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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에 그림 하나, 한 페이지에 문장 하나. 미스 반 하우트의 <해피 시리즈>는 아주 단순하게 표현한 듯하지만, 물고기의 표정 하나하나 세세하게 담고 있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책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 매력적인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요술까지 부린다. 지금껏 동물을 그린 여러 그림을 봤어도 이렇게 표현한 그림은 처음 봤다. 물론 내가 그림책을 많이 접하지 않아서 모르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색감과 표현이 낯설면서 새롭고 자꾸 눈에 들어온다. 어른인 내 눈에 이렇다면 아이들의 눈도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내가 아동도서나 그림책을 보고 재미있다고 느껴지면 아이들도 재미있다고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 주의.) 그래서인지 곧 4살이 되는 조카가 한참을 보면서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나는 조카의 표정을 보곤 했다. 웃으면서도 심오하게, 가끔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자주 웃으면서... 나는 옆에서 조카가 그림 한 장 넘길 때마다 옆에 있는 단어를 읽어줬다. 글을 모르는 아이도 그림의 표정에서 마음을 읽는다는 것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조카의 표정이 그림 속 물고기, 아이와 꼬마 괴물, 새의 표정과 너무 닮아 있었다.

 

 

<행복한 물고기>

시리즈의 첫 번째인 <행복한 물고기>는 아이들이 일상에서 실제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감정이기에 어떻게 보이는지 더 궁금했다. 기쁘고 즐거운, 떨리고 놀라운, 궁금하고 화나는, 자랑스럽고 샘나는 감정을 물고기를 그린 색과 표정으로 말한다. 거울을 보지 않는 한,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떻게 얼굴로 나타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거울을 본다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 표현된 물고기의 표정을 보면서 사람의 감정에 따른 표정을 그대로 보게 된다. 화나면 찡그리고 미운 주름이 생기는 모습, 놀라워서 눈을 동그랗고 크게 뜨는 것, 기쁘고 흐뭇해서 함박웃음 짓는 입 모양,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의 불안함을 그대로 담았다.

물고기로 표현된 감정이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는데, 아이들의 순수한 표정을 보는 듯했다. 어른이 되어 때로는 감정을 표정에서 숨기고 세상을 대해야 할 때를 경험하곤 하는데, 아직 감정을 숨기거나 표정을 가리지 못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만 같다. 특히 눈빛과 입 모양을 달리하면서 말을 대신하는 표정은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눈빛과 입 모양으로 보이는 표정이 얼굴 전체에 담기지 않나? 어떤 눈빛으로 보고 있는지, 입모양에 따라 어떤 웃음인지도 보이는 정도이니 얼마나 솔직한 언어인지... 시각적 효과를 그대로 담고 있는 <행복한 물고기>의 이야기에 눈으로 즐긴다는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행복한 꼬마 괴물>

어느 시기가 지나면 아이들은 매일 보는 가족이 아니라 타인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을 배운다. 그 시작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동네 놀이터나 기타 장소에서 또래의 다른 아이들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 혼자, 항상 내가 먼저였던 것이 이젠 나만의 것이 아니고 '함께' 하는 게 뭔지 배워가는 시간이다. 그런데 친구를 만들고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어른인 우리도 이 관계가 쉽지 않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 서로의 관계를 유지시키고 화해하고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행복한 꼬마 괴물>이다.

아이와 꼬마 괴물의 만남. 같이 놀다가 지루하기도 하고, 그러다 약 올리고 다툰다. 속상한 마음에 울면서 "다신 너랑 안 놀아." 하며 팽 돌아서기도 한다. 그렇게 사이는 멀어지고 시간이 흐른다. 왜 싸웠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뉘우친다. 그러면서 기다린다. 친구가 다시 오기를... 머쓱한 마음이지만 화해도 하고 서로에 대한 믿음도 쌓아간다. 이젠 해피해피 스마일~! ^^

아이들 사이에서 우정을 만들어가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보니 참 단순해보이지만, 현실에서 그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 역시 만감이 교차하는 어느 순간을 만날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생각, 내가 뭘 잘못하고 잘했는지 반추하는 모습, 타인과 잘 지낼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 아닌 사람과 항상 잘 지낼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관계를 잘 유지해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 과정을 담은 <행복한 꼬마 괴물> 이야기는 어른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에서 느끼지 못할 것들을 그림과 감정 표현으로 들려준다. 책 속에서 아이 자신의 모습을 많이 볼 것 같다. 특정한 어느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그 나이에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의 보편적인 모습이고 갈등이다. 그렇게 배워가는 모습이 참 예쁠 것 같다. 우정의 풍경이 이렇게 그려지고,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 돈독해지는 것. 살아가는 모습이 비춰지는 이 순간에 행복을 느끼게 되는 아이들의 표정도 내 머릿속에 그려본다.

