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사람의 속마음 비채×마스다 미리 컬렉션 2
마스다 미리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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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우리나라와 비슷할까? 지역의 특색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분명 그 지역 특유의 분위기와 유명한 것들이 있어서겠지. 모두가 다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지역이라는 특성이 분명 작용하는 게 있을 것 같다. 내가 사는 전라도는 이렇다, 충청도는 이렇다고 말하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곧잘 즐기는 다코야키, 유명한 한신 타이거즈, 나는 잘 모르겠지만 개그계의 본산 요시모토라는 인물도 자주 언급되는 걸 보면, 마스다 미리는 오사카의 여러 가지를 자랑하고 싶은가 보다. ^^

 

마스다 미리가 전하는 오사카는 그녀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성장 시절을 그리워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오사카'는 꿈을 찾아서 도쿄로 갔던 그녀가 마음의 위안을 받는 이름이기도 했을 것 같다. 우리에게도 종종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학교나 직장 때문에 집을 떠나서 생활하곤 할 때,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모든 게 외로워질 때, 공부나 사회생활이 힘들어서 마음을 기대고 싶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나 장소 말이다. 그건 엄마일 수도, 친근한 고향일 수도, 오랫동안 함께해온 친구일 수도 있다. 그녀가 전하는 오사카는 이 모든 것이 함께한 장소이다. 동네 상점 주인의 친절한 응대, 누구에게나 느껴지는 다정한 말투, 특정 기념일에 강으로 뛰어들면서 자신감을 뽐내는 이들. 희극을 보러 간 공연장의 화장실에 무료로 비치된 요실금 패드 이야기에는 나도 한참을 웃었다. 웃다가 소변이 찔끔하면 사용하라는 의미인가 싶은 저자의 생각이 그대로 상상이 되어 전해진다.

 

 

지방에 살다 보면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여기를 벗어나면 사투리를 쓰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사투리를 쓰나? 대화 상대에게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오랫동안 써 온 말이기에 잘 느끼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장난삼아 엄마가 쓰는 사투리를 일부러 쓸 때가 있는데, 그럴 때가 아니라면 말투에 사투리가 묻어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데 저자도 그렇고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대개 고향을 떠나면서 사투리를 고치려고 노력한다. 지방에서 서울로 갈 때, 오사카에서 도쿄로 갈 때. 다른 이들과 대화하면서 고향을 드러내지 못할 이유는 없는데, 이상하게도 말투는 표준어로 쓰고 싶어진다. 그러면서 고향의 말은 점점 잊히고, 현재의 주거지와 고향의 구분이 생긴다. 그러면서 또 우리는 표준어와 사투리를 동시에 배우기도 한다. 예를 들면 표준어로 '부추'라고 부르는 것을 전라도에서는 '솔'이라고 부르곤 한다. 웬만한 대화에서 만물상처럼 '거시기'라는 단어 하나로 다 통하기도 하는데, 나는 아직도 이 단어가 가장 궁금하고 신기하다. 있잖아, 거시기. 거기, 거시기. 저기, 거시기. 그거, 거시기 있잖아. 뭐 이런 말들이 계속 들려오면 정신없는데, 나는 전라도에 살면서도 뼛속까지 전라도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오사카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곳이라고 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오사카 성, 도톤보리 거리의 맛집 등 보이는 곳곳이 매력이 넘치는 곳이라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사카의 자랑은 '오사카 사람들'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저자의 오사카 사랑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곳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것들을 차치하고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최고의 자랑이라고 느낀다는 게 어느 정도의 감정인지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자라면서 얼마나 따뜻함을 느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애정 어린 인간미를 느꼈으면 이런 마음이 가능할까 싶다.

