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뱅크 The 중국어 Step 1 (본책 + 워크북 + 오디오 CD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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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다처럼 짰다 띵 시리즈 6
고수리 지음 / 세미콜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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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들어라. 잘 들으래도 너는 듣지 않겠지만. 인생이 그렇다. 부모가 중요하다고 여러 번 일러줄 때는 귀찮고 부아가 나서 잔소리라고만 여겼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중요하게 느껴지고 중요하게 나타난단다. 그걸 깨닫고 배우고 싶어서 달려가면 부모는 없어. 그 맛도 이미 없고. 그게 얼마나 허망한 마음인지 아니.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부모가 중요하다 하는 것들에 대해 조금은, 아니 조금만 너그럽게 돌아봤으면 좋겠어.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말이야.” (99~100페이지, 엄마가 쥐여준 보따리를 먹기만 할 때는 몰랐지, 가자미식해)


이번 명절에는 전을 부치지 않았다. 가족이 오지 않기도 했지만, 명절 연휴 전에 퇴원한 엄마 때문이기도 하다. 통깁스한 다리로 괜히 이것저것 하신다고 몸을 움직이실까 봐, 본인의 불편한 몸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여기며 조심하려는 게 눈에 보인다. 명절이라고 꼭 전을 부쳐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엄마의 음식을 떠올리면 먹고 싶은 게 있다. 전라도에서 유명한 홍어회 무침을 먹지 못하는 식구들 때문에, 엄마가 항상 해주시던 것은 오징어회 무침이다. 맛은 비슷하다. 주재료가 홍어에서 데친 오징어로 바뀐 것뿐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메뉴다. 나도 엄마의 어깨너머로 본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흉내를 내도, 맛집이라고 소문난 반찬가게에서도 파는 그 음식을 맛있게 먹은 적이 없다. 오직 엄마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맛. 언젠가는 동생이 오징어회 무침이 너무 먹고 싶어서 반찬가게에서 사 왔는데 도저히 맛이 안 나서 먹다가 결국 버렸다고 얘기했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오징어를 사 와서 바로 만들어서 택배로 보냈다지. 그것도 다 엄마가 건강할 때 얘기다. 언젠가 우리 곁에서 사라질 엄마, 지금처럼 아픈 몸으로 자식의 돌봄을 받는 엄마라면 이제 더는 엄마의 손맛을 즐길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기억에서 소환할 수밖에 없는 그 맛. 저자는 저자와 엄마, 엄마 엄마의 마음을 이어온 그 맛에 관해 이야기한다. 특히 바닷가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그 특유의 짠맛이 문장 곳곳에서 묻어난다. 읽는 내내 코끝으로 그 바닷냄새가 들어오는 것만 같다. (미안하지만 나는 좋아하지 않는 그 맛 말이다. ^^) 바다에서 얻은 것들로 힘들게 자식들을 키운 할머니, 그 할머니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음식들을 먹고 자란 엄마, 그 입맛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딸. 이들의 삶과 일상에 함께한 음식 이야기를 듣다 보면, 대물림하는 것은 유산만이 아니라 입맛이기도 하다는 게 새삼스럽다. 닮아간다는 것. 마음이 연결되지 않으면 불가능할 그 닮음이 음식에서도 그대로 보인다.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마음을 음식에 담아 먹이고 키웠다. 추운 겨울에도 바다에 뛰어들어 해산물을 잡아서 올라오고, 생계를 위해 내다 팔면서도 내 자식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남겨두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할머니의 그 마음을 엄마도 그대로 닮았겠지. 그 사랑 그대로 먹고 자랐으니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저자가 자라면서 받은 엄마의 밥상에서도, 엄마가 된 저자가 차려내는 밥상에서도 빠지지 않는 고등어는 3대에 걸친 이 가족의 사랑이었으리라.


이들이 먹고 자란 짜고 비릿한 바다 음식 앞에서 누구라도 울컥할 수밖에 없다. 자연에서 걷어 올린 것으로 내 자식을 키워내고 생계를 이어갔으며, 엄마가 되고 보니 엄마의 고됨을 너무 잘 알아서 더 이해하고 애틋할 수밖에 없는 딸의 마음을 그려내는 문장 앞에서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을까. 부모와 털어져 타지에서 자취생활을 하면서도 차려 먹는 밥상을 기어코 유지했던 것은 당연하게 몸에 밴 습관이었을 테다. 처음에는 귀찮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아무렇게나 채웠던 끼니가, 내 몸과 엄마의 밥상을 생각하니 저절로 따라서 하게 되는 이상한 마음. 이들이 하나씩 차려냈던 밥상은 그냥 음식이 아니다. 모녀 사이가 대물림하면서 나눈 다정한 마음 그대로였다. 말로 다 하지 못한 그 마음을 눈앞의 음식에서 읽어내는 능력을 발휘하는 건, 마음이 이어진 관계이기 때문일 거다. 제주 해녀 출신 할머니가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바다 음식, 강원도 생활이 오래된 엄마의 자연 음식, 그 두 가지를 골고루 만들어내는 저자의 음식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노릇하게 고등어를 굽고 살을 발라 밥 한 숟가락 위에 올려주는 건 엄마의 마음밖에 없는 듯하다. 그 짭조름한 맛이 문장 곳곳에 새겨져 있다. 마치 생선 한번 구워 먹고 온 집안에 냄새가 배여 쉽게 빠지지 않는 어느 날의 풍경 같다. 읽으면서 아쉽고 또 아쉬웠던 게 고등어를 구워 올려주는 밥상 풍경이었다. 언젠가부터 집안에 냄새가 배니까, 아무리 손질 잘하고 환기 잘하면서 구워도 오래가는 그 특유의 생선구이 냄새 때문에 집에서는 생선을 구워 먹지 않게 됐다. 생선조림 역시 마찬가지. 생선을 좋아하는 엄마도 그 냄새 때문에 먹는 걸 포기할 정도였으니. 그래서 가끔 근처의 생선구이 집에 가서 먹고 오곤 하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괜히 냉동실에 넣어둔 굴비라도 한번 구워 먹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시를 잘 발라낸 생선 살 몇 조각이면 밥 한 그릇 뚝딱인데, . 그것뿐이면 다행인데, 저자가 기억에서 소환하는 음식들 대부분 입에 침이 고이게 한다. 건강에는 그다지 좋지 않을, 맵고 짜서 자극적인 입맛을 그대로 불러온다.


