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받아들인 적은 없다. 그렇다고 마냥 무겁게만 대하기에는 뭔가 이야기를 덜 한 느낌이라 개운하지 않았다. 꺼내기 어려운 주제이지만, 잘 듣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자주 접하고 싶기도 했다. 나와 내 가족이 경험하게 될 어떤 장면을 미리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조금 다른 의미로 보자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죽음이 내가 알던 것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도 했다. 그 죽음의 다양함을 확인하는 게 세상 사람들의 모습 전부는 아니겠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우리 살아가는 곳곳의 의미를 누군가의 죽음으로 알게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사실 내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죽은 사람이 만든 냄새가 가져다줍니다. 그 냄새를 극적으로 없앴을 때 내 비즈니스는 성공하지요. 대가로 살아 있는 사람이 나에게 돈을 지급합니다. (죽은 자의 집 청소, 6페이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죽은 자의 시간은 멈췄으니, 남겨진 자들은 죽은 자를 보내는 일과 죽은 자가 남기고 간 자리를 정리해야 한다. 보통은 그 일을 가족들이 맡아서 한다. 장례를 치르고, 죽은 자가 살았던 방(집)을 정리하고 청소한다. 하지만 혼자 있다가 죽는 사람은 누가 정리해줘야 할까.


여러 가지 사연으로 고독사하는 이들이 머물다 간 곳을 청소하는 사람. 저자는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한다. 처음 일반청소로 시작했던 일이 점점 찾아주는 사람이 많아지고, 청소의 범위나 사연이 다양해지면서 어느새 그는 특수청소의 전문가가 되었다. 일이 다양해지고 힘들겠지만, 그만큼 그의 손을 거친 장소는 깨끗해졌다. 그리고 그 특수청소 안에서 그는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가 청소하면서 읽은 그 공간의 주인들 삶이 조금씩 전해진다. 일명 고독사. 그 공간에 혼자 머물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보인다.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서 일하면 안 되겠지만, 인간인지라 보이는 것들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공간의 시간이 느껴지면서, 덩달아 연결되는 또 다른 생각들까지 같이 읽게 된다. 죽음이 우리 삶, 우리 사회와 절대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다. 누군가는 죽고 우리는 그 누군가를 애도하며 살아간다. 언젠가 나의 죽음을 두고 누군가의 애도를 받기도 하겠지. 만약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다가 죽은 게 아니라면, 어딘가에서 혼자 맞이하는 죽음이라면 나도 저자와 같은 특수청소업자의 마지막 인사를 받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어떤 고독사의 얼굴들을 만났을까. 비슷한 죽음 같았다. 죽음 이후의 청소하는 것도 다 똑같은 거 아닌가 싶었지만, 달랐다. 죽은 지 며칠, 몇 달 후에 발견되었다는 시간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죽은 자리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하기도 했고, 마치 오늘 아침에도 청소한 것처럼 분리수거를 해놓고 죽은 이도 있었다. 누군가는 죽기 전에 청소 가격을 문의하기도 했다. 읽으면서도 의심스러웠는데, 결국 그 의뢰인(?)은 자기 죽음 이후를 정리하는데 얼마의 돈이 드는지 그에게 묻고 싶었던가 보다. 보통은 죽은 이의 가족이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고, 세입자가 머물다 간 장소를 청소하고 복구해주기를 바라는 집주인이나 부동산 중개업자의 의뢰도 있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죽은 이가 머물던 자리를 정리하는 것이지만, 애도의 색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싶다. 가족이 떠나서 슬픈 마음 담은 정리와 재산 보호에 목적을 둔 이들의 의뢰가 완전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가끔은 경찰이나 검찰에게 의뢰받는 범죄 현장 정리도 있다. 범죄 피해자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장소에 다녀오기도 한다.


