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기적 같은 피아노 이사 39번 문학동네 세계 인물 그림책 4
조나 윈터 지음, 정지현 옮김, 배리 블리트 그림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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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이삿짐센터를 운영하고 있어서, 이삿짐 옮기고 난 후의 이야기를 거의 매일 들었던 적이 있다. 그때 자주 들었던, 이삿짐센터에서는 정말 피하고 싶은, 반갑지 않은 이삿짐 목록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피아노라고 했다. 너무 무겁고, 혹시라도 옮기면서 흠집이라도 날까 긴장하면서 옮기게 되고, 이사를 의뢰한 사람의 집이 1층이 아니면 피아노를 옮기기도 전에 등에 땀부터 난다고. ^^ 전문가들이 피아노를 옮기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겠지만 실제로 피아노를 옮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나도, 상상만 해도 벌써 등에 땀이 난다. 베토벤은 그런 피아노 이사를 빈에서만 서른아홉번이나 했다니 금방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괴팍한 베토벤의 피아노를 옮기던 일꾼들의 땀 흘리는 얼굴은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사실 :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1770년 독일 본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시간이 흘러, 베토벤은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다리 없는 피아노 다섯 대가 있었고, 방바닥에 앉아 위대한 곡들을 만들었습니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서른아홉 번이나 이사를 다니며 셋방살이를 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이 책에서 다루려는 주제입니다. 피아노를 옮기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피아노 다섯 대를 옮기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베토벤. 괴팍한 성격을 가진 음악가. 훗날, 그는 귀가 들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냈다, 라고 들어온 인물이다. 음악을 잘 알지 못하다 보니 베토벤의 유명한 음악 몇 곡만 들어왔을 뿐, 베토벤이라는 인물 자체나 그의 음악이 만들어진 배경이나 역사에 대해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 중 하나가 이 책에서 들려주고 있는,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빈에 살면서 서른아홉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서른아홉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왜 이사를 그렇게 자주 했었는지, 어디로 이사를 했었는지, 그가 이사한 방은 어땠는지, 문제의 다리 없는 피아노 다섯 대를 이사할 때마다 어떻게 옮겼는지 알려진 부분이 없다. 이 백 년 동안 연구됐지만 피아노 다섯 대를 옮긴 방법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니, 이 얼마나 밝혀내고 싶은 미스터리란 말인가! 서른아홉번이라는 이사의 횟수가 적지도 않을뿐더러(^^), 한 대도 아닌 다섯 대의 피아노를 매번 어떤 방식으로 옮겨야 했을지 궁금했던 마음을 한방에 해소해주고 있는 책이다. 게다가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베토벤의 음악이 탄생된 배경까지 듣고 있자면, ‘어머, 정말?’ 하면서 귀가 솔깃해지고, ‘아하, 그럴 수도 있겠어!’ 라며 손뼉을 치면서 읽게 된다.

예를 들면, ‘피아노 소타나 14번(월광)’은 도시 중심가에 있는, 열린 창으로 달빛이 들어오는 아름다운 방에서 만들어진 곡이라고 말한다.(상당히 그럴싸하지?^^) 그럼, 이렇게 아름다움이 스며드는 방에서 계속 작곡을 하면 될 것을, 베토벤은 이 셋방에서 쫓겨나고 만다. 왜냐고? 방세 내는 것을 잊었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슬픈 이유가 여기에 있다. ㅠㅠ 이때부터 베토벤의 이사여행은 시작된다. 그 다음 이사한 지하 셋방에서는 8일 만에 또 이사를 하게 된다. 테라스가 있는, 다뉴브 강이 한눈에 보이고 창문으로는 비엔나커피 향이 들어오는 곳에서는 ‘교향곡 3번(영웅)에서 5번(운명)’까지 만들었다고도 한다. 자연에 대한 사랑이 담겼다는 ‘교향곡 6번(전원)’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니, 혹시 그가 한 번씩 이사할 때마다 그 공간에 어울리는 악상이 막 떠올랐던 것일까? 그럼 서른아홉 번보다 더 많이, 더 자주 이사를 했다면 지금쯤 베토벤의 음악은 더 많이 남겨져 있었을까? ^^

이 책이 써진 목적처럼, 여기서 내가 추리하고 싶은 것은 그의 이사 이유만큼이나 서른아홉 번에 달하는 그의 이사에서 피아노가 어떻게 옮겨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피아노를 어떻게 건물 밖으로 꺼냈는지(비록 다리가 없었다고 해도 피아노는 덩치가 크고 무겁잖아!), 고층 혹은 지하 같은 곳으로 어떻게 피아노를 올리고 내리고 했는지(혹시 피아노가 타고 다닐만한 미끄럼틀이라도 있었던 걸까?),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옮겨갈 때는 어떻게 갔는지(바퀴가 달린 커다란 수레를 직접 제작해서 피아노를 태웠을지도 몰라!) 그의 이사에 관한 모든 것이 궁금해서 안달이 날 지경이다. 피아노를 건물 밖으로 꺼내어 뒷문으로 옮겼을 수도, 도르래로 지붕 위를 통과하게 한 다음 옆 건물 난간에 내려놓았을지도, 벽을 뚫고 이웃집의 주방을 통과했을 지도, 낑낑거리면서 고층 계단을 걸어서 피아노를 들고 올라갔을지도 모르지. 베토벤의 피아노를 옮기기 위해 직접 도면(피아노를 땅에 내리지 않고 옮길 수 있는 방법을 그렸다니까!)을 그려야했을 정도로 짐꾼들은 베토벤의 피아노 이사로 인한 분노가 끓어오르기 일보직전이었던 것 같다. ^^ 그럼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던 베토벤은 이곳저곳으로 옮기느라 망가진 피아노를 버리고 새 피아노를 사기도 한다.