 

 

<행복한 엄마 새>

엄마가 되기를 꿈꾸고 바라는 일. 엄마 새를 통해 보여주는 건 우리네 엄마이자,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이다. 아이를 잉태하고 뱃속에 품어 보듬고 세상에 내보내는 일이 평범한 엄마의 모습이지만, 평범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할 것 같다. 보살피고 다독이고 아껴 주면서 키우지만, 잘못된 부분에서는 호되게 나무란다. 사랑과 행복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지켜본다.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실패부터 생각하지 않게 많은 일에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잘 할 거야.' '잘 할 수 있어!' 라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한없는 신뢰를 보낸다. <행복한 엄마 새>는 그런 마음을 그대로 담은 엄마 새와 아기 새의 시간을, 아기 새를 품고, 낳고, 키우고, 세상으로 향해 나가기까지 지켜보고 보살피는 엄마의 여정을 담았다. 그 여정에서 느낄 수 있는 놀람의 단어들과 표정을 하나의 단어, 문장으로 표현했다. “꿈꾸어요.” “바라고, 또 바라요.” “우아!” "즐겨요" "나무라요" "귀 기울여요" "용기를 주어요" "떠나보내요" 일련의 과정이 이 단어들로, 그대로 시간의 역사를 만든다. 아이를 보는 엄마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다.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엄마에게' 라고 써져있다. 아마도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헌정하는 책이 아닐까 추측한다. 어디 작가의 어머니뿐이랴. 세상 모든 어머니가 이 책에 담겨 있는 걸. 아이와 함께 보내는 순간들이 얼마나 애틋한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기쁘고 슬프고, 아프고 고맙고,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들. 몇 개의 단어로 빛나는 순간과 엄마의 사랑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아이가 자라서 누군가의 엄마와 아빠가 되면 똑같이 겪을 감정이 기대된다.

 

 

처음 이 책을 펼치지 전에는 물고기로 어떻게 사람의 감정을 표현할까 싶은 궁금증이 있었지만 특별한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하나, 등장하는 주인공의 표정 그대로 표현하는 게 너무 완벽해 보인다. '아, 이렇게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표를 머릿속에 띄웠다. 이 시리즈가 아마도 4세 전후의 아이들에게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글을 모르는 아이도 말을 시작하고 단어를 쓰며 눈에 보이는 사물이 뭘까 궁금해 할 수 있는 나이다. 호기심과 궁금증이 넘쳐 '이건 뭐야?' 하는 말이 돌림노래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오는 게 이때의 아이들 모습이다. (아이가 없어도 여러 명의 조카들이 이 나이를 통과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래도 좀 안다. ^^) 특히 보는 게 많아지고, 보이는 그대로 습득하기 쉬운 나이이다 보니 주변의 어른이 어떻게 행동하고 가르치는지 중요하게 영향 받을 시기다. 그대로 성립된 자아가 커가면서 어떻게 작용할지 생각하고 염려해야만 한다. 미스 반 하우트의 <해피 시리즈>는 우리가 살아가는 그런 일상적인 모습을,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키워야 하는지를 그림 하나와 단어 하나로 대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방법으로 그 마음을 설명하고 그린다.

 

무엇보다 이 책의 매력은 그림이다. 평소 관심이 없던 것도 한번 눈에 들어오니 소장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그림이 원색적이면서도 화려해서 한 번씩 펼쳐보고 싶어진다. 이런 색으로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터치 하나, 색깔 하나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이미지가 뇌리에 남는다. 게다가 보통 흰 바탕의 종이에 그림을 그린다는 보편성을 버렸다. 검은색을 바탕으로 깔아놓고 그림을 그렸다. 온통 검은색 바탕에 어둡고 무겁게 보일 수 있는데, 그 위에 그려진 그림이 전체적으로 밝고 환하게 보이게 한다. 원색의 강렬한 대비가 멋스럽다. 표현 재료로 오일 파스텔을 재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일 파스텔은 다루기 쉽고 발색이 선명하며 속도감 있는 선묘에 적합하지만, 혼색이 어렵고 표현도 거칠어 정교한 표현을 하기에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작가는 오히려 오일 파스텔의 단점을 활용하여 그 표현 재료만이 가능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캐릭터가 분명해지고 다채로운 색채를 멋지게 조화시켰다. 특히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한글의 문자 구조를 연구하고 연습한 끝에, 네덜란드 문자로 그려진 원작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글자의 시각 이미지를 재현했다고 한다. 다른 나라의 언어로, 처음의 의미를 그대로 담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보인다.

 

기존에 만났던 그림책과의 차별성이 매력적이고, 이런 간단한 표현과 문장에 인간의 온갖 감정을 다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책을 접할 아이와 어른들에게 전하는 글과 의미가 따뜻하다는 것이다. 아이의 정서에 이 책이 줄 온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이 책을 따라 그리기를 해도 좋을 듯하다. 서투르지만 함께 그리고 표현하면서 인간의 감정을 배워가는 여정을 부모와 아이가 함께한다는 게, 큰 의미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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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란 단어 끝에 매달린 눈물을 멈추게 할 치료약은 없는 듯하다. 그리움이 밀려오는 그 시간을 흘려보내는 수밖에는. 시간이 만들어낸 그리움이 시간으로 흐릿해지길 바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눈물이 나면 나는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수밖에. 누구, 다른 방법 알고 있다면, 좀, 알려줘...