주로 가난한 이가 혼자 죽는 것 같다. 그리고 가난해지면 더욱 외로워지는 듯하다. 가난과 외로움은 사이좋은 오랜 벗처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이 세계를 순례하는 것 같다. 현자가 있어, 이 생각이 그저 가난에 눈이 먼 자의 틀에 박힌 시선에 불과하다고 깨우쳐주면 좋으련만. (죽은 자의 집 청소, 47페이지)


TV 뉴스에서나 보던 소식을 저자의 입으로 듣는 느낌이 달랐다. 혼자 살던 노인이 죽은 지 며칠 후에 발견되었다는, 세입자의 월세가 안 들어와서 가봤더니 벌써 죽은 지 몇 달은 되어 백골 형태로 남아있었다는 등의 이야기들. 저자가 방문하는 장소들의 사연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혼자 살다 죽은 자연사에 더해진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사연도 겹쳐 있다는 것이다. 고독사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확인하게 되는 건, 지금 우리 사회의 민낯이었다. 자기 존재를 죽음의 냄새로 먼저 알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씁쓸했다. 죽음의 현장에서 맡아지는 냄새를 온갖 수식어로, 그대로 표현하고 싶어도 적당한 표현이 없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그 자리에 없지만, 죽은 상태로 오래 방치되었다는 사실을 냄새로 알리는 듯하다. 방호복과 신발 위로 신은 덧신, 방진 마스크와 방독마스크, 의료용 장갑과 청소 소독 용품까지 챙긴 저자의 발걸음 무게를 알 것 같다.


세대를 가리지 않은 쓸쓸하고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죽음이 어느 사람인가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죽음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목숨을 내려놓기 바로 직전까지도 살아보려고 했던 흔적들이 집안 곳곳에서 발견된다. 죽은 이들에게서 나온 피와 오물, 여러 가지 유품에서 죽은 이들의 생전 일상을 유추하기도 한다. 대개 가난한 이들이 혼자 죽었으며, 가족이 아닌 채권자들이 안부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 유품이나 쓰레기에서 죽은 자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죽음에 다다르게 된 이유를 유추하게 되는 증거이기도 했다. 방바닥에 놓여있던 자기계발서에서 위로받고자 했던 누군가를 떠올린다. 병원 처방전에서 죽은 자의 몸이 어땠을지 그려보면서, 신문광고 속의 구인란을 눈여겨보던 어느 인생을 생각한다.


그가 보고 확인하는 죽음의 흔적에서 삶을 생각하게 된다는 게 아이러니이자, 저자가 이 기록을 남기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의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은 무게감에,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사실과 기록하는 이의 감정까지 들여다본다. 1인 가구와 고령 인구가 늘어나고, 매 순간 가계 빚이 사상 최고점을 찍는 현실의 암담함이 저자의 기록과 연결하여 생각하게 한다. 나는 아직 고령이 아니지만 죽음을 아주 먼 일로 생각할 수도 없게 하는 이야기에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고독사가 나이 성별 따져가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고독사의 공간이 아닌 쓰레기 집을 청소하는 의뢰가 올 때면 안도하기도 한다. 의뢰가 들어오는 쓰레기 집이 자살이나 고독사의 전조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말이다. 그런 집을 치울 때면 누군가 다시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외치는 것처럼 들릴 것 같다. 나를 옥죄던 이 공간을 치우면서 다시 살아갈 의지를 만드는 기도같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좋은 것만 생각할 수는 없다. 변기를 꽉 채운 똥을 장갑 낀 손으로 퍼내거나 오줌이 가득 찬 패트병을 볼 줄 누가 알았으랴. 고양이 사체 몇 개를 치워야 했던 순간은 또 어떻고. 그럴 때면 치우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그런 공간에서 살아야 했을 누군가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내 옆에, 내 공간에 자꾸만 뭔가를 쌓아가는 일. 저장 강박증은 조금 더 관심 두어야 할 현대인의 질병이 아닐까.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도기용 광택제를 뿌려서 변기와 세면대를 천사장 가브리엘의 이빨이라고 할 만한 수준으로 하얗고 눈부시게 닦아놓으면 마음이 참 뿌듯해진다. 더러움이나 불쾌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 자리엔 그저 순수하고 충만한 행복이 남는다.