 

일본과 다르지 않은 우리나라의 환경도 느끼게 된다. 남북으로 길게 생긴 나라라는 공통점에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인 사투리에 놀이문화의 다양성까지. 마스다 미리가 전하는 고향의 풍광과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푸근한 곳이라고 증명하는 듯하다. 여탕과 엄마에 이어 오사카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이 세 가지 때문에 지금의 자기 모습이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아마도 오랫동안 이 세 가지를 가슴에 품고 살아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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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돌보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조차 두려움을 가졌던 적이 있다. 어떻게 키워야 하나, 잘 돌보지 못하면 어쩌나... 엄마가 돌보는 작은 화분 몇 개에서 꽃이 피는 걸 지켜보면서도 내가 돌볼 몫으로 화분을 만든 적은 없다. 애완동물을 곁에 두지 않는 이유도 비슷했다. 이 녀석을 내가 잘 보듬어줄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니 내 곁에서 외로워하거나 홀대받다가 죽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고 그랬다. 그러니 내게 애완동물은 멀리서 거리를 두고 보는 대상이다. 누군가의 강아지 고양이를 그저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정도.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과연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게 인간과 애완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전부였던가 싶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미유는 작은 상자 안에 있던 고양이 초비를 거둔다. 버림받은 고양이였지만 미유에게 속하게 된 초비. 오랫동안 유지한 친구와의 우정과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남자친구 사이에서 아픔을 겪는다. 그림을 그리는 레이나의 집에 드나들던 고양이 미미는 떠돌면서도 레이나의 곁을 찾아든다. 시니컬한 레이나 곁에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 고양이 미미는 길고양이와 집고양이의 중간쯤 행동으로 레이나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생활한다. 1년 동안 집안에서 나가지 않던 아오이에게 고양이 쿠키가 찾아온다. 아오이의 엄마가 분양받은 고양이다. 세상과 단절하고 싶고 밖으로 한발짝도 나갈 수 없는 아오이에게 대화 상대가 되고 친구가 된다. 노부인 시노의 곁에 까칠하고 힘센 고양이 구로가 애완견 존의 자리를 차지한다. 개인 존과 친구 아닌 친구 사이였던 구로는 어느 날 사라진 존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시노 부인의 활력소가 된다.

 

화자 '나'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세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별다른 걸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점점 드러나는 '나'는 고양이의 시선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묘했다. 고양이가 보는 세상의 모습, 고양이가 하는 말들, 고양이가 겪는 감정의 변화들까지.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감정으로 세상을 보고 고양이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고양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들의 생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지켜보게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화자 '나'는 인간의 시선이다. 연작소설처럼 이어지는 네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간은 모두 '그녀', 여자다. 젊은 여자 나이 든 여자. 세상 만만하게 살아가도 좋으련만, 각자의 상처와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신뢰가 없는 연애 아닌 연애를 했다가 친구도 애인도 잃은 여자, 자기 재능을 너무 믿고 있다가 뒤늦게 좌절하는 여자, 우정에 실패하고 1년 동안 집안에서 파묻힌 여자, 결혼생활에 지친 시집살이에 이제 혼자가 됐지만 외로운 여자.

 

"누가, 누가 좀."

나는 그녀가 소중한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잃었음을 알았다.

"누가 좀 나를 구해줘."

그녀는 언제까지고 울었다.

우리를 실은 이 세상이 끝없는 암흑 속에서 계속 돈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46페이지)

 

처음 생각할 때는 이 여자들이 고양이를 집안에 들이면서 떠돌이 고양이를 거두는 것이 아닐까 했다. 길에서 흔히 보는 고양이들의 거처를 마련해주면서, 먹이를 주고 돌봐주는 일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다른 면이 조금씩 보이면서 누가 누구를 돌보는지 알 수 없게 됐다. 삶의 여러 가지 것들로 지키고 힘든 인간에게, 고양이는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옆에서 공생하는 대상이었던 거다. 고양이의 언어로 하는 말을 인간이 알 수는 없지만, 서로 이야기가 통한다. 하고 싶은 말이 전달된다. 이게 가능할까? 등장인물들과 네 마리의 고양이, 한 마리의 개가 차근차근 풀어가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알겠다. 이들이 하고 싶은 말은 굳이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어도 괜찮았다는 것을. 표정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말이 서로에게 전달되는 기적(?)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인간이어도 동물이어도 상관없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강하기만 한 인간은 없지만 계속 약하기만 한 인간도 없으니까."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99페이지)