 

2회 모두 챙겨보게 된 <무한도전 토토가>가 한없이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렇게 화려하고 흥겨운 무대에,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어 그냥 흐르게 놔두었는데, 다 끝나고 생각해보니 그건, 그리움이었다. 가수들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처럼, 언제 이런 자리가 또 만들어질지 몰라서 더 그리워질 시간.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찾아왔을 그 순간이 눈물로밖에 표현될 수 없었던 듯하다. 전성기라 불러도 좋을 시간을 묻어두고 살았을 그들에게 이번 무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을 분출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1990년대에 십 대 후반 이십 대를 살았던 나에게도 온갖 감정이 범벅이다. 자신들의 화양연화를 되돌아보고, 다시 모인 자리가 기쁘고 즐거운데도 눈물을 훔치는 그들의 모습에서 가슴 속 말들을 읽는다. 힘들지만 좋았던 시절, 좋은 줄도 모르고 그저 익숙하게 지냈던 시간, 다시 모여 이렇게 노래 부르고 행복하지만, ‘언제 또 우리 다시 뭉치자’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것.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만족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20대가 아닌 30, 40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선뜻 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 알고 있기 때문에... 길에서 우연히 예전에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순간적인 반가움에 아는 척하지만 누군가가 먼저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 하는 말이 영혼 없는 약속이 되어버릴까 봐, 선뜻 꺼낼 수 없는 말이 됨을 아는 것과 같은 의미.

 

그래서 계속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닌 지금 이 순간 들려오는 <토토가>의 노래가 기쁘면서 눈물이 나는 거 아닐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판타지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이들의 이 무대가 지금 이렇게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프고 좋다는 것. 나이를 먹고 체력이 달려 춤추면서 힘들어하고, 그때와 똑같이 분장을 했지만 얼굴의 주름이 다 가려지지도 않는...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같이 나이 먹어가고 있음을 공감하며, 닿지 않는 손을 뻗어가며 다독이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틀에 박힌 향수라고 해도, ‘추억팔이’라고 말해도 괜찮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시간의 소환이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게, 어느 한 때를 노래로 공유했다는 것 자체가 그저 감사해서, 추억이라 부를 시간을 만들어낸 게 기적 같아서 좋은.

 

배순탁의 <청춘을 달리다>도 비슷하다. 그의 전문적인 음악 지식을 풀어내고 있지만, 그 배경은 1990년대, 그가 이십 대를 보내던 시절의 이야기가 곳곳에 녹아있다. 

 

 

때때로 음악은 특정한 시절을 소환하는 마법을 부린다.

그리고 내 경험에 의하면, 어려운 시절보다는 좋았던 시절이 소환될 때, 눈물이 왈칵 차올라서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고는 한다.

시간이 흐르면 나쁜 기억들은 사라지고, 행복했던 기억만이 남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돌아오지 않아’라는 진실을 그 어떤 바보가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이 곡을 지금까지도 듣는 이유는, 거기에 아버지와 나의 환한 미소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음악은 때로 이렇게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거는 전화가 된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된다. 나처럼 나중에 땅을 치면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잘해야 한다. 돌아오지 않는다. 절대로.

- 46~47페이지 <청춘을 달리다>

 

 

 

1년쯤 전, TV를 잘 보지 않았던 그때도 <응답하라 1994>에 빠져 본방송을 챙겨볼 정도였다. 주변에서 웬일인가 싶어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내곤 했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거, 우리 그때랑 너무 똑같잖아!’ 라면서 미치도록 공감하며 다음 회를 기다렸다. 우리의 20대, 너무 그립고, 서툴러서 아쉬웠던 그 시간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봤다. 드라마가 너무 재밌다며 몰입했고 중독됐다. 그땐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그저 재밌는 드라마라고... 근데 오늘 <무한도전 토토가>를 보면서 그 드라마를 떠올리니, 스토리 자체가 만드는 몰입보다 그 배경에서 계속 들려왔던 음악이 더 생각났다. 그 때문인 듯하다. 눈이 아닌 귀로 저절로 그 시간을 소환해내는 것. 물론 눈과 귀가 같이 영향을 받았기에 그 시너지가 엄청났을 테지만, 음악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감동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짙어진다. 그 시대의 음악이 빠져서는 이야기가 안 될 정도로...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잠시 잠깐, 시간이 멈춰있었다. 그 시간의 감동과 열기가 행복하면서 두렵기까지 하다. 이 순간이 지나면 한바탕 꿈에서 깨어난 후유증을 견디기 어려울까 봐. 휴...

 

어느덧, 누구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고, 누구는 가수보다 예능인으로 더 각인되었고, 누구는 혼자 두 사람 몫의 노래를 하며 행사를 뛰고, 누구는 한류의 한가운데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그때 매일같이 얼굴 보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들의 지금 자리는 너무 달랐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에 다른 생각은 낄 자리가 없는 듯하다. 지금, 이렇게 행복하면 좋다는 듯, 다행이라는 듯...