어째서인지 인간의 마음도 더러운 화장실 청소처럼 얼마간 곤욕을 치르고 나면 잠시나마 너그러워지고 밝아진다. 평소 우울감에 시달려 단순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화장실 청소를 추천하고 싶다. 그 화장실이 더럽고 끔찍할수록 더 좋다. (죽은 자의 집 청소, 220~221페이지)


"누군가의 죽음을 돌아보고 의미를 되묻는 이 기록이 우리 삶을 더 가치 있고 굳세게 만드는 기전이 되리라고 믿는다"는 작가의 말이 무엇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느껴진다. 저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생계를 이어가지만, 그의 생계를 책임지는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다시 삶을 생각한다. 죽음의 공간을 청소하면서 마음속 청소를 한다. 위로가 된다. 죽음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묻는 방식이 누군가가 죽은 공간을 청소하는 일이라니 놀랍기도 하지만, 막연하게 생각했던 죽음의 모습들을 보니 세상을 더 깊게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은 개인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 죽음에 이르는 환경과 감정의 문제는 개인만의 일이 아니기도 하다. 사회가 같이 묻고 답을 찾아가야 할 많은 일 중의 하나를 이렇게 마주한다.


저자의 말처럼, 죽음이란 게 참 신비하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익숙하게 마주하는 죽음의 흔적이 지겨운 밥벌이의 고충으로 느껴질 법도 한데, 저자는 그 시간에 죽음의 곁을 들여다보고 삶의 생생함과 행복을 찾아간다. 오늘, 내 앞의 사소한 것들이 더 귀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시선 그대로를 배우고, 죽음 앞에서 삶이 더 절실해짐을 확인한다. 우리는, 우리 인생은 너무도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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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9-10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이들에게 둘러쌓여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는 그런 죽음의 장면. 그게 제가 꿈꾸는건데요. 쉽지않겠죠. 내 죽은 뒤의 자리를 스스로 정리하고 준비할수 있는것 누구에게나 오는 축복은 아니겠죠. 정말 죽음은 예측불허이므로 살아있는 오늘 하루가 소중해집니다. 구단씨님의 글로 죽음의 자리를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구단씨 2020-09-14 16:01   좋아요 0 | URL
저는... 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장면을 기대하다가도, 정말 누군가에게 악담을 들으면서 떠나는 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 혹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으로 기억될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지 문득 걱정되기도 하더라고요.
죽음으로 바라본 생의 의미를 들려주는 이야기에 한참 시선이 멈춰있었네요...
 

 

오오~ 정은궐 작가님.

작품을 계속 쓰고계셨네요...

신간 소식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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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전쟁
이종필 지음 / 비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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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놀랄 때가 있다. 마냥 상상만 하던 것이, 영화나 소설에서 봤던 모험 같은 판타지가 현실에서 가능한 것을 봤을 때 말이다. 얼굴 보고 통화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던 게 영상통화가 익숙한 시대가 됐고, 미지의 곳으로 여겼던 우주를 이제는 인간이 다녀오기도 한다. 누군가는 일반인의 우주여행 시대를 열겠다고 계속 투자하고 시도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의심은, 어느 날 실현 가능성 있는 현실로 나타나곤 했다. 그러니 인간이 가진 상상력이나 생각들, 어떤 시도들은 언젠가 우리 일상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 소설 역시 의도는 다를지 몰라도 인간이 이루어낸 과학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인공지능과 양자역학이 만들어갈 세상, 이거 정말 현실일까? 아니면 진짜 이런 시도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나?

 

놀랍네요. 그러니까 인공지능이 불완전한 데이터를 갖고 완전한 이미지를 복원해낼 수 있다는 얘기네요?” (32페이지)

 

세종로 사거리, 이순신 장군 동상에 목이 없는 시체가 매달렸다. 누가 저지른 일인가 하는 것도 의문이지만, 시체가 동상에 매달린 방법도 놀라웠다. 드론이 시체를 옮기고 올가미처럼 동상에, 그것도 한 번에 매달았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시체를 한 번에 매달을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드론이 해냈단 말인가. 사이언스이스트 기자인 하영란은 대학교수 조성환에게 연락해서 이 사실을 뉴스보다 먼저 알려준다. 이게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누구의 짓인지 묻고 싶었던 것. 이 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 성환은 영란과 함께 수사팀 윤태형을 만난다. 수사하는 입장에서는 성환의 도움이 컸다. 드론에 인공지능이 장착된다면 가능하다는데, 이렇게 한 번에 시체를 매다는 것까지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더 의문이고 범행의 목적이 궁금해진다. 더군다나 머리 없는 시체의 몸에는 사람 얼굴 모습을 그린, 아닌 철로 된 핀(공사 현장에서 사용하는 타카핀)으로 박은 사진이 있다. 성환은 컴퓨터로 그림을 확인하고,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하지만 그 이상 알아내는 건 무리였다. 이들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 사건을 저질렀는지 찾아야 하는 공동 목표가 생겼다. 주변의 잘 아는 이들에게 연락해서 조금씩 그 내밀한 이야기를 찾아간다.

