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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례 이야기 세트 - 전2권
지수현 지음 / 테라스북(Terrace Book)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밥은 먹고 다니냐?"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는 살인용의자 박해일을 마주했을 때 이렇게 물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고……. 붙잡아서 주리를 틀어도 모자랄 판에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묻는 장면을 보면서 분명 한국인의 오래된 정서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 세상에서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이렇게 인사를 묻고 있지 않는가, "식사는 하셨어요?"라고. 배를 곯지 않고 다니기를 바라는 마음, 어려웠던 시절의 배고픔이 세상살이의 가장 큰 해결 과제였던 것처럼, 밥을 먹고 다니냐고 묻는 것은 묻는 이와 대답하는 이 서로의 가장 큰 마음을 담은 안부인사일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밥으로 정을 나누는 것 같은, 밥에 대한 애착 같은 책이 아마 이 책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의 제목에서부터 풍겨오는 구수한 밥 냄새 나는 이름이 있다, "쌀례" 평생 쌀알 모자라는 법 없이 살라고 쌀례라 불렸던 여자. 열네 살의 나이로 얼굴도 모르는 스무 살 신랑을 찾아가서 혼인을 한다. 꽃가마를 대령하고 모셔가야 하거늘 기차를 타고 혼인하기 위해 경성으로 가는 쌀례(세상이 바뀌어서 꽃가마로 3일 걸리는 거리는 기차로 하루 만에 간단다. ㅎㅎ). 그런데 이 신랑, 혼인은 하되 거기까지란다.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쌀례를 조혼 시킨 어른들의 입맛에 딱 그만큼만 맞춰준단다. 그렇게 너 자리 내 자리 알아서 살아가는 두 사람이다. 신랑은 학교도 다니고 몰래 야학도 하면서 자신의 신조에 맞게 살아가고 있고, 쌀례 역시 그녀의 모든 바람을 담아 기원하고 또 기원하는 그 공간 부엌을 신봉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역시나 이야기는 그냥 그렇게 흐르면 재.미.없.어. ^^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세월이 흘러, 이 신랑님 쌀례에게 반했다네~~ ㅎㅎ 줄거리도 그냥 다 말하면 재.미.없.어. ^^
아직은 우리나라가 일본이라는 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절인 1943년부터, 1945년 광복을 거쳐 1950년 육이오 전쟁을 겪고, 종전 그 후의 몇 년을 더 살아가는 이야기다. 시간으로 따지면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들을 살아가는 두 사람 아니 세 사람, 쌀례와 쌀례의 남편 한선재, 그리고 거지 윤찬경의 이야기. 평생을 지아비 한 사람만을 정인으로 알고 살아가겠다는 여자 쌀례, 친일파 아버지의 욕심과는 반대로 조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남자 한선재, 거지로 살아가게 만든 누군가를 위해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은 남자 윤찬경. 전체적인 틀은 이들 세 사람의 인생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조금은 더 넓게 보자면 암울했던 우리의 역사 안에서 우울하고 한편으로는 비장하게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까막눈은 안 된다고 세상을 보게 하려 애쓰던 남편에게 글자를 배우는 여자 쌀례의 인생은 피어난다. 나중에 쌀례 스스로가 독립하게 만들기 위해 가르쳤던 글자와 문명이 쌀례를 새로운 인생으로 살아가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자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다른 이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겼던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도 마음대로 품지 못했던 남자가 한선재다. 자신의 인생만큼 그 누군가의 인생도 소중할지 언데 그런 우선순위를 무시해버리는 아버지 때문에 나라를 위해 살기로 마음먹고 전선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선재의 인생 역시 꼬이고…….
무너져 가는 또 하나의 청춘 윤찬경. 단 한마디면 되는데, 그저 잘 돌아왔다고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될 것 같았는데, 자식으로 인정해주지 않아도 괜찮을 뻔 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욕심만 알았던 아버지라는 인간 때문에 세상의 악귀가 되어간다.
