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편지 -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손거울 같은 책
윤석미 지음 / 포북(for book)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연필을 깎았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손이 다치지 않게, 커터칼로 조심스럽게 앞으로 밀면서 깎아냈다. 생각하고 싶은데 생각이 막히고 멈춰버렸을 때,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을 때, 집중할 게 필요하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 순간을 흘려보낼 수 있겠지만, 가끔 나는 그 순간을 연필을 깎으면서 흘려보낸다. 오직 이 연필을 깔끔하고 예쁘게 깎아내는 일만 생각한다. 다 깎고 나면 쓰던 메모지에 뭔가를 끼적이기도 한다. 펜으로 마구 휘갈겨 쓰는 촉감과는 사뭇 다르다. 연필 특유의 사각거리는 소리, 종이에 잉크가 번지는 것이 아닌 연필심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가루들, 펜을 사용했을 때 보다는 연하게 써지는 글씨들이 눈에 들어온다. 뭔가가 맘에 안 들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쓴다. 어렸을 때 처음 글씨를 배울 때의 마음 같다. 네모 칸 반듯한 노트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쓰고, 틀린 글자를 지우고 다시 쓰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글씨를 다 익히게 된다. 가끔 맞춤법이 틀리기도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지우고 다시 쓰고, 틀린 것을 또 배우면서 쓰면 되겠지.

 

뭐든 거기에 맞는 게 있다. 틀릴 수도 있고 지워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연필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거기에 맞는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면 맞춰가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인정해야 한다. ‘다름’을... 손이 예쁜 사람 발이 예쁜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노래를 잘하는 사람, 공부를 잘하는 사람 잡다한 지식이 많은 사람. 다양한 가능성과 다른 점으로 살아가는 세상인데 유독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눈에 더 들어올 때는 생각이 나아가질 못한다. 일시정지 같은데 영원히 정지가 될까봐 가슴이 막혀온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는 왜 안 되지? 왜 느리지? 왜?’ 하는 마음들이 벅차서 터질 것만 같을 때, 알면서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숨이 가빠져 올 때, 나에게만 적용되는 법칙들이 따로 있는 것만 같아서 혼란스러울 때, 느려터진 내가 한심스러워 보이던 그런 때... 저자 윤석미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왜 이런 문장은 띠지에 떡 하니 버티고 서서 내 눈길을 잡아끌고 있나?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단다. 달팽이걸음이라도 느려도 갈 길 다 가니까, 각자에게 맞는 옷이 있으니까, 인생은 오래달리기니까... 참 적절하게 들려준 이야기에 눈물 한 방울이 핑 돈다. 겉으로 보기에 똑같아 보이는 지게도 산길을 오르기 위한 지게와 들판을 다니기 위한 지게의 길이가 다르단다. 평지를 다니기 위한 지게는 다리가 좀 긴 편이고 산길을 다니기 위한 지게는 다리가 좀 짧은 편이라고, 수풀을 헤치고 다니는 그 길에 걸리지 말라고 지게의 다리가 좀 짧단다. 똑같은 지게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된다. 아마도, 맨 처음에 그 지게는 길이가 똑같지 않았을까. 사용하다 보니 산길을 다닐 때 거치적거려서 다리를 조금 잘라낸 것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산길에 딱 적당한 지게로 맞춤형이 된 것이겠지. 사람도, 그 사람을 둘러싼 많은 것들도 그렇게 적응하고 맞춰가는 거겠지 싶은 마음에, 점점 저자의 이야기에 동화된다. 지금 뭔가가 좀 안 맞아도 괜찮을 것 같고, 느리고 또 느려도 괜찮을 것 같고, 무엇 하나 옆에 붙어지거나 나가떨어진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고... 무조건 다 괜찮은 거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가는 데 이삼일, 오는 데 또 이삼일. 우체통에 넣은 편지가 서로에게 오가는 데는 보통, 일주일이 걸립니다.

그것도 편지를 받자마자 답장을 써서 그 길로 우체통에 넣었을 때만 그렇습니다.