 

네 마리의 고양이가 각자 다른 것 같지만, 고양이들은 또 고양이들과 함께하는 주인들의 사연은 조금씩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슬픔이나 상황이 낯설지 않다.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가 이들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듯하다. 진학 문제, 남녀 문제, 우정 문제, 결혼생활의 문제 등 여자들에게 공통으로 다가오는 고민이 그대로 전해진다. 지나고 보니 별일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 앞에서는 어른 사람 마음을 흉내 내면서 읽게 되고, 내가 아직 감당하지 못한 문제 앞에서는 그들의 고충을 짐작하면서 읽게 된다. 사는 내내 우리가 털어내지 못할 삶의 힘겨움을 고양이와 여자의 일상으로 공감하게 하는 이야기다.

 

이미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인 적 있는 이야기라 그런지, 영화의 포스터나 스틸컷으로 장면들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흥미로운 소재에 평범한 일상이 어우러져 판타지와 드라마 두 가지 장르를 만나는 기분이다. 특히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동물들의 세상이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그냥 길고양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길고양이들에게도 나름 관할 구역(?)이 있고 그렇게 정해진 구역에 발을 디디는 것은 남의 구역을 침범하는 게 된다. 바로 전쟁의 시작인 거다. 고양이들의 난투극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본 적이 없어서 다 알 수는 없으나, 인간 세상의 구역 싸움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역의 터주대감같이 그 구역의 오래된 노견 존의 지혜가 고양이들끼리의, 고양이와 인간의 교감을 이뤄내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달리고 달리다가 그제야 알아차렸다. 세상이란 내 생각과 다르다는 걸.

세상의 크기는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무서워.

아오이도 분명 이걸 두려워했던 거야.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141페이지)

 

단순히 인간의 시선으로 보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면서 교감하고 성장하는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괜히 더 착해지고 싶은, 누군가를 더 이해하고 싶은, 내 인생을 조금 더 아껴주고 싶게 하는 이야기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반려동물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끈끈한 뭔가를 엿본 기분이다. 이제 길에서 마주하는 고양이들이 다시 보일 것 같다. 그들의 사연과 사정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길을 걷게 될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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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가 그랬던가. 작가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게 자기 이야기를 한번 써보는 거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이 한 마디가 계속 생각나는 건,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확인하게 되는 감정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 몇 편을 접하면서, 그녀의 작품이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수식어를 그대로 흡수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가 왜 자신의 이야기를, 경험한 그대로 사실대로 적어야만 했는지 읽으면 저절로 느끼게 된다. 이건 그녀의 이야기이고, 그녀가 느낀 그대로 적어내려 애쓴 흔적이며, 그녀 자신이 걸어온 시간이면서, 그녀가 작가로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고 말이다.

 

1952년의 어느 여름, 그녀의 열두 살 일요일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어머니의 목을 조르고 때렸으며, 심지어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소리를 치면서 낫을 들었다. 공포의 순간, 어머니는 비명을 질렀으나 그날의 사건은 그대로 끝났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식탁에 앉는 부모. 흔한 부부싸움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렇게 행동했다.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그렇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날의 일은 열두 살의 아니 에르노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고, 그녀 삶의 방식이 되었다.

 

나는 사립학교,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움 속에 편입된 것이다.

