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 328

술집에 앉아서 확인하고 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인생의 본질이 사실은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때가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음, 죽음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은 영원과 불멸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면서 자신과 나누는 대화인 것이다. 이때 자신의 인생 여정의 무의미를 맛보며 어차피 지소되지 못할 아름다운 것들 안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 바로 그것이 벌써 죽음의 문제에 대한 답의 시작인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맛보고 경험하는 일은 인간을 비통하게 만들지만 또한 아름다움으로 채워주기도 한다. - 331

2025. feb.

#영국왕을모셨지 #보후밀흐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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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불꽃을 쫓다 설자은 시리즈 2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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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의 탐정 설자은의 활약 두 번째 이야기.

귀향길에 우연히 만난 소울메이트 목인곤과 지혜로운 동생 도은이 어슴푸레 팀 설자은을 결성한다.

왕의 공식적?인 칼인 흰 매가 된 설자은의 신분이 노출될까 싶은 아슬아슬함과 통쾌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느낌의 1권이었다면
두 번째 책은 조금 더 야만의 중세 느낌이랄까. 
당시의 신라인과 신라인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던 외부인들의 이야기가 주가 되는데,
사회를 통합해야 하는 큰 과제에 당면한 신라. 그 안에서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목숨까지 걸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사정이 비정한 시대의 반영으로 보였다.

덕분에 1권보다 다소 무거워진 배경. 그게 오히려 시리즈로서의 무게감을 얻어 가는 과정이라고 느꼈다.

- "어떤 궤를 벗어난 일을 겪고 나면...... 사람의 마음에 어둠이 남네. 이제 와선 자네 앞에서 세상 불행을 다 끌어안은 척했던 게 부끄럽지만, 나는 조금 굶었던 것만으로 안쪽에 어둠이 고였어. 음식을 삼키면 뱃속에서 그 그림자도 함께 흔들리지. 자네 안에 그런 게 남지 않았을 리가 없어. 자네의 늘 웃는 얼굴은 일종의 마개인가보군."
"남의 얼굴을 마개라 하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
"흥, 지켜보기로 하지. 자네의 어둠이 어느 순간 새어나오는지."
그렇게 말한 자은이었지만 다음날 인곤의 방을 볕이 가장 잘 드는 방으로 바꿔주게 하였다. - 78

- 금성의 군더더기.
그것이 되고 싶지 않았다. 급히 몸집을 키워가는 금성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남는 입. 본 것이 지나치게 많은 눈. 그 어떤 외침에도 냉담한 귀. 웅크린 채 다음 일이 일어나길 기다리지만 다음을 만나지 못하는 망가진 진흙 인형. 왕이 자은을 내치면, 자은은 그런 군더더기가 되고 만다. - 126

- 왕은 다른 이가 베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베는 것까지가 자은의 소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베게 한 것은 왕의 힘이 자은을 통해 흐른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해서였고, 자은도 그 뜻을 읽었기에 수행했다. - 155

- "어찌되었든 날을 더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입버릇 같은 혼잣말을 거듭했다. 누구나 더 이상 새날이 주어지지 않을 때까지 날을 더해가며 산다. 그뿐이다. 야단을 떨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고 경망스러운 자들이나 달리 굴 것이다. 일어난 일들, 일으킨 일들 모조리 품고 견디면 된다. 그럴 수 있다. 
말하다 보면 믿기는 날도 더러 있다. - 162

- 자은은 탑이 있거나 없거나 아무것도 기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그다음의 이야기. - 327

2025. jan.

#설자은불꽃을쫓다 #정세랑 #설자은시리즈2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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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조앤 디디온 지음, 홍한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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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가족의 죽음.

배우자의 죽음과 딸의 투병이 연달아 이어지고 그 상실의 과정을 받아들이는 작가의 내면이 서술된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가며 등장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평온한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부분은 필사적으로 죽음을 부정한다는 강한 확신을 준다.

안 좋은 기억의 시기를 자세히 기억하기 어려운 증상을 나도 겪고 있는데,
되새기고 기억하려고 하지만 번번이 그 구간의 기억은 지워지는 그런 증상이다.
엄마의 투병과 죽음과 관련된 시기여서 나도 죽음에 대한 책에 자꾸, 자주 끌려들어 와 읽게 되는 면도 있다.
남겨진 나를 스스로 위로하려고 하는 행동인지, 이 부재의 상황을 타인의 경험에 기대어 동질감을 얻어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주지시키려고 하는 행동인지 모르겠다.

죽음이라는 '급작스러움'과 '불가역성'을 생각하다 보면 늘 무의미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예상보다 꽤 잘, 빨리 읽히는 글이다.

