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들은 이제 전쟁 안 일어나죠.
전쟁은 언제 일어났어요?
우리가족 안 태어났을때 일어 났어요.

하나님이 지팡이로 안 일어나게 하면 되요!=====민수

두심이님 감사해요.
오늘 제가 일이 좀 많았는데 저 비디오 때문에 아이들이 저를 잊었군요.
지금은 같이 보고 있는데 뒤를 생각하면 제가 눈물이 또 나올려고 해요.

혹시 안 보신분들은 꼭 두심이님께 부탁하세요^^^^

민수는 나의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나의 목에 메달리면서 나는 이제 안 볼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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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만화 중고 서점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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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어디에도 > 반딧불의 묘

작년이었나 내가 토토로에 환장한 것을 알고 난 친구 녀석이 그 영화를 구해서 시디로 구워주었다. 가끔씩 기분이 좀 안 좋을 때, 난 그 토토로 시디를 돌려 보면서 그 속의 음악처럼 둥당둥당 다시 기분이 좋아지는 걸 지켜보는 게 무척이나 좋다. 그런데 그 친구가 토토로를 주면서 몇 개 다른 영화도  같이 구워줬는데 매번 토토로만 보느라 바빠서 다른 것들은 그냥 방구석을 굴러다니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 우연찮게 그 중의 하나를 골라서 보다가...... 정말 우느라고 죽는 줄 알았다. 제목은  <반딧불의 묘>.

 

 

 

 

 

 

 

 

 

 

 

 

 

 

 

 

 

 

 

 

 

 

대강의 줄거리 정도는 어찌어찌 주워 들어 알고 있었고 또 감독인 다카하시 이사오라는 사람이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은 지브리 스투디오를 어쩌구 저쩌구 한 여차저차한 사이라고도 하니(잘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해야하니 대충 얼버무리기 전법;;) 내 마음은 이미 예전부터 심각하게 반딧불의 묘를 원하고 있은 셈. 허나 함부로 그 시디를 돌려보지 못한 단 하나의 이유는, 주변에서 본 인간들마다 무지하게 슬퍼서 펑펑 울었다는 사실. 그래서,
나는 (우는게 겁나서)매번 시디 껍데기만 만지작만지작 망설이다가 에이, 다음에~ 하고는 늘상 토토로만 줄창 봤던건데, 어제 밤 실행에 옮긴 결과, 조울증의 주기 중 울의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지 않은 것을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제는 편안한 조증 상태에서 밥먹고 술먹고 (둘다 얻어 먹어)기분이 좋았고 집에 와서 씻고 보니 웬일로 맥주도 냉장고에 얌전히 앉아 있어 혼자 캬캬 거리며 맥주를 따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 영화를 척 돌리기 시작했는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안되어 곧장 희희낙락의 시간은 끝이 났고 그에 이어 바로 마시는 맥주가 그대로 눈을 통해 다시 빠져나오기라도 하는양 계속 줄줄줄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나중에는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프고 안되었고 속상하고 해서 목에서 꺽걱 소리가 날 지경이었는데 약간의 술기운이 감정의 오바를 가져왔을 지언정, 이 영화는 아마 근 5년 아니 10년안에서라도 나를 가장 많이 울게 한 영화로 단숨에 기록되었다.

주인공은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다. 세이타는 중학생 정도의 나이, 여동생인 세츠코는 다섯 혹은 여섯 살 정도이다.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의 어디. 전쟁 때문에 엄마가 죽고 군인인 아빠도 죽고 결국 고아가 된 그들이 친척집에 맡겨졌다가 점차 냉대와 구박을 받고, 둘 만 방공호 속에서 지내면서 굶고 훔쳐먹고 굶고 하면서 겨우 살아가는, 죽는, 뭐 그런 이야기.

나는 전쟁의 가장 극단, 반대말은 아이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전쟁의 광기와 끔찍함을 아직 세상이 뭔지 납득은 커녕 미처 다 알지도 못하는 나이의 아이들이 겪는다는 건 지독하게 잔인한 일이다. 허나, 그래서, 나는 영화나 드라마에 아이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잔뜩 긴장을 하고 실눈을 뜨게 된다. 흥, 얄팍할 수도 있어. 어린 아이가 주인공에다 전쟁이 배경이야?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웃다가 결국 맑고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장면 보여주려고? 흥! 내가 이번엔 그렇게 순순히 같이 울어줄줄 아시나? 하는 같잖은 반항심으로 말이다.

물론 <반딧불의 묘>는 그딴 알수 없는 반항보다는 무조건적인 기대감과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는 상태로 보기 시작했지만, 솔직히 주변 인간들이 울었다는 말에 약간은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초반부터 그딴 마음은 눈사람 녹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미 나는 줄줄 울고 있었다. 그리고 한 번 시작된 눈물은 다 마셔버린 맥주병을 다시 채우고도 넘칠 만큼 멈추질 않았다. 함께 넘쳐버린 먹먹한 감정들은 밤사이 내내 나를 들쑤시고 떨게 만들었다.

