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늦은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가 무서운 적이 많았다. 지금도 그런 무서움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익숙해져서 그런지 아니면 조금 무뎌진 건지, 예전보다는 덜 하다. 뭐 별것도 아닌 걸로 그러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경험이 아니었기에 그 기억이 더 오래가는 듯하다. 위험한 말이 오고 가서가 아니고, 안 좋은 소식이나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 많아서였다. 절대 유쾌하지 않을 일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밤중에 도착하는 소식 중에는 외로움, 혹은 쓸쓸함이 담겨 있는 것도 많았다. 자정을 전후로 들어오는 문자가 특히 그랬다. 밤이라는 시간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외로움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는 이는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었고, 대개 가까운 사이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말을 웃음과 같이 건넬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 다행인... 때로 바쁜 시간이 지난 후 찾아온 여유에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시간이거나, ‘그냥’이라는 이유로 스스럼없이 말문을 열 수도 있는 시간. 그래서 한밤중의 문자가 안 좋은 소식들로 불안한 것보다 괜히 마음이 허해지는 순간으로 변해가곤 했었다.
외로운 밤이 있다.
'아니 이건 그리움이야, 아니 이건 고독이지, 고독은 나의 친구인걸' 하고
아닌 체해보아야 어쩔 수 없이 사무치는 건, 외로움이다.
외로움에는 눈물이 없다.
메마른 가슴이 괴롭게 사람을 들쑤시는 밤.
(쓸쓸해서 비슷한 사람 194페이지)
이상한 밤이었다.
요즘, 이상하게 잘못 걸린 전화가 자주 온다. 일주일에 두세 번쯤, 그것도 밤에 주로. 지금 번호를 사용한지 1년쯤 됐는데, 그동안 잘못 걸린 전화 어쩌다 한번 받기는 했어도 요즘처럼 자주 오지는 않았다.
언젠가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어.
‘자신을 완벽하게 고백하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어떤 표현도 불가능하다.’
비루한 고백을 들어줘서 고마워. 오랫동안 옆에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마지막으로 어떤 주저도 없이 말할게.
행복해라, 꼭. (말하자면 좋은 사람 198페이지)
며칠 전 금요일 밤, 자정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 문자 한 통이 들어온다.
“00아, 잘 지내니?”
모르는 이름이기에 잘못 온 문자려니 싶어 무시했다.
몇 분쯤 지나자 다시 또 문자가 들어온다.
“00아, 나야. 보고 싶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상대방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문자 잘못 보내셨습니다.”
상대가 잘 알아들었겠거니 했다. 잘못 수신된 문자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으니, 알아듣고 이젠 문자를 안 보내겠구나 했다. 그런데 이 사람 이젠 문자가 아니라 전화를 걸어온다. 순간, ‘이걸 받어, 말어?’ 몇 초의 고민을 했더랬다. 굳이 잘못 보냈다는 문자에 왜 전화를 걸어올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 알바 아니라는 마음이 커서, 귀찮아서였다. 그래도 한 번 더 친절해도 될 것 같아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말 00 휴대폰이 아닌가요?”
“모르는 분입니다. 전화 잘못 거셨어요. 제가 이 번호를 1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바로 전화를 끊을 줄 알았다. 전화를 잘못 걸었다는데, 상대방은 자기가 찾는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끊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 전화를 끊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전화를 끊겠다고 말하고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이 남자가 먼저 말문을 연다.
“죄송합니다. 00은 헤어진 여자 친구인데요.”
그래서?
“참고 참다가 1년이 넘어서야 전화를 했어요. 보고 싶어서요.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요.”
그런데?
“그 사이 전화번호가 바뀐 걸 몰랐어요. 너무 당연하고 익숙한 번호라 계속 사용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문자 잘못 보냈다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고 전화까지 하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네.”
“......”
“저기요?”
“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평소 하던 대로 했다. 나와 상관없는 이 얘기를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찾는 분의 전화번호가 바뀐 걸 알았으니, 이제 이 전화를 끊어야하지 않겠어요?”
“아, 예. 그렇죠. 그래야죠...”
근데 왜 끊겠다는 말이 없어?
내가 먼저 끊어야겠다고 다시 말하려고 하는 순간, 상대가 다시 말문을 연다.
“정말 거짓말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00과 목소리까지 비슷하네요. 처음엔 본인인데 아닌 척하는 줄 알았어요. 근데 말의 억양이 달라서 아닌 걸 알았어요. 그쪽은 목소리가 좀 더 낮네요.”
“저에게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저는 그쪽과 계속 통화할 이유가 없는데요.”
냉정하게 들릴 정도로 딱 잘라 말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의미 없는 대화를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상대를 배려하고 싶어도,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을 찾아 데려다 줄 수도 없잖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 말투가 정말 스팸전화 끊듯이 ‘뚝’ 끊어버릴 수 없게 했다. 그렇게 나 혼자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이어져오는 말.