베토벤의 이사의 시작이 단지 방세를 못 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일기에서 언급됐던 것처럼 ‘코를 찌르는 끔찍한 치즈 냄새’ 한 가지 때문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그의 잦은 이사의 이유가 점점 잃어가는 그의 청력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처음 이사의 시작은 다른 이유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점점 사라져가는 그의 청력은 이웃들에게 본의 아니게 소음을 제공하는 격이 되었다. 이웃들의 “다아아아악쳐!!!” 하는 항의가 빗발쳤으니까. 들리지 않는 귀 때문에 피아노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고, 조금 더 크고 힘 있게 피아노 건반을 내리친다면 자신의 귀에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들리지 않는 귀, 폭발할 것 같은 화, 광기까지 더해져 피아노에 그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 것인지도... 어쨌든, 실제로 그가 내는 소음 때문에 여러 차례 민원이 제기되기도 했다는 걸 보면 그의 잦은 이사의 이유가, 이웃에게 끼치던 소음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베토벤은 청력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작곡을 멈추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귀로 그는 ‘교향곡 9번(합창)’까지 만들어냈다. 그의 이웃들에게는 이런 그의 행동이 소음으로 행하는 폭력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계속해서 음악을 할 수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던 것 같다. 자신이 계속해왔던 음악(작곡)에 대한 애착과 들리지 않는 귀로 인해 번번이 좌절로 보내야 했을 시간을 견디게 해줄 방법 같은... 상상력과 사실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 들려준 그의 이사는 웃음과 기발함으로 재미를 주지만 그 이면에 깔려있는, 음악에 대한 그의 고통과 간절함은 괴팍스러운 성격과 광기, 소음으로 신고 되기까지 하는 그의 음악으로 함께 보여주고 있다. 상상력으로 그려진 이야기의 웃음 뒤의, 사실을 담은 그의 고통으로 인한 아픔까지 보게 하는 것이다.

외골수, 광기, 혹은 괴짜로 유명한 베토벤의 인생에 있어서 서른아홉번의 피아노 이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상상하는 재미를 그대로 전달해주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걸 보면, 이 책의 작가 조나 윈터 역시 베토벤 못지않게 괴짜로 보인다. ^^ 틀에 박힌 위인전의 색깔을 벗고 뜬금없이 베토벤의 이사를 언급하다니! 요즘에 비추어 보면 베토벤은 진상 중의 진상 고객이다. 들려오는 그의 성격을 봐도 보통의 고객은 아니었을 것이다. ㅋㅋ 피아노 다섯 대와 괴팍한 성정의 베토벤. 생각만 해도 진상 고객을 욕하는 짐꾼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이삿짐센터에서 피해가고 싶은 진상 고객이다. 이 많은 책에다가 예민한 성격까지, 베토벤의 서른아홉번의 이사로 내가 받은 교훈은 이삿짐센터의 진상 고객은 되고 싶지 않다는 거. 그렇다면 (이사 계획이 생긴다면) 이사하기 전에 이 책을 다 처분하고 이삿짐센터에 의뢰해야 한다는 말인가?! ㅠㅠ

이 책에서, 베토벤의 이사는 서른아홉번이 다 채워지지 않았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 나머지 이사의 방법, 이사의 이유, 이사하는 모습을 우리가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 된다. 베토벤의 그 시간 속으로 함께 들어가 그와 같이 이사를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해봐.(어쩌면 나는 낑낑대며 그의 다리 없는 피아노 중의 한 대를 옮기고 있을지도 몰라!) 신나지 않겠어? ^^

그동안 내가 만났던 위인들의 이야기에서 보편적으로 들어왔던 내용은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기 형식이었는데, 이 책 『베토벤의 기적 같은 피아노 이사 39번』은 베토벤에 대해 알려진 사실 단 몇 줄만을 언급해주고 ‘모큐멘터리(mockumentary)’ 형식으로 구성했다. 베토벤이 서른아홉번의 이사를 했다는 것뿐, 이사의 내용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기발한 상상력을 채워 넣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그림과 글로 보이고 있는 그 이상을 나만의 상상력으로 계속 그리게 만드는 것이다. 몇 가지 추측으로 따라가 본 베토벤의 이사는, 어쩌면, 영원히 ‘왜?’ 라는 의문으로만 남겨질지도 모르지만, 뭐 어떤가. 베토벤의 인생에 있어서 이미 알려진 사실들 말고, 이런 내용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독자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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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인간
이석원 지음 / 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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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벽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을 수도 있는 것이라면, 자신을 보이지 않는 틀 안에 가두는 것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리라. 사랑도 마찬가지. 사랑을 하는 것도 사람이고, 끝내는 것도 사람이다. 살아가는 이유를 사랑에 부여하는 것도 사람이고, 존재 이유를 부정하게 하는 것도 사랑일 때가 있다. 사랑이 끝나고 이별이 찾아왔을 때, 그 이별을 감당하고 견디는 것도 제 일이다. 그리고 그다음 행보를 정하는 것도 똑같다. 끝났으니 털어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끝났지만 끝난 게 아니라고 붙들고 있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나, 자신이 생각하는 이별의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있기에 다시 시작할 그 언젠가의 시간을 기다리거나... 사랑이 내 삶을 주도할 때, 그 사랑이 내 삶을 긍정적으로 관여할 때, 웃는다. 하지만 사랑이 내 삶을 쥐고 흔들 때, 놓고 싶으나 놓을 수 없을 때, 울고 있다. 이럴 때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다시 그 사랑을 얻거나, 냉정하게 잘라내거나.