 

인공지능의 역할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계속 궁금해지게 하는 소설이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이 사건에 개입되었고, 인류 역사에 어떤 결과물을 남길 것인지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이야기는 과학에 관계된 이들이 하나씩 들려주는 기가 막힌 과학의 발달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국의 과거 역사에서 비롯된 인식의 등장이기도 하다. 과학과 역사의식이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못된 역사의식이 어떤 비극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지켜보게 한다. 무엇보다 과학이 만들어낸 성과는 잘만 이용하면 긍정의 목적을 이루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인지도 높은 과학 교수 부부가 합작한, 인공지능과 양자역학을 접목한 연구는 하나의 프로젝트가 된다. 과거 복원 프로그램. 현재의 자료를 가지고 과거 어느 시점의 사실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기본 원리로 현재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는 일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인데, 아무런 부작용 없이 가능한 일일까? 무슨 일이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민감하고 완벽하지 않은 일을 진행하는데 위험이 없을 수가 없다. 무언가(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할 수도 있고, 누군가(무언가)는 의도하지 않은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이들이 진행한 과거 복원 프로그램은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이 관계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국정원이 관여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과거 복원 프로그램은 무슨 일이기에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누군가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이 일의 중심에 있게 된 것일까.

 

엄청난 성능의 양자컴퓨터가 있다면 조각난 일부의 정보만으로도 나머지 필수적인 퍼즐을 재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적어도 불가능하진 않다고 봐야겠죠.” (96페이지)

 

조금씩 뚜껑이 열린 이 사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치닫는다.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관계되어 있었고, 그들이 품은 사건의 배경은 놀랍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의 어느 시대, 과거 고종과 명성황후가 존재했던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고, 몇 대에 걸친 조상과 후손들까지 그물망처럼 촘촘히 엮인 이야기로 펼쳐진다. 그리고 밝혀진 인공지능의 정체를 확인했을 때는 끔찍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인간은 정말 이렇게까지 발전을 이루어야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 적당한 걸음으로 필요한 만큼만 이루어가는 과학의 발달을 그려보면 안 되는 것일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여러 장소는 사건의 전말과는 대조적으로 그려져서 더 안타까웠다. 이순신 동상이 있는 광화문과 그 뒤의 경복궁, 대명대학교(가상)의 인공지능연구소는 세계 최고의 이름으로 불렸고, 종로경찰서의 수사관들과 한강을 묘사하는 문장들. 과거의 현재와 미래가 겹쳐진 공간에서 잘 어우러진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무시하고 싶어도 저절로 관심이 가는 양자역학이나 인공지능, 거의 모든 것이 자동화가 되어가는 현재의 시스템, 그런데도 여전히 아날로그의 감정을 필요로 하는 인간 세계의 아이러니를 확인한 기분이다. 전문적인 용어도 많았지만,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 맞는 설명으로 소설을 읽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판타지와 현재의 모습을 적절하게 접목한 게 재밌기도 했고,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라는 역사와 과학의 충돌 같은 장면들도 흥미로웠다. 어쩌면 소설에서 다 보지 못한 과학의 무한한 미래는 또 다른 이야기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도 생긴다. 인간이 추구하는 과학의 발전은 절대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을 대신하는, 아니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역할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과학을 잘 몰라서 소설에서 등장하는 여러 가지 용어나 해설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로 만나는 과학의 놀라움은 여러 가지로 흥분될 수밖에 없었다. 과학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나, 과학자가 우리 사회에 지는 책임감 같은 것을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었다. (주인공의 고민이나 마지막 선택을 보면 저절로 느껴진다)