몰랐던 것들도 알게 되는 이상한 책이기도 하다. ‘보리토시의 동해안 사투리라고 한다. 나도 처음 들었다. 이곳 전라도에서 부추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같은 것을 두고 저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른 건 왜일까, 언제부터 그랬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프리마 우유가 무슨 브랜드인가 했는데, 어릴 적에 할머니가 프리마와 설탕을 넣어 타준 우유라고 한다. 잠깐 프리마가 뭘까 생각하다가 떠올랐다. 요즘의 커피믹스를 수고스럽게(?) 타서 먹던 재료. ^^ 우리 엄마의 커피 황금비율은 ‘2(커피) : 2(프리마) : 2(설탕)’이었다. 저자의 할머니가 커피를 빼고 타준 게 프리마 우유였다고. 빙 둘러앉아 해물파전을 부치면서 명절의 고단함을 음식과 수다로 풀어내던 이모들의 등장은 시끌벅적했다. , 생각만 해도 푸짐하다. 음식도 사람도. 그렇게 모여서 만들어 먹어야 맛있는데. 언젠가부터 단출해지고 조용해지는 게 우리 집 명절인데, 올해 설날은 정말 고요했던 기억에 괜히 서글퍼진다. 저자의 할머니가 엄마의 손에 쥐여준 보따리 속에 맛있게 머물렀던 가자미식해의 추억은 눈물이 난다. 언제까지나 엄마가 그 자리에서 가자미식해를 해줄 거로 여겼을까. 미처 엄마에게 배워두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는 이 모녀의 말에 계속 눈물이 났다. 어디서든 쉽게 먹을 수 있는 가자미식해가 기억 속에 머물던 그 맛이 아니라는 게 아파서 말이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이런 음식을 만나본 사람은 알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이 평생 기억에 남은 이유가 단순히 맛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어떤 음식은 손으로 만드는 위로 같다. 재료를 구하고 씻고 다듬고 만들어 전하는 수고로움과 누군가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이 한데 섞인 맛깔스러운 위로. 그런 음식을 입으로 넘겼을 때 나는 처음으로 미음을 먹어본 아기처럼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저 고맙습니다, 인사하며 울 것 같은 마음으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세상에는 이런 음식도, 이런 위로도 있다. (48~49페이지, 아랫집이랑 나눠 먹으렴, 김치)


슬픈 일에도 웃을 수 있고 기쁜 일에도 울 수 있는 것. 기꺼이 같이 울어줄 수 있는 것. 그럴 수도 있지 헤아려보는 것. 심각하다가도 툭툭 털고 일어나 밥을 먹는 것. 내가 지어 내가 먹는 것. 나눠주는 것. 힘차게 껴안아 주는 것. 씩씩한 것. 내가 가진 기질들은 모두 우리 집 여자들에게서 배운 것들이었다. (68~69페이지, 웃음도 울음도 쉽고 다정하여, 해물파전)


단순히 음식 이야기에 머물지 않아서 더 애틋한 이야기로 남을 듯하다. 저자 엄마의 자매들은 자라면서 할머니의 일을 함께했다. 김을 만들고, 할머니가 따온 미역을 정리하는 일을 도우면서 생계를 위한 부모의 고단함을 체험했다. 어려웠던 형편에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힘이 들었을 부모에게 조금이나마 보태려는 마음이 고맙다. 그래서일까. 자매들 누구도 가난을 푸념하며 원망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함께 모이면 수다 떨고 추억 곱씹으며 같이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기에도 바쁘다는 것을 진즉에 알았던 듯하다. 저자 역시 성장의 시간에 함께한 음식을 소소하게 기억하고 새긴다. 일의 고단함을 그대로 풀어냈던 대구탕의 개운함, 동생과 둘이서 혼밥의 시간을 달랬던 달걀밥, ‘꼬아내서끓여야만 제맛을 내는 미역국 레시피처럼, 삶의 모든 순간에 음식이 있었다.