이 느림보 편지를 두고 ‘달팽이 편지(Snail Letter)’라고 부릅니다. (110페이지)

 

손쉽게 문자 한통, 전화 한통, 실시간 이메일 전송, 더 빠르고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SNS. 세상이 점점 빨라지고 간편해진다. 내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두통일 생길 지경이지만, 지금이 그런 세상이라는데 부정할 수가 없다. 다만, 내가 그 속도에 맞추지 못할 뿐이다. 그렇게 빠른 세상에서 손으로 편지를 써서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고, 상대방에게 배달되기를 기다리고, 또 상대방이 답장을 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상대가 내 편지를 받고 바로 답장을 썼다고 했을 경우의 시간을 계산한 것이 일주일이다. 물론 바로 답장이 오지 않을 경우,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기다림의 시간이 더 길어지겠지. 그리고 마냥 기다리겠지. 답장이 올 때까지...

 

그런 달팽이 편지의 마음으로, 천천히, 조금은 느리게, 저자가 한 문장 한 문장 들려준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누군가가 한 말이기도 하고, 어디선가 한번쯤을 들어봤음직한 말이기도 하고, 대책 없이 긍정적인 말이기도 하다. 지금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냐고, 여기에 맞춰야만 제대로 가는 길이 아니겠냐고, 이대로 가도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물어야 했을까. 그러면서도 수도 없이 묻고 싶었던 순간들을 뒤로 하고 자꾸만, 자꾸만 그 자리에서 듣고 있게 된다. 듣고 있으면서 나도 모르게 혼자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고 있다. 그래서요? 이렇게 하면 될까요? 그건 아니지 않나요? 쉽지가 않아요. 틀린 것 같아요. 다른 것은 안 될까요? 그래요, 어쩌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시작도 끝도 내가 해야 한다는, 채우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비우는 것이라는, 내 발끝이 향하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가슴 속을 들여다보라는,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을 담아두라는 것도.

 

조금만 앉아서 쉬었다가 가더라도, 잠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더라도,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더라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안식... 저자가 조근조근 들려주는 한마디에 조금씩 마음을 내려놓는다. 편지를 보내고 다시 받기까지의 시간이 그렇게 느릿느릿 흘러가니, 덩달아 기다림의 시간도 길어지고, 진심을 가득 담은 한 마디가 더 값지게 담겨 있을 것만 같아서, 답장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 순간을 감당하게 만든다.

 

고인 눈물은 다 쏟아내야 합니다.

쏟아 내지 못한 눈물은 저 혼자 마르지 못하고,

마음 안에 고여 또 다른 상처를 만듭니다. (175페이지)

 

이상하게, 뭔가를 계속 끼적이면서 읽었던 책이다. 책의 문장을 필사한 것이 아닌, 읽으면서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기에 그랬다. 한 문장 읽고 이 생각, 다른 한 문장 읽고 저 생각, 그러다가 뭔가를 적어가고 있는 내 손가락. 어느 순간 보니 메모지에는 형체와 내용을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빼곡하다. 무슨 생각인가를 열심히 적었던 것 같은데, 알아볼 수 있는 글씨는 거의 없었다. 저자가 들려주는 문장에 빠져 나만의 생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가 보다. 세상에 좋은 말, 좋은 얘기, 참 많다. 그런 긍정적인 얘기를 듣고 있는 그 순간의 내 마음까지 긍정적이 된다면 더 없이 좋겠지.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언제 듣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제는 응원이 되었던 말이 오늘은 거추장스럽게 들릴 때가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유독 거슬릴 때도 있다. 이 책 속에서 저자가 하고 있는 말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이렇게 좋은 말들도 딱 적용할 수 있는 타이밍에 들려와야만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천천히 흐르는 저자의 목소리를 제법 좋은 순간에 만난 듯하다. 늘어지고 싶고, 아무 것도 손에 잡기 싫고, 두통이 머리 한 구석을 갉아먹고 있을 때, 저자가 나에게 달팽이 편지를 보내주었다. 천천히 써져 느리게 배달된 이 편지처럼, 나도 천천히 읽고 또 읽고 곱씹어보면서, 연필로 느리게 답장을 써야겠다. 쓰다가, 이게 아닌 것 같다는 마음이 들면 지우고 다시 쓰면서, 느리더라도 하고 싶은 말로 다시 채워 넣으면서. ‘내 마음, 잘 들여다볼게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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