 

실연 1년 차를 보내고 있는 용우에게는 일상을 둘러싸고 있었던 많은 것들과의 단절이 찾아왔고, 자신만의 3층 집에서 살아가던 용휘의 모습은 제롬의 말처럼 ‘실내인간’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세상과의 단절이 찾아온 것이다. 사각의 틀로 만들어진 액자(용휘의 집)에서 이미 찍혀버린 사진의 단 한 가지 표정(실내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남아있다. 용우와 용휘, 이 두 사람의 조우는, 처음에는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던 두 사람의 우연처럼 보였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처럼 보였다. 서로에게 묻고 대답할 수 있는 관계, 상대방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기도 했다. 거짓으로 점철된 용휘의 작가 인생에서, 단 한번만 허락된다면 그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은 용우여야만 했다. 이유? 글쎄, 너무 간절히 원했던 용휘의 사랑이 어긋나는 순간을 용우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실연하고 일상이 흔들렸던 용우였기에... 사랑으로 시작된 이들의 혼란스러운 이야기는 삶의 본질에 대해, 지금 나를 살아가고 버티게 하는 이유에 대해 수많은 물음표를 함께 던져주고 있었다. 무엇이 나를 살게 하고 달리게 하는지를.

 

그렇게 달렸다.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자신이 정한-정답이라 여겼던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잘 나가는 작가가 되기 위해 용휘는 미친 듯이 질주했고, 마침내 모든 것을 거머쥐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에게 다시 찾아올 무엇, 그가 그렇게 달리기 시작했던 이유를 만들어준 그것이 돌아오는 일만 남은 것이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자신이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이유에 대한 것을 용휘만의 방식으로 새겼다. 자신이 이별한 이유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족하게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자신이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 빗금 그어진 틀린 답과 같다면, 이제 오답 노트를 풀었으니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정답을 적어 넣을 새로운 시험지를. 그렇게 믿고 기다렸다. 그가 잃어버린 사랑을. 이미 지나간, 끝나버린, 하지만 지금도 계속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을 그의 연인을 그만의 방식으로 기다렸다.

 

여기서 화자인 ‘나(용우)’의 시선으로 용휘를 지켜보고 서술하는 이유가 보인다. 연인과 헤어지고 보낸 1년의 세월이 용우에게 가져다준 것은 칩거에 가까운 단절이었으니까. 일상생활도, 일도, 그 무엇도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던 것은 그 죽일 놈의 사랑이었다. 단지 한 번의 이별이 찾아왔을 뿐인데, 그의 예상과는 다른 이별의 증상이 나타났다. 그래, 이별했어, 하는 인생의 한 타이밍이 지나간 것이 아닌 치명적인 부작용을 불러왔다. 이별을 후회하고,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고, 일상은 망가졌고, 귀엽던 워리(강아지)는 지저분한 개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이사한, 조금은 수상한 그 집, 그 동네에서 용휘를 만난다. 7대 3 가르마에 맑은 날에도 우산을 쓰고 다니는, 바람을 저주하는 그 남자 용휘. 두 사람을 어떻게 연결 지을까 싶은 궁금증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추리소설처럼 용휘에 대한 추적이 동시에 시작된다. 용휘의 과거, 그를 둘러싼 소문들, 달콤한 빵으로 배 속을 채우는 그의 정체를 하나씩 밝혀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었다. 아니, 표면적으로는 용휘 스스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용휘 자신이 살아가는 또 하나의 방식일 뿐이었다. 많은 것을 가졌고, 완벽하게 보였고, 그의 현재와 미래는 햇빛 찬란히 맑은 날만 예고된 것 같았다. 그러나 진실은, 잘못된 일기예보로 폭우를 맞게 하는 그런 날을 가져왔다. 7년을 그렇게 달렸는데, 오답 노트를 그렇게 풀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가 달려나간 방향은, 정답과는 멀어진 아주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그가 풀었던 오답 노트는 또 다른 오답 노트를 준비해야만 했다.

 

조금 늦게 드러나지만 용휘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용우였다.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기 위해 글을 썼던 용휘 자신이 마지막에 가서야 본 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왔다는 결승선이었다. 간절하게 바라던 단 하나를 위해 달려왔는데 그게 반대방향이라니. 이토록 허무할 수가. 자신을 지탱하게 하는 오직 한 가지를 맹목적으로, 필사적으로 붙잡고 달렸는데... 그 모습을 용우가 보고 알게 된다. 지금 용우의 모습은 용휘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봐왔던 용휘의 모습은 모두 무엇이었단 말인가. 내가 보고 있고 내가 믿었던 것들이 한순간 모두 사라지고 백지상태로 변했다.

 

“너라는 사람이 원래부터 갖고 있던 거, 널 지탱하게 하는 거, 너한테서 아무도 훔쳐갈 수 없는 거. 그게 뭐냐고. 그게 알고 싶다고.” (218페이지)

 

용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이별의 본질을. 자신이 했던 이별의 진짜 이유를. 어쩌면 용휘가 알고 있던 이별의 이유는 자신이 인정하고 싶은, 이별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내가 이별을 했어, 이것만 아니면 다시 사랑을 이어갈 수 있어, 그래, 기다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네 앞에 다시 설 때까지. 은둔 작가라는 수식어로, 제2의 이름인 필명으로 글을 써야만 했고 계속 글을 썼던 이유가 거기서 나온다. 그의 사랑을 끝나게 했던 이유를 뒤집고자.

