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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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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던가. TV로 본 어떤 남자는 하루를 버티는데 26알의 약을 삼켜야 한다고 했다. 여기가 아파서 이 약을 먹으니 부작용이 생겼고,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다시 저 약을 먹고, 저 약을 먹고 생기는 또 다른 부작용 때문에 다른 약을 먹다 보니 그렇게 많아졌다고 한다. 약이라고 하면 몸의 독을 빼는 데 쓰는 거 아닌가? 그 독을 빼기 위해 먹은 양은 몸속에 또 다른 독을 만들고, 그 독을 빼려고 또 다른 약을 쓴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하지만 우리는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내 독과 약의 엎치락뒤치락, 흡입하고 쏟아내고.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 들어온 독을 내보내기 위해 먹는 약, 그로 인해 쌓이는 독을 내보내는 일의 반복. 우리 몸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런 방식으로 세상에서 버틸 것이다.
한 남자가 의식불명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온다. 혹시 극단적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싶은 의료진의 추측이 있지만, 사실 화자인 ‘나’는 그저 상한 음식을 먹었을 뿐이다. ‘나’가 눈을 뜬 곳은 3인실 병실이었는데, 같은 병실에 누워있는 남자가 있었다.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는데, ‘나’는 점차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렇게 듣게 된 이야기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독을 다스리던 남자 조몽구의 이야기를 쓴다.
함부로 손대기 어렵기도 하지만, 두려운 마음에 가까이 갈 수 없는 게 독이 아니던가. 음식에서, 자연에서 만나는 동식물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독은 절대 가까이 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런 독을 태어날 때부터 몸에 지니고 사는 남자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그 자신이 지닌 독의 존재를 조몽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는 아버지(실은 할아버지에서부터)로부터 이어져 온 독과 그 해독을 위해 존재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자기가 가진 독의 근원, 독을 향해 손을 뻗는 일, 독에 관한 관심 같은 것을. 어머니가 그렇게 해독하려고 애쓰던 모든 상황을 지켜본 그로서는 이 운명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두통마저 소화하려고 애쓴다. 두통을 없애는 방법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치료를 할 수 없었다. 그즈음 등장한 삼촌 조수호는 그가 독에 가까이 가는 다리가 된다.
소설에서 줄곧 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한 가지 정의로 향해 간다. 세상의 모든 것이 독이면서 약이라고. 그렇게 접근하면 소설 속 인물들이 가까이하는 독은, 독이면서 약이다. 그들은 식물에서 찾은 독으로 연구와 실습(?)을 한다. 독과 독이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어떤 독이 서로 만났을 때 강해지는지 또는 약해지는지, 독이라고 알고 있지만 어떻게 사용할 때 약이 되는지 직접 독에 닿으면서 확인한다. 온갖 꽃, 동물, 광물에서 얻는 독으로 인간의 몸이 반응하는 것 역시 확인한다. 그리고 인간이 그 독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지켜보게 하면서 위험과 안정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을 탄다.
“인생이 뭔지 한마디로 말할 수 없겠지만, 이런 말은 할 수 있지. 인생의 매 순간은 독과 약 사이의 망설임이야. 망설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오래 주저하고 머뭇거려서는 안 돼. 어느 순간 약은 독이 되어버리니까.” (100페이지)
“삼촌도 독이 무서웠어?”
“그럼 무서웠지. 늘 무서웠지. 세상도 무서웠어. 이 세상에 독이 아닌 게 없거든.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독을 가지고서 세상과 싸워야 해. 하지만 ‘독’에 대항해서 우리를 지키게 하는 ‘약’도 얼마든지 있어.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거야.” (198페이지)
세상에 이렇게 많은 식물에 독이 있다는 것인지 놀랍기도 하고, 우리가 사는 이곳의 구석구석에 자리한 위험을 감지하게 되기도 한다. 몰랐을 때는 몰라서 안전(?)할 수 있지만, 한번 알게 되면 그 위험을 우리는 또 어떻게 이용하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실제로 소설 속 인물들은 그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그 독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먼저 조몽구의 엄마는 아들의 두통을 낫게 하려고 독에 손을 댄다. 어릴 적부터 병치레했던 자경은 자해를 일삼는다. 자경의 오빠 정우는 오래전부터 약에 중독되었던 때가 있다. 군대에서 만난 광수는 아버지가 술로 살아왔고 술로 죽었다. 결벽증에 걸렸던 소화는 페인팅에 참여하면서 독의 변화를 확인한다. 등장인물 대부분 평범하지 못한 삶을 가졌고, 그 시간 동안 독에 가까이 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 안에 조몽구가, 그 역시 독에 감염되었고, 그 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던 시간이 있다. 독과 약을 동시에 품게 된 거다.
‘나’가 서술하는 조몽구의 인생은 한마디로 독과 약이 공존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런 삶이 어디 조몽구뿐이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과 닮지 않았는가? 소설은 독과 약의 적절한 사용을 시사하면서 독을 독으로만 규정하지 않았다. 독은 단지 물질로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 역시 들려준다. 인간의 분노와 욕심, 이기심, 공포, 어긋난 신념 같은 우리 정신을 지배하는 것 역시 독과 약이 같이 작용한다.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 모를 일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듯이. 어느 한 곳, 한 사람에게 머문 게 아닌 거다. 물질과 정신에 같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상 모든 일에 스며들어 우리 인생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두 가지가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지켜보게 한다. 모든 물질은 독이고, 독이 아닌 물질은 없다고. 다만, 올바른 용량만이 독과 약을 구분한다는 정의를 이렇게 확인한다.
대체 독이 뭐야? 그 물질이 무엇이든 간에, 몸 안에 들어와 생체의 리듬과 균형을 무너뜨리면 그게 독이야. 몸에 꼭 필요한 호르몬, 비타민, 히스타민, 세로토닌 같은 생물활성물질도 내부에서 과도하게 분비되거나 외부에서 대량으로 투여되면 독이 된다는 걸 너도 모르지 않잖아. (467~468페이지)
“모든 물질은 독이며 독이 아닌 물질은 없다. 다만 올바른 용량만이 독과 약을 구별한다.” (177페이지)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과 그들이 독을 사용하게 되는 이유와 과정을 보면서 낯설지 않았다. 그 ‘올바른 용량’을 지키기가 어려워 우리는 극단적으로 독과 약으로 치닫는 거 아닐까 싶다. 살아가다 보니 피할 수 없는 독의 세계의 혹독함에서 약을 지키기가 어려워서 말이다. 이 소설에서 만난 인물들 역시 독과 약, 극과 극을 오가면서 대립하기도 하고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점 다다르는 지점이 그 ‘올바른 용량’이 아니었을까. 안타깝게도, 아직은 약에 가까워지는 경우보다 독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완벽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계속 보여줄 뿐이다. ‘해독과 정화’를 마지막 장에 배치하면서 ‘해독’보다는 ‘정화’의 삶으로 가는 방향을 열어준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