부끄러움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믿는 것이다. (『부끄러움』 117페이지)

 

'부끄러움'이라는 제목에서 인간적이지 못한 인간의 행동을 떠올렸다. 흔히 어떤 행동이나 말투를 보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혐오의 눈길을 보내는 순간 말이다. 우리가 부끄럽다고 말할 때는 대개 그런 순간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녀가 전하는 부끄러운 순간은 충격이었다. 공감하고 싶지 않지만, 삶의 곳곳에서 묻어났던 어떤 감정이 생각났다. 부유하지 못한 우리가 세상에 부딪히면서 느끼는 순간순간들 말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소리치며 싸우던 그때. 아마도 그녀 가족이 중산층도 되지 못하는, 가난한 노동계층이라는 자각에서 그녀의 부끄러움은 시작된 것 같다. 싸우다가 자기 아내를 죽이겠다고 낫을 손에 휘두르는 남자가 아버지라는 사실이 트라우마가 된 건 아니었을까. 특히 그녀가 공립학교가 아닌 기독교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생활 수준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던 순간 그 부끄러움은 본격적으로 다가왔다. 중산층 이상이 다니는 기독교 사립학교는 그녀와 다른 아이들 사이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느끼게 했다. 결국, 가난하고 천박한 행동을 하는 부모가 부끄럽고, 그런 부모가 자기 존재의 뿌리라는 게 그녀를 혼란스럽게 한 거다.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잘하지만, 소녀스럽고 괜찮은 외출복을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 우아하고 예쁘게 자랄 거라는 긍정적인 말을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게, 사람들의 시선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아름다우며 고급스러운 어휘를 사용하는 대상으로 비치지 않는다는 게 그녀에게는 상처가 되고 부끄러움이 되었다.

 

아버지와 둘이 떠난 여행지에서도 그녀의 부끄러움은 계속됐다. 여유롭게 여행 준비를 하지 못해서 여행지에서 부족함에 시달렸다. 때가 낀 운동화를 신고 계속 다녔고, 넉넉한 돈을 준비하지 못했다. 레스토랑에 가서도 제대로 주문하지 못했고, 우아하게 식사할 줄 몰랐다. 비슷한 또래의 여행객에게서 매 순간 다른 점을 볼 때마다 그녀는 좌절했다. 자기는 그들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 배경을 가졌고, 또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이어갈지 모른다는 불안 같은 게 그녀에게 내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녀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근원이 시작된 그곳에서부터 이어져온 부끄러움이 사라질 곳이 있던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부끄러움』 137페이지)

 

열두 살의 그녀가 체험한 1952년은,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그리 부유한 상황은 아니지 않았을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세계적으로 불안정한 분위기는 계속되었을 것이고, 전쟁 후에 안정적인 나라가 얼마나 되었으려고. 하지만 그런 불안정한 환경에서도 부와 가난은 뚜렷하게 구분되기 마련이니, 그녀 가정의 가난이 쉽게 변할 환경도 아니었던 거다. 누구나 비슷하게 살아가는 모습일 테니, 그리 아파하거나 차별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한번 눈에 들어온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경험했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말하지 못할 그 체험의 감정을 그녀는 오랜 세월 담아두고 살았다. 부끄러움은 그녀 삶의 방식이 되었으며 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년이 된 그녀의 어느 날, 그녀는 1952년 그때의 기억을 다시 꺼낸다. 오랜 세월 그녀를 부끄럽게 했던, 그녀의 삶을 지배했던 그 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의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자기의 기억을 꺼내면서도 객관적인 그녀의 감정은 때로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이기에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인간이기에 가능하고 허용될 것 같은 그 주관적인 느낌을 그녀는 철저히 배제하며 적었다. 그 순간의 상황이나 현상에 감정을 넣지 않는다. 오랜 전의 기억을 꺼내면서 추억 운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슬프기까지 하다. 이제 와서 이 기억을 꺼내놓아야만 했던 그녀의 간절함이 느껴져서다. 이런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기어코 이걸 써 내려가지 않으면, 이 순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위기를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자기 존재의 불편함을 이제는 정면으로 마주하며 넘어서야 할 때라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것일까.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 한 번쯤은 찾아올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옥죄며 단단히 묶어놓고, 어떤 기억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살아왔기에 완전하지 못했던 순간을 다시 마주할 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불안하게 세상으로 보게 했던 기억에, 지금 그 기억과 감정을 털어내지 못하면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결국은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간절함에 몸부림칠 때.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언젠가 한 번은 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한 것만 같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그런 글쓰기가 가능한 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는 말과 기억이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게 어렵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녀의 글이 더 충격적이고 날카롭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다들 비슷하게 경험하는 어떤 감정과 충격들일 텐데, 그 비슷한 경험과 영향에서도 비슷하지 않게 드러내는 방식들. 누구는 해냈고 누구는 해내지 못한 채로 간직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차이를, 그녀는 이렇게 통과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뿌리를 수치스러워했던 기억에서 벗어났다. '나는 기어코 이렇게 쓰고 말았어.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거든. 이제 벗어날 수 있어서 홀가분해. 이렇게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해냈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당신, You win!

