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산책하듯 떠나는 여행서.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다.
나 혼자 가야 여행, 나 혼자 백제 여행, 나 혼자 경주 여행. 이번에 개정판 출간으로 <나 혼자 백제 여행>을 읽고, 경주 여행까지 읽고 있다. 역사 여행을 이렇게 다녀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추천한다.
이 책 때문은 아니지만, 백제문화역사지구 여행을 계획했었다. 내가 사는 곳과 가까워서 부담 없이 다녀오기로 했었다. 7월 첫 주에 2~3일 예정으로 돌아보기로 하고 숙소를 알아보기도 했다. 평일이면 좀 저렴하게 갈 수도 있겠군. 하지만 웬일. 비가 이렇게 빨리, 아주 많이 올 줄 몰랐다. 이 지역의 재래시장이, 큰 도로의 사거리 곳곳이 물에 잠겼다. 게으름에 숙소 예약까지 한 건 아니어서 다행인 걸까. 일정은 다시 8월 첫 주로 변경되었다. 비 때문에 미뤄지기는 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미뤄진 게 더 나은 듯하다. 딱히 백제문화역사지구를 돌아보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계획 없이 움직이는 것보다 저자의 코스대로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 책을 펼치고 나처럼 놀란 사람 분명 있을 텐데? 백제의 흔적이 서울에도 있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내가 둘러보려고 했던 곳도 부여, 공주, 익산 정도였다. 그러니 뜬금없이 서울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산책하듯 모이는 공원에서, 주택가 근처에서 백제 유물이 자리하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지. 풍납 백제문화공원과 풍납토성, 한성백제박물관, 방이동과 석촌동의 고분까지, 어떻게 서울의 곳곳에 이런 흔적이 남을 수 있을까? 특히 석촌동의 고분은 내가 몇 번이나 무심코 지나쳤던 곳에 있었다니. 나, 도대체 뭘 보고 다닌 거니?
저자가 너무 편하게 얘기해서 그런지, 마치 이 여정이 마음 크게 먹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그냥 슬리퍼 신고 나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나선 길 같다. 그렇다고 이 여행의 의미가 가벼운 건 아니다. 그만큼 역사 여행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조언으로 들린다. 크게 계획하고 떠나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이번에 부여를 시작으로 돌아보고 싶던 마음도 비슷하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이기도 하거니와, 내가 사는 이곳에 백제문화유적이 자꾸 나오고 있고, 유명한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 세월을 가끔 지켜본 시민으로 학교 수업에서나 들어왔던 백제문화역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역사에 무지했고, 달달 외우면서 시험 보기에 바빴던 시간은 지식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변에 역사를 주제로 함께 여행할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런 목적의 여행 계획은 오롯이 내가 주관해야 했다. 별것 아니지만, 어려운 일이어서 미루고 미루기만 했으니 민망하다.
역사 여행이 일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저자는 선뜻 나선 그 길에서 동선을 확인하고 봐야 할 것을 보면서 나름 체계적인 여행을 하고 있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 흐름에 자기만의 여행을 그려보기도 한다. 걷거나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고, 역사적 사실과 검증된 것으로 파악하면 될 테지만, 그 역사의 흐름에 같이 하는 문화의 흔적도 놓치지 않는다. 자료로 확인한 것이 바탕이 되면서, 저자가 직접 보고 확인한 것이 더해져 역사의 비워진 틈에 그의 지식을 채워 넣는다. 박물관 마니아라는 저자의 수식어에 맞게, 철저하게 자료 조사를 하면서도 박물관에서 얻은 정보로 지식을 더한다. 무엇보다 관심이 없었다면 시작조차 하지 못할 일이겠지.
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에 남긴 건축물 중 거의 유일무이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은 것이다. 아 아니, 고분도 건축으로 포함한다면 유일무이는 아니겠구나. 부여 역시 능산리 고분이라는 왕릉이 있으니까. 음 여하튼 그만큼 역사적 가치도 상당하다 하겠다. (나 혼자 백제 여행, 190페이지)
백제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듯한 설명에 흐름을 따라가면 어렵지 않다. 한 시대가 막을 내리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백제는 신문물 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듯하다. 특히 중국의 문화를 백제의 분위기에 맞게 변화하여 발전시켰다. 삼국(혹은 가야까지)으로 잘 지내기도 했지만, 전쟁도 겪어야 했다. 신라와 손을 잡아 고구려에 대항했으면서도 신라의 힘에 무너지기도 했던 백제는 이제 역사 속에 있다. 그 세월 동안 백제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문화 교류를 했다. 특히 일본의 문화 곳곳에 백제의 흔적이 있는 걸 보면 백제의 기술이 일본으로 흘러갔다는 게 증명되기도 한다. 백제의 건축 양식은 불교를 도입하면서 더 활성화된 느낌이다. 절을 짓고 탑을 쌓고. 왕의 능을 만들면서 그 기술을 뽐내는 듯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의 흔적을 보면 그 시대의 기술을 그대로 눈에 담게 된다. 목탑으로 시작하여 석탑으로 변화하는 과정, 그 우아한 능, 절까지. 통일신라는 물론이고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데... 아, 정말 지나가면서 자주 보던 것도 너무 가볍게 봤던가 보다. 내 나라의 역사를 조금 더 관심 두고 살펴볼 것을, 후회하는 순간이다.
