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두 살 여자, 혼자 살만합니다 - 도시 여자의 리얼 농촌 적응기
가키야 미우 지음, 이소담 옮김 / 지금이책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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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른 나라의 소설도 그렇긴 하지만 일본 소설을 읽을 때 자주 느끼는 게, 비슷한 환경과 문화에서 겪는 일들이 너무 닮았다는 거다. 거기에 이 작가, 가키야 미우의 작품 속 주인공들과 그들이 마주한 여러 가지 사연들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심정을 토로하는 건 듣는 기분이 들거나, 어느 드라마에서 봤을 법한 고민을 마주하는 듯하다. 그런 이유로 저자의 작품을 좋아한다. 가식을 떨칠 수 있는, 굉장히 적나라한 상황과 심리 묘사로 현실에 찰싹 달라붙은 우리의 이야기를 펼치곤 해서 말이다.


인간이 절망을 느끼며 다시 바닥 짚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는 건 국적을 가리지 않는가 보다. 계약직으로 일하는 구미코는 긍정적이었다. 일도 잘하고 분위기도 좋았으니 이번 계약이 끝나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거로 믿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계약이 끝났다는 통보로 구미코와의 인연을 끝냈다. 설상가상, 7년째 동거하며 지내온 남자친구는 새로운 인연이 생겼다며 헤어지자고 말한다. 둘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같이 준비하며 합했던 모든 것은 이제 나뉘어야 한다. 특히 구미코에게는 머물 공간이 필요했다. 부모도 가족도 없는 그녀가 돌아갈 곳도 없다. 갑자기 회사에서 잘리고 살던 집에서도 나가야 하는데, 도저히 해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구인란을 뒤지며 새로운 일을 찾고 있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단기로 일하는 시간제만 있다. 그녀가 찾고 싶은 정규직에 안정적인 직장은 그녀를 거부한다. 그녀의 나이 이제 삼십 대 중반을 향해 간다. 무언가 안정되어 있어도 모자랄 판에 더 불안한 현실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모아놓은 돈은 집을 구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집을 구하려면 보증이 될만한 배경이 필요하다. 다닐 직장도, 가야 할 집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듣기만 해도 캄캄하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하고, 내 몸 하나 편히 뉠 곳도 없다는 건 얼마나 벼랑 끝이란 말인가. 이것저것 시도하면서도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고 절망에 절망을 거듭할 무렵, 그녀의 눈에 들어온 한 가지. 농업.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홍보하는 장면에 시선을 빼앗긴다. 직접 몸을 움직여서 땅을 고르고 씨앗을 심고 정성 들여 가꾸니 무언가가 자란다. 채소와 과일이 눈에 그대로 담긴다. , 뭐든 노력하는 만큼 내놓고 보여주는 게 땅이구나. 그녀는 농업을 가르쳐주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실습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농업을 계속할수록 자신감이 붙는다. 이제 모든 수업은 끝나고, 실전이다. 땅을 구하고 열심히 채소를 가꾸기만 하면 된다.


생각하는 그대로 모든 게 현실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의 끝에 다다랐다고 생각할 무렵 농업을 알게 되고, 이제 다시 일어설 일만 남았다고 두 주먹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쳤건만, 현실은 냉혹했다. 시골에서 여자 혼자 농사를 짓겠다고 하자 모두가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대대손손 농사를 지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뜬금없이 나타난 뜨내기가 농사를 짓겠다고 바람을 일으키니 좋아할 사람이 없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봐도 인내심을 가지고 농업을 하면서 시골에 정착한 사람이 없더라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구미코는 당황한다. 땅을 임대해야 농사를 짓고 집도 짓고 하면서 시골 생활에 적응할 텐데, 준비 단계에서부터 그녀는 다시 꽉 막힌 현실에 부딪힌다.