 

한 남자의 이별이야기로 시작한 이 책은 점점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이다가, 마침내 우리 삶의 본질과 문제들에 대해 묻는다. 사랑에 대한 의미, 우리가 했던 사랑이 끝났다고 잊히는 게 아니라는 것, 사랑했던 사람을 잊는다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이냐는 듯... 살아가면서 옳다고,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 우리 생각대로였느냐고도 묻는다. 그렇게 믿었고, 그 믿음으로 달려갔던 그 끝에서 마주하는 것이 처음의 그 믿음 그대로였느냐고도 묻는다. 내 삶을 주관하는 많은 것 중에서,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되고, 의미가 된다고 믿었던 것들이, 그 믿음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 안에 사랑이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내가 알았던 사랑의 방식이 옳은 것이었냐고...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이들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숨겨져 있던 뭔가가 한 가지씩 드러날 때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다가도 한 남자의 집념과 같은 간절함에는 울고 싶어진다.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그 간절함이 나에게까지 밀려오기에 모른 척할 수가 없다. 틀렸다고 말해줄 수도 없었다. 정말 틀린 것인지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으니까. 마지막까지 같이 가야했다. 확인해야만 했다. 옳다고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전력 질주한 그 끝에서 만나게 될 진실을 봐야만 했다. 그리고 알았다.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옳다고 믿었던 마음 하나로 향했던 그것이 옳은 것이었냐고 계속 묻고 있는 물음표와, ‘그렇다, 아니다’, 로 말할 수 없어서 침묵으로 대신했던 말줄임표로 마무리되는 문장을. 깔끔하게 마침표 하나로 찍고 싶었으나, 여전히 그 물음표 앞에서는 말줄임표일 것 같다. 계속해서 멈추지 않을 생각과 같이 가고 있을 것만 같아서, 내 삶의 의미와 이유와 본질이 항상 같을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어느 순간에는 그게 사랑일 수도, 가족일 수도, 물질일 수도, 또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미가 어떤 것일지라도, 다시 또 걷고 달릴 것이라는 것만 변함없을 것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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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출판 24시
김화영 외 지음 / 새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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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고백하건대, 유감스럽게도 내가 이 책을 순수한 의도로 구매한 것은 아니었다. ‘소설 출판 24시’라는데, 그 24시라는 기준은 누구의 입장에의 시간인지, 어떤 이야기로 변명을 포장하려 하는 것인지 싶은, 조금은 삐딱한 시선이었다. 현재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참여해 쓴 소설이란 점에서 정말 솔깃했다. 철저하게 독자로, 돈을 주고 책을 사는 소비자로만 살아온 내가 요즘처럼 시끄러울 때 이 책을 펼쳐보게 된다면, 그들이 하는 말을 조금은 더 생생하게,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기는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책과 관련된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니었고, 누구의 변명도 아니었으며, 활자 그대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신뢰하면서 듣고, 내 자리에서 내 몫의 역할을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있었다. 책은 결코 어느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과거에도, 현재도, 앞으로도!

오래전에 책을 잘 안 읽을 때의 나는, 도서관이나 서점, 출판사라는 공간에 환상이 있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부러움 같은 게 있었다. 대뜸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으니 좋겠군요!” 라는 말을 쉽게 건네곤 했었다. (아마도 이쪽 업계 종사자들은 이 질문을 지금도 많이 받고 있지 않을까?) 물론 과거형이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도서관의 서가 사이를 돌다가 우연히 눈이 마주치는 낯선 남자와 여자가 시작하는 인연, 서점의 바닥 한구석에 앉아 책을 보면서 살짝 입을 맞추기도 하는 연인들, 출판사에서 일한다고 하면 그 책들 덕분에 머릿속에 가득 채워질 것만 같은 지식까지! (이 무슨 허무맹랑한 생각이었던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책과 관련된 일에서 환상을 기대하지 않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누군가는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 책이 참 많구나, 하고 생각하면 돼.” 라고 말했고, 서점에서 일하던 지인은 “완전 막노동이야. 늘 야근이고, 항상 목장갑을 끼고 일하느라 손이 거칠어. 핸드크림도 소용이 없어져.” 라고 말하기도 했다. (항상 무거운 책들을 대하느라 어마어마한 육체노동이라고 했다.) 출판사는 뭐, 직접적으로는 아니어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환상이 깨지는 건 시간문제였으니... 그러고 나서 드는 생각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여전히 독자로 내 자리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책 읽기)을 내가 좋아서 계속하는 것, 그 외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나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선입견이나 환상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책과 관련해서 내가 거의 알 수 없었던 출판사의 생생한 하루가 소설로 써졌다니 얼마나 솔깃하겠는가. 한 권의 책(이 책에서는 제목처럼 소설이 주제이긴 하나, 나는 장르 구분 없이 ‘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이 만들어져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들을 이런 기회가 흔하지는 않으리라.

출판사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한 권의 책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내가 지금 대하고 있는 ‘책’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이야기가 이 한 권에 다 담겨있다.
수비니겨 출판사에는 편집자 출신의 사장 이정서가 있고, 기획실장 강아라, 꼼꼼한 편집장 김해윤, 전자책을 주로 담당하는 편집자 이순덕, 영업부 과장 민윤식, 그리고 작가가 있다. 편집자의 책상 한 구석에서 선택되어지지 못한 원고 하나를 우연히 사장이 먼저 읽게 된 후, 소설로 출간하기로 결정된다. 그렇게 출간이 결정된 소설 한권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이들이 책 한권을 만들기까지는 우연처럼 운명처럼 다가오는 원고가 있고, 그 원고가 책으로 만들어지길 선택되는 순서가 있다. 출간이 결정되면 최종원고가 만들어지고, 교정과 교열의 과정을 거치고 겉옷이 결정되면, 인쇄소에서 잉크냄새 풀풀 풍기면서 새 책이 나온다. 그 사이에 편집자와 마케터는 그 책을 어떻게 소개할까 하는, 어떤 홍보로 독자들의 눈에 들게 되는 책을 만들어서 팔 수 있을까 하는, 머리 쥐어짜는 고통과 환희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독자의 눈을 사로잡을 책의 카피나 마케팅 계획을 짜는 일은 고통스러운 시간일지 모르겠으나, 그런 과정을 거쳐 태어난 책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면 그건 또 환희의 순간이 아니겠는가. 보통 책을 자식으로 비유한다고 생각하면, 열 달을 뱃속에 품고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일 것이다. 때로는 그 반대의 것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런 결과를 만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결과가 만들어지는 부분까지 생각할 여지를 주고 있기에 더욱 집중하고 읽게 한다.