 

전작들에서와 다르지 않은 그녀의 쓰기 방식이 가슴에 파고든다. 『단순한 열정』에서 사랑의 절절함을 목 놓아 우는 것처럼 기록해내더니, 『남자의 자리』와 『한 여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을 적나라하게 서술하더니, 이번에는 자기 자신의 기억을 들추며 비루하며 수치스러웠던 솔직한 기억을 폭발시키는 듯하다. 그녀다운 글쓰기 방식이 혹시 언제 변하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이 방식을 끝까지 고수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일기처럼, 기록처럼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느낌을 얻고 싶어서다. 아무리 솔직해도, 아무리 객관적으로 쓴다고 해도, 이렇게 자기의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고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아직은 부족한 우리들일 테니까 말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매번 충격적이지만, 그 충격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는 게, 아직은 그녀의 작품을 가까이하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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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5-30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불과 얼마전에 이 책이 나온 걸 알게 되었는데 구단씨 님은 벌써 읽고 이렇게 근사한 리뷰를 쓰셨네요. 역시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아니 에르노 좋아요.
:)

구단씨 2019-05-30 14:29   좋아요 0 | URL
<세월>과 <사진의 용도>는 읽는 중이라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한 여자>와 <남자의 자리>, <단순한 열정>은 좋아하는 글이거든요.
이번 <부끄러움> 역시 짧은 문장 읽으면서 숨이 뚝뚝 끊어지는 듯한 묘한 느낌이더라고요.
이제까지 읽은 그녀의 글 중 가장 있는 그대로, 솔직한 문장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레삭매냐 2019-05-30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나온 책의 재개정판
이더라구요.

구판으로 도서관에서 한 번 봐야겠네요.

구단씨 2019-05-30 15:51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저는 기존 출간작을 몰랐어요.
번역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저자의 글을 만나는 데는 구판 신판 구분할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
 
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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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던가. TV로 본 어떤 남자는 하루를 버티는데 26알의 약을 삼켜야 한다고 했다. 여기가 아파서 이 약을 먹으니 부작용이 생겼고,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다시 저 약을 먹고, 저 약을 먹고 생기는 또 다른 부작용 때문에 다른 약을 먹다 보니 그렇게 많아졌다고 한다. 약이라고 하면 몸의 독을 빼는 데 쓰는 거 아닌가? 그 독을 빼기 위해 먹은 양은 몸속에 또 다른 독을 만들고, 그 독을 빼려고 또 다른 약을 쓴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하지만 우리는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내 독과 약의 엎치락뒤치락, 흡입하고 쏟아내고.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 들어온 독을 내보내기 위해 먹는 약, 그로 인해 쌓이는 독을 내보내는 일의 반복. 우리 몸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런 방식으로 세상에서 버틸 것이다.

 

한 남자가 의식불명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온다. 혹시 극단적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싶은 의료진의 추측이 있지만, 사실 화자인 ‘나’는 그저 상한 음식을 먹었을 뿐이다. ‘나’가 눈을 뜬 곳은 3인실 병실이었는데, 같은 병실에 누워있는 남자가 있었다.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는데, ‘나’는 점차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렇게 듣게 된 이야기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독을 다스리던 남자 조몽구의 이야기를 쓴다.