- 삶은 빠르게 변한다.
삶은 순간에 변한다.
저녁을 먹으러 자리에 앉는 순간, 내가 알던 삶이 끝난다.
자기 연민이라는 문제. - 9

- 비애란 것은, 맞닥뜨리고 보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다. (...) "우리가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도, 우리 나이가 몇 살이건 간에, 부모님의 죽음은 마음 깊은 곳을 뒤흔들고 뜻밖의 반응을 일으켜 아주 오래전에 묻어 놓은 줄 알았던 기억과 감정을 헤집어 내지요. 우리는 애도라고 하는 그 불특정한 기간에, 바다 밑 잠수함 속에서 지내는지도 모릅니다. 심연의 고요 속에 머물며, 때론 가까이에서 때론 멀리서 회상을 불러일으켜 우리를 뒤흔드는 폭뢰의 존재를 느끼면서 말이지요." - 38

- 비애는 수동적이었다. 비애는 저절로 생겨났다. 그러나 비애를 다루는 행위인 애도는 주의를 집중해야 할 수 있었다. - 192

- 제러드 맨리 홉킨스의 시가 생각난다.
마거릿, 슬퍼하고 있니 / 골든그로브에 잎이 떨어져서? ... 인간은 시들기 위해 태어났단다 / 네가 애도하는 건 마거릿 너 자신이지.
인간은 시들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는 이상화된 자인이 아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고, 외면하려해도 유한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실을 슬퍼하면서 좋든 싫든 우리 자신을 애도하게끔 되어있다. 우리의 이전 모습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을. 언젠가는 영원히 사라질 존재를.
엘레나의 꿈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엘레나의 꿈은 노화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 그 누구도 엘레나와 같은 꿈을 꾼 적은 없다(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61

2025. feb.

#상실 #조앤디디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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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밭 걷기 문학동네 시인선 214
안희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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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지가 아닌 흐름에 흘러가고 있는 '이' 삶에 대해.
휩쓸리지 않으려 순리대로 최대한 무탈하게 생존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보인다.

무덤덤하게 시작한 독서지만, 조금 마음의 위안을 받은 것 같기도 한 다독이는 시들.

슬픔과 위로가 노골적이지 않아 더 그렇게 느껴졌다.

나 아닌 존재, 혹은 비존재 조차도 가혹하게 바라보지 않는 따뜻함.

- 나는 너의 왼팔을 가져다 엉터리 한의사처럼 진맥을 짚는다. 나는 이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 같아. 이 소리는 후시녹음도 할 수 없거든. 그러니까 계속 걷자. 당근의 비밀을 함께 듣자. 펼쳐진 것과 펼쳐질 것들 사이에서, 물잔을 건네는 마음으로 - 시인의 말

- 실온에 두면 금세 썩는다고 했다. 알면서도 그대로 두었다. 여름이 상하게 한 것이 나만은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해서. - 터트리기 중

- <당근밭 걷기>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모두 나의 땅이라 했다. 이렇게 큰 땅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뜬다. 있다.

무엇을 심어볼까. 그게 뭐든 무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자라기 시작하고. 나는 기르는 사람이 된다.

주황은 난색이에요. 약동과 활력을 주는 색. 그는 머잖아 내가 당근을 수확하게 될 거라 했다. 나는 내가 바라온 것이 당근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잠시 휘청했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쏟아짐이라 믿었다.

하지만 당근은 보고 있었네. 나의 눈빛. 번뜩이며 나를 가르고 간 것.

나의 당근들, 흙을 파고 두더지를 들였다. 눈을 가졌다.

자루를 나눠드릴게요. 원하는 만큼 담아 가셔도 좋아요. 혼자 먹기 아까운 당근들,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떠나보낸 땅 위에서

이제 내가 마주하는 것은
두더지의 눈

나는 있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당근밭

짧은 이야기가 끝난 뒤
비로소 시작되는 긴 이야기로서

- 중환자실 병상에서 할아버지는
면회 온 가족들 손을 한 번씩 꽉 쥐었다
악력이 엄청났기에
이제 됐다 살았다 꽃놀이 갔다
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우주의 마지막 인사였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온 세상이 밀가루 밭으로 변한 뒤에야 보이지 않는 기차를 본다 - 북극진동 중

- 이곳은 완전히 나를 버려야만 도착할 수 있는 세계. 한 아이가 가던 길을 되돌아와 내 눈을 감겨주고 간다. 나는 잠시 슬퍼할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굴어보았다. - 확대경 중

- 겨우, 기껏, 고작, 간신히, 가까스로......
내가 사랑하는 부사들을 연달아 적으며
그것들의 겨움을 또한 생각한다 - 야광운 중

- <굉장한 삶>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내려왔는데
발목을 삐끗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런 것이 신기하다

불행이 어디 쉬운 줄 아니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또 늦은 건 나다
하필 그때 크래커와 비스킷을 차이를 검색하느라

두 번의 여름을 흘려보냈다
사실은 비 오는 날만 골라 방류했다
다 들킬 거면서
정거장의 마음 같은 건 왜 궁금한지
지척과 기척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

장작을 태우면 장작이 탄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오래 불을 바라보던 저녁이 있다

그 불이 장작만 태웠더라면 좋았을걸
바람이 불을 돕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솥이 끓고
솥이 끓고

세상 모든 펄펄의 리듬 앞에서
나는 자꾸 버스를 놓치는 사람이 된다

신비로워, 딱따구리의 부리
쌀을 세는 단위가 하필 '톨'인 이유
잔물결이라는 말

솥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신기를 신비로 바꿔 말하는 연습을 하며 솥을 지킨다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
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2025. feb.