새삼스레 전쟁의 무모함이니 잔혹함 같은 것들을 말하는 건 뭣도 모르는 내가 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일이고, 애써서 말하려 한다고 해도 어떤 단어로도 표현이 부족할 것이다. <반딧불의 묘>를 보고 그 배경이 된 전쟁에 관해서나, 스토리를 통해 나타내고자 한 감독의 의도나 덧붙여 많은 이들이 칭찬해마지않는 그 섬세한 동작과 표정의 표현에 관해서조차 나는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내가 설사 잘 안다고 해도 그것에 관한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나는 역시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흔들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만났을 때, 진정으로 감.동.했을 때는  진짜 할 말이 없어진다. 그저, 부르르 떨면서 맘껏 울면 그 뿐. 그리고 그러한 순간 순간들이 주는 힘으로 어쩌면 계속
살아 갈 수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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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icaru > 반딧불의 묘

 반딧불의 묘 [ Tombstone for Fireflies ]


 요약
1988년 일본에서 제작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감독 : 다카하타 이사오
제작 :
원작 : 노사카 아키유키
각본 :
주연 :
상영시간 : 1시간 30분
제작사 : 스튜디오 지브리
배급사 :
제작연도: 1988년


 

 

 

 

 

 

 

 

 

 


 

<반딧불의 묘>에 나타난 전쟁관

최근 이라크 파병 문제로 국내가 떠들썩하다. 이는 단순히 파병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넘어서 전쟁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과연 국익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파병은 국익과는 무관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전쟁 자체가 인류 최고의 범죄로 절대악인가. 이에 대한 답은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이 달린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생각을 쉽게 양보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파병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우리가 전쟁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의 문제다. 과거 우리나라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반도국가로서 수많은 침략을 당해 왔고 불과 50여 년 전에는 민족끼리 총부리를 거둬야 하는 비극이 있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번번히 전쟁의 피해자로 자리해 왔기에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경직되어 있었다.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일본은 우리를 식민지로 삼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게다가 제대로 된 공식 사과 한 번 없이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역사 망언은 일본을 파렴치범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역시 어느 정도 경직되어 있다.

하지만 단순히 반일과 극일의 정서만으로 대일 문제를 풀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같은 역사를 놓고도 일본 내에서도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 여전히 군국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쟁의 기치를 내거는 무리가 존재하는가 하면, 자신들의 역사를 반성하고 우리에게 사죄하려는 집단도 존재하는 것이 일본의 모습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으로 일본을 배척하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대일 문제를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손을 내밀어야 할 때와 엄중히 따지고 심판해야 할 때를 가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문화 속에 나타난 전쟁관을 살펴보는 것은 몹시 흥미로운 작업이다. 다양하게 공존하는 전쟁에 대한 시각은 그들의 지난 과거에 대한 다채로운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火垂るの墓)를 살펴본다. <반딧불의 묘>는 전쟁을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매우 독특한 관점을 보이고 있다.

작품 소개

이 작품은 일본의 유명한 문학상인 나오키[直樹]상을 수상한 노사카 아키유키[野坂照如]의 소설을 1988년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勳] 감독이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은 우리에게 친숙한 <빨간 머리 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를 연출한 감독이다.

그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2인자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성에 눌려서 상대적으로 평가를 덜 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 스스로 그를 평생의 동업자이자 선배로 여길 만큼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그의 위치는 대단하다.

이런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인 만큼 여타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과는 다른 리얼리티를 갖춘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사실적인 배경과 인물의 묘사는 관객을 작품에 깊이 빠지게 만든다. 다른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향으로 공상과학 쪽에 편향되어 있어서, 대부분 세심한 배경이나 색채 묘사보다는 역동적이고 생생한 인물의 행동 표현과 화려한 스케일의 스토리 전개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약간 궤를 달리하여 역사적 사건을 리얼리티로 하여 섬세하고 꼼꼼한 배경과 인물 묘사가 주를 이룬다. 특히 인물의 풍부한 표정 연기는 다른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이타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나, 세츠코가 천진난만하게 웃는 장면에서 감정의 섬세한 곳까지 세심하게 배려한 노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인물의 표정이나 행동 묘사가 밋밋하고 단조로와 보이는 다른 지브리의 작품과는 구별되는 다카하타 이사오만의 장점이라고 하겠다.