“보고 싶은 거 그동안 잘 참았는데, 오늘은 정말 못 참겠어서요. 한마디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안하던 짓을 했어요. 죄송했습니다. 제가 먼저 끊겠습니다...”
뚜. 뚜. 뚜...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귀신에 홀린 듯했다. 오 분에 가까운 시간동안 뭐가 지나갔나? 뭐지, 이건? 아, 진짜...
그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하는 순간 증기처럼 아득한 두려움이 나를 덮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 토막들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을까.
진짜는 죄다 도둑맞고,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아의 금고 속에는 엉뚱한 모조품만 잔뜩 쟁여져 있는 느낌이다.
스물두 살의 첫새벽처럼 나는 텅 빈 주방 앞에서 나지막이 읊조린다.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지? (비자나무 숲 262페이지)
멀쩡한 기분이었다. 두통이 좀 심했던 거 말고 특별히 더 나쁠 게 없었다.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뭐야? 잠들려고 했던 기운을 다 깨워놓고 이상하게 멜랑콜리한 기분까지 남겨놓다니. 그 사람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 괜찮아졌는지 어땠는지 몰라도, 그녀의 전화번호가 바뀐 것을 알고 이제 삭제하고 개운해졌는지 몰라도, 이젠 정말 그 미련을 버렸는지 몰라도... 나는 괜히 우울해졌다. 전혀 모르는 남인, 누군가의 외로움이 쓸데없이 전염된 듯했다. 수화기 너머 누군가의 쓸쓸함이 그대로 건너온 듯했다. 뭐가 이래. 아, 이런 거 정말 별론데.
잠이 다 깼다. 이대로 잠들기는 어려울 듯하여 양양의 책 제목이 생각나서 들춰보다가 문득, 내 전화번호 전 주인이 궁금해졌다. 나에게 온 잘못 걸린 전화는 남자를 찾는 전화도 있었지만 대부분 여자를 찾는 전화였다. 같은 이름의 여자를 찾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바꾸면서 번호연결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은 듯했다. 그 말은, 굳이 바뀐 전화번호를 전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 아닌가. 본인이 먼저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이상 타인이 그 번호를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나에게 잘못 걸려온 전화를 생각해보니, 1년 동안 이 사람들은 내 전화번호 전 사용자와 연락이 없었다는 건가? 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1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을 찾는 거지? 전화한 그 남자는 1년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혹시, 좁은 편도 1차선 같은 길을 가고 있었을까. 같은 마음으로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는 길, 상한 마음에 '나 없이 잘 지내지 말라'고 소심한 복수라도 했던 걸까. 그래도 결국 쓸쓸해진 마음을 어쩔 수 없어 그녀를 찾았던 걸까.
한 사람을 떠올렸다. 늦은 밤 전화해서 내려앉은 목소리를 들려주던, 늦은 퇴근길에 걸음은 무겁고, 불 꺼진 집에 들어와 시어진 김치에 물을 만 밥으로 허기를 달랬다던, 외롭다고 푸념을 늘어놓던 목소리. 누구나 사는 게 비슷하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외롭다고 말하던 사람의 가슴은 쓸쓸했겠구나, 싶다. 이런 거였구나. 양양이 평범하다면 평범한 일상을 두고 말하면서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를, 어쩌면 알 것도 같다.
늦은 밤 불쑥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건, 제목에서 흐르는 그 쓸쓸함 때문이다. 아닌 체하려고 해도 안 되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침묵이 기어코 또 다른 말이 되어 뛰쳐나오고야 마는 것. 함박눈이 펑펑 내리며 추위가 더 짙어지고, 양양의 노랫말이 되어버린 그녀의 끼적임은 그래서 '비슷한 사람'이란 이유로 우리를 붙든다. 닮아있음을 부정하지 말라고, 닫힌 창문 열고 손 뻗으면 바로 닿는 사람들이라고... 살아가는데 때로 말이 없어도 되고 표정이 없어도 되고 혼자여도 되지만, 가끔은 딱 한 마디가 필요한 때가 있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한 마디만. '어쩌면 우린, 비슷하구나.'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이 필요할 때. 이 책에서 그녀가 뿜어대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 같은 시간 앞에 괜히 민망해진다. '너도 그렇잖아' 건네는 한 마디에 모든 감정을 읽힌 듯 얼굴이 붉어진다. 나도 모르는, 혹은 모른 척하고 싶었던 감정을 타인이 살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다. 전화를 잘 못 걸었던 그 남자에게 괜찮아질 거라는, 진심어린 한 마디라도 해줄 걸 그랬나 싶은 마음에 뒤늦은 후회를 한다.
외롭게 혼자 맞이하는 쓸쓸한 죽음도 있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떠나는 행복한 죽음도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떠날 때는 우리 모두 혼자다.
(기억해줘 184페이지)
나답지 않게,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에 신경이 쓰여 생각의 오지랖을 넓혔다.
이상하게, 괜히 쓸쓸해지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