 

함부로 손대기 어렵기도 하지만, 두려운 마음에 가까이 갈 수 없는 게 독이 아니던가. 음식에서, 자연에서 만나는 동식물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독은 절대 가까이 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런 독을 태어날 때부터 몸에 지니고 사는 남자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그 자신이 지닌 독의 존재를 조몽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는 아버지(실은 할아버지에서부터)로부터 이어져 온 독과 그 해독을 위해 존재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자기가 가진 독의 근원, 독을 향해 손을 뻗는 일, 독에 관한 관심 같은 것을. 어머니가 그렇게 해독하려고 애쓰던 모든 상황을 지켜본 그로서는 이 운명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두통마저 소화하려고 애쓴다. 두통을 없애는 방법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치료를 할 수 없었다. 그즈음 등장한 삼촌 조수호는 그가 독에 가까이 가는 다리가 된다.

 

소설에서 줄곧 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한 가지 정의로 향해 간다. 세상의 모든 것이 독이면서 약이라고. 그렇게 접근하면 소설 속 인물들이 가까이하는 독은, 독이면서 약이다. 그들은 식물에서 찾은 독으로 연구와 실습(?)을 한다. 독과 독이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어떤 독이 서로 만났을 때 강해지는지 또는 약해지는지, 독이라고 알고 있지만 어떻게 사용할 때 약이 되는지 직접 독에 닿으면서 확인한다. 온갖 꽃, 동물, 광물에서 얻는 독으로 인간의 몸이 반응하는 것 역시 확인한다. 그리고 인간이 그 독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지켜보게 하면서 위험과 안정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을 탄다.

 

“인생이 뭔지 한마디로 말할 수 없겠지만, 이런 말은 할 수 있지. 인생의 매 순간은 독과 약 사이의 망설임이야. 망설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오래 주저하고 머뭇거려서는 안 돼. 어느 순간 약은 독이 되어버리니까.” (100페이지)

 

“삼촌도 독이 무서웠어?”

“그럼 무서웠지. 늘 무서웠지. 세상도 무서웠어. 이 세상에 독이 아닌 게 없거든.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독을 가지고서 세상과 싸워야 해. 하지만 ‘독’에 대항해서 우리를 지키게 하는 ‘약’도 얼마든지 있어.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거야.” (198페이지)

 

세상에 이렇게 많은 식물에 독이 있다는 것인지 놀랍기도 하고, 우리가 사는 이곳의 구석구석에 자리한 위험을 감지하게 되기도 한다. 몰랐을 때는 몰라서 안전(?)할 수 있지만, 한번 알게 되면 그 위험을 우리는 또 어떻게 이용하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실제로 소설 속 인물들은 그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그 독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먼저 조몽구의 엄마는 아들의 두통을 낫게 하려고 독에 손을 댄다. 어릴 적부터 병치레했던 자경은 자해를 일삼는다. 자경의 오빠 정우는 오래전부터 약에 중독되었던 때가 있다. 군대에서 만난 광수는 아버지가 술로 살아왔고 술로 죽었다. 결벽증에 걸렸던 소화는 페인팅에 참여하면서 독의 변화를 확인한다. 등장인물 대부분 평범하지 못한 삶을 가졌고, 그 시간 동안 독에 가까이 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 안에 조몽구가, 그 역시 독에 감염되었고, 그 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던 시간이 있다. 독과 약을 동시에 품게 된 거다.