사랑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입이라도 더 넣어주고 싶고, 맛있는 거 먹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고, 손수 차려서 밥 한 끼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뭐냐고. 삶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담긴 음식 앞에서 세월을 느끼고 엄마를 생각한다. 그 음식들은 대부분 짠맛과 동의어처럼 들렸고, 이 가족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 그 짠맛은 바닷냄새 그대로이기도 했고, 고단한 일상에서 흐르는 눈물의 맛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엄마의 인생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맛이기도 할 테다. 엄마 생각만 하면 짠하니까. (.) 할머니에서 엄마, 저자에 이르는 한 가족의 과거와 현재를 짭짜름한 맛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누구라도 비슷할 평범한 일상과 익숙하게 매일 먹는 밥이 의미를 담은 채로 남겨졌다. 사랑스럽고, 그립고, 눈물 나고, 애틋해서, 특별했다. 즐거울 수만은 없는 인생이겠지만, 아프기만 한 인생도 아닐 것이다. 내가 아직 엄마 나이만큼 살아보려면 많은 시간이 남았지만,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니 보이는 것이 점점 많아진다.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보고 싶고 그리워질 대상이 되기도 하더라.


엄마. 엄마.

엄마랑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엄마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기억하고 싶었다. 헤어질 때마다 항구식당에서 먹었던 맵고 짠한 우리의 작별 식사를, 언제나 버스가 떠날 때까지 창밖에서 손 흔들어주던 엄마의 얼굴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헤어질 땐 맵고 짠하게 안녕.

맛있는 음식들 쟁여 먹은 힘으로 열심히 살다가 돌아올게. (146~147페이지, 헤어질 땐 맵고 짠하게 안녕, 잡세기탕)


문장에서, 활자에서 음식이 그대로 보이는 착각을 할 정도로 맛있게 읽었다. 짠맛과 비린내가 이렇게 먹음직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니... 이 밤에 내일 아침 밥상에 올릴 생선구이를 떠올리며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킨다. 온 집안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꼭 구워 먹을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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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두 살 여자, 혼자 살만합니다 - 도시 여자의 리얼 농촌 적응기
가키야 미우 지음, 이소담 옮김 / 지금이책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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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의 소설도 그렇긴 하지만 일본 소설을 읽을 때 자주 느끼는 게, 비슷한 환경과 문화에서 겪는 일들이 너무 닮았다는 거다. 거기에 이 작가, 가키야 미우의 작품 속 주인공들과 그들이 마주한 여러 가지 사연들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심정을 토로하는 건 듣는 기분이 들거나, 어느 드라마에서 봤을 법한 고민을 마주하는 듯하다. 그런 이유로 저자의 작품을 좋아한다. 가식을 떨칠 수 있는, 굉장히 적나라한 상황과 심리 묘사로 현실에 찰싹 달라붙은 우리의 이야기를 펼치곤 해서 말이다.


인간이 절망을 느끼며 다시 바닥 짚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는 건 국적을 가리지 않는가 보다. 계약직으로 일하는 구미코는 긍정적이었다. 일도 잘하고 분위기도 좋았으니 이번 계약이 끝나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거로 믿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계약이 끝났다는 통보로 구미코와의 인연을 끝냈다. 설상가상, 7년째 동거하며 지내온 남자친구는 새로운 인연이 생겼다며 헤어지자고 말한다. 둘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같이 준비하며 합했던 모든 것은 이제 나뉘어야 한다. 특히 구미코에게는 머물 공간이 필요했다. 부모도 가족도 없는 그녀가 돌아갈 곳도 없다. 갑자기 회사에서 잘리고 살던 집에서도 나가야 하는데, 도저히 해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구인란을 뒤지며 새로운 일을 찾고 있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단기로 일하는 시간제만 있다. 그녀가 찾고 싶은 정규직에 안정적인 직장은 그녀를 거부한다. 그녀의 나이 이제 삼십 대 중반을 향해 간다. 무언가 안정되어 있어도 모자랄 판에 더 불안한 현실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모아놓은 돈은 집을 구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집을 구하려면 보증이 될만한 배경이 필요하다. 다닐 직장도, 가야 할 집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듣기만 해도 캄캄하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하고, 내 몸 하나 편히 뉠 곳도 없다는 건 얼마나 벼랑 끝이란 말인가. 이것저것 시도하면서도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고 절망에 절망을 거듭할 무렵, 그녀의 눈에 들어온 한 가지. 농업.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홍보하는 장면에 시선을 빼앗긴다. 직접 몸을 움직여서 땅을 고르고 씨앗을 심고 정성 들여 가꾸니 무언가가 자란다. 채소와 과일이 눈에 그대로 담긴다. , 뭐든 노력하는 만큼 내놓고 보여주는 게 땅이구나. 그녀는 농업을 가르쳐주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실습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농업을 계속할수록 자신감이 붙는다. 이제 모든 수업은 끝나고, 실전이다. 땅을 구하고 열심히 채소를 가꾸기만 하면 된다.