작품의 줄거리

이 작품은 지하철역에서 죽어가는 세이타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세이타는 다른 부랑자들과 함께 지하철 역에서 서서히 식어 가고 있었고, 그를 발견한 지하철 직원이 세이타가 지니고 있던 사탕 깡통을 집어 던지면서 과거 회상이 시작된다.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는 해군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와 단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아버지는 전장으로 떠나고 매일 공습이 그들을 위협한다. 어느날 공습으로 인해 어머니는 전신 화상을 입고 죽게 되고 집마저 불타버려 갈 곳을 잃은 두 남매는 친척 아주머니집에 맡겨지게 된다.

처음에는 남매가 가져온 음식과 돈 덕분에 아주머니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전쟁으로 상황이 악화되자, 친척 아주머니의 냉대는 갈수록 심해진다. 아주머니의 냉대를 참다 못한 두 사람은 방공호에 그들만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두 사람만의 짧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한참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 두 사람에게 생활은 갈수록 힘들기만 하다. 세스코는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약 한 번 쓰지 못하고,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세이타가 남의 밭에서 작물을 훔치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경찰서에 끌려 가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결국 세츠코가 영양실조라는 것을 알고 은행에서 돈을 모두 찾아 먹을 것을 사들고 세이타가 방공호로 돌아왔을 때 세츠코는 이미 생명이 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빠가 입에 넣어 주는 마지막 수박을 입에 넣은 세츠코는 오빠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간다.

"오빠 안녕"

세이타는 죽은 동생을 화장하고 떠돌다가 결국 전철역의 차가운 바닥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작품에 나타난 전쟁관과 두 가지 의문점

전쟁의 참혹한 폐허 속에서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처절하게 죽어가야 하는 남매의 짧은 삶은 우리에게 진한 슬픔을 가져다 준다. 특히 죽어가는 세츠코의 입에 수박을 넣어 주는 장면은 두고 두고 기억에 남을 명장면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하나는 왜 세이타는 표면적으로 큰 학대도 없었는데 아주머니의 집을 나와야 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이 가해자로서의 일본이 아닌 피해자로서의 일본의 처지에 서있다는 점이다.

우선 세이타가 아주머니의 집을 나오게 된 계기를 살펴보자. 겉으로 보기에는 뭐 그 정도 가지고 집을 뛰쳐 나가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세이타에게 여러 번 종용한 것은 전시 상황의 국가를 위해 일을 하라는 것이다. 세이타의 아주머니는 일을 하지 않는 집안 사람들은 좁쌀죽을 먹어야 한다고 여기며, 전시 상황의 국가를 위해서는 국민이 앞장서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이타는 이제 겨우 14살의 소년이며 전쟁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나 국가에 대한 강한 충성심 따위를 기대할 수 없는 나이다. 세이타가 인식하고 있는 전쟁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앗아간 공습이고 세이타는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겉멋으로 군가를 따라 부르는 평범한 소년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한참 놀 나이의 소년에게 국가와 전쟁을 위해 일한 것을 강요하는 아주머니의 태도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갈수록 냉담해지는 아주머니의 태도는 세이타가 집을 나오도록 부추기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세이타 남매가 아주머니의 집을 나오면서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전쟁으로 인해 버림받는 아이들의 인권 문제에 대한 충격적인 고발이다. 평화로울 때 아이들은 부모의 귀여움을 받으며 떠받들린다. 그러나 자신을 보호하고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아이들에게 전쟁은 인권의 사각지대다. 아이들이 배가 고파서 밭의 작물을 훔쳐도 먹을 것을 주는 사람도 없고, 병으로 죽어 가는 아이에게 의사가 해 주는 말이란 고작 음식을 잘 먹이라는 것뿐이다. 세이타 남매의 처절한 죽음은 바로 이러한 전쟁의 참혹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이 작품이 일본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시각으로 그리고 있으며, 이러한 시각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교묘한 술책이 깔려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국가 중 하나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동남 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키며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더 괘씸한 것은 정작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이나 사과가 없이 군국주의의 잔재를 서서히 되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해 "그 이면에는 일본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는 메시지가 숨어있다"('군국주의는 만화를 먹고산다'·<한겨레21>·제326호·2000년 9월)고 보거나, 일본의 패전일에 일본TV에서 <반딧불의 무덤>을 방영하는 것조차 일본이 보수우익화하는 분위기를 보여주는 근거 중 하나(<중앙일보>99년 8월10일자)로 평가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이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본 것이다. 이 작품에서 전쟁의 공습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일본이고, 그들에게 공습을 자행한 것은 바로 미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만행을 저지른 가해자이면서도 자신들도 피해자라는 자기 변호의 논리가 이 작품에 깔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궁색한 비판에 불과하다. 이는 작품을 꼼꼼히 보지 않고 단지 이 작품이 피해자의 시선으로 그려졌다는 외적인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전쟁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미그기의 공습으로 도시가 파괴되는 정도다. 실제로 일본군과 미군이 교전하는 모습은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또 이 작품에서 전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대사나 행위가 부각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전쟁으로 처참히 죽어가는 시체와 불타서 재로 변해 버린 도시의 모습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리고 전쟁으로 참혹하게 파괴되어 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꼼꼼히 그려진다.

