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흔들리는 중입니다 - 산책길 들풀의 위로
이재영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마흔이면 엄청 어른인 거 같고 대부분의 일들이 다 해결되어 있을 거라고 믿고 살았는데 아니었다. (6페이지)


왜 하필 마흔일까. 인생의 계단을 한번 오를 때마다 느껴지는 10년이라는 간격이 있었지만, 스물 서른을 넘기고 마흔에 다가간 감정을 확인하는 이유가 있을까? 이 책의 제목을 거꾸로 묻고 싶기도 했다. 살면서 흔들리지 않은 때가 언제였더냐고, 그런 때가 있다면 오히려 흔들리지 않은 때를 세는 게 더 빠르겠다고. 하루를 보내면서도, 몇 년의 세월을 넘어가면서도, 한 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작은 선택 하나를 할 때도, 갑자기 닥친 큰 문제를 해결할 때도 언제나 마음은 위태로웠다. 그저 그 순간, 오늘을 잘 건너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니 저자가 말하는 마흔 즈음의 흔들림은, 그냥 우리가 사는 모든 찰나의 순간이 이어져가는 거라고 느껴진다. 어차피 오늘도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고, 내일도 흔들리는 날들을 감당하면서 걸어갈 테니까 말이다.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작가는 마흔에 접어든 순간의 일상이 흔들림을 경험한다. 작가라고 하기에도 깊게 뿌리내리지 못했고, 프리랜서 작가로의 일도 그즈음 줄었다고 한다. 소박하게 꾸려가는 작은 책방 역시 현상 유지만 할 뿐이라니,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 오늘이겠는가. 중학생 딸과의 관계도 잘 이어가야겠고, 저자 자신의 삶도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데, 무엇 하나 완벽하게 갖춰진 것 같지도 않다.


나이 마흔. 어릴 때 들었던 마흔이란 숫자는 참 대단해 보이고 굉장한 어른이 된 것만 같았는데, 막상 자기 앞에 닥친 마흔은 아직 어른도 아니었고, 마냥 편하게 안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가까운 이가 그런 말을 하더라. 마흔이 넘으면 뭐든 다 자리 잡은 상태일 거라고, 결혼하고 직장 잘 다니고 아이 키우면서 걱정 없이 하루하루 잘 지내면 될 것 같았다고. 그런데 현실은 한없이 불안하고 아직도 아이인 것만 같은 날들이라고, 적성과 다른 직장에서 버티는 나날에 '억' 소리 나는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할까 봐 걱정이고. 계속 달린 것 같은데 왜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은지 모르겠다고, 죽을 때까지 자리 잡기는 잡는 거냐면서. 누구나 오늘을 살면서 느끼는 건 비슷한 것 같다. 괜찮을까 하면서 나아가고, 지치고 힘들 때마다 또 마음이 갈팡질팡 우울해지고.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면서도 다른 선택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삶. 저자도 비슷하게 말하더라.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느냐고. 나도 웃으면서 그런 말 자주 했다. 다시 고3으로 돌아간다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는 친구 말에, 나는 그때로 돌아가도 공부를 더 열심히 잘할 것 같지는 않다고.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더 고민하고 선택하고 싶다고.