생각하는 그대로 모든 게 현실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의 끝에 다다랐다고 생각할 무렵 농업을 알게 되고, 이제 다시 일어설 일만 남았다고 두 주먹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쳤건만, 현실은 냉혹했다. 시골에서 여자 혼자 농사를 짓겠다고 하자 모두가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대대손손 농사를 지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뜬금없이 나타난 뜨내기가 농사를 짓겠다고 바람을 일으키니 좋아할 사람이 없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봐도 인내심을 가지고 농업을 하면서 시골에 정착한 사람이 없더라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구미코는 당황한다. 땅을 임대해야 농사를 짓고 집도 짓고 하면서 시골 생활에 적응할 텐데, 준비 단계에서부터 그녀는 다시 꽉 막힌 현실에 부딪힌다.


가까운 주변에 농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실제로 농사를 지켜본 적은 없다. 마트에서 필요한 채소 몇 가지 사다 먹으면 된다는, 편한 일상을 지내기만 했으니 농사의 현실을 내가 알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다가 엄마가 마당의 작은 텃밭을 가꾸면서 거의 일 년 내내 그 작은 밭에 몸과 마음을 쏟는 것을 보고 농사의 어려움을 작게나마 알게 됐다. 이렇게 땅에 몇 가지 채소를 키우는 것도 힘들고 어려운데, 더 크고 넓게 농사를 한다는 건 정말 가늠할 수 없는 고단함이겠구나 싶었다. 여름에 푸릇하게 벼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가을에 누렇게 익은 벼를 수확하는 것을 지켜보는 이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듯하다. 구미코가 처음 농사에 뛰어들겠다고 마음먹은 이유, 사람도 회사도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나를 배신하는 때도 많지만, 땅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농업을 쉽고 편하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라는 걸 몸소 체험하고 나니, 땅을 일구고 수확을 하는 일이 더 경건하고 위대한 일로 보인다.


식물을 만지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즐거웠다. 채소와 꽃이 조금씩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기뻤다. 씨앗 한 알갱이에서 싹이 나올 때의 기대감, 시간이 지나면 가련한 꽃이 피고 거기에 열매가 맺힌다.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또 연구하고 노력하기에 따라 열매의 품질이 정해지니까 더 열심히 노력하고 싶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도 베란다에 채소를 키우곤 한다.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79페이지)


구미코가 도시에서 벗어나 농촌에 입성하고, 어렵게 땅을 구하고 채소를 심고 가꾸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삶의 고단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느낀다. 일하겠다고 땅을 구하는 여자에게 농업 하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이나 하라고 말하는 인식, 열심히 자기 삶을 꾸리지만 그래도 결혼해서 남편의 안정적인 삶에 기대야 한다고 말하며 결혼 만남에 등 떠미는 시선, 단체 맞선 같은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강요되는 여성의 자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참담했다. 내숭을 떨어라, 바지 말고 치마를 입어라, 상대의 취향에 맞추는 척해라, 처음부터 남자의 환경이나 능력을 묻지 말아야, 가만히 앉아서 적당히 미소로 응대하라는 등 다시 만나려고 이래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말들이 암흑이었다. 솔직하게 자기를 보여주는 일이 거부당하는 현실, 그것도 대부분 여자에게 강요하는 처세술이 이런 거라니. 결혼하지 말라는 게 아닌, 여성 그 자체로 살아가기 위한 당당함과 독립이 무시당하는 현실을 비추면서, 결혼의 진정한 의미가 누구에게 기대거나 현실의 불안에서 도피하기 위함이 아닌 오롯이 마음이 통하는 상대와의 결합이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여성 혼자 농촌 생활을 시작하는 고군분투가 생생해서 삶의 치열함을 거듭 엿볼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들이 내 앞에 튀어나올까 겁나기도 한다. 그때마다 내 앞에 닥친 문제의 답을 찾고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또 뛰어다녀야 할까 생각만 해도 심란하다. 그렇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 그 순간을 넘어가기 위해 우리는 또 답을 찾아서 달려야만 하니까. 결국은 눈앞에 닥친 지금을 성실히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게 답이 되겠지. 그게 바로 삶의 의지가 되고 이유가 된다. 구미코의 곁에 아야노와 후지에 같은 삶의 경험이 축적된 어른이 있어서, 현실의 고충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또래의 시즈요나 히토미, 미즈키 같은 여성이 있어서 다행이기도 하다. 일상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사람이 있다는 건 삶의 필수 요소이기도 하니까. 함께, 오래 멀리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구미코가 현실의 절망에서 다시 일어서기까지 스스로 노력하기도 했겠지만, 주변에서 관심 둬 주고 함께 나아갔던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테다. 이번 기회로 삶의 고마움과 사람의 소중함을 더없이 배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의 문제들을 겸허히 껴안은 방법도 배웠겠지. 성장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차근차근 배워가는 삶의 순간들이 아름답게 보였던 소설이다. 어떤 환경을 만들어도 고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답을 찾은 그녀의 농사가 언제나 풍년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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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태어난다. 일종의 숙제라면 숙제이고,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의 숙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인생의 숙제를 풀든 풀지 않든, 어떻게 풀든 결국 죽는 순간 그 결과는 자신이 안아 드는 것일 테다.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특별한 보너스일지도 모른다. 보통은 자기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63페이지)