여행서는 많고 다양하지만, 이 책이 좀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아마도 저자의 여행 스타일 때문일 것이다. 마치 동네 마실 나가듯 아침 먹고 나와서 버스를 타고, 박물관이나 유적지로 간다. 물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만이 정할 수 있는 동선일 테다. 그런 경지에 이르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 이 역사 여행을 다녀봐야 하는 걸까. 이 책에 담긴 저자의 백제 여행은 서울 잠실의 버스를 타면서 시작된다. 그 여행은 부여와 공주, 익산까지 이어져 백제 문화 여행의 완성판을 이룬다. 마음 끌리는 대로, 백제 유물 유적의 가치는 놓치지 않고, 발걸음은 가볍지만 마음은 진지하게 걷는다. 백제 유물의 아름다움과 예술적 가치, 보이는 것 이면의 숨겨진 이야기까지 알아가는 재미가 상당하다. 혹시라도 배경지식이 얕아서 주저하는 이가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고? 나보다 더 배경지식이 없는 이가 있을까? 그런 나도 백제 문화 유적 여행을 계획할 정도면 이 여행은 전혀 어려울 게 없다는 거다.
석탑 중 오른편에 위치한 동탑은 1994년, 사라진 동탑의 터에 새 돌을 자르고 올려 마치 새 것처럼 복원한 것이다. 반면 왼편의 서탑은 백제 때부터 오랜 세월 이어오던 석탑이다. 특히 서탑은 2001년부터 해체를 시작하여 2009년, 탑의 뿌리인 심주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하였고 2018년 여름부터 완전히 복원되어 다시금 공개되었다. 그런 차이가 있음에도 어느덧 동탑도 연차를 꽤 먹어서 그런지 이제는 이곳과 어울리는 맛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다만 돌을 기계로 너무 새것처럼 갈아서 여전히 가까이서 보면 정이 들지 않는다. 그냥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아, 본래 저런 모양이었구나!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나 혼자 백제 여행, 224페이지)
2015년 공주 부여 익산의 백제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더 관심이 생긴 건 사실이다. 가끔 미륵사지 석탑, 무왕의 묘라고 불리던 쌍릉, 왕궁리 석탑 등을 보러 가곤 했다. 내가 사는 도시에 있다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 오랜 세월 보호하듯 이어져 온 손길이 무엇인지 보고 싶기도 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어느 날 가림막이 쳐지고 복원의 세월을 거쳐 거의 20년 만에 다시 시민들의 눈으로 들어왔다. 우연히 지나다 본 쌍릉은 한참 발굴 작업 중이어서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었다. 왕궁리 석탑은 서늘한 가을날 행사 갔다가 봤다. 뭐든 의도하고 간 건 아니다. 그런데 가까이에 이런 곳이 있는데도 일부러 가지 않으면 평생 한 번도 못 가본 곳이 될 터였다. 거기에 우리가 겉핥기식으로 알아 왔던 백제의 이야기를 조금은 진지하게 다시 찾아보고 싶어졌다. 패배국이라는 오명 말고, 백제 문화가 세계에 끼친 영향을 돌아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많은 것이 사라졌고 그래서 더욱 상상력에 의존하여 그 시대를 알아가야 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것과 보이는 것으로 더 깊게 파고들어야 하는 역사가 아닐까 싶다.
저자가 이 책을 왜 썼는지 알 것 같다. 말 그대로 일상이 고고학. 역사 여행이 일상이 되는 순간을 만나고 싶은 거다. 조금은 더 알고 그 유물과 유적지를 만난다면 여행의 의미는 더 깊어지리라. 다르게 보인다는 게 뭔지 확실히 알게 될 것 같다. 백제 유적 유물에 관한 기초 지식을 바탕으로 백제의 역사를 같이 배우면서 여행하는 시간이었다.
저자의 팁에 따르면, 한성백제여행과 공주 부여 익산으로 떠나는 1박 2일 코스가 있다. 한성백제 여행은 정말 하루에 다 다녀볼 수 있을 듯하다. (월드타워 근처에 언니 집이 있어서 그렇게 다녔던 길이건만, 이곳을 모르고 화려한 타워의 불빛만 보고 다녔네, 그려) 그리고 내가 계획했던 부여 공주 익산 백제문화역사 여행은 반대의 코스로 시작하려고 한다. 이곳에서 부여와 공주까지 가는 시간은 자차로 30~40분 정도 소요된다. 그래서 공주 먼저, 그리고 부여(미안, 사실은 아울렛이 첫 번째 목적지였어. ㅠㅠ), 부여에서 1박, 그리고 이곳 익산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코스를 장식하고 귀가. 이 책이 굉장한 여행 안내서가 된다는 걸 이미 확인했으니, 안심하고 이 책 한 권 들고 떠나야겠다. 비가 빨리 멈추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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