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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라이터
앨러산드라 토레 지음, 김진희 옮김 / 미래지향 / 2022년 11월
평점 :
헬레나 로스의 시간은 석 달 정도 남았다.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해도 목숨 앞에서는 그녀의 소설 같은 서사가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던 거다. 열다섯 편의 작품을 출간했고, 모두 인기 작품이었다. 이제 그녀의 이름은 브랜드가 되어 출간되는 모든 소설이 연일 매진을 예고하는 수준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괜찮은 작품이 나올까 하는 기대에 반박하듯, 그녀의 시간은 거의 남지 않았다. 뇌종양은 그녀의 온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새 작품 계약도 했는데, 그녀는 계약한 작품을 출간하지 않는다. 정말 써야 할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생명이 사라지기 전에 꼭 완성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력은 쇠해지고, 몇 글자 쓰는 것도 힘에 부칠 때가 많아졌다. 어쩔 수 없다. 이메일로 싸우면서 서로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라이벌 작가에게 그녀의 작품 대필을 의뢰한다.
그녀의 책 출간과 관련하여 모든 일을 대행했던 케이트는, 헬레나가 10대였을 때 처음 계약하고 처음 봤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놀랐다. 그녀의 모습을 열정이 넘치다 못해 까다롭기 그지없던 갑질 대마왕으로 기억했는데, 지금은 마치... 마른 장작처럼 말라비틀어져서, 저기서 몇 걸음 걸어오다가 쓰러질 것만 같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던 케이트는 충격을 받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가 요구하는 많은 일을 처리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게, 은퇴를 선언하고 마지막 작품을 쓴다면서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 작가를 보는 답답함이었다. 아직은 말할 수 없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무슨 내용인지, 왜 그녀가 생명이 사라져가는 이 순간에 그 작품을 써야만 했는지. 그녀의 태도가 자기 멋대로, 막무가내로 보여도 간절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도대체 그녀가 감춘 비밀은 무엇인가.
예상하지 못했다. 죽음을 3개월 앞두고 해야 할 이야기가 무엇일지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가 칩거하듯 지내면서, 거의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집안에서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던 이유가 궁금했다. 혹시,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헬레나가 힘겹게 메모하듯 초고를 쓰고, 마크가 초고를 정리하면서 완성해가는 과정이 매력적이다. 모든 것을 한방에 터트리는 게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헬레나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이 무슨 그림을 그리게 될까 기대됐던 거다. 더군다나 헬레나의 숨겨진 이야기가 마크를 통해야만 나오고 있으니, 그 갈증이 더했다. 4년이나 비밀로 간직해 온 그날의 기억은 이렇게 시작된다.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딸이 있고, 그녀의 글은 막힘없이 써졌다. 그녀의 모든 생활은 그녀가 쓰는 소설에 집중되어 있지만, 소설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가 지켜야 할 가족도 있었다. 이대로만 흘러가면 좋았겠지만, 어떤 진실은 그녀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사건은 벌어졌고, 그녀는 거짓말로 그 시간을 건너왔다. 평소 소설로 다져진 이야기꾼은 그렇게 거짓말도 진실로 만들어놓았고, 모두 그녀의 거짓말을 믿었다. 이제는 그 거짓말이 이야기가 되어 그녀의 최고작으로 남겨질 것이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이렇게 아프고,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설의 몰입감은 좋았다. 헬레나가 감춘 거짓말이 무엇일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남편을 죽였다고 말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남편의 죽음에 그녀가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짐작은 가능했다. 어떻게 죽였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어느 정도 예상한 것 이상으로 진실은 교묘했고, 거대했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생길 수 있지만, 그 증오와 절망을 잠재울 방법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게 있다. 그녀가 사랑하는 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했다. 결국, 그녀는 위험요소를 제거하긴 했지만, 동시에 소중한 것을 잃었다. 완벽한 거짓말로 진실을 감춰둔 채 어떻게 살아왔을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소설에서 서술하는 헬레나의 상태만 봐도,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왔는지 훤히 보일 정도다. 죽음의 순간에서야 진실을 쓸 수 있었던 그녀의 마음도 편할 수 없었겠지. 말 그대로 너덜너덜. 왜 고통은 피해자의 몫이어야 하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내가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을 조금만 용서해줘, 라고 말하는 듯 소설은 마냥 까칠한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게 했다. 그녀가 그 세월 동안 혼자 아파했을 것을, 죄책감에 사람답게 살지 못한 시간을, 언젠가 때(?)를 기다리며 시달려왔을 것을 생각한다. 그녀에 대한 단죄이며, 그녀를 용서해달라는 마크의 말이 그대로 와닿는다. 이 작품으로 그녀의 거짓말은 탄로가 났고, 읽는 사람은 숨이 막힌다. 심장이 이렇게 멈추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진실을 듣기 위해 몇 시간을 이 책과 함께 그녀의 다용도실(?)에 갇혀 있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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