 

 

프로그램이 끝나고 이십여 년을 함께 한 친구에게 문자를 한 통 보냈다.

'졸업하고 우연히 남철이를 만난 적이 있어. 우리가 슬리퍼 버렸다는 거, 알고 있더라고... 그냥 웃더라.'

그 친구와 나만이 알 수 있는 암호 같은 문장을 전송했다. 가수들에게 오늘의 시간이 여운으로 길게 남아 힘들 것처럼, 나에게도 한동안 마음을 무겁게 할 여운으로 남아있을 듯하다. 그리운 어떤 게 빨리 잊히기만을 기다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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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늦은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가 무서운 적이 많았다. 지금도 그런 무서움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익숙해져서 그런지 아니면 조금 무뎌진 건지, 예전보다는 덜 하다. 뭐 별것도 아닌 걸로 그러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경험이 아니었기에 그 기억이 더 오래가는 듯하다. 위험한 말이 오고 가서가 아니고, 안 좋은 소식이나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 많아서였다. 절대 유쾌하지 않을 일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밤중에 도착하는 소식 중에는 외로움, 혹은 쓸쓸함이 담겨 있는 것도 많았다. 자정을 전후로 들어오는 문자가 특히 그랬다. 밤이라는 시간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외로움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는 이는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었고, 대개 가까운 사이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말을 웃음과 같이 건넬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 다행인... 때로 바쁜 시간이 지난 후 찾아온 여유에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시간이거나, ‘그냥’이라는 이유로 스스럼없이 말문을 열 수도 있는 시간. 그래서 한밤중의 문자가 안 좋은 소식들로 불안한 것보다 괜히 마음이 허해지는 순간으로 변해가곤 했었다.

 

 

외로운 밤이 있다.

'아니 이건 그리움이야, 아니 이건 고독이지, 고독은 나의 친구인걸' 하고

아닌 체해보아야 어쩔 수 없이 사무치는 건, 외로움이다.

외로움에는 눈물이 없다.

메마른 가슴이 괴롭게 사람을 들쑤시는 밤.

(쓸쓸해서 비슷한 사람 194페이지)

 

 

 

이상한 밤이었다.

요즘, 이상하게 잘못 걸린 전화가 자주 온다. 일주일에 두세 번쯤, 그것도 밤에 주로. 지금 번호를 사용한지 1년쯤 됐는데, 그동안 잘못 걸린 전화 어쩌다 한번 받기는 했어도 요즘처럼 자주 오지는 않았다.

 

 

 

언젠가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어.

‘자신을 완벽하게 고백하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어떤 표현도 불가능하다.’

비루한 고백을 들어줘서 고마워. 오랫동안 옆에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마지막으로 어떤 주저도 없이 말할게.

행복해라, 꼭. (말하자면 좋은 사람 198페이지)

 

 

 

며칠 전 금요일 밤, 자정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 문자 한 통이 들어온다.

 

“00아, 잘 지내니?”

모르는 이름이기에 잘못 온 문자려니 싶어 무시했다.

몇 분쯤 지나자 다시 또 문자가 들어온다.

“00아, 나야. 보고 싶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상대방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문자 잘못 보내셨습니다.”

상대가 잘 알아들었겠거니 했다. 잘못 수신된 문자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으니, 알아듣고 이젠 문자를 안 보내겠구나 했다. 그런데 이 사람 이젠 문자가 아니라 전화를 걸어온다. 순간, ‘이걸 받어, 말어?’ 몇 초의 고민을 했더랬다. 굳이 잘못 보냈다는 문자에 왜 전화를 걸어올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 알바 아니라는 마음이 커서, 귀찮아서였다. 그래도 한 번 더 친절해도 될 것 같아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말 00 휴대폰이 아닌가요?”

“모르는 분입니다. 전화 잘못 거셨어요. 제가 이 번호를 1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바로 전화를 끊을 줄 알았다. 전화를 잘못 걸었다는데, 상대방은 자기가 찾는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끊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 전화를 끊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전화를 끊겠다고 말하고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이 남자가 먼저 말문을 연다.

 

“죄송합니다. 00은 헤어진 여자 친구인데요.”

그래서?

“참고 참다가 1년이 넘어서야 전화를 했어요. 보고 싶어서요.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요.”

그런데?

“그 사이 전화번호가 바뀐 걸 몰랐어요. 너무 당연하고 익숙한 번호라 계속 사용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문자 잘못 보냈다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고 전화까지 하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네.”

“......”

“저기요?”

“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평소 하던 대로 했다. 나와 상관없는 이 얘기를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찾는 분의 전화번호가 바뀐 걸 알았으니, 이제 이 전화를 끊어야하지 않겠어요?”

“아, 예. 그렇죠. 그래야죠...”

근데 왜 끊겠다는 말이 없어?

내가 먼저 끊어야겠다고 다시 말하려고 하는 순간, 상대가 다시 말문을 연다.

“정말 거짓말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00과 목소리까지 비슷하네요. 처음엔 본인인데 아닌 척하는 줄 알았어요. 근데 말의 억양이 달라서 아닌 걸 알았어요. 그쪽은 목소리가 좀 더 낮네요.”