이처럼 이 작품은 피해자인 일본의 모습을 부각한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파괴되는 일상을 고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교묘하게 일본식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전쟁 앞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이라는 것처럼 옹색한 것이 없으며, 전쟁은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인류 최악의 범죄일 뿐이다.

전쟁이라는 것은 위정자들의 권력 놀음에 불과한 것이며, 일반 사람들이 거기에 속고 놀아나는 진정한 피해자이다. 이 작품은 한 남매의 처절한 죽음을 통해 전쟁으로 파괴되어 가는 일상을 생생하게 재현해 군국주의의 허황된 꿈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잊지말 것을 촉구한다.

거기에 어떤 가치나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처사다. 이 작품의 감독인 다카하타 이사오는 Q채널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반딧불의 묘>의 경우 내가 겪은 패전 경험이 은연 중에 드러났을지 모르지만 일본이 당시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그리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어린 여자애 세츠코와 사춘기 소년 세이타가 전쟁을 어떻게 겪어냈는지를 보여 주고 싶었다"

이처럼 감독 스스로 군국주의의 기치를 옹호하지 않는 것이 분명한데도 작품의 의도를 군국주의로 폄하하는 것은 의도 확대의 오류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물론, 작품이라는 것이 텍스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사회의 맥락과 수용자의 창조적인 수용에 따라 재창조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

<반딧불의 묘>는 피해자인 일본의 시각으로 전쟁을 그리고 있지만, 전쟁으로 신음하는 유소년의 시각을 통해 과거를 잊고 있는 일본인들의 자각을 촉구하는 작품이다. 다카하타 이사오는 '일본의 전쟁'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를 제재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단순히 일본으로 한정되지 않고 보편성을 얻는다. 이는 일본의 전쟁 문제를 일본 자국의 문제로 한정하여 과거가 옳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의 문제를 뛰어 넘는 독특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일본의 전쟁을 소재로 삼았지만, 던지는 메시지는 '반전'이라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역사 문제와는 궤를 달리한다. 이처럼 작품은 전쟁 자체를 문제삼고 있을 뿐, 2차 세계 대전의 장본인으로서의 일본의 모습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군국주의를 포장하고 있다는 혐의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선의 초점을 단순히 일본의 역사에 한정하지 않고 전쟁에 대한 자의식에 맞춘다면 반전의 메시지를 훌륭하게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하는 데는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윤성민 기자 (kingseven@empal.com)

 



 

 감독에 대하여


리얼리즘에 기초해서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계속하는 다까하다 이사오
감독은 1935년 생으로, 동경대 불문학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도에이(東映)동화에
입사했다. <늑대소년 켄>으로 연출을 시작한 그는 1968년 극장용 애니메이션
<태양의 왕자 홀스의 모험>으로 일약 만화영화계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이 작품은 당시까지 생소했던 인간의 내면 세계를 본격적으로 묘사하여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그는 TV 시리즈에도 진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비롯해
<첼로 켜는 고슈>, <반딧불의 묘>, <추억은 방울방울> 등을 감독했고,
최근의 <헤이세이 너구리 전쟁>으로 다시 한 번 그 명성을 확인했다.
그는 일상적인 삶의 소중한 체험을 리얼하게 연출하는 탁월한 작가로 평가되는데 특히 그의 작품
<태양의 왕자 홀스의 모험>과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리얼리티에 입각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만화영화의 매력은 비현실적인 픽션세계의 구현에 있지만 그 전제로서 일상 생활과
그 구성요소 즉 풍경, 지형, 건축물, 가구, 소도구, 음식물 등과 이것들에 대한 등장인물의 감정과
반응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다까하다의 연출 스타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적으로 구현된
요소들에 의해서 다음에 펼쳐질 비현실적 스토리 전개가 마침내 '리얼리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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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라시보 > 반딧불의 묘(에 나오는 드롭스)

에니메이션 반딧불의 묘에 나오는 여자 아이가 맨날 '드롭스 드롭스'하며 먹던 깡통 드롭스. 나중에 다 먹고 나서 여기다 물을 담아 막 흔들어서 먹는다. 오빠에게 권하지만 오빠는 그냥 먹으라고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에니메이션을 떠 올리면 눈물부터 난다. 아무리 봐도 봐도 또 눈물이 난다.(비디오 테잎을 가지고 있다.)

여동생의 친구가 일본가서 사 왔다는데 착한 내 동생. 이번에 내려오면 나에게 넘긴다고 한다.

이런 드롭스가 들어 있는데 사탕은 다 먹어버렸단다. 역시 내 동생은 먹는거 앞에 약하다. 것도 한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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