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꽤 잘나갔던 상담가 임해수는 하던 일을 접고 은둔 중이다. 최소한의 외출만 하면서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 그날 이후 임해수의 일상은 달라졌다. 내담자들에게 자신 있게 조언했는데, 이제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조언할 수 없는 마음이다. 당연히 일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욕을 먹으면서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녀에 대한 악성 댓글은 여전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비난의 대상이 된 그녀가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용기는 없었다. 설상가상 상담소에서는 그녀에게 퇴사를 통보하고, 남편과는 이혼한다. 자신 있게 해냈던 일은 이제 두려운 대상이 되었고, 외로움도 모를 정도로 혼자인 생활에 익숙해진다.


어쩌면, 실수라면 실수일 수도 있는데, 그녀의 말 한마디로 누군가 세상을 등졌다. 국민 상담사로 칭송받던 그녀가 한순간에 공공의 적이 된다. 그런 그녀가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소설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편지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계속 등장한다. 그녀의 기사를 썼던 기자, 죽은 이의 가족들, 그녀에게 진심을 건넨 친구 등 이 사건으로 그녀와 대척하거나 거리를 두게 된 이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이상하게도 이 편지들은 항상 끝맺지 못하고 부치지 못한 채로 남겨진다. 하고 싶은 말을 다 적지 못한 걸까? 아니면 이 말을 끝내 전하지 못하는 마음인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쓴 편지의 내용은 수신인을 원망하기도 하고, 사과하기도 하고, 반성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편지는 계속 쓰면서도 미완성으로 남겨지고, 폐기되는 순서를 반복한다. 읽으면서 느끼겠지만, 부치지 못하는 편지가 반복될수록 그녀의 자기 연민은 짙어지고, 그때의 자기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합리화는 계속된다.


어쩌면 임해수는 지금 가장 큰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비하와 부정으로, 매일 밤 울분을 토하고 자신과 세상을 원망하며 보내는 시간이 그 벌이라면 벌일까. 그러던 중 심하게 다친 길고양이 순무를 구하려는 세이를 만나면서 전환점을 만난다. 고양이에 관심도 없던 그녀가 우연한 장면을 포착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순무 구출 작전에 투입되면서 은둔의 장소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 그녀의 행동반경이 넓어지면서 대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제 은근한 내담자가 된 세이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주인공 임해수가 우연히 세이를 만나고, 세이가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걸 알면서도 참견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게 의아했다. 한마디라도 해줄 거라고, 실력 있는 상담가로서 이 아이에게 닥친 문제를 자연스럽고 편안한 방법으로 해결해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본인은 세상에서 차단당했지만, 그래도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던 본성은 어딜 못 가는 거 아니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소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 둘 사이의 흐름을 이끈다. 임해수는 세이의 몸에 있는 멍 자국, 피구 연습이 없는 시간에도 여전히 연습한다고 말하는 아이를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세이 역시 적극적으로 자기가 처한 상황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모른 척하기를 바라는 듯 행동하면서도, 자기가 잘하고 있음을 피력하려고 애쓴다. 결정적으로 세이의 내면이 폭발한 순간에도 임해수는 그저 지켜본다.


왜 그랬을까. 불행은 빨리 처리하면 좋은 거 아닌가. 어서 내 옆에서 불행을 모조리 쫓아내 버려야 속이 시원한 거 아니었나. 착각이었다. 나는 임해수가 왜 세상으로부터 차단당했는지 이 짧은 시간 사이에 잊고 있었던 거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 다 알지 못하면서 말을 보태지 말 것. 말하는 것보다 듣는 일 먼저 완수할 것. 사람들은 이 모든 사태에 임해수의 한 마디가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임해수는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는다. 매일 밤 쓰는 편지조차도 부치지 못한 채로 쌓아두는 걸 보면, 그녀 역시 편지로 하는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기까지 고민하는 것일 테다. 느리게, 그저 듣는 일은 세이가 임해수에게 진심을 꺼내놓는 순간이 오기까지 시간이 길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거기에 그녀가 고양이 순무를 구하자고 들이는 시간을 보면 더 확실히 알게 된다. 기다리는 것. 고양이를 구조하려고 기다린 시간만큼, 고양이를 지켜보는 시간도 많아지고, 고양이를 더 관찰하여 구석구석 볼 수 있었으며, 마음을 전달하면서 천천히, 그녀의 손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치 자기 자신을 구조하듯 고양이 순무를 구조하기에 이른다.


아줌마, 근데요. 그럼 그냥 듣기만 할 수 있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요.

아이가 묻고 그녀가 답한다.

그럼. 그냥 듣기만 할 수 있지.

대화는 조금씩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불신과 두려움 같은 것을 밀어내며 스스로 반경을 넓힌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녀는 아이의 마음속에 불이 켜진 것 같다고 느낀다. (182페이지)


처음에는 이 소설이 무슨 말을 하려고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디에 초점을 두고 읽어야 하는지 몰라서 혼자 우왕좌왕. 작가의 전작으로 진하게 감동했는데, 이 작품은 어디에서 공감을 찾아야 하나 싶었다. 그러다가 점점 눈에 보이는 게 있더라. 구조하겠다고 기다리던 순무, 아픈 걸 아는데도 말하지 않는 세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이 눈에 읽혔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상담자의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던가 보다. 언젠가 때가 되면, 내담자가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시작할 것을 아는 것처럼 듣고 있었다. 강요하거나 자기 얘기로 유도하지 않고, 함부로 판단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누구도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고 그녀를 지켜보는 것처럼 서술되는 분위기가 그렇다. 과거의 그녀가 어땠는지 상관하지 않고, 이제 그녀가 다시 상담가로 살아갈 모습을 기대하게 할 뿐이다.


#경청 #김혜진 #민음사 #소설 #한국소설 #문학 #한국문학

##책추천 #책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