아마도 저자는 흔들리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붙잡아줄까 하는 바람으로 걷지 않았을까 싶다. 잠깐 걸으면서 눈앞의 것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을 기록한다. 넘어질 것 같을 때 걷기로 한 저자의 발걸음이 여러 곳을 향하고 많은 것을 보게 했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반려견과 함께. 아름다운 이름과 꽃말을 가진 식물들, 들꽃이라 불리며 길가에 단단하게 피어 있는, 풀 같으면서도 피어있다는 것 자체가 예쁘고 고운 것들. 항상 다니던 길인 것 같은데 왜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나 싶어서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다. 패랭이꽃의 화려한 색을 왜 못 보고 지나치기만 했는지, 왕고들빼기꽃이 이렇게 예뻤나 싶고, 강아지풀의 꽃말은 왜 동심과 분노처럼 대조적인지, 담쟁이가 덮고 있는 저 담 너머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궁금해지기도 하는...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면서, 길에서 마주친 꽃과 풀에서 섞여 나오는 자기 이야기에 인생의 어느 부분을 되새기기도 한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과 마주하면서, 계획하지 않았던 시간과 만났다. 물가에 핀다는 고마리를 보면서 고이지 않고 흘러가는 인생을 생각한다. 어떻게든 흘러가는 게 인생이겠거니 하는 마음의 긍정을 찾는다. 가슴에 뭔가 꽉 찬 것처럼 답답한 속내가 길에서 만난 작은 꽃 하나에 스르륵 풀리기도 한다. 나를 숨 가쁘게 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눈을 돌리니 주변이 보이고, 소소한 아름다움이 보이고, 그렇게 보이는 것들이 흔들리는 마음에 중심을 잡아주는 듯하다. 여기저기 뿌리내린 작은 초록들은 제각각 자기의 모습 그대로 꿋꿋하게, 누가 와서 봐주지 않아도, 조금 천천히 자라도,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남은 생은 실속 있는 알밤처럼 알맞게, 매달려 있을 만큼만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지루하고, 적당히 행복하고 불행하다가, 적당히 얻기도 하고 내주기도 하면서, 적당히 여물어 땅으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속도이자 앞으로도 쭉 유지하고 싶은 속도이고 내 꿈이다. (171페이지)


작은 것들은 작아서 더 오래 내 곁에 남는다. 크고 무거운 것들은 생의 어느 순간 버겁게 느껴져 헤어짐의 수순을 밟는다. 비싸게 돈 들여 산 옷이라도 옷장을 차지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애물단지가 되고 결국 버려지고 만다. (중략) 사람과의 관계도, 그밖의 많은 것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은 자연스레 정리되기 마련이다. 작은 관계, 작은 성취, 작은 성공, 작은 수고, 작은 행복, 작은 즐거움, 음악, 색깔, 향기처럼 아예 손에 쥘 수 없는 것들. 인생에 중요한 건 웅장한 게 아니라 작고 사소해서 긴밀하고 떨어지지 않는 그런 것들이 아닐까. (208페이지)



마음이 괜찮지 않은 어떤 날들은 흘러갈 거라고 위로하는 글이다. 길가에 보이는 꽃과 풀을 보면서 자기가 흘러온 시간을 반추하며 하는 이야기가 새삼 낯설지 않다. 땀 흘리면서 걷던 어느 저녁 시간이 개운했던 것처럼, 익숙하게 나를 감싸고 있던 것들에서 잠시 눈 돌리는 땡땡이가 필요하다. 조금씩 천천히, 괜찮아지는 날들과 마음을 기대하면서 공감하는 문장들이다.


어제 저녁에는 밥을 먹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 왜 그런지는 모르겠고, 그냥 밥 한 숟가락 밀어 넣고 울컥하는 기분에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가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놀랐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유를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요즘 며칠 괜히 우울하고, 워낙 집순이인데도 반강제적으로 나가지 못하는 시간이 계속되니까 그런지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이 가득하다. 핑계지만 움직이는 시간이 줄어드니 살이 찌는 속도도 빠르다. 반년 넘게 심각한 감염병 때문에, 긴 장마에 안 나가고, 폭염에 숨이 막혀서 못 나가고, 태풍이 몰고 오는 바람이 무서워서 스스로 집안에 가두는 시간. 가을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새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가로수 잎들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꽉 막힌 속을 뚫을 수 있는 것은 문득 시선을 돌린 어느 곳에서 발견한, 소소한 것 하나에서일 수도 있다. 아마도 오늘은, 마음을 묶어두는 것을 잠시 내려놓아도 좋은, 태풍이 지나간 어느 길 위를 땀 흘리면서 걸어도 좋은 하루일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