 

지인의 아버지는 희귀백혈병으로 투병 중이시다. 아들과 50% 확률로 맞는 골수를 이식받았고, 곧 좋아질 거로 여겼지만 문제가 생겨 다시 입원하셨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곧 좋아지기를 기다린다고 했지만, 만에 하나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가족들이 모여서 의논도 하고, 앞으로의 일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나의 남동생의 장인어른과 여동생의 시아버지는 위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주변 사람들의 암 소식은 너무 흔하게 들려왔다. 병명 자체만으로도 공포가 생기는 병이 암이 아닐까. 언젠가부터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익숙한 병이 되어버렸고, 혹시나 우리도 암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병원을 찾고 검사를 받는 일이 낯설지 않다. 아마 두 가지가 겹치니 그 공포는 배가 되는 것일 테다. , 병원. 특히 암은 죽음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있는 병도 아니다. 암에 걸렸다고 다 죽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암은 죽음에 가까이 있는 병이기는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암과 함께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암 전문 의사로 항암치료를 해오면서, 그가 만난 암 환자와 가족들을 보면서 느낀 것들을 기록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무엇을 보고 느끼게 될까.

 

2019년 전체 사망자의 27.5%가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국인이 사망하는 장소의 77.1%는 병원이라고 한다. 그만큼 암과 병원은 우리 삶과 가깝다. 암 환자들의 마지막 모습은 어떨까. 저자는 18년 차 종양내과 의사로 일하면서 많은 암 환자를 만났다. 완치가 아니라 생명 연장의 목적으로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와 가족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궁금했다. 나는 의료진이었던 적이 없으니, 언제나 환자 본인과 가족의 자리에서 보게 될 터이다. 그러니 같은 상황 같은 죽음을 두고 저자와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 어쩌면 이 책으로 의료진의 시선을 알 기회가 생긴 셈이다.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삶과 죽음의 순간이 생생하다. 암을 앞에 두고 대응하는 방식은 너무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아마도 그건 살아온 세월과 삶의 방식, 환경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다.

 

의사이면서 한 인간으로 삶의 의미를 마주한 저자의 기록은, 저자는 물론이고 이 책을 읽는 모든 이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지금까지 만나온 많은 환자의 선택을 지켜보며, 그들이 채워온 삶과 병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그의 삶의 태도에 하나를 더한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그들의 시간이 담담하면서도 위태롭게 들리기도 했다. 그건 내가 경험한 삶과 죽음의 모습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마주할 죽음의 순간을 상상하면 아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남과 죽음을 한 번씩은 겪으니까, 내가 태어나는 순간을 누군가가 지켜봤다면 내가 죽는 순간도 누군가는 지켜볼 테니까 말이다.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죽음이 된다는 것. 그걸 생각하면 죽음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삶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간단하게만 생각할 수는 없을 듯하다.

 

