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페이지를 펼치니,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

남자는 사랑인지도 모른 채 기뻐하고 여자는 “사랑일까? 하며 묻는다.

사랑이 깊어질 때

남자는 사랑에 익숙해지고 여자는 사랑에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사랑이 끝나갈 때

남자는 그녀를 버리고 여자는 ‘사랑에 빠져 있던 나’를 버린다.

 

문장들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 지나간 시간을 하나하나 꺼내어 확인해보기도 한다. 그때 내 마음은 이랬나? 그때 그는 그랬던 거였나?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저 문장들을 보니 한때 나에게 지나갔던 시간들이 어땠었는지 자꾸 파고들게 된다는 것. 그래, 그랬었던 것 같다, 라고 생각하고 싶어지게 공감을 만들어내는 문장들이다.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번만은 그러고 싶어진다. 사랑을 시작하기 전, 사랑이 진행 중일 때, 사랑이 끝나갈 때의 우리의 마음이 그랬노라고. 또한 그런 시간들은 다시 반복되기도 한다고.

 

 

 

 

사랑이 그대들을 부를 때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감싸 안을 때 사랑에 몸을 맡겨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을 상하게 할지라도……

 <예언자> 중에서 - 칼릴 지브란

 

 

 

 

여자는, 남자가 자꾸만 헤어진 애인의 이야기를 하는 게 싫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녀의 이름이 듣기 싫다. 괜히 심통이 난다. 이제껏 잘 들어줬는데 갑자기 그의 지나간 사랑이야기가 듣기 싫어진다. 괜히 뾰로통해지고 마음이 삐딱해진다. 여자는 듣는 일을 멈추고 남자는 여자의 이상한 낌새에 말하는 것을 멈춘다. ‘왜 이러지?’

 

 

 

 

한 사람이 누군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치명적 이끌림’이다.

<LOVE(사랑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중에서 - 아얄라 말라크 파인스

 

 

 

 

 

남자와 여자는 친구 사이다. 두 사람 모두 헤어진 누군가와의 상처로 공감을 만들어내며 친구가 되었다. 이별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 대상끼리 만나 서로의 아픔을 들어주고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했다.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여자는 남자의 지나간 사랑이 듣기 싫다. 그냥, 듣기 싫다. 듣기 싫은 것뿐만 아니라 화도 난다. 왜? 그런데 여자는 남자에게 화를 낼 수가 없다. 여자는 남자에게 화를 낼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는 애인 사이가 아니었고 서로에게 간섭이라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이였으니까. 그렇게, 정의할 수 없는 공기로 서먹해진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이 피어오른다.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알아채고, 여자는 남자에게 화를 낼 자격이 주어진다. 설렌다. 즐겁다. 하트 모양의 심장은 아주 진한 핑크빛으로 물든다.

 

 

 

 

처음엔 그녀가 하루에 열 번씩 전화를 했어. 그러곤 “사랑해”라고 했지.

그다음엔 하루에 한 번 전화해서는 “아주 사랑해”라고 하더군.

요새는 2주일에 한 번 꼴로 전화해서는 “아주 아주 사랑해!”라고 말해.

그래도 난 “빈도가 줄어들면 강도는 높아진다.”는 애덤스 이론을 굳게 믿으며 낙관하고 있다네. 

<겹겹의 의도> 중에서 - 장 자크 상페

 

 

 

 

 

거기서, 그대로 멈췄다면 사랑이란 이름에 나쁜 감정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은 익숙해지고, 솔직하게 풀어냈던 마음은 자꾸 가리게 되고 침묵하게 된다.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는다. 서로를 할퀴고 상처 내는 말들을 쏟아낸다. 한때는 상대를 먼저 배려했던 마음이 왜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냐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다. 함께 내일을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오늘의 이야기도 할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먼저 한 마디만 해주면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두 사람 모두 주저한다. 먼저 입을 열 용기가 없었고, 지금 이 순간을 넘어가면 다시 이런 문제가 반복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지금 싸우는 문제가 잠시 후 다시 불거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인 것일까? 두 사람이 헤어지는 거?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받기 전까지 우리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에서 - 알랭 드 보통

 

 

 

 