가까운 주변에 농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실제로 농사를 지켜본 적은 없다. 마트에서 필요한 채소 몇 가지 사다 먹으면 된다는, 편한 일상을 지내기만 했으니 농사의 현실을 내가 알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다가 엄마가 마당의 작은 텃밭을 가꾸면서 거의 일 년 내내 그 작은 밭에 몸과 마음을 쏟는 것을 보고 농사의 어려움을 작게나마 알게 됐다. 이렇게 땅에 몇 가지 채소를 키우는 것도 힘들고 어려운데, 더 크고 넓게 농사를 한다는 건 정말 가늠할 수 없는 고단함이겠구나 싶었다. 여름에 푸릇하게 벼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가을에 누렇게 익은 벼를 수확하는 것을 지켜보는 이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듯하다. 구미코가 처음 농사에 뛰어들겠다고 마음먹은 이유, 사람도 회사도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나를 배신하는 때도 많지만, 땅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농업을 쉽고 편하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라는 걸 몸소 체험하고 나니, 땅을 일구고 수확을 하는 일이 더 경건하고 위대한 일로 보인다.


식물을 만지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즐거웠다. 채소와 꽃이 조금씩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기뻤다. 씨앗 한 알갱이에서 싹이 나올 때의 기대감, 시간이 지나면 가련한 꽃이 피고 거기에 열매가 맺힌다.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또 연구하고 노력하기에 따라 열매의 품질이 정해지니까 더 열심히 노력하고 싶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도 베란다에 채소를 키우곤 한다.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79페이지)


구미코가 도시에서 벗어나 농촌에 입성하고, 어렵게 땅을 구하고 채소를 심고 가꾸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삶의 고단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느낀다. 일하겠다고 땅을 구하는 여자에게 농업 하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이나 하라고 말하는 인식, 열심히 자기 삶을 꾸리지만 그래도 결혼해서 남편의 안정적인 삶에 기대야 한다고 말하며 결혼 만남에 등 떠미는 시선, 단체 맞선 같은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강요되는 여성의 자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참담했다. 내숭을 떨어라, 바지 말고 치마를 입어라, 상대의 취향에 맞추는 척해라, 처음부터 남자의 환경이나 능력을 묻지 말아야, 가만히 앉아서 적당히 미소로 응대하라는 등 다시 만나려고 이래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말들이 암흑이었다. 솔직하게 자기를 보여주는 일이 거부당하는 현실, 그것도 대부분 여자에게 강요하는 처세술이 이런 거라니. 결혼하지 말라는 게 아닌, 여성 그 자체로 살아가기 위한 당당함과 독립이 무시당하는 현실을 비추면서, 결혼의 진정한 의미가 누구에게 기대거나 현실의 불안에서 도피하기 위함이 아닌 오롯이 마음이 통하는 상대와의 결합이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여성 혼자 농촌 생활을 시작하는 고군분투가 생생해서 삶의 치열함을 거듭 엿볼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들이 내 앞에 튀어나올까 겁나기도 한다. 그때마다 내 앞에 닥친 문제의 답을 찾고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또 뛰어다녀야 할까 생각만 해도 심란하다. 그렇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 그 순간을 넘어가기 위해 우리는 또 답을 찾아서 달려야만 하니까. 결국은 눈앞에 닥친 지금을 성실히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게 답이 되겠지. 그게 바로 삶의 의지가 되고 이유가 된다. 구미코의 곁에 아야노와 후지에 같은 삶의 경험이 축적된 어른이 있어서, 현실의 고충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또래의 시즈요나 히토미, 미즈키 같은 여성이 있어서 다행이기도 하다. 일상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사람이 있다는 건 삶의 필수 요소이기도 하니까. 함께, 오래 멀리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구미코가 현실의 절망에서 다시 일어서기까지 스스로 노력하기도 했겠지만, 주변에서 관심 둬 주고 함께 나아갔던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테다. 이번 기회로 삶의 고마움과 사람의 소중함을 더없이 배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의 문제들을 겸허히 껴안은 방법도 배웠겠지. 성장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차근차근 배워가는 삶의 순간들이 아름답게 보였던 소설이다. 어떤 환경을 만들어도 고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답을 찾은 그녀의 농사가 언제나 풍년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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