“저에게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저는 그쪽과 계속 통화할 이유가 없는데요.”

냉정하게 들릴 정도로 딱 잘라 말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의미 없는 대화를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상대를 배려하고 싶어도,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을 찾아 데려다 줄 수도 없잖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 말투가 정말 스팸전화 끊듯이 ‘뚝’ 끊어버릴 수 없게 했다. 그렇게 나 혼자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이어져오는 말.

“보고 싶은 거 그동안 잘 참았는데, 오늘은 정말 못 참겠어서요. 한마디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안하던 짓을 했어요. 죄송했습니다. 제가 먼저 끊겠습니다...”

뚜. 뚜. 뚜...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귀신에 홀린 듯했다. 오 분에 가까운 시간동안 뭐가 지나갔나? 뭐지, 이건? 아, 진짜...

 

 

 

그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하는 순간 증기처럼 아득한 두려움이 나를 덮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 토막들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을까.

진짜는 죄다 도둑맞고,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아의 금고 속에는 엉뚱한 모조품만 잔뜩 쟁여져 있는 느낌이다.

스물두 살의 첫새벽처럼 나는 텅 빈 주방 앞에서 나지막이 읊조린다.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지? (비자나무 숲 262페이지)

 

 

 

 

멀쩡한 기분이었다. 두통이 좀 심했던 거 말고 특별히 더 나쁠 게 없었다.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뭐야? 잠들려고 했던 기운을 다 깨워놓고 이상하게 멜랑콜리한 기분까지 남겨놓다니. 그 사람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 괜찮아졌는지 어땠는지 몰라도, 그녀의 전화번호가 바뀐 것을 알고 이제 삭제하고 개운해졌는지 몰라도, 이젠 정말 그 미련을 버렸는지 몰라도... 나는 괜히 우울해졌다. 전혀 모르는 남인, 누군가의 외로움이 쓸데없이 전염된 듯했다. 수화기 너머 누군가의 쓸쓸함이 그대로 건너온 듯했다. 뭐가 이래. 아, 이런 거 정말 별론데.

 

 

잠이 다 깼다. 이대로 잠들기는 어려울 듯하여 양양의 책 제목이 생각나서 들춰보다가 문득, 내 전화번호 전 주인이 궁금해졌다. 나에게 온 잘못 걸린 전화는 남자를 찾는 전화도 있었지만 대부분 여자를 찾는 전화였다. 같은 이름의 여자를 찾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바꾸면서 번호연결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은 듯했다. 그 말은, 굳이 바뀐 전화번호를 전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 아닌가. 본인이 먼저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이상 타인이 그 번호를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나에게 잘못 걸려온 전화를 생각해보니, 1년 동안 이 사람들은 내 전화번호 전 사용자와 연락이 없었다는 건가? 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1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을 찾는 거지? 전화한 그 남자는 1년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혹시, 좁은 편도 1차선 같은 길을 가고 있었을까. 같은 마음으로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는 길, 상한 마음에 '나 없이 잘 지내지 말라'고 소심한 복수라도 했던 걸까. 그래도 결국 쓸쓸해진 마음을 어쩔 수 없어 그녀를 찾았던 걸까.

 

 

한 사람을 떠올렸다. 늦은 밤 전화해서 내려앉은 목소리를 들려주던, 늦은 퇴근길에 걸음은 무겁고, 불 꺼진 집에 들어와 시어진 김치에 물을 만 밥으로 허기를 달랬다던, 외롭다고 푸념을 늘어놓던 목소리. 누구나 사는 게 비슷하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외롭다고 말하던 사람의 가슴은 쓸쓸했겠구나, 싶다. 이런 거였구나. 양양이 평범하다면 평범한 일상을 두고 말하면서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를, 어쩌면 알 것도 같다.

 

늦은 밤 불쑥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건, 제목에서 흐르는 그 쓸쓸함 때문이다. 아닌 체하려고 해도 안 되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침묵이 기어코 또 다른 말이 되어 뛰쳐나오고야 마는 것. 함박눈이 펑펑 내리며 추위가 더 짙어지고, 양양의 노랫말이 되어버린 그녀의 끼적임은 그래서 '비슷한 사람'이란 이유로 우리를 붙든다. 닮아있음을 부정하지 말라고, 닫힌 창문 열고 손 뻗으면 바로 닿는 사람들이라고... 살아가는데 때로 말이 없어도 되고 표정이 없어도 되고 혼자여도 되지만, 가끔은 딱 한 마디가 필요한 때가 있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한 마디만. '어쩌면 우린, 비슷하구나.'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이 필요할 때. 이 책에서 그녀가 뿜어대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 같은 시간 앞에 괜히 민망해진다. '너도 그렇잖아' 건네는 한 마디에 모든 감정을 읽힌 듯 얼굴이 붉어진다. 나도 모르는, 혹은 모른 척하고 싶었던 감정을 타인이 살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다. 전화를 잘 못 걸었던 그 남자에게 괜찮아질 거라는, 진심어린 한 마디라도 해줄 걸 그랬나 싶은 마음에 뒤늦은 후회를 한다.