내 마음을 알아주는 한 사람을 지킨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처음 먼저 손을 잡았던 그 마음은 어디로 도망간 것일까. 네가 이해해주고 알아주던 그 한마디는 언제부터 사라진 것일까. 여자와 남자 모두 그 시간을 그리워하겠지만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기대는 그리 크지 않다. 이만큼 와버린 마음들이 다시 뒤로 돌아가기에는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나의 존재감을 부여했던 감정이 다쳤고, 상대의 아름다움을 보게 했던 시력이 나빠졌다. 상대를 한 가지씩 알아갈 때마다 흐뭇했던 마음은 닫혀버렸다. 이젠 너를 배려하거나 너의 마음을 굳이 몰라도 되는 편안함이 자리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중에서 - 류시화

 

 

 

 

 

그렇다. 많은 것들이 변했다. 사람이 변한 것인지, 사람이 했던 사랑이 변한 것인지. 아마도 둘 다 변한 것일 수도 있겠다. 피할 수 없는 게 운명이 아니라 정녕 피할 수 있는데 피하지 않은 것이 운명이라던 생각마저 변한 것이겠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시간이 계속되고 많아지면서 이제 상대가 하는 말은 외계어로 들리는 순간이 온 것 같다. 한발 물러서서 먼저 듣고 있던 태도는 사라졌고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왜 감지하지 못했을까.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일에는 전조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과 조짐이 있다. 애써 그런 감정과 생각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은 아니라고, 보여도 못 본 척 들려도 안 들리는 척, 조금 더 유예의 시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끝이 오고 있음을 알면서 절망 반 기대 반으로 마음을 채운다. 이게 끝일 거야, 혹은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언제쯤 눈과 귀는 다시 열릴까. 눈과 귀가 다시 열리는 순간, 같은 상대가 앞에 있을까?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처음 사랑했을 때의 마음일 뿐이다.

그들은 용서를 할 것도 용서를 구할 것도 없다.

단지 다시 만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19초> 중에서 - 피에르 샤라스

 

 

 

 

시간은 흐른다. 여자와 남자는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던 만남부터, 너무 좋아서 헤어지고 나서도 바로 보고 싶었던 감정까지 경험했다. 많은 것을 말했던 서로에게 부담과 짜증이 생기기도 하고 나를 이해해달라는 바람마저 무색한 순간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헤어졌다. 우연처럼 운명처럼 서로 다른 상대를 만나기도 한다. 여자에게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에게는 자신을 믿고 기다려달라는, 내일을 말할 수 있는 여자가 옆에 있다. 연인이었던 두 사람에게는, 의외의 장소에서 우연처럼 만나도 모른 척 지나쳐야 하는 관계가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한때, 우리의 사랑은 이랬다. 그 사랑이 만들어낸 목적지가 각각 달랐을 뿐이다. 이별 후 다른 사랑을 만나거나, 결혼 혹은 계속 진행중인 연애로 이어지거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중에서 - 기형도

 

 

 

저자는, 사랑은 두 개의 심장이 잠시 하나가 되는 기적이라고 했다. 두 개의 심장이 만나 외로움이 아닌 사랑을 만들어 내거나, 하나의 심장이 다시 두 개로 나뉘는 경험을 하거나. 한 번의 사랑이 끝났다고 겁내거나 연연해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들린다. “사랑이 다시 올까?” 묻지 말고, “사랑은 다시 또 온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피식 웃음도 난다. 저자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다. 한 번의 사랑이 끝났다고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니니까. 기억을 더듬어보자. 그 한 번의 사랑이 지나갈 때마다 모든 것이 나쁜 것만도 아니었지 않는가. 알게 모르게 변하고 배우게 된 많은 것들이, 하나였다가 떨어져나간 심장의 한쪽을 채웠을 거라 믿는다. 나 같은 경우, 사람과 세상에 대해 많이 배웠던 것 같다. 감정적이던 성격은 조금 더 이성적으로, 화가 나면 큰 소리가 아닌 저음의 목소리가 되고, 사람들을 볼 때 어떤 설렘이 아닌 인간미를 먼저 보고는 했다. 그건 어떤 시간이 지나갔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쌓여가는 세상의 때 묻음의 도움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사랑>인생’이 아니라 ‘사랑<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한쪽으로 기울었던 부등호는 점점 그 방향을 바꾼다. 많은 감정들이 극으로 치닫는 것을 붙잡아준다. 천천히 가도 되니까 앞, 뒤, 옆, 눈 크게 뜨고 사방을 보고 가라고. 어떤 결말을 만나더라도 괜찮아지게 말이다.

