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생명이 시한부란다. 그걸 가족들은 당사자에게 알리기를 거부한다. 의사도 이에 동참한다. 환자가 충격 받을까 염려된다는 이유였다. 정작 당사자는 환자인데, 그는 자기에게 남겨진 시간을 알 권리가 없을까?
종종 드라마를 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상황을 알고 있는 가족들이 정작 당사자에게는 남은 시간을 말하지 않는다. 그에 의사도 동참한다. 정확한 상태를 환자에게 말하지 않고, 그저 잘 치료되고 있다고만 한다. 이때 정말 궁금해진다. 환자는 몰라도 되나? 자기에게 남겨진 시간을? 아니면, 자기 몸 상태를 이대로 몰라도 된다고? 그러다 죽음의 순간에 원망하면 어쩌려고?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울부짖으면 어떻게 하려고?
이런 장면을 두고 친구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고. 질병으로 오래 앓다가 죽을 수도 있고, 예고 없는 사고로 즉사할 수도 있는데, 너의 죽음이 어떤 모양으로 다가왔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니라 병을 앓고 있다면, 그렇게 너에게 남겨진 시간이 곧 끝난다면, 그걸 아는 게 좋겠느냐고, 모르고 가는 게 낫겠느냐고... 친구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는데, 나는 전자라고 했다. 어떤 경우에서든 알고 싶다고 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곧 끝난다는 걸 알고 싶었다. 잘 살았든 못 살았든, 살아온 시간의 정리는 내가 직접 하고 싶었다. 하다못해, 잔고 0원인 통장까지도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의 모든 흔적들은 지우고 가고 싶다. 죽음이 다가오는 방법을 내가 선택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지만, 만약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여전히 전자다. 알고 싶다. 내 죽음의 주인공은 나니까. 주변 사람들이 쉬쉬하면서 나의 상태를 비밀로 할 이유를 모르겠다.
임선경의 소설 『빽넘버』를 읽으면서 자꾸만 '만약'을 생각했다. 주인공 원영은 다른 사람의 등에 있는 숫자를 본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그 숫자는 그들의 남은 시간이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숫자가 하나씩 줄어든다. 남은 날이 하루인 사람의 등에는 붉은색으로 숫자 1이 빛난다. 그러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 붉은색 숫자 1은 점멸하면서 희미해지고, 숨이 끊어지면 숫자도 완전히 사라진다.
원영은 그게 너무 괴로웠다. 저마다의 숫자를 등에 달고 사는 사람들. 남은 시간이 많은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지만, 숫자가 적은 사람을 볼 때마다 힘들었다. 그 사람에게 가서 '당신은 남은 시간이 열흘 밖에 되지 않으니, 곧 정리해야 되지 않겠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을 거다. 반대로 남은 숫자가 많은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다. '당신은 삼만 이천구백이십일 후에 죽으니 남은 시간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라고 말할 수도 없잖아. 그렇게 말해도 미친 사람 취급하는 건 똑같을 테니. 어쨌든 남의 인생이다. 원영이 그들의 등에 붙은 숫자를 본다고 해서 그들에게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고, 말할 의무나 이유도 없다. 그런데 막상 그 숫자가 보이는 사람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막연하게 부러웠다. 얼마나 좋아. 아무도 모르는 그 남은 시간을 안다는 게, 점쟁이처럼 다 아는 거잖아. 그거 말해주고 복채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했다. 누군가의 시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거 자체도 신기했지만, 그걸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요! 알고 싶어요, 라고... 나의 마지막 시간을 알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미워하는 사람을 떠올렸다. 그들의 시간은 얼마나 될까. 아니, 얼마나 되었으면 좋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등에는 초록빛의 긴 자릿수 숫자가 밝게 빛나고 있었으면, 미운 사람의 등에는 붉은 한 자릿수 숫자가 점멸하고 있었으면 하는, 정말 상상에서나 가능한 생각들을 머릿속에 띄웠다.
생명의 탄생에는 예정일이라는 것이 있다. 출산 예정일을 알고 그 계절에 맞추어 출산 준비를 한다. 몇 년 뒤에 학교에 갈 테니, 몇 년 뒤쯤이면 결혼도 할 테니……. 인간 삶에는 대력의 예정이 있다. 예정이 있어야 준비도 할 수 있다. 죽는 날도 예정일이 있다면 어떨까? 그건 혹시 축복이 아닐까? 사는 동안에 열심히 살고 죽음이 가까워지면 또 그 준비를 하게 되지 않을까? (『빽넘버』 180페이지)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은 죽는다. 금연, 금주, 규칙적인 운동, 오메가3와 프로바이오틱스, 깨끗한 공기와 물, 채식, 생식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놀랍게도 삶 그 자체다. 살아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갔으므로, 그의 숫자가 다 소멸했으므로 사람은 죽는다. (『빽넘버』 128페이지)
그런데, 정말 다, 만약이다. 그런 걸 알 수가 없잖아. 알 수가 없으니 오늘을 사는 거 아닐까. 이 소설이 그걸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설정은, 다른 이의 등에 있는 숫자로 그들의 남은 시간을 보는 원영은 자신의 숫자는 못 본다. 안 보인다. 죽을 때까지 못 볼 거다. 남들의 시간을 보는 이가 정작 자기 숫자는 못 본다니, 재밌다. 마치 다 알 것처럼 보이는 그의 눈이 부러웠는데, 결국 타인의 남은 시간을 관여할 수 없는 그 자신도 자기의 남은 시간을 모른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이 소설의 답이 있다. 그냥, 오늘을 살아가시오. 남은 시간을 알아도 문제, 몰라도 문제. 그러니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 말고, 답이 있겠소? 있다면 나에게도 좀 알려주시구려. 에고고...
며칠 전에 읽은 이 소설이 유독 많이 생각나는 하루였다. 며칠 전부터 자꾸 꼬이고 어긋난 일들이 머리 아팠는데, 싫은 사람들을 지켜봐야만 하는 일에 고통스러웠는데, 오늘 아침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오는 짜증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지냈다. 냉동실 문을 열자마자 떨어지는 작은 덩어리 하나. 엄마가 남은 만두 몇 개를 비닐 팩에 넣고 얼려두었는데, 그게 떨어졌다. 만두 끝의 뾰족한 부분이 발등을 찍었고, 무슨 혈관주사 맞은 것처럼 빨간 바늘 자국과 그 주변에 바로 퍼지는 푸른 멍. 손을 댈 수 없는 통증에 절뚝거리며 걸었는데, 다행이 크게 붓지는 않아서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누군가의 등에 붙은 숫자를 간절히 보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했던, 헛웃음 나는 일만 계속되었던 하루였다. 이제 다 끝난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오늘은 말도 안 되는 '만약'을 떠올리지 않고, 편하게 잠드는 그런 하루로 끝났으면...
햇살이 좋았다.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빽넘버』 238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