 

 

 

 

외롭게 혼자 맞이하는 쓸쓸한 죽음도 있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떠나는 행복한 죽음도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떠날 때는 우리 모두 혼자다.

(기억해줘 184페이지)

 

 

 

 

나답지 않게,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에 신경이 쓰여 생각의 오지랖을 넓혔다.

이상하게, 괜히 쓸쓸해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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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에서 아버지 차순봉(유동근)은 자식들을 상대로 불효자 청구 소송을 했다. 자식들에게 성인이 된 후에 들어간 돈을 계산해서 청구한 거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야 말 그대로 미성년이니 부모가 자식을 부양해야 할 의무라고 계산에서 뺐나 보다. 암튼 삼 남매에게 청구된 금액은 컸다. 그런 소송을 받아들인 판사도 의아해 하면서 이 소송을 지켜보기로 한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자식을 상대로 왜 이런 소송을 하게 되었는지 사연을 알고 있기에 무시할 수 없었던 듯하다. 그러면서 차 씨 삼 남매에게 강조한다. 이 소송은 판결이 아니라 조정으로만 진행하겠다고, 그러니 아버지와 합의를 하라고 조정 자리에 나온 삼 남매에게 말한다. 그럼 아버지가 원한 합의 조건은 뭔가. 결혼 안 한 첫째 강심(김현주)에게는 석 달 동안 열 번의 선을 보라고 한다. 둘째 강재(윤박)에게는 석 달 동안 집에 들어와 살라고 한다. 셋째 달봉(박형식)에게는 석 달 동안 매달 백만 원의 용돈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삼 남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아버지가 원한 합의 조건을 수락한다. 이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이 소송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정말 삼 남매는 아버지의 요구사항을 얌전히 이행할 것인가, 석 달 후 이 가족은 어떤 모습일까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진다. 드라마다. 내가 궁금해하지 않아도 이들은 성장하고 변화하며, 이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될 것이다. 물론 아버지 차순봉의 건강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난 주말에 동생이 다녀갔다. 저녁을 먹으며 이 드라마를 함께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생이 툭 말을 던진다. 실제로 부모가 자식들에게 위자료 청구 소송을 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이 있더라고 말했다. 동생은 파출소에 근무하는데, 파출소로 서류 떼러, 혹은 뭔가 확인하러 오는 사람이 종종 있다고 했다. 예를 들면 며칠 전에 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어떤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출소해서 나왔는데, 본인이 먹고 살길이 없으니 자식들에게 위자료 청구 소송을 했단다. 그에 소송을 당한 자식이 파출소로 서류를 떼러 왔는데, 그 서류가 뭔고 하니, 그동안 아버지가 쳤던 사고 뒷수습한 증거라고 했다. 그 아버지는 평생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 술 먹고 들어와 행패 부리고, 때려 부수고, 폭행하고... 교도소에 있기 전부터도 오랫동안 자식들과 연락 없이 지냈단다. 그런데 이제 와, 실컷 죄를 저지르고 처벌받고 세상에 나와 먹고 살길이 없으니, 가족마저 외면하니 자식들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한 거란다. 자식들은 이에 억울해서 반박할 자료를 제출하기 위해 이런 서류도 떼러 온다고 했다. 그 아버지가 사고 쳐서 신고 된 내용, 어떤 내용으로 잡혀왔고 자식들은 그에 어떤 식으로 얼마를 합의하거나 뒷수습을 했는지 증거를 찾으러 온 거다. 그러니까 자식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가족을, 자식을 돌 본 기억이 없는 거다. 평생 아버지가 한 일이라고는 사고 쳐서 경찰서 드나들고 자신들은 그거 뒤처리한 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는 거다. 한두 번도 아니고 빈번했다고 했다.

 

 

 

 

 

 

 

 

 

 

동생이 들려준 말에 조금 놀랐다. 그런 마음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그걸 실행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모가 자식을 상대로 이런 소송을 하기도 하는 구나, 싶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저 밥을 먹는데 좀 답답했다. 남의 가정사 내가 다 알 수는 없다. 아버지가 술 먹고 행패부리고 폭행하고 했다고 해도, 자식들이 그 뒷수습 하느라 지쳤다고 해도, 그 이하의, 그 이상의 일들을 내가 다 알 수 없으니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다. 그저, 드라마 속의 이런 일도 실제 일어나고 있구나 하면서 끄덕이는 수밖에.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다른 것들 다 차치하고서라도, 부모가 부모 노릇을 해야 부모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거다. 부모 자식 간에도 기브 앤 테이크가 존재한다. 단순히 돈을 말하는 게 아니고, 부모가 부모의 자리에서 자식을 어떻게 키웠느냐 하는 자세의 문제다. 저기 파출소에 서류 떼러 왔다는 가족의 문제를 듣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아마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자식 대접을 못 받은 것에 속상하지 않을까. 자식으로 아버지에게 당연히 받아야 할 애정과 보살핌을 못 받아서 아버지를 돌볼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래도 부모인데...’ 라는 말을 누군가는 여기서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정말, 그게 속상할 것 같다. 젊은 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실컷 술 먹고 손이 가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고 죄를 저질렀으니 처벌을 받는 건 당연한데, 자신이 자식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에서 지우고 낳아놨다는 것 한가지만으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하는 것으로만 보이는 게 안타깝고 속상하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이 존재한다는 게 더없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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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모 2014-12-0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자료라는게 부모 자식간에 성립할수도 있군요 부모님의 사랑을 너무 당연시한건 아닌가 반성하게 되네요