 

 

 

 

운명이 호의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져다준 영혼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사랑> 중에서 - 막스 뮐러

 

 

 

 

 

 

 

 

남자와 여자에 대한 심리를 짧은 소설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끄덕끄덕 하면서 공감을 하거나, 이건 아닌데 하면서 반대의 생각을 펼칠 수도 있다. 새겨듣고 싶은 말은 새겨듣고, 버릴 말은 버리면서 각자의 취향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전문적인 용어보다는 상황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해 사랑을 차분히 정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두근거림이나 고민, 생각을 들려준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대신 말해주는 역할이다. 이런 방식-상대의 마음을 대신 들려주는-이 새롭거나 신선하지는 않다. 이미 읽어본 몇 권에서도 이런 방식의 마음 알아가기는 충분히 경험했다. 그런데도 싫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풀어가는 방식 때문인 것 같다. 서로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는 그 상황이 왜 그렇게 되는지를,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일들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뻔한 복선처럼 보이게 하면서 납득하게 한다. 왜? 우리가 그랬으니까. 같은 상황을 두고 서로 생각하는 것,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심하면 전쟁 같은 상황도 일어나겠지. 하지만 그 이후로 다가오는 일들에 대한 대처가 간혹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 경우 뒤따르는 것은 후회다. 어떤 식으로든 후회를 해야 하는 경우라면, 그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내가 하는 말이 상대에게까지 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사랑이 끝난 후에 보이게 되는 우려를 범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지금, 그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처음 두 개였다가 하나가 된 심장이 다시 두 개로 나뉘지 않게, 다음에 하나가 될 심장을 위해서라도...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중에서 - 킴벌리 커버거

 

 

 

 

** 함께 소개된 책들은 이 책 속에서 저자가 소개해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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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이 많이 나오고 있다.

가을이니까, 살랑살랑 바람이 제법 차가운 바람으로 변했으니까...

읽어보고 싶은 책이 많은데, 늘 그렇듯 더디다.

타이밍을 놓친 책들도 많고...

그래도 기억해두고 싶은 마음에 고르고 또 골라본다.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많은 건, 좋은 일...

 

 

 

 

 

 

 

 

 

 

 

 

 

 

가을이라 그런지, 하니면

10월의 한가운데로 들어와서 그런지...

책이 많이 나오긴 하는구나...

 

 

 

 

 

 

 

미주부동산이 많이 궁금하다. 저자에 대한 입소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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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편지 -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손거울 같은 책
윤석미 지음 / 포북(for book)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연필을 깎았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손이 다치지 않게, 커터칼로 조심스럽게 앞으로 밀면서 깎아냈다. 생각하고 싶은데 생각이 막히고 멈춰버렸을 때,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을 때, 집중할 게 필요하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 순간을 흘려보낼 수 있겠지만, 가끔 나는 그 순간을 연필을 깎으면서 흘려보낸다. 오직 이 연필을 깔끔하고 예쁘게 깎아내는 일만 생각한다. 다 깎고 나면 쓰던 메모지에 뭔가를 끼적이기도 한다. 펜으로 마구 휘갈겨 쓰는 촉감과는 사뭇 다르다. 연필 특유의 사각거리는 소리, 종이에 잉크가 번지는 것이 아닌 연필심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가루들, 펜을 사용했을 때 보다는 연하게 써지는 글씨들이 눈에 들어온다. 뭔가가 맘에 안 들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쓴다. 어렸을 때 처음 글씨를 배울 때의 마음 같다. 네모 칸 반듯한 노트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쓰고, 틀린 글자를 지우고 다시 쓰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글씨를 다 익히게 된다. 가끔 맞춤법이 틀리기도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지우고 다시 쓰고, 틀린 것을 또 배우면서 쓰면 되겠지.

 