저자가 마주한 환자와의 실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다양한 상황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엿보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했다. 죽음의 순간을 두고 동생에게 2억 원을 갚으라고 하는 남자, 평생 술과 도박으로 가족을 돌보지 않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이 딸에게는 다행인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 사연, 암 투병 이후의 시간을 감사하며 긍정의 힘을 뿜어대는 환자, 시한부 삶을 맞이한 여자와 결혼을 이루는 남자의 사랑, 사후 뇌 기증을 신청하고 떠난 사람, 남편이 완치되길 바라면서 서울과 부산을 오가던 부부, 이혼했지만 각자 암 투병 중인 부모를 돌보며 일터와 병원을 바삐 오가는 아들, 암과 치매를 동시에 앓는 80대 아버지는 모시는 예순을 바라보는 딸,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하나씩 이뤄가며 남은 시간을 채우는 노인 환자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어느 정도라는 말을 듣고 그 시간을 채워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삶을 채우고 있지만 결국은 죽음으로 향해 가는 그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는 각자의 몫인 듯하다. 반드시 죽음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주 그 숙제를 떠올린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 얼마나 의미 있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물음. 그 물음과 답은 자기가 만들어가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이 숙제를 풀든 풀지 않든, 어떻게 풀어가든 죽음에 다다르며 그 결과 또한 자기가 받아들여야 한다. 모르지 않은 일인데도, 왜 자꾸만 그 답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삶이 되어가는지, 언제나 어렵다. 의미 있게 살아가는 일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안다는 것은 행운일까 아닐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오늘과 남겨진 시간을 생각한 적이 있다. 만약 나의 목숨이 시한부라면, 시한부라는 사실을 아는 게 좋을까 모르고 지내다가 죽는 게 좋을까 하는 질문을 떠올린다. 나는 언제나 전자의 선택을 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나는 남은 시간을 잘 정리하면서 내 마지막을 준비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말기 암 환자라도 그럴 것 같다. 하염없이 병상에 누워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보다, 나와 내 주변의 것을 조금씩 정리하고 마음을 나누면서 마지막을 향해 가고 싶다고. 저자의 말처럼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특별한 보너스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는 끝을 맞이하는 것보다, 슬프지만 끝을 알게 된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보낼 오늘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종착역으로 가는 환자의 곁에는 같이 그 길을 걷는 가족이 있고, 그들은 곧 한 사람의 끝을 함께하면서 조금이라도 덜 아쉽고 행복하게 걸어갈 수 있게 노력한다. 마음을 다하려고 애쓰며 헤어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저자가 환자와 그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읽은 이야기는 끝이 없다. 저마다의 선택과 결과 앞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하나의 인생이, 한 가족의 삶이 변해가는 장면을 눈에 담는다. 그러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생각한다. 모르는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된다. 누군가의 부모이고 자식이고 배우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그 많은 이야기 속에서 계속 묻는다. 우리의 남은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평범한 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누구보다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일, 느닷없이 찾아온 운명을 받아들이고 본인 몫의 남은 삶을 평소처럼 살아내는 일.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37페이지)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환자의 암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3장과 4장에서는 의사로 살아가는 일과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시간과 싸우며 환자를 보는 병원의 환경, 마지막에 다다른 환자의 연명치료가 정말 필요한 것인가 하는 고민을 담았다. 암 투병 이후 완치된 젊은 환자의 미래도 같이 걱정한다. 병을 앓았다는 이유로 취업에서 실패하고, 현실은 언제나 살아가야 하는 냉정함을 뿜어대는데 생존의 위협에 또 시달리는 고통이 뒤따르는 암 투병 이후의 시간을 처음 알았다. 다시 건강해졌으니 다행이고 좋은 결과라고만 여겼지, 현실에서 암이 공격하는 또 다른 일상이 있었다는 게 무서웠다. 몸의 건강만 되찾았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던 거다. 의사의 자리에서 겪는 많은 고충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환자나 보호자는 의료진이 처한 현실을 다 알지 못한다. 의료진 역시 마찬가지로 환자와 보호자의 고통을 다 알지 못한다.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일까, 다 알지 못하는 그 마음 때문에 때로는 오해하고 서운해한다. 내 자리에서 보이는 것만 두고 생각하고 말하고 싸우고 운다. 의료진이 환자를 대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들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하기에도 벅찬 상황이 있더라는 것. 그러다가 비로소 환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보이는 것들을 감싸 안는다. 자기가 환자가 되어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진료하던 환자의 시선과 마음이 보이는 거다. 역지사지라고 해야 하나. 누군가 아프게 되는 건 싫지만, 나는 의료진이 이렇게 서로 다른 상황을 알아가는 기회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연명치료에 관한 부분이었다. 연명치료를 선택하는 게 최선이기만 한 걸까? 환자의 남은 삶이 연명치료로 행복해질까? 연명의료계획서 작성 건수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나도 경험했다. 아버지가 처음 응급실에 실려 가고 수술대 위에 되었을 때, 시간이 지나고 다시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병원에 한 번 드나들 때마다 온갖 서류에 서명하고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때마다 나도 연명의료계획서에 사인을 했다. 처음에는 이 서류에 어떻게 뭐라고 서명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고민이 많았는데, 그 처음 서명을 위해 가족들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위급한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그 연명치료를 수락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그 목숨의 주인은 환자 본인이지만, 환자가 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호자와 가족들은 어떤 선택이든 결정을 해야만 하는 어려운 위치에 선다. 의식을 잃은 환자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순간까지 심폐소생술을 하는 게 정말 최선이었을까 묻는 저자의 말에, 우리 가족의 판단이 틀리지만은 않았다는 안도가 생긴다. 어쩌면 또 다른 순간에 우리는 같은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렵지만, 저자가 말하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하는 질문에 같은 무게로 고민하게 될 것 같다. 살아 있으나 죽음보다 못한 상태인, 존엄과 멀어지고 있는 환자의 마지막을 위한 결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일. 몇 번을 생각해도 어렵기만 한 주제를 두고 참 많은 생각과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듯하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행복하다고 이야기하기는 쉽다. 입으로 도덕을 외치고 윤리를 말하는 일도 참 쉽다. 똥 치우며 병수발하고 비용 부담하긴 어려워도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만 있을 뿐 인간다움을 완전히 잃는다면 그때에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혹 당신이 그런 상황이 된다면, 혹은 인지 기능 없이 단순히 숨만 쉬는 상태가 된다면 그런 상태로 몇 년 더 사는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될까?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254~255페이지)

 

의사가 들려주고 있지만, 의사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안에 우리가 언제나 함께 참여한 대화이자 기록이다. 우리는 인간이고 언제 어디서든 질병과 마주할 수 있다. 질병이나 병원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기도 하다. 동생이 아파서 1월의 절반을 서울에서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이제는 엄마가 아프셔서 병원 생활을 이어간다. 지금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로 여긴 적이 없다. 언젠가 그럴지도 모를, 나이 들어가는 부모의 건강을 염려하기는 했지만, 뜻밖의 일 앞에서 이렇게 당황하고 걱정하면서 병원을 전전할 줄 몰랐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읽다 보니, 저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가깝게 다가온다. 의사는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존재이고, 병원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머무는 곳이 되었다. 내가 환자가 될 수도, 보호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은 언제든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러니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남의 일이 아닌 게 되더라는 깨달음은 저절로 따라온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하면서, 언젠가 나와 가족에게 찾아올 죽음의 순간도 항상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낯설지 않은 경험담에 많이 공감하면서, 삶과 죽음을 겪어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지금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숙제이자 의무라고 말하는 문장들에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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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2-10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 그림이, 잎사귀처럼 보였다가 살아 움직이고 싶어했던 잠자리 날개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아름다운 글 잘 읽고 갑니다.