암울했던 시절을 살아가는 이들의 사랑과 인연에 가슴이 저리다. 왜 나를 봐주지 않느냐고 울먹거리는 쌀례나 마음에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선재나 한번 마음에 들어오면 남의 것이라도 뺏고야 말리라 다짐하는 찬경이나. 욕심이 지나친 사람들 때문에 꼬이고 엇갈리는 이들의 인생이, 보면서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시대적 배경이 그렇고, 사람의 욕심이 그렇고, 역시나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마음들 때문에 그렇다. 어쩌면 한 여자(쌀례)의 일생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모든 이야기는 그녀의 중심으로 흐르고 열네 살 그녀가 스무 살이 넘어가고, 까막눈이었던 그녀가 글을 알고 학교에 다니고 신식여성의 삶을 살아보고, 어른이 되고 여자가 되고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이 그대로 들려올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시대를 그렇게 살았던 누군가가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 같기 때문에. 실제 작가의 가족사에서 힌트를 얻어 써내려간 이야기라니까 완전 허구는 아닐 것이다.
특히나 아름다운 그 여자, 쌀례.
참 답답한 인생을 살아가는 듯 보여 이해가 안 될 것 같았는데(사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 저절로 그녀의 마음에 고개가 끄덕여지더라. 새벽 일찍 일어나서 부엌의 부뚜막에 정안수를 떠놓고, 부엌 조왕신에게 마음을 다해 빌면서 쌀을 안쳐 식구들을 위한 밥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삶. 집 나간 누군가의 몫으로 밥 한 그릇을 늘 따로 챙겨두고 그 밥의 주인을 위한 안부를 빈다. 집 떠나 있어도 배곯지 말라고 기원하고, 어딜 가서도 매 순간마다 '밥, 밥, 밥'을 외치는 그 여자의 밥 예찬은 끊임없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부르짖는 밥을 바로 내 눈 앞에서 생생하게 보는 듯한 기분을 내내 떨칠 수가 없다. 동그란 밥상 위, 누런 놋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이 고봉으로 담겨진 그 뿌듯함, 콧속으로 스며드는 그 뜨끈뜨끈한 밥 냄새, 아무런 반찬이 없이 그냥 그 밥만 먹어도 뱃속이 든든해지는 기분, 그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나가면 그 무엇도 다 해쳐나갈 수 있는 듬직함이 그 밥 한 그릇에서 나온다. 그동안 쌀례가 배워오고 쌀례가 계속 했던 밥 예찬은 그래서 멈출 수 없다. 계속되어야 한다.
여기서 나가면, 나는 새로운 주발을 살 거야.
내가 깨뜨렸던 것보다 훨씬 예쁘고 단정한 새로운 조왕신의 주발을 사야지.
맑디맑은 물을 떠서 바쳐야지.
그리고 다시 한 번 합장을 하고 감사드려야지. 혹은 다시 빌어야지.
- 보우해 주세요. 내 쌀독에 쌀알이 가득하길. 내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기를.
기도는 이루어진 것도 있었고,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노여워서 주발을 부셔 버린 적도 있었고, 더 이상 기원할 것이 없다고 기도하는 것을 포기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주발이 있거나 없거나 정안수가 가득 채워졌거나 말라 버렸거나 그녀는 늘 빌어 왔었다.
기원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끊임없이 보채는 것 같아 어떨 때는 스스로 얼굴 붉어지는 때가 있더라도, 삶은 기도다.
그것도 멈출 수 없는 기도.
끊임없이 허기진 배를 쌀알로 채우고, 집 떠나 있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더운밥 한 공기 아랫목에 묵혀 두고, 사랑하고, 울고, 웃고, 다투다가 다시 밥상을 함께하는 그 모든 것은 다 행복해지기 위한 기원인 것이다. - 2권 445페이지
로맨스소설 특유의 달달함은 없지만, 그 약간의 로맨스에 저릿저릿함은 충분히 있다. 한 여자의 인생에서 우리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인생을 배우게 된다. 어두웠던 그 시절의 젊은 인생들의 아픔도 보인다. 그리고 시간의 배경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다를 바 없는, 인간의 욕심이 가져오는 선과 악을 동시에 보게 된다. 이른 새벽, 정안수를 떠놓고, 그 무언가를 간절히 빌고 있는 그 시절의 여인네들의 간절한 바람이 아직까지도 들리는 듯하다. 앞으로도 계속될 그 바람들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