#당근밭걷기 #안희연 #문학동네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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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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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하는 작가 김금희의 남극 기지 단기 거주? 에세이.

좀 더 어렸을 때는 여기저기 여행 다니고 새로운 곳을 경험하는 일이 흥미로운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여행은 그저 고단하고 번거롭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세계 일주까지는 아니어도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는데 언제부터 그게 다 부질없다고 느끼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새로운 곳에 굳이 가지 않아도 대리 경험해 주는 매체가 많아서일까?
어쨌든 많은 이들이 북극, 남극, 정글, 사막 등등의 극한의 환경인 장소를 가보고 싶어 하는데...
나에겐 그런 욕구가 없기에 이해를 완전히 하기도 어렵지만,
그들이 목격하는 것들을 간접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안락한 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환영. ㅋ

책에 꽂혀있던 엽서에서 밝혔듯 '자연 속에서 하나의 종으로 살면서 작고 단순하고 환해졌던 날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안에서 관찰자로서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그대로 드러난 글이다.
작가가 돌아와 결심한 대로 등산하는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자연이 만든 지리적 경계 이외에 다른 인위적인 경계가 없다는 사실도 매혹적이었다. 누구도 남극의 주인이 아니며 국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의 빙원은, 빙산은, 유빙은 '국가'라는 제도 안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마치 우주의 행성처럼. 지구상에 그런 '없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숨이 좀 트였다. - 14

미보고 종을 처음으로 발견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했다. 창조에 가까운 일 같으니까. 옆새우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가 시급한 건 옆새우 또한 기후변화로 멸종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빨리 알아차리지 않으면 아예 없었던 존재가 된다는 말에 안타까웠다. 남극에 있는 동안 안을 통해 옆새우 세계에 발 좀 담가봐야지 다짐했다. - 118

촬영을 못 하게 되나 불안했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은 느긋해 보였다. 날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남극에서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 조용한 순응을 다들 잘 아는 듯했다. - 137

정작 나는 추워 덜덜 떨고 있었지만 마음은 녹듯이 포근해졌다. 일면 슬퍼지기도 했는데 너무 순정한 것, 아름다운 것, 들끓는 자아 따위와는 무관한 자연 자체의 풍경과 맞닥뜨릴 때 느끼는 기이한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남극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나는 실제 내 삶은 이곳과 얼마나 다른가를 동시에 감각했다.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남극이 인간이 인간처럼 살 수 있고 해표가 해표처럼 살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공간이었다. - 138

남극 하면 우리와 먼 곳처럼 들리지만 막상 여기 와보니 남극의 모든 것이 삶을 관장하고 있었다. 지구의 양 끝인 남극과 북극은 세상의 대기와 해류를 이동시키는 아주 거대한 손이었다. 이곳의 변화들이 지구를 휘저었고 우리 일상이 조형되었다. '기후'라는 말 뒤에 붙는 변화, 위기, 때론 전쟁과 습격이라는 수많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매일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같은 시각에 풍선을 올려 하늘을 살핀다는 것이 작은 낙관처럼 느껴졌다. - 200

"아주 많은 것이 날려 오고 있어요, 지금, 남극에." 홍 선생이 손짓을 할 때마다 이편으로 건너오고 있을 많은 것이 떠올랐다. 사람, 동물, 식물과 곤충, 씨앗 균류, 바이러스, 강처럼 흐르는 대기, 중금속과 블랙 카본, 미세 플라스틱, 지구의 현 상태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출구를 찾으려는 노력과 연대, 그리고 상상. - 258

펭마 해변에는 펭귄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있었다. 얼음덩어리와 뒤섞인 검은 자갈, 반들반들한 검은 등과 멋진 붉은 부리. 바위에 올라 파도의 세기를 가늠하며 어느 타이밍에 뛰어들지 고민하는 성체들도 보였다. 어려울 것이다, 바다로 뛰어드는 일은.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는 일이 두렵고 주저되는 것처럼.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삶이 되고 만다. 이윽고 한 마리가 용기를 냈고 그 뒤에 서 있던 녀석들도 툭툭 뛰어내렸다. - 280

나는 잘 있으라고, 겨울을 잘 견디라고 말하며 아쉽게 돌아섰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남극에 오고 싶어 한 정확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서였다. - 281

2025. feb.

#나의폴라일지 #김금희 #남극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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