“어느 한 권의 책이 팔린다는 건, 정말 누구 혼자만이 아니라 작가와 출판사, 독자가 한마음이 될 때 가능한 일인 거 같아요.” (266페이지)

책은, 처음부터 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글이 출판사로 투고되어 선택되기도 하고, 혹은 편집자가 아이템을 구상해서 그 목적에 맞는 책이 맞추어지기도 한다. 정말 뭘 모르던 때에 책을 그냥 글만 쓰면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편집자’라는 일에 대해, 상당히 어렵기도 하고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한 편의 드라마였다. <반짝반짝 빛나는(2011 MBC)>이라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출판사의 편집자로 나온 것이었다. 다이어리에 깨알 같은 정보가 가득한 그 장면에서 알았다.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아이템을 다이어리에 적어두고 보물처럼 여기던 주인공의 모습은, 책과 편집자라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아, 누군가가 글을 가져와서 책으로 만들어달라고 했을 때 살펴봐 주는 게 편집자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뒤늦게야 제대로 알았다. 거기에 이 책에서 들려주던 작가와 편집자 사이에 원고 수정을 놓고 벌어지는 의견 교환의 과정은 팽팽한 신경전 같으면서도 결국은 같은 방향을 보고 가는 사람들이기에 합의점을 찾게 된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더 훌륭한 생각’을 주고받고 있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기에, 그 시간은 아름다운 치열함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말이다. 책이 만들어지는 시작이 글이 먼저일 수도, 목적이 먼저일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것이 이유가 되어 ‘읽고 싶은 책’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너무, 좋다.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제목과 표지 디자인이 정말로 중요하다. 제목이 청각적 감각을 지배한다면 표지는 시각을 지배하는 것이다. (153페이지)

책의 출간이 결정되고 편집부에서의 일을 제외하면 그 책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외관을 만들어야 한다. 책의 판형부터 속지, 겉표지 디자인, 그리고 더 많게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책의 모든 것들이 계획되고 결정되고 진행되는 것이다. 그 과정도 만만치는 않았다. 여러 시안을 디자인하고, 많은 의견을 참고하고, 최종적으로 맘에 들 때까지 계속 반복되는 과정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지칠 만도 할 텐데,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마음 하나로 끝까지 붙들고 있는 그 끈기가 에너지를 퐁퐁 샘솟게 하는가 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우리의 감각을 지배하는 제목이나 표지가 완성되는걸 보니, 지금 내 옆에 있는 책의 모습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많은 시간과 땀으로 만들어졌구나 싶어, 대견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선택된 원고가 하나의 책으로 탄생하기 전부터 출판 영업자들은 시장성과 작품 내용 등을 분석하여 홍보 계획을 수립한다. 더불어 도서의 콘셉트와 제목, 표지, 가격 등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초판을 몇 부 제작할 것인지, 제작된 부수를 각 서점과 도매상별로 어떻게 나눠 배본하며 홍보를 위한 광고나 이벤트, 그 밖의 프로모션은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따위의 계획을 짠다. (196페이지)

그렇게 만들어진 책은 독자를 향해 달려간다. 그 타이밍에 가장 중요한 것이 마케팅일 것이다. 나 역시도 기다리던 책이 나오면 반가움에 더럭 구매하기도 하지만, 혹여나 이벤트가 진행된다면 기간 맞춰 구매하기도 한다. 책의 마케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정말 독자들에게 노출되는 빈도수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어떤 책은 정말 좋은데 조용히 소리소문없이 묻히기도 하고, 왜 베스트셀러인지 모르겠는데도 많이 팔리는 걸 보면(이건 나와 다른 독자들의 취향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정말로 마케팅, 특히 입소문은 중요한 것 같다. 책을 읽거나 구매하면서 보는 많은 장면이, 이런 과정이 있기에 내 눈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좋은 책은 기본적으로 글에서부터 시작할 테지만 잘 팔리는 것 역시 중요하기에, 여기서 그 힘을 발휘하는 건 마케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한 권의 책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매달리는 것일 테고...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니 그렇게 간단하거나 말 한마디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이 책이 들려주고 있는 더 많은 일화들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누군가는 그 생생함을 이 책으로 직접 확인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서 멈추려 한다. 몇 년 동안 들어와서 지겨운, 하지만 살벌한 그 말 ‘유사 이래 최고 불황’이라는 말을 이들의 이야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불황’이라는 게 어디 출판계뿐이랴 만, 현재 내가 부리는 유일한 사치가 책인데, 그 책에서까지 불황을 느끼고 싶지는 않은 바람이 있기에 많이 안타까운 것이 나의 진심이다.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베스트셀러로 올리기 위해 사재기까지 해야만 하는 상황, 오프라인 중소형 서점의 계속되는 폐업, 책의 유통 과정에서 존재하는 어음거래의 폐해와 업체의 부도, 서점에서 책의 진열위치에 따라 명당과 흉당이라 붙여지는 이름, 그동안 정말 궁금했던(이미 들었던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온라인 서점과 출판사와의 관계, 변해가는 세상에 맞춰 등장한 전자책과의 동행 등등. 우리(독자)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다 담겨 있는 듯했다. 다 읽은 후에는 숙제를 남겨주기도 했다. 출판계의 현실이 이러한데 뭐가 문제인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그 안에 존재하는 관계들이 갑과 을의 구조가 아닌 모두(출판사, 서점, 독자)가 동등한 입장에 서서 나란히 가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책을 만드는 사람과 책을 읽는 사람,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리는 ‘소통’이어야 하므로.