구단씨 2014-12-09 11:22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

세실 2014-12-08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벌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전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해줄때 생색을 많이 냅니다. 공을 알아야 나중에 당당하게 요구하죠! ㅋ

구단씨 2014-12-09 11:21   좋아요 0 | URL
부모가 당연하게 돌보고 생색내도 됩니다.
부모가 어떤 마음으로 아이들을 키우는지 아이들도 알아야죠. ^^
 

 

 

 

작년 연말 즈음에, 내 옆에 쌓여있는 책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아, 이 상태로 책 읽기를 계속할 수는 없겠구나.' 심각했다. 방이 워낙 좁은 데다가 정리 따위는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 책이 몇 권만 더 쌓여있어도 금방 심란해진다. 책으로 방이 지저분해도 딱 그만큼이어야 했다. 늘어나는 책이 차지하는 어지러움은 바로바로 치워버려야 답답증이 가셨다.

 

생각해보면 그건, 책을 읽지 않고 살거나 책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해결될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게으른 책 읽기를 하는 나지만, 책을 가까이하지 않고 사는 건 잘 상상이 안 된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책 구매에 신중해지고 책 읽기를 가볍게 하자고. 언젠가부터 조금씩 들었던 생각을 올해 시작하면서 제대로 실천해보자고 다짐했었다. 올해가 거의 끝나가고 있으니, 11월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으니, 찬찬히 되돌려 생각해본다. 나는 그 다짐을 잘 실천하고 있었는지...

 

 

 

3.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할 때마다 다 읽고 반납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처럼 그게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5권쯤 대출하면 그중 1~2권은 대출기한 때문에 다 읽지 못한 채로, 혹은 아예 읽지 못한 채로 반납하기도 했다. 당연히 반납해야지. 그래야 다음 이용자가 읽을 수 있고 나도 도서연체자가 되지 않을 테니까. 못 읽은 책에 아쉬운 마음이 들어도 반납하고 나면 그만인데, 이상하게 같은 책을 다음에 또 대출하는 경우가 있다. 그건 그만큼 읽고 싶은 책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못 읽고 반납한 도서를 다시 대출한다는 건 그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나에게는 그렇게 대출하고 읽지 못한 채로 반납한 도서가 몇 권 된다. 그런 식으로 세 번 대출했는데도 못 읽고 반납한 도서는 구매하기로 했다. 세 번이나 그 번거로운 일을 반복했다면 그건 그만큼 읽고 싶었다는 말이고, 못 읽고 반납했다는 건 그만큼 아쉽고 안타까웠다는 거다. 그아쉬움에 또 대출할 것 같아서 아예 구매해놓고 옆에 두고 읽자는 생각이다.

그래서 구매한 책이 몇 권 있다. 그중 하나가 <영원의 아이>다. 처음 구판으로 세 권짜리를 대출했을 때 못 읽고 반납했고, 개정판으로 나왔을 때도 못 읽고 반납했다.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개정판의 그 두툼한 두께에 지레 겁을 집어먹었는지도 모른다. 못 읽은 그 아쉬움에 항상 보관함에서 먼지만 덮고 있던 목록이었는데 지난번 반값행사 때 구매했다. 고이 모셔놓고 얼른 읽어주고 싶어서 매일 쓰담쓰담 쳐다보고 있다. 괜히 안심된다. 물론, 아직 읽지 않았다. @@

 

 

 

 

 

 

 

 

 

 

3.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서점 몇 곳의 플래티넘 등급이었다. 다른 어떤 조건 때문에 등급이 올라간 게 아니고 순수주문금액으로만 만들어진 결과였다. 가족이 같은 아이디로 구매하니까 그렇기도 했지만 나도 책 구매를 큰 고민 없이 하는 편이었다. 그게 몇 년 동안 계속된 등급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속도가 책을 구매하는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책은 게으르게 읽고 책 사는 속도는 엄청 빨랐으니까. 책을 장바구니에 담을 때도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가 정말 읽고 싶은 책인지 아닌지, 책값이 적정한지 아닌지(책값의 적정 기준은 순전히 개인적인 기준임.), 지금 이 책을 읽을 시간이 되는지 안 되는지, 같은 여러 가지 고민이 아니라 그냥 단순하게 읽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만 구매를 완료하곤 했다. 그러니 안 봐도 뻔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분명 읽고 싶은 마음 하나로 책을 사들였는데 읽지도 않은 책은 쌓여가고, 그 책탑만 보면 괜히 피곤해지고, 책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그로 인해 나 혼자 스트레스를 만들고...