 

‘나’가 서술하는 조몽구의 인생은 한마디로 독과 약이 공존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런 삶이 어디 조몽구뿐이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과 닮지 않았는가? 소설은 독과 약의 적절한 사용을 시사하면서 독을 독으로만 규정하지 않았다. 독은 단지 물질로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 역시 들려준다. 인간의 분노와 욕심, 이기심, 공포, 어긋난 신념 같은 우리 정신을 지배하는 것 역시 독과 약이 같이 작용한다.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 모를 일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듯이. 어느 한 곳, 한 사람에게 머문 게 아닌 거다. 물질과 정신에 같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상 모든 일에 스며들어 우리 인생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두 가지가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지켜보게 한다. 모든 물질은 독이고, 독이 아닌 물질은 없다고. 다만, 올바른 용량만이 독과 약을 구분한다는 정의를 이렇게 확인한다.

 

대체 독이 뭐야? 그 물질이 무엇이든 간에, 몸 안에 들어와 생체의 리듬과 균형을 무너뜨리면 그게 독이야. 몸에 꼭 필요한 호르몬, 비타민, 히스타민, 세로토닌 같은 생물활성물질도 내부에서 과도하게 분비되거나 외부에서 대량으로 투여되면 독이 된다는 걸 너도 모르지 않잖아. (467~468페이지)

 

“모든 물질은 독이며 독이 아닌 물질은 없다. 다만 올바른 용량만이 독과 약을 구별한다.” (177페이지)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과 그들이 독을 사용하게 되는 이유와 과정을 보면서 낯설지 않았다. 그 ‘올바른 용량’을 지키기가 어려워 우리는 극단적으로 독과 약으로 치닫는 거 아닐까 싶다. 살아가다 보니 피할 수 없는 독의 세계의 혹독함에서 약을 지키기가 어려워서 말이다. 이 소설에서 만난 인물들 역시 독과 약, 극과 극을 오가면서 대립하기도 하고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점 다다르는 지점이 그 ‘올바른 용량’이 아니었을까. 안타깝게도, 아직은 약에 가까워지는 경우보다 독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완벽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계속 보여줄 뿐이다. ‘해독과 정화’를 마지막 장에 배치하면서 ‘해독’보다는 ‘정화’의 삶으로 가는 방향을 열어준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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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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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철이 없을 때는 이런 상상을 하기도 했다. 혹시 나는 어디서 데려온 아이가 아닐까, 우리 진짜 부모는 저기 어디서 굉장한 부자로 사는 분들이 아닐까, 학벌도 좋고 집안도 좋은 그런 사람이 내 부모는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너무 어렵게 자라던 시절의 상상 같은 일이기도 하고, 정말 힘든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때 막연하게 떠오르던 동화 같은 일이다. 조금 더 자라서는 뉴스에서 보던 부모 같지 않은 부모가 저지른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때도 생각했다. 부모가 되는 일에는 자격이 필요하다고, 혹시 어느 나라에서는 부모 자격시험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고. 부모는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당연하게 주어지는 자격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누군가를 알아 간다는 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146페이지)

 

내가 상상만 하던 일을 이야기로 내놓은 작가가 있다. 놀랍기도 했지만, 어떤 내용으로 독자의 궁금증을 채워줄까 하는 기대가 더 컸다. “부모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이 소설은 이미 첫 페이지를 열게 하는 마법을 부렸으니까.

 

미래의 어느 시대. 부모가 버린 아이들을 국가가 보호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생겼다. 아이들은 이 센터에서 같이 먹고 생활하며 자란다. 한 마디로 국가가 아이들을 키워주는 양육 공동체가 된 거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부모 선택을 못 하면 기관을 나가야 한다. 기관을 나가기 전까지 아이들은 두 가지 결정을 한다. 양부모를 만나서 나가느냐, 아니면 이대로 스무 살을 채우고 나가서 센터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회생활을 하느냐. 이게 무슨 차이인가 싶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만의 차별을 두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듯하다. 어쨌든, 센터에 있는 동안 아이들은 관리자가 특별히 선별한 부모 후보를 만날 기회가, 그 부모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쉽게 상상이 되는 일이던가?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니. 물론 이 아이들에게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치명적인 과거가 있지만, 그런 과거가 그다지 단점이나 불편함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상황에서 그들에게 맞는 부모를 선택할 권리만을 가진다. 시뮬레이션으로 본 부모 후보의 모습, 직접 만나서 몇 분간 대화가 가능한 시간, 마지막 세 번째로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최후 결정을 한다. 자기 부모로 선택할 것이냐 마느냐. 센터의 아이들은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을 페인트라고 부른다. 주인공 ‘제누301’에게도 페인트 할 기회가 왔다. 그동안 진심으로 페인트에 응한 부모를 만난 적이 없던 제누에게 이번은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상처가 많은 아이가 선택한 부모 후보는 어떤 사람들일까? 아이들을 입양함으로써 정부의 복지 혜택만을 욕심냈던 부모들과는 다를까?