책이 좋아서 읽었고(독자),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서(출판인) 뛰기 시작했을 그 ‘처음’을 상기하게 하고 있었다. 독자인 나에게, ‘처음 내가 왜 책을 읽기 시작했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면서,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내가 책을 읽고 있는 것인지를, 지금 읽고 있는 이 책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와 남아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럼 또 다른 출판인에게는 설렘과 흥분으로 책을 만들기 시작했던 그때를 떠올리게 하고 있겠지. 좋은 책을 위해 땀 흘리게 뛰며 등에 소금꽃을 피워가면서 즐겁고 행복했던 그때를...
큰 이변이 없는 한 나는 계속 책을 읽어가면서 살아갈 것 같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책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 책과의 시간을 위해서 ‘유사 이래 최대 불황’ 같은 말이 출판계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현실이란 것이 한 번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런 억지는 부리지 않겠다. 다만 어느 입장에서든 책을 대하는 자세가 똑같다면, 어느 순간에서든 접점은 있을 테니 ‘좋은 책’을 읽고 만들어가기 위한 방향으로 같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출판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실제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소설이다. ‘소설’이라 부르지만 ‘소설’로만 읽을 수는 없었던 책이었다. 출판시장의 현주소와 미래를 같이 고민하게 하는 이 소설이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독자들에게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독자’가 있었다. 출판사에서 일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설책은 소설가 혼자만 잘하면 독자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해윤은 이제는 안다.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내용뿐만 아니라 표지 및 본문 디자인, 어떤 마케팅으로 독자에게 다가갈 것인지 등 독자를 만나기 위해서 책은 여러 사람의 손길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라는 걸.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힘들 때면 책 속의 문장들 사이에 숨었던 해윤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이 전해주는 위로에 미소 지었던 해윤은, 자신의 손길이 닿은 책들 역시 독자와의 만남에서 그런 소중한 순간을 맞이했으면 하고 바랐다. (301페이지)

이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보고 듣고 싶다면 이곳으로....
http://saeumbook.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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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 - 제5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43
김이윤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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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선고를 받은 엄마를 둔 딸이 수학 문제집을 들여다보는 것도 우습고, 그렇다고 소설책 같은 게 머리에 들어올 것 같지도 않고, 책상 위에 책만 여러 권 뽑아 놓았다. 정신을 다른 데 쏟고 싶어 만화책도 추리 소설도 꺼냈지만 한 쪽을 다 읽기도 전에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았다. 눈과 귀를 붙잡아 두는 영화나 미국 드라마, 일본 드라마, 대만 드라마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것도 효과가 업을 게 분명했다. 뉴스가 의미 없다는 건 초저녁에 이미 확인한 일이고, 이런 밤에는 다만 만나는 일만이 필요할 것이다. 나 자신과 마주하거나 엄마와 독대하거나.

책을, 잘못 골랐다.
내가 일방적으로 엄마를 거부(dis-)하면서 속으로 미움을 쌓아가고 있던 요즈음, 그리고 오늘이다. 예약해놓은 건강검진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약간 서먹한 시선을 모른 척 하면서 나란히 병원에 들어섰고, 엄마는 검진실로 나는 대기실에 자리했다. 한번 가면 기본 세 시간은 기다려야 하기에 급하게 방바닥에 널려있던 책 한권을 가방에 넣고 나왔는데 하필이면 이 책이다. 들고 나갈 때는 몰랐는데, 다 읽고 나니 눈물 섞인 욕이 나온다. 정말 ‘제기랄’이다. 기다리고 있는 시간동안 나는 이 책 한권을 다 읽어버렸고, 대기실 구석의 작은 의자에 깊이 파묻혀 혼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삼키고는 했다. 오늘 아침, 언짢은 마음에 ‘엄마, 혼자서 가.’라는 유치한 말을 내뱉지 않은 내 입을 다독여주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안도의 말을 중얼거려본다.

어느 날 고등학생 여여‘군’(여여는 여자다)에게 갑작스러운 불행이 찾아온다. 페미니스트 사진작가인 엄마가 회복 불가능한 암에 걸려버린 것이다. 시간을 붙잡을 사이도 없이 엄마의 암은 괴력을 발휘했다. 엄마가 요양을 위해 시골로 떠나고, 남은 여여는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고등학생으로 지내고 있다. 비록 집에서는 혼자 있지만 여전히 학교에 갔고, 단짝 친구인 세미와 피를 보는 우정의 맹세도 하고, 자신의 두 손에 쥐어진 그럼 스틱으로 우울한 기분도 풀어낸다. 자신의 첫사랑이었는지 어땠는지 모를 선배인 시리우스를 가슴 속에 담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엄마와의 이별도, 세상에 없던 아버지를 발견한 흥분도, 남겨진 자신이 살아가야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수시로 다가올 두려움과 인사하는 법을 배운다. 여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열여덟의 소녀가 충분히 보여줄 수도 있는 행동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학교 선배를 가슴에 담아 첫사랑의 설렘을 느끼기도 하고, 친구와의 우정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생각될 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여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사랑을 했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미혼모라 불리는 엄마를 가진 여여다. 그런 엄마가 마흔 다섯의 나이에 이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을 지켜보는 여여다. 아픈 엄마를 두고도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이 옳은 것인지 가끔은 헷갈리기도 하는 여여다. 마지막이다 싶은 순간 자신의 아버지를 보고 확인하고 싶은 여여다. 지금 여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여여 자신에게 두려움일지도 모르는데 당차고 멋지게 서 있는 여여가 내 눈에는 참 특이한 아이로 보였다. 단 둘이서만 살던 엄마와 여여였는데, 엄마가 떠나버리면 혼자 남을 여여일 텐데, 자칫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려 하는 여여가 안쓰럽다고 생각되어야 할 것만 같았는데…….