 

어쩌면 인간이기에 가능한 상상력과 도전이 아니었나 싶다. 그 바탕이 되었던 역사의식은 위험했지만, 좋은 방향으로 목적을 둔 시도는 응원하고 싶기도 하다.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역사와 사회 등 많은 시선으로 파고들기 좋은 소설이다. 조금은 더 쉽게 풀어서 들려주는 과학 서적으로도 만나고 싶은 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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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흔들리는 중입니다 - 산책길 들풀의 위로
이재영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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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흔이면 엄청 어른인 거 같고 대부분의 일들이 다 해결되어 있을 거라고 믿고 살았는데 아니었다. (6페이지)


왜 하필 마흔일까. 인생의 계단을 한번 오를 때마다 느껴지는 10년이라는 간격이 있었지만, 스물 서른을 넘기고 마흔에 다가간 감정을 확인하는 이유가 있을까? 이 책의 제목을 거꾸로 묻고 싶기도 했다. 살면서 흔들리지 않은 때가 언제였더냐고, 그런 때가 있다면 오히려 흔들리지 않은 때를 세는 게 더 빠르겠다고. 하루를 보내면서도, 몇 년의 세월을 넘어가면서도, 한 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작은 선택 하나를 할 때도, 갑자기 닥친 큰 문제를 해결할 때도 언제나 마음은 위태로웠다. 그저 그 순간, 오늘을 잘 건너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니 저자가 말하는 마흔 즈음의 흔들림은, 그냥 우리가 사는 모든 찰나의 순간이 이어져가는 거라고 느껴진다. 어차피 오늘도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고, 내일도 흔들리는 날들을 감당하면서 걸어갈 테니까 말이다.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작가는 마흔에 접어든 순간의 일상이 흔들림을 경험한다. 작가라고 하기에도 깊게 뿌리내리지 못했고, 프리랜서 작가로의 일도 그즈음 줄었다고 한다. 소박하게 꾸려가는 작은 책방 역시 현상 유지만 할 뿐이라니,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 오늘이겠는가. 중학생 딸과의 관계도 잘 이어가야겠고, 저자 자신의 삶도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데, 무엇 하나 완벽하게 갖춰진 것 같지도 않다.


나이 마흔. 어릴 때 들었던 마흔이란 숫자는 참 대단해 보이고 굉장한 어른이 된 것만 같았는데, 막상 자기 앞에 닥친 마흔은 아직 어른도 아니었고, 마냥 편하게 안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가까운 이가 그런 말을 하더라. 마흔이 넘으면 뭐든 다 자리 잡은 상태일 거라고, 결혼하고 직장 잘 다니고 아이 키우면서 걱정 없이 하루하루 잘 지내면 될 것 같았다고. 그런데 현실은 한없이 불안하고 아직도 아이인 것만 같은 날들이라고, 적성과 다른 직장에서 버티는 나날에 '억' 소리 나는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할까 봐 걱정이고. 계속 달린 것 같은데 왜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은지 모르겠다고, 죽을 때까지 자리 잡기는 잡는 거냐면서. 누구나 오늘을 살면서 느끼는 건 비슷한 것 같다. 괜찮을까 하면서 나아가고, 지치고 힘들 때마다 또 마음이 갈팡질팡 우울해지고.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면서도 다른 선택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삶. 저자도 비슷하게 말하더라.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느냐고. 나도 웃으면서 그런 말 자주 했다. 다시 고3으로 돌아간다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는 친구 말에, 나는 그때로 돌아가도 공부를 더 열심히 잘할 것 같지는 않다고.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더 고민하고 선택하고 싶다고.