scott 2021-02-10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페이퍼는 문장마다 읽고 음미하고 새겨둘 구절이 많아서 이페이퍼는 아끼면서 읽을겁니다. 구단님 설 연휴 가족 모두 평안하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영원한 유산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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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떡하지?’

정말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영화 보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어 계속하던 것이, 영화 관람은 오랜 세월 나의 취미이자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영화 보기를 잠시나마 고민했던 적이 있다. 언제였던가, 기다리던 영화의 개봉 날짜를 기다리며 보러 가려고 계획했던 순간. 주연 배우의 스캔들이 터졌다. 그 배우의 이런저런 이야깃거리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한 개인의 사생활이려니 하면서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던 게 여러 번이었으니 뭐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도저히 못 들은 척하기가 어려운 스케일의 이야기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 영화를 볼까, 말까? 영화를 보면서 자꾸 그 스캔들이 배우의 얼굴에 겹쳐 보일 것 같아서 망설이다가, 결국은 보고야 말았다. 영화가 다 끝나고 상영관을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에이, 더럽게 연기 잘하네.’ 어쩔 수 없는 미움 앞에서도 배우의 연기를 훌륭했고, 캐릭터와 한 몸인 것처럼 보였으며, 영화도 재밌었다. 무엇 하나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도 그 배우를 떠올리면 지나간 시간의 모든 이야기가 생각날 것이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또 한 번 과거의 스캔들을 소환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믿고 보는 배우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제 그를 미워하면서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보지 않는다. 미워할 때 미워하고, 영화는 영화로 본다. 이 마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서 당황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궁금하다. 이 마음이 뭐란 말인가.

 

작가가 소설에 담아낸 벽수산장이 그랬다. 아름다운 건축물이지만, 적산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잊을 수 없게 하는 존재.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기억하게 하면서 아픔도 동시에 소환하는 그곳을 어떻게 해야 옳은 건지 언제나 고민하게 될 터였다. 한때 한양 아방궁이라 불렸던 벽수산장은 친일파 윤덕영이 3년여에 걸쳐 지었다. 친일파 중에서도 악명이 높았다고 하니, 그가 나라를 팔아서 번 돈으로 지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면적이 옥인동 일대의 거의 절반이라고 한다. 위치 또한 기가 막히고, 인왕산 중턱에 자리하며 경성을 내려다보는 프랑스식으로 호화로움까지 갖췄단다. 소설 속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상상해보는 순간에도 그려지는, 뻣뻣하게 목을 세우고 세상의 주인이고 중심인 것처럼 내려다보는 시선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해동이 윤원섭을 만나는 순간부터 솟아나던 그 갈증과 답답함을 문장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1966, 해방 후 20여 년이 지난 현재, 이십 대 청년 이해동은 언커크(유엔 산하 한국통일부흥위원회)에서 호주 대표 애커넌의 통역 비서로 일한다. 현재 벽수산장은 언커크의 사무실로 쓰인다. 어느 날 해동 앞에 나타난 윤원섭은 친일파 윤덕영의 막내딸로, 이제 막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했다. 그런 그녀가 애커넌을 만나러 벽수산장으로 돌아왔고, 그녀만 알던 벽수산장 비밀의 방을 보여주며 그곳의 신비로움을 피력한다. 마치 오래된 고성의 비밀의 방을 여는 것처럼, 누구도 몰랐지만 누구나 들어가 보고 싶은 공간으로 포장한다. 옛 주인은 자기만이 그 방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 벽수산장이 그냥 평범한 건물이 아니고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품고 있다고 말하며 그녀의 위치를 각인시킨다. 만약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었다면, 나는 이미 윤원섭의 모든 것을 알아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그곳에 발을 들인 순간, 벽수산장은 더는 언커크 사무실로 쓰이지 않을 것이며, 그녀가 돌아온 이유가 한 번에 보일 만큼 적나라했다. 그건 언커크 사무실로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들만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무언의 연대 같은 느낌일 것이다. 해동은 윤원섭의 말을 통역하면서도 구역질이 난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쩜 저렇게 뻔뻔하고 염치가 없을까. 밥벌이를 이어가자니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이것도 못 참고 뛰쳐나가자니 일상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이다. 해동의 갈등은 윤원섭과 함께하면서 계속된다.