여여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여여를 지켜보던 모든 순간이 상실의 시간들이었는데 여여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스스로가-어쩌면 자신이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배워가고 알아가고 채워가면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알게 된 아빠에게 ‘왜 나와 엄마를 버렸냐.’고 울부짖거나 징징대는 것이 아니라 멘토와 멘티로 만나 서로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외발자전거를 타고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있다는 것도 스스로 알아가고 있었다. 결국은, 부모와 자식에게도 언젠가는 이별이라는 것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 온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남겨진 자신 역시 그렇게 살아가야 하고 살아지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 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두려움. 이제껏 그려진 여여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혹여 아무렇지도 않게 보였을 지도 모를 그 모습 안에 충분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 두려움이 여여에게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게 작게, 다양한 모양으로 무수히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여에게도 그 두려움을 떠나보내는 일이 아직 남아있던 것이다. 엄마가 떠나고 자신이 홀로 남은 일이, 남아서 살아가야할 일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밝고 긍정적인 겉모습과는 다르게, 몸보다 마음이 더 많이 자란 아이인 여여는 그렇게 두려움과 인사하는 법을 배운다. 하얀 종이배를 접어서 서이사와 함께 강물에 띄워 보낸 것처럼 그렇게 차근차근, 오늘 이후로 내일에 만날지도 모를 두려움이 있더라도, 이제 여여에게는 겁날 일만은 아닐 것 같다. 모든 일은 다 지나간다. 아름다운 외모도 영원하지 않을 것처럼 변하듯이 두려움과 아픔과 슬픔, 누군가와의 이별 역시 그렇게 많은 것들이 흘러가듯 지나갈 것이다. 부모 자식 간의 이별이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도 당연하게 여겨지겠지.

맞아. 너도 괜찮고, 나도 괜찮고 서이사님도 괜찮아. 우리는 다 괜찮아. 그치?

아침 이른 시간부터 검진용 가운을 입고 검진문진표를 들고 각각의 번호가 붙어있는 이 방 저 방을 돌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이 저 사람들에게 저렇게 자신의 건강을 확인하고 싶어 하게 만든 것인지 순간 궁금해졌었다. 아마도 저 사람들 역시, 자신이 포함된 가족이나 그 외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별-잠시 이별이 아닌 영원한 이별-을 하는 것이 겁이 나서 확인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 이별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미리 알고 있다면 약간의 연습 정도는 해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애잔한 바람 같은 몸부림이 아닐까 하고…….
엄마 차례의 검진이 다 끝나고, 아침부터 빈속으로 이런 저런 검사로 지쳤을 속을 달래주기 위해 병원 앞의 죽집으로 갔다. 배도 고프지 않았는데 혼자 앉아서 드시게 하기가 뭐해서 억지로 죽 두 그릇을 시켜놓고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눈을 든 순간에 엄마의 눈과 마주치고……. 괜히 쑥스러워서 씩~ 한번 웃어줬다. 어영부영 화해의 제스처를 먼저 날렸다. 다행이다.

아직까지 눈앞에서 누군가의 임종을 본 기억이 없다. 그저 그런 소식을 듣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내 나이 이 정도로 먹었으면 앞으로는 누군가의 죽음을 보게 되는 시간이 더 많을 텐데, 나는 여여처럼 초연한 듯 강하게 그리고 담담히 두려움과 인사하는 법을 나 스스로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알고는 있으면서도 역시나 두려운 것이 현실인가 싶은 마음으로 조금 더 변명을 미뤄본다. 그래도 여전히, 언젠가는 맞이해야할 운명 같은 시간이라면 나도 마음의 연습을 조금쯤은 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 한 자락 늘 품고 살아야겠다.

오늘이 6월의 첫날인줄 알았는데, 달력을 보니 5월의 마지막 날이다. 다행이다. 아직 5월이 몇 시간 남았구나. 정신없이 5월이 흘러갔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면, 나에게 2013년의 5월은 번개가 번쩍 하고 지나간 것처럼 내 기억에서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던 공사로 한 달의 시간을 보내고, 온갖 가족 행사가 몰려있는 달이어서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날려 보낸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집에서는 명절보다 더 큰 행사인 엄마의 생신이 있기도 했다. 벌써 칠순이시다. 깜짝 놀랐다. 나는 항상 자식이었고 엄마는 항상 엄마였는데, 나이에 붙은 숫자를 보고 멘붕이 왔다. 아기처럼 엄마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엄마가 벌써 칠십이야?” 하고 물으면서도 놀라기만 했다. 갑자기 당신의 나이를 알리는 숫자에 우울해지시는 표정이다. “괜찮아. 괜찮아. 어디 가면 환갑으로 본다니까.” 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본다니까. 엄마, 동안이야!) 위로해드리면서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마음이 짠하다. 철없는 딸내미 먹이고 키우느라 울 엄마 나이 칠십이 되도록 자신의 나이를 잊어야만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보내셨구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나도 여여처럼 언젠가 엄마와의 이별을 해야만 할 테지만, 꼭 그래야만 하겠지만... 적어도 그 시간을 뒤로, 아주 많이 뒤로, 미룰 수 있는 최대한 멀리 미루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엄마’라는 울림을, '이별'이라는 슬픔을 가슴에 깊이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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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
김도언 지음 / 이른아침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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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배워야 했을까...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다. 물론 나는 비흡연자이니 이 부분은 내가 이루지 못할 로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담배연기와 함께 맡아도 좋을 것만 같은 냄새가 난다. 왠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약간 비스듬히 앉아 한 손에는 담배를 한 손에는 이 책을 들고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라고 할까. 시인이자 소설가인 저자의 사유가, 내뿜는 담배연기처럼 눈앞에서 흐트러지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퍼져나가라고... 이 책으로 담배연기를 떠올리게 된 이유는, 그게 전부였다.