 

읽다 보면 우리가 바라보는 온갖 현실이 다 담겨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센터의 아이들은 태어난 달의 이름을 따서 뒤에 번호를 붙인다. 1월에 태어난 아이는 제누, 제니. 그 뒤에는 아이들을 구분하려고 붙인 번호. 그래서 센터의 모든 아이는 똑같은 이름이 많다. 그중에서도 6월에 태어난 아이들과 10월에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이 가장 많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아차’ 했다. 여름 휴가철, 겨울의 크리스마스 시즌.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가볍고 설레기 좋은 그때 잉태된 아이들이 6월, 10월에 태어나고 버려졌다고. 어른들은 자기들의 즐거운 시간을 만들었지만, 그 후에 태어난 아이들을 책임질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센터로 보내진 아이들의 인생을 한번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을까 싶은 아쉬움이 계속 떠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해도 아이를 양육하는 현실은 아주 많은 차이를 느끼게 할 것이다. 경제적인 형편, 산후 우울증, 육아에 투자해야 하는 시간, 아이가 자라면서 겪는 많은 일을 같이 경험해야 하는 감정적인 문제들까지. 더군다나 그게 다 처음 겪는 일이라면 얼마나 두렵겠는가. 하지만 그 두려움을 안고 겪어야 할 게 아이와의 공동 성장 아닐까? 그 경험이 이뤄지는 동안 우리는 더 많은 감정과 상황을 겪게 될 것이지만, 그래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하게 묶이는 기적을 맞이하게 되는 결말을 맞이하는지도 모른다.

 

하나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한 가족이 된 것을 기뻐할 때도 있을 테고, 후회할 때도 있을 거야. 너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야. 얼굴 표정, 목소리만으로 서로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 정도로 가까워지겠지. 그렇게 되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내가 친구들과 그랬듯이. 해오름과 부부가 되었을 때 또 그랬듯이.” (163페이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또 모르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겪잖아요.”

모른다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모르기 때문에 배울 수 있고, 모르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으니까. 삶이란 결국 몰랐던 것을 끊임없이 깨달아 가는 과정이고 그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긴 여행 아닐까? (196페이지)

 

부모를 선택하는 시대라는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지만, 차근차근 듣다 보면 결국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가족이 어떤 형태와 마음으로 가능한지 설명해주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 더불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는지도 드러난다. 익숙해서 편하지만 당연하게 생각해서 상처받게 하는 존재가 되는 가족들, 사회에서 출신 성분을 따져가며 사람을 판단하는 시선들, 가족 중심의 사회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그러면서 다다르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부모는 어떻게 되는가, 자식은 어때야 하는가. 부모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부모가 되어가는 것’처럼, 자식 역시 부모에게 어떤 자식이어야 하는지 처음부터 정해진 건 아니다. 그걸 몰라서, 알면서도 자주 잊어서 무책임하고 상처 주는 일들이 생기는 거 아닐까. 준비와 노력만으로 가족이란 관계를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가족이란 계속 서로 맞춰가야 같이 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하는 소설이다. 혹시라도 멈춰있던, 같이 색을 칠하며 그림을 완성해가는 시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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