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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필요한 시간 - 다시 시작하려는 이에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1월
평점 :
문학이 세상을 구원해줄 거냐고 물어본다면, 분명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도 비슷하다. 뭐라고 말해야 누구나 이해하는 문학의 정의가 될지 모르겠다. 대신 문학이 힘이 세다는 말은 긍정의 끄덕임을 날릴 수 있다.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작품 속 문장 하나를 오랫동안 바라봤던 것처럼 말이다.
문학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내가 스스로를 학대하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도 믿지 못할 때 문학은 한없이 다정한 눈길로 속삭였다. 너의 불안과 너의 절망과 너의 증오조차 사랑한다고. 우리의 그 어처구니없음과 울퉁불퉁함과 대책 없음이 세상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임을 문학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76페이지)
자기가 읽은 책 속의 시간과 장면, 단상을 끄집어내어 펴낸 책을 마주한 게 이 책이 처음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정여울이라는 이름만으로도 한번은 펼쳐보고 싶은 이상한(?) 이 마음은 뭐란 말인가. 그동안 저자가 출간해왔던 많은 책이 그러하듯, 이 책 역시 저자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시간을 불러오고, 나 같은 독자가 다시 마주함으로써 그 여운이 마치 다단계 회원 확보하듯이 뻗어 나간다. 특히 저자의 이 말이 이 책의 궁금증을 더해줬다. ‘끝을 모르던 자존감의 바닥에서 구해준 게 바로 문학’이었다고. 사실 지금 내가 그렇다. 뭔가 하고 싶은데 이게 맞는 건가 싶고, 잘 안 되니까 이렇게 계속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의심스럽고. 강사가 뭐라고 말을 하고, 다른 수강생들 다 알아듣고 끄덕이는 것 같은데. 나만 이해 못 하는 거야? 중요하다고 말하는 문장들이 왜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스치듯 지나가 버리는 건지. 아, 맞다. 나는 외우는 거 못해서 학교 다닐 때 암기 과목 거의 빵점 수준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게 다 외는 것뿐이니, 이게 될 리가 있나. 내가 그렇지 뭐. 그렇다고 지금 포기하자니 자존감을 넘어서서 자존심까지 나를 떠나버릴 것 같고.
그 회복의 순간을 저자는 문학작품에서 찾았다. 찾아내려고 애쓴 게 아니라, 계획된 우연처럼 그 순간을 만난 거겠지. 문학으로 위로받은 저자는 문학의 힘을 믿는다. 그 힘의 중심에 우리가 이뤄가는 사회, 관계, 마음의 사이에 존재하는 법이 있었다. 누군가 소설을 왜 읽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은, 허구의 세상에서 허우적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환상 속에서 내내 살게 되는 이야기가 삶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던 이였다. 그때부터 생각했다. 내가 소설을 왜 읽는지를. 지금처럼 일상의 답답함과 빠듯함에서 잠깐 떨어져 있고 싶기도 할 때, 전혀 답을 모르겠는데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막막할 때. 대충 이 정도인데, 어쨌든 두 가지는 분명하다. 이야기 자체로의 즐거움을 누리거나, 타인의 삶을 엿보면서 내가 사는 세상 속 이야기를 듣는 거였다. 저자가 말한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나와 타인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로 세상은 더 풍요로워질 수 있을 테다. 내가 그 세상에 접촉하고 스며들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한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마음은 언제나 충족되지 못했다. 내 안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어떤 마음으로 마주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알면서도 모르고, 몰라서도 모를 그 마음을 문학작품 속 한 문장에서 알게 될 때가 있는 걸 보면, 역시 문학의 힘이 이런 건가 싶기도 하다. 힘들 때마다 『데미안』의 문장을 떠올린다고 한다. ‘우리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해내는 누군가가 살고 있어.’(14페이지) 불러오면 좋을 듯하다. 그래서 내가 뭘 모르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이 존재를 불러와 그렇게 다 아는 것을 좀 말해달라고 하고 싶다.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내 안에 있어서 부르면 소리를 낼 것 같은 희한한 위로가 이렇게 들려온다. 나는 그런 사람이야. 내 안에 이런 존재가 있어서 나를 지켜주고 내가 잘할 수 있게 응원해주고 있어. 그러니까, 잘 될 거야.
문학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독자의 영혼에 상처를 준다. 하지만 그 상처를 통해서만 배워지는 것들이 있다. 상처의 틈새로 온 세상의 햇살이 온통 나에게로 쏟아지는 듯한 벅찬 감정을 통해 ‘내가 아는 나’와 ‘나조차 아직 꺼내보지 않은 내 잠재력’의 경계가 기쁘게 무너진다. (199페이지)
저자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작품으로, 우리 삶에 끼어드는 타인과의 비교하는 일상을 말할 때는 많이 놀랐다. 갖고 싶은 거, 원하는 게 많아지는 세상에서 자꾸만 타인이 가진 것들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 부러움을 바탕으로 한 자기 비하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나는 왜 안 될까, 나는 왜 가질 수 없을까, 나는 안 되는가 봐. 그럴 때마다 소유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넌지시 비추는 문장들에 시선을 돌린다. 그렇게 많은 게 없어도, 타인이 가진 걸 내가 갖지 않아도 느긋하고 여유 있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왜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은 조급해지는지, 왜 안 되는 걸 자꾸만 마음에 두고 있는지, 왜 타인의 삶을 자꾸 내 삶에 복사해서 붙이려고 하는지 묻게 된다.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지만, 타인과의 비교가 우리 삶에 끼어들어 나를 갉아먹게 하는 건 문학의 역할이 아닌 듯하다. 저자가 느끼고 싶은 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연대하고 공감하는 마음일 테다. 소설 속 주인공이 겪는 고통을 공감하고, 고난을 이겨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그 순간 말이다. 좌절하고 무너질 것 같다가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순간을 포착하는 게 독자의 시선이고, 작품이 말하려는 궁극적인 지점이 아닐까. 그런 과정을 통과하고, 이제 좀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까지 장착하게 하는 것. 문학의 힘은 이렇게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언제나 그렇듯, 읽다가 계속 리스트가 추가됐다. 몰랐던 책, 알았지만 모르고 지나쳤던 장면들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 정말 놀랐던 장면 하나 생각난다. 프랑켄슈타인의 무서운 외모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정작 그가 했던 간절한 말 한마디는 생소했다. 자기랑 똑같은 존재를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그럼 외롭지 않을 것 같다고. 그는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안의 외로움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던 거다. 자기가 사라지면 외로움도 사라지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그의 외로움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의 말처럼, 자기랑 똑같은 존재가 있다면 그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더라도 덜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 그 간절함이 문장으로, 문장으로 그린 내 머릿속 장면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삶이 나를 놀라게 했지만 나 또한 삶을 놀라게 해줄 거야.” (46페이지)
작품들 속에서 시간을 찾는다. 일상의, 삶의 기회를 만든다. 어느 순간 무너진 마음을 일으키고 싶은, 나를 이해하고 내 편이 되어주는, 때로는 내가 막연하게 바랐던 어른의 모습을 기억하게 한다.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을 다 쏟아내듯 담아낸 작품들 속에서, 꼭꼭 숨겨놓았던 마음을 꺼낸다. 설명하기 어려운 속내를 다 긁어낸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순간인 거다. 문학으로 삶을 확장해나가는 방법을 이렇게 배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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