김도언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2012년부터 2010년까지-나도 저자처럼 시간을 역순으로 말해본다- 약 3년여 시간의 기록이다. 지극히 사적인 일기 같으면서도 누군가의 투명한 일상을 만난 느낌은, 엿보는 것이 아닌 공유하는 기분이었다. 그 일상이 문학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라니 더 반갑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면서도 잘 알 수 없는 이야기, 독자가 아닌 작가가 문학-그는 특히 시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에 대한 사유를 풀어내고 있는 모습은 낯설면서도 궁금했기에 그렇다. 공적으로, 사적으로 만난 다양한 문인들이 언급되고 그들의 대화가 들려온다. 거기에 저자의 마음을 풀어내는 소리까지 더해지니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에 나의 허밍이 저절로 따르는 것 같다. 잘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음에도, 나도 같이 흘러가도 괜찮을 것 같은 시간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와 화장을 지우고 맨얼굴을 마주하는 기분인 것도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는 편안함으로 만날 수 있는 상대 같은, 그 안에 글 이면의 문인들이 있었다. 그들의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생소했지만 편안하기도 했다. 그건 어쩌면 저자가 자신과 이야기하듯 말하는 느낌, 혹은 일기라 부를 수 있는 이 글들을 마주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의 생각들, 하고 싶은 말들, 자신이 가야할 길에 대한 바라봄, 갖고 싶은 믿음일지도. 그래서 저자가 하는 말들이 더 진솔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저자의 일상 속에서 저자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다. 소설가들, 시인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숨 쉬는 문학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유독 내 눈과 귀에 들어왔던 것은 저자가 하는 말들이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듯한 말들. 그중에서도 특히,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이라 말하는 것은 치유의 한 가지 방법이라고 말하는 듯해서 더 귀가 쫑긋해진다. 이 책이 역순으로 흘러가야만 했던 이유를 나는 여기서 발견했다. 이미 지나간 일의 결과물을 먼저 보고, 몇 페이지 넘어가면 그 과정이 드러나고, 다시 또 몇 페이지 넘어가면 그 일의 시작이 보인다. 아, 이렇게 시작되어 이렇게 흘러갔었구나, 싶은 생각으로 되짚어 가고 있었다. 저자가 글쓰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해왔다는 이유가 보이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냥 흘러가는 하루라는 일상이든 누군가(무언가)와의 일들이 해결되어가는 과정이든, 그건 글쓰기를 통해 흘러가면서 마무리되고 치유되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문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마음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가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이 세계에서 이방인이 아닌 그 안에 흡수되고 싶었던 거라고, 그와 동시에 이 세계의 맑음을 함께 가지고 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쓴 소리를 하고, 누군가는 내밀어주어야 할 따뜻한 손을 가진 사람이고, 그러면서도 헛된 희망을 품지 않는 사람이라고.

일상을 품은 그의 문학적 사유는 일상의 구석구석을 비집고 들어오는 찰나의 생각들과 감정들을 떠올리게 했다. 곰곰이 생각하면서 틈 하나를 보게 만들고, 그 틈을 또 하나의 문학이 채워 넣는 과정을 갖게 했다.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책이 어떤 느낌인지 찾아보게 만들고, 왜 그 책이 그 순간에 언급되고 있었던 건지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문장들을 귀에 담게 했다. 처음 발견했던 그 틈을 메우는 것은 참 다양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문학을 통해 채워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사유를 담게 만들고 있으므로 다행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저 독자인 내가 작가라는 이름의 그들을 다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겠지만 그들이 바라고 가고자 하는 그 길을 떠올리면 같이 뭉클해질 수 있었다. ‘모든 문장은 온도를 가진다.’고 말하는 그의 말에, 내가 갖고 있는 나만의 문장도 그 온도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출렁인다. 저자의 문학일기이면서 동시에 이 책을 만나는 모든 이들의 문학일기가 되는 순간이 아닐 런지.

읽어가는 동안 거꾸로 가는 완행열차를 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그랬다. 저자의 기록이 역순으로 흐르고 있다. 그래서 앞에서 읽은 내용(the end)이 뒤로 가면 진행형이나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일로 묘사되고는 했다. 그런 것들이 잠깐 어지럽기도 했었다. 그럼 뒤에서부터 읽으면 편할 것을, 이상하게도 그러기는 싫었다. 굳이 이렇게 역순으로 엮어낸 것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나도 시간을 앞에서부터 거꾸로 걸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거꾸로 흐르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름 모를 여유로움도 생긴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한발 뒤로 물러서서 보게 한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그리고 나 자신을...

이 책 안에 담긴 저자의 사유를, 내가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자신의 생각들과 시선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 되기도 했다. 문학이란 공간 안으로 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틈을 준 것 같아서, 살짝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여전히 나는 독자로 살아가면서, 문학 안에서 숨 쉬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을 테니...


당신들도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모든 문장은 온도를 가진다.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 문장도 있고 피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문장도 있다.
좋은 문장은, 적정한 온도를 가진 문장이다.
문장의 적정한 온도는 작가의 비범한 감각에 의해 통제된다.
문장의 온도를 통제할 감각을 가지지 못한 작가는 불행한 작가이거나 혹은 가짜 작가이다.
그 감각은 훈련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천연적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이지만,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뜨거운 일은 아니다.
그것이 어떤 선동에 소구되는 격문일지라도,
글을 쓰는 행위는 작가의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과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문장의 온도와 현실의 온도가 구분되지 못하고 연계될 때,
광고 문안이나 반성문 같은 천격의 문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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