뭐든 거기에 맞는 게 있다. 틀릴 수도 있고 지워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연필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거기에 맞는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면 맞춰가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인정해야 한다. ‘다름’을... 손이 예쁜 사람 발이 예쁜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노래를 잘하는 사람, 공부를 잘하는 사람 잡다한 지식이 많은 사람. 다양한 가능성과 다른 점으로 살아가는 세상인데 유독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눈에 더 들어올 때는 생각이 나아가질 못한다. 일시정지 같은데 영원히 정지가 될까봐 가슴이 막혀온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는 왜 안 되지? 왜 느리지? 왜?’ 하는 마음들이 벅차서 터질 것만 같을 때, 알면서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숨이 가빠져 올 때, 나에게만 적용되는 법칙들이 따로 있는 것만 같아서 혼란스러울 때, 느려터진 내가 한심스러워 보이던 그런 때... 저자 윤석미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왜 이런 문장은 띠지에 떡 하니 버티고 서서 내 눈길을 잡아끌고 있나?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단다. 달팽이걸음이라도 느려도 갈 길 다 가니까, 각자에게 맞는 옷이 있으니까, 인생은 오래달리기니까... 참 적절하게 들려준 이야기에 눈물 한 방울이 핑 돈다. 겉으로 보기에 똑같아 보이는 지게도 산길을 오르기 위한 지게와 들판을 다니기 위한 지게의 길이가 다르단다. 평지를 다니기 위한 지게는 다리가 좀 긴 편이고 산길을 다니기 위한 지게는 다리가 좀 짧은 편이라고, 수풀을 헤치고 다니는 그 길에 걸리지 말라고 지게의 다리가 좀 짧단다. 똑같은 지게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된다. 아마도, 맨 처음에 그 지게는 길이가 똑같지 않았을까. 사용하다 보니 산길을 다닐 때 거치적거려서 다리를 조금 잘라낸 것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산길에 딱 적당한 지게로 맞춤형이 된 것이겠지. 사람도, 그 사람을 둘러싼 많은 것들도 그렇게 적응하고 맞춰가는 거겠지 싶은 마음에, 점점 저자의 이야기에 동화된다. 지금 뭔가가 좀 안 맞아도 괜찮을 것 같고, 느리고 또 느려도 괜찮을 것 같고, 무엇 하나 옆에 붙어지거나 나가떨어진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고... 무조건 다 괜찮은 거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가는 데 이삼일, 오는 데 또 이삼일. 우체통에 넣은 편지가 서로에게 오가는 데는 보통, 일주일이 걸립니다.

그것도 편지를 받자마자 답장을 써서 그 길로 우체통에 넣었을 때만 그렇습니다.

이 느림보 편지를 두고 ‘달팽이 편지(Snail Letter)’라고 부릅니다. (110페이지)

 

손쉽게 문자 한통, 전화 한통, 실시간 이메일 전송, 더 빠르고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SNS. 세상이 점점 빨라지고 간편해진다. 내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두통일 생길 지경이지만, 지금이 그런 세상이라는데 부정할 수가 없다. 다만, 내가 그 속도에 맞추지 못할 뿐이다. 그렇게 빠른 세상에서 손으로 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고, 상대방에게 배달되기를 기다리고, 또 상대방이 답장을 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상대가 내 편지를 받고 바로 답장을 썼다고 했을 경우의 시간을 계산한 것이 일주일이다. 물론 바로 답장이 오지 않을 경우,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기다림의 시간이 더 길어지겠지. 그리고 마냥 기다리겠지. 답장이 올 때까지...

 

그런 달팽이 편지의 마음으로, 천천히, 조금은 느리게, 저자가 한 문장 한 문장 들려준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누군가가 한 말이기도 하고, 어디선가 한번쯤을 들어봤음직한 말이기도 하고, 대책 없이 긍정적인 말이기도 하다. 지금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냐고, 여기에 맞춰야만 제대로 가는 길이 아니겠냐고, 이대로 가도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물어야 했을까. 그러면서도 수도 없이 묻고 싶었던 순간들을 뒤로 하고 자꾸만, 자꾸만 그 자리에서 듣고 있게 된다. 듣고 있으면서 나도 모르게 혼자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고 있다. 그래서요? 이렇게 하면 될까요? 그건 아니지 않나요? 쉽지가 않아요. 틀린 것 같아요. 다른 것은 안 될까요? 그래요, 어쩌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시작도 끝도 내가 해야 한다는, 채우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비우는 것이라는, 내 발끝이 향하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가슴 속을 들여다보라는,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을 담아두라는 것도.

 

조금만 앉아서 쉬었다가 가더라도, 잠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더라도,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안식... 저자가 조근조근 들려주는 한마디에 조금씩 마음을 내려놓는다. 편지를 보내고 다시 받기까지의 시간이 그렇게 느릿느릿 흘러가니, 덩달아 기다림의 시간도 길어지고, 진심을 가득 담은 한 마디가 더 값지게 담겨 있을 것만 같아서, 답장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 순간을 감당하게 만든다.

 

고인 눈물은 다 쏟아내야 합니다.