 

윤 자작의 일족이 일본 지배 시절의 행적으로 비난받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의 대한민국과 그때의 조선은 다른 세상이 아닌가? 나는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형편은 그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97페이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의 결정이나 판단이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인공 이해동의 갈등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친일파의 후손 윤원섭과 국제사회의 시선을 담은 애커넌의 말에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해동은 상사에게 윤원섭이 어떤 인물이고 그 가문이 대한민국에 저지른 죄를 말하지만, 애커넌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형편은 그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지금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윤원섭은 마치 그 시선을 이용하는 것처럼 당당하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은 과거 따위 무시하고 현재 벽수산장의 아름다움을 호소하며 문화적 가치를 앞세운다. 정말 그럴까? 지나간 시간의 일은 과거와 같이 묻어두고 현재의 것만 다루면 그만인 것일까? 해동의 혼란이 커질수록 독자의 마음도 같이 흔들린다. 무엇을 따라야 옳은 것인지 계속 고민해봐도 답을 알 수가 없다. 특히 해동의 마음은 더 복잡했으리라.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했지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발각되어 목숨을 잃은 아버지였다. 해동에게 고아라는 이름을 물려주게 했던 그 시절의 아픔은 친일파의 후손인 윤원섭에게도 책임이 있다. 단지 가해자의 후손이니까? 아니다. 피해자의 피와 눈물로 착취한 재산으로 배를 불리고 대대손손 그 부유함을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게 문제가 되는 거 아닐까? 해동이 윤원섭에게 느끼는 감정도 비슷할 거다. ‘당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들이 나를 고아로 만들었고, 성장하는 동안 힘들지 않은 순간이 없었는데, 당신은 왜 지금 이곳으로 돌아와 주인 행세를 하며 차지하려 드는가?’

 

해동의 혼란은 사무실로만 쓰던 벽수산장이 아니라, 알지 못했던 그곳의 곳곳을 들여다보면서 커진다. 섬세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의 면면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 순간, 그는 적산이라 부르며 혐오하던 그곳에 마음을 빼앗긴다. 동시에 적산이니까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마음도 커진다. 상처와 고통을 주면서도 바라보고 싶은 아름다움에 흔들리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부끄럽고 죄스러웠으며, 저택이 그곳에 뿌리내리듯 존재하는 이상 그가 느낀 아름다움 역시 사라지지 않을 거로 여겼다. 누군가에게는 적산이고 누군가에게는 유산이 되는 그곳의 존재는 곧 사라진다. 벽수산장에 불길이 치솟고, 몇 년 후 철거된다.

 

작가는, 윤덕영의 옛 별장 벽수산장이 한때 언커크에서 사무실로 사용했으며 화재로 소실되어 몇 년 후 철거되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소설의 내용 대부분은 허구라고 말했다. 많은 부분을 자료 조사가 바탕이 된 상상이라고. 그런데도 상상으로 그려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마도 우리 마음속에 그 시대의 아픔과 고통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과거이지만 지워지지 않고, 지워서도 안 되는 그 시간의 흔적이라고 말이다. 거기에 적산과 유산의 구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일도 끝나지 않았다. 친일파의 적산가옥으로 생활 좀 편해지고 싶어 하는 소시민의 마음과 친일파의 흔적이니 사라져야 한다는 마음의 갈등은 계속된다. 독립운동에 가담해서 일찍 죽은 아버지를 원망하는 고아 인생을 이해하면서도, 그 아버지의 장한 행동으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살아가는 일. 해동이 윤원섭을 보고 느끼며 변화하는 과정이 그가 원망하듯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지는 않았을까. 불타는 벽수산장을 뒤로 하고 그 언덕을 걸어 내려가는 그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적산이 사라지는 것을 기뻐할 수도 없고,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할 수도 없는 마음을 안고 돌아가는 그 길에서 이제 그는 무엇을 향해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어쩌면 해동의 마음은 이 소설을 읽는, 우리의 과거 속에서 마주하는 비슷한 상황들에서 공감하는 마음이고 질문이겠지.

 

해동이 가진 것은 온통 미미한 것들뿐이었다. 아버지가 돼지막에 숨겼던 인쇄기, 생전에 고모가 쌓은 덕과 인정, 애커넌 씨와 개인 간 고용으로 만들어진 언커크의 일자리. 그런 미미한 것들은 길가의 거미줄처럼 금세 더럽혀지고 아무 발길에나 찢어지고 제일 먼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그것이 실제 있었다고 말할 근거조차 희박해지는 것들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덕영은, 벽수산장은, 언커크는 얼마나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가. (중략)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들리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 지난 석 달 동안 그것의 질긴 생명력을 경험하면서 해동은 그것이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세상에는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힘들이 있었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입장에서는 분하고 고까울지언정 그것이 아예 없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248~249페이지)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들로 기억될 갈등은 이분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분하고 화가 나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감정을 알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모든 상황과 인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이 겪어온 상황과 혼란, 여러 가지 마음을 안다고 말하고 싶다. 씻은 듯이 모든 감정을 없앨 수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 우리 역사 속에서 이런 순간과 공간이 또 얼마나 많을까 싶다. 작가의 말처럼, ‘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정직과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이야기지만, 자기의 가치관과 삶을 지키려고 나아가는 사람들의 선택을 함께 지켜보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사라짐과 지킴의 묘한 겨루기를 주관하는 힘을 고민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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