아마도 저자는 흔들리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붙잡아줄까 하는 바람으로 걷지 않았을까 싶다. 잠깐 걸으면서 눈앞의 것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을 기록한다. 넘어질 것 같을 때 걷기로 한 저자의 발걸음이 여러 곳을 향하고 많은 것을 보게 했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반려견과 함께. 아름다운 이름과 꽃말을 가진 식물들, 들꽃이라 불리며 길가에 단단하게 피어 있는, 풀 같으면서도 피어있다는 것 자체가 예쁘고 고운 것들. 항상 다니던 길인 것 같은데 왜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나 싶어서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다. 패랭이꽃의 화려한 색을 왜 못 보고 지나치기만 했는지, 왕고들빼기꽃이 이렇게 예뻤나 싶고, 강아지풀의 꽃말은 왜 동심과 분노처럼 대조적인지, 담쟁이가 덮고 있는 저 담 너머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궁금해지기도 하는...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면서, 길에서 마주친 꽃과 풀에서 섞여 나오는 자기 이야기에 인생의 어느 부분을 되새기기도 한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과 마주하면서, 계획하지 않았던 시간과 만났다. 물가에 핀다는 고마리를 보면서 고이지 않고 흘러가는 인생을 생각한다. 어떻게든 흘러가는 게 인생이겠거니 하는 마음의 긍정을 찾는다. 가슴에 뭔가 꽉 찬 것처럼 답답한 속내가 길에서 만난 작은 꽃 하나에 스르륵 풀리기도 한다. 나를 숨 가쁘게 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눈을 돌리니 주변이 보이고, 소소한 아름다움이 보이고, 그렇게 보이는 것들이 흔들리는 마음에 중심을 잡아주는 듯하다. 여기저기 뿌리내린 작은 초록들은 제각각 자기의 모습 그대로 꿋꿋하게, 누가 와서 봐주지 않아도, 조금 천천히 자라도,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남은 생은 실속 있는 알밤처럼 알맞게, 매달려 있을 만큼만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지루하고, 적당히 행복하고 불행하다가, 적당히 얻기도 하고 내주기도 하면서, 적당히 여물어 땅으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속도이자 앞으로도 쭉 유지하고 싶은 속도이고 내 꿈이다. (171페이지)


작은 것들은 작아서 더 오래 내 곁에 남는다. 크고 무거운 것들은 생의 어느 순간 버겁게 느껴져 헤어짐의 수순을 밟는다. 비싸게 돈 들여 산 옷이라도 옷장을 차지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애물단지가 되고 결국 버려지고 만다. (중략) 사람과의 관계도, 그밖의 많은 것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은 자연스레 정리되기 마련이다. 작은 관계, 작은 성취, 작은 성공, 작은 수고, 작은 행복, 작은 즐거움, 음악, 색깔, 향기처럼 아예 손에 쥘 수 없는 것들. 인생에 중요한 건 웅장한 게 아니라 작고 사소해서 긴밀하고 떨어지지 않는 그런 것들이 아닐까. (208페이지)



마음이 괜찮지 않은 어떤 날들은 흘러갈 거라고 위로하는 글이다. 길가에 보이는 꽃과 풀을 보면서 자기가 흘러온 시간을 반추하며 하는 이야기가 새삼 낯설지 않다. 땀 흘리면서 걷던 어느 저녁 시간이 개운했던 것처럼, 익숙하게 나를 감싸고 있던 것들에서 잠시 눈 돌리는 땡땡이가 필요하다. 조금씩 천천히, 괜찮아지는 날들과 마음을 기대하면서 공감하는 문장들이다.


어제 저녁에는 밥을 먹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 왜 그런지는 모르겠고, 그냥 밥 한 숟가락 밀어 넣고 울컥하는 기분에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가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놀랐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유를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요즘 며칠 괜히 우울하고, 워낙 집순이인데도 반강제적으로 나가지 못하는 시간이 계속되니까 그런지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이 가득하다. 핑계지만 움직이는 시간이 줄어드니 살이 찌는 속도도 빠르다. 반년 넘게 심각한 감염병 때문에, 긴 장마에 안 나가고, 폭염에 숨이 막혀서 못 나가고, 태풍이 몰고 오는 바람이 무서워서 스스로 집안에 가두는 시간. 가을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새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가로수 잎들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꽉 막힌 속을 뚫을 수 있는 것은 문득 시선을 돌린 어느 곳에서 발견한, 소소한 것 하나에서일 수도 있다. 아마도 오늘은, 마음을 묶어두는 것을 잠시 내려놓아도 좋은, 태풍이 지나간 어느 길 위를 땀 흘리면서 걸어도 좋은 하루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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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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