그래서 생각을 많이 바꿨다. 내가 정말 이 책을 읽고 싶은지, 꼭 지금 구매를 해야만 하는지 최소 세 번 이상은 생각하고 구매하자는 것. 책값이 비싸고 싸고 하는 문제가 우선이 아니다. 책으로 이루어지는 충동구매가 여러 가지 안 좋은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깨닫고 보니, 책은 좋은 것이지만 무조건적인 책 구매가 절대 좋은 일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혹시라도 할인 기회를 놓쳐 다른 구매자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사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이 책이 지금 구매해야 하는지를 꼭 세 번 이상은 고민하고 결정하자고.

그렇게 구매한 책이 김경민의 <시 읽기 좋은 날>이다. 두 번쯤 고민하고, 도서관에서 대출해 살펴보다가 결국 구매했다.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책이기도 하고, 김경민의 차근차근 말하는 듯한 분위기가 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젊은 날의 책읽기>가 조금 무게감 있게 다가오는 거에 비하면 <시 읽기 좋은 날>은 감정에 취하기 좋은, 시를 부르는 시 이야기다. 좋다.

 

 

 

 

 

 

 

 

 

 

 

 

3.

가끔 내가 지금 소장하고 있는 도서를 가만히 살펴볼 때가 있다. 그중에는 최근에 구매한 책도 있지만 몇 년 전에 구매하고서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도 있다. 시간이 없어서 못 읽은 경우도 있고, 책의 무게감(내용) 때문에 한 번에 호흡하기 힘들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먼지만 덮은 책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끌어안고 있는 책이 늘어갔다. 어떤 목적을 두고 필요해서 구매하기도 했고, 한번 가볍게 읽어보려고 구매한 책도 있다. 책이 저마다의 목적을 두고 책장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다. 그렇게 자리만 굳건히 지키고 있는 책을 가만히 놔두는 게 옳은 일일까. 물론 그렇게 자리만 차지한 책들도 언젠간 내 손에서 펼쳐지겠지. 하지만 그 '언젠가'라는 막연함으로 몇 년 동안 방치되고 쳐다보지도 않는 책들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답답한 마음에 내 눈에 걸리는 책을 가만히 쳐다보곤 했다. 그 책들은 대개 두 부류다. 아직 읽지 않았기에 소장 여부를 고민하게 하는 책, 이미 나에게 한번 읽힌 상태이기에 소장 여부를 고민하게 하는 책. 물론 그렇게 방출(중고로 팔거나 다른 이에게 나눔 하거나)하고 후회할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특히 구매한지 3년 이상 된 책을 집중적으로 고민했다. 분명하게 소장해야 할 책이 고민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 외의 책들, 이도저도 아닌 채로 머물러 있는 책들. 이 경우도 분명하게, 적어도 세 번 이상은 고민해야 한다. 내보내 놓고 가능하다면 후회를 안 하게. 이 책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 내 책장에서 내보내도 되는 이유를 잘 판단해서 책이 누르는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하다 얼마간의 책을 내보냈다. 작년에 몇백 권을 내보낸 것에 비하면 올해는 거의 처분하지 않은 셈이다. 새해 시작하면서 다짐했던 것을 많이 고려한 책 구매 방식 덕분이다. 다행이다.

 

 

 

 

이렇게 하는 게 잘한 일일까 많이 고민했다. 지금도 그 고민은 계속된다. 아직도 이 부분에서 내 생각이 옳다고 100% 확신하지는 않는다. 다만 작년보다 올해, 예전보다 요즘 더 책을 대하는 마음이 나아지고 있는 걸 보면 괜찮은 결과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2014년이 한달 반 남은 지금 어느 정도 습관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조금씩 더 나아지는 책 관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도서정가제 시행으로 마음이 많이 심란했던 몇 달이다. 특히 최근 한 달 동안에는 책을 엄청나게 구매했다. 있는 돈 없는 돈, 얼마 안 남았던 적립금, 남겨두었던 상품권까지, 바닥까지 긁어서 구매 완료했다. ('위에서 계속 말하던 거는 뭐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름으로 고민에 또 고민한 신중한 구매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럴...거...야...) 몇 년 동안 보관함에 머물러 있던 책, 읽고 싶었지만 선뜻 손대지 못했던 세트 도서, 계속 미루기만 했던 고전들,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고른 읽고 싶었던 신간 몇 권, 조카에게 보낼 어린이 도서들. 책 구매 신중하자고 생각한 상태에서 데려온 책들이라 마음이 더 충만하다. 뭐랄까, 정말 고르고 골라 선택받은 아이들(책)을 보는 뿌듯함 같은 것... 이제 이 책들을 참 재밌게 읽기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안심이 되는 느낌이다. 막상 읽고 보니 생각보다 별로였어, 라고 내가 서운하게 대할 책이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내년에도 나의 이런 책 구매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도서정가제 시행이 불만스럽지 않게 ‘이 책은 이 가격을 주고 사도 정말 좋아.’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 많이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것...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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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2 2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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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3 1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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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4 0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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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4 16: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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