쏟아 내지 못한 눈물은 저 혼자 마르지 못하고,

마음 안에 고여 또 다른 상처를 만듭니다. (175페이지)

 

이상하게, 뭔가를 계속 끼적이면서 읽었던 책이다. 책의 문장을 필사한 것이 아닌, 읽으면서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기에 그랬다. 한 문장 읽고 이 생각, 다른 한 문장 읽고 저 생각, 그러다가 뭔가를 적어가고 있는 내 손가락. 어느 순간 보니 메모지에는 형체와 내용을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빼곡하다. 무슨 생각인가를 열심히 적었던 것 같은데, 알아볼 수 있는 글씨는 거의 없었다. 저자가 들려주는 문장에 빠져 나만의 생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가 보다. 세상에 좋은 말, 좋은 얘기, 참 많다. 그런 긍정적인 얘기를 듣고 있는 그 순간의 내 마음까지 긍정적이 된다면 더 없이 좋겠지.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언제 듣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제는 응원이 되었던 말이 오늘은 거추장스럽게 들릴 때가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유독 거슬릴 때도 있다. 이 책 속에서 저자가 하고 있는 말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이렇게 좋은 말들도 딱 적용할 수 있는 타이밍에 들려와야만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천천히 흐르는 저자의 목소리를 제법 좋은 순간에 만난 듯하다. 늘어지고 싶고, 아무 것도 손에 잡기 싫고, 두통이 머리 한 구석을 갉아먹고 있을 때, 저자가 나에게 달팽이 편지를 보내주었다. 천천히 써져 느리게 배달된 이 편지처럼, 나도 천천히 읽고 또 읽고 곱씹어보면서, 연필로 느리게 답장을 써야겠다. 쓰다가, 이게 아닌 것 같다는 마음이 들면 지우고 다시 쓰면서, 느리더라도 하고 싶은 말로 다시 채워 넣으면서. ‘내 마음, 잘 들여다볼게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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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을 먹었다.

이틀 만에 처음으로 채우는 끼니다. 그것마저도 배가 고파서가 아닌, 어지럼증이 와서 약이라 생각하고 목으로 넘겼다. 밥을 안 먹었다는 생각도 못했는데, 내가 밥을 안 먹었더라...

 

 

예정대로였다면,

어제 오전에는 미뤄두었던 책을 한권 펼쳐들었을 것이고, 어제 오후에는 엄마와 함께 큰 조카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예정대로였다면...

 

 

이상하게도 조금씩 비켜가는 일들이 자주 생긴다.

토요일 밤부터 심상치 않았던 엄마의 어지럼증과 구토로, 예정대로였던 일들이 예정에서 다 사라졌다. 요즘 며칠 계속 잠을 못 자던 것을, 일요일 아침에는 늦잠을 잤다. 눈을 떴더니 오전 9시가 거의 다 되어간다. 늦게 잤으니 늦게 일어날 수도 있는데 문제는 다른 데서 보인다. 일요일 오전 9시 정도면 교회에 가려고 현관 앞에 서계셔야 할 엄마가 이불 속에 누워있다. 몽롱했던 정신이 확 든다. 아, 울 엄마 아프구나. 권사님께서 일요일에 교회를 안 갈 정도면...

 

 

응급실에 갈까 물었더니 지난번보다 심각하지 않으니 조금 견뎌보겠다 하신다. 목으로 넘길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누워 있어도 머리가 빙빙 돈다.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니까. 내가 지난번에 급체해서 도로에서 쓰러졌을 때 정도 되려나? 그 이상일 수도 있겠다. 아무 것도 못 넘기고 어지럼증도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만 보내게 된다. 아픈 사람은 누워 있고, 옆에 있는 사람은 뭘 해도 집중을 못 한다. 틈나는 대로 들여다보고 괜찮은지, 어떤지 물어보고, 휴일이니 외래 진료가 안 되니까 응급실로 직행할 수도 있어서 작은 가방을 꾸린다...

 

 

예정에 있었던 책 읽기는 <홍도>였다. 제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앞쪽 몇 페이지만 넘겨봤는데 기존의 수상작들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수상할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그 감동을 못 찾았다. 끝까지 다 읽어봐야 알 수 있으려나...

 

계속 읽어야 하는데 자꾸만 눈이 감긴다.

예정했던 일은 여전히 예정과 다르게 잠으로 비켜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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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큰 스도쿠 148 세트 - 전2권 - 두뇌가 말랑말랑 논리력이 쑥쑥 어린이 큰 스도쿠 148
손호성 지음 / 아르고나인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초등 저학년인 조카에게 선물용으로 구매. 이 책을 시작으로 스도쿠의 매력에 푹 빠져보길 기대한다. 초보자에게 알맞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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