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생각나는 어떤 시간이 있다. 일부러 소환하지는 않았지만, 기어코 떠오르고야 마는 장면들 때문에 울컥해지고야 만다.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고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닌데, 아련하게 떠오르고야 마는 기억 때문에 심장이 잠시 두근거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떤 계기로 떠오르기도 하고, 갑자기 찾아온 그리움 같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그런 순간은 대부분 후회를 동반한다. 그때 왜 그랬을까 하면서 가슴을 한번 치고 싶은 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어떤 일,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책 같은 거 말이다. 그래도 좋았는데, 그리운데, 그 한가운데는 언제나 아쉬움이 있다. 나이를 먹어가는 걸 이렇게 느끼는 건가. 아니면 이런저런 생각에 심란해서 그냥 그런 순간이 다가온 것이었거나. 안드레 애치먼의 하버드 스퀘어는 처음부터 그리움이 묻어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자인 는 열일곱 살 아들과 함께 캠퍼스에 있다. 하버드였다. 대학 입학을 앞둔 아들의 미래를 같이 고민하는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 중이다. 아버지의 자격으로 함께 듣는 설명회였지만, 거기에는 두 가지 진실도 있다. 아들이 후회하지 않는 대학 생활을 바라는 마음에 부모로서 건네는 조언과 염려와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는 그의 대학 생활 한 부분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그럴 수도 있지. 대학에 입학하는 아이를 두고 어느 부모라도 그 시절을 떠올릴 수밖에. 너무 자연스러운 기억의 부름이 아니겠나.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보면 이십 대의 시작이었을 테고, 너무도 찬란해서 종종 그리워질 시간이다. 가장 젊고 예뻤을 때, 청춘이라 불리며 힘이 넘쳤을 때, 하고 싶은 게 많을 때. ,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그립다. 하지만 그의 대학 생활을 여유롭지 못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버는 돈은 모두 집세로 들어갔고, 그의 용돈은 항상 모자랐다. 그나마 받는 장학금이 도움이 되는 정도였을까.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시간이었고, 그의 청춘과 다른 어려운 시절이었다.


느 순간 그는 아들을 앞에 두고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그의 대학 시절의 어느 날, 문학 시험을 대비해 책을 읽던 카페에서 그는 친구가 될 칼라지를 만난다. 수다스럽지만 의미 있는 말을 쏟아내는 칼라지. 그의 힘든 시절 한 장면을 장식하게 될 중요한 사람을 만난 순간이었다. 칼라지의 몇 마디에 반해버린 그는 단번에 칼리지와 친해진다. 어쩌면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칼리지와 나눌 수 있어서일까. 주변의 화려한 것 가운데서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일까. 하버드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자기 출신을 부끄러워하고 가난을 힘들어했다. 상황이 비슷한데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받아들이는 칼라지를, 그를 부러워했다. 매력적으로 여기며 닮고 싶었다. 두 사람에게는 프랑스를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있었으니, 대화가 얼마나 잘 통했을까.


소설에서 묘사되는 칼리지는 참 당당한 사람이었다. 환경에 주눅 들고, 항상 돈에 쫓기며 지내는 대학 생활이 그를 우울하게 했던 것과 달리 칼리지는 무서울 게 없어 보였다. 큰 소리로 이야기하며 지식이 넘쳐 보였다. 안으로 숨어들기에 바빴던 그가 칼리지를 어떻게 봤을지 상상이 된다. 비슷한 조건인 것 같은데,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이상해 보이기도 했겠지만, 닮고 싶기도 했을 거다. 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 하버드에서 살아가기란 어려웠다.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허락된 건 그저 하버드 입학뿐이었을까. 칼리지를 알고 그에게는 고향의 냄새를 맡는 것처럼 편안했다. 학교 시험에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통과해야 할 시험보다 카페에서 칼리지와 머무는 시간이 더 중요했다. 초라해 보이는 카페에서 마음만은 초라하지 않은 일이 가능했다.


이런 마음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아? 각자의 상황, 삶이 다르기에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냥, 그런 비슷한 시절을 지나왔다고, 현실에 치여 살다가 마음 편하게 해주는 것에 눈길을 뺏기기도 했다고 말하면 어떨까. 나는 눈앞의 것을 해결해야 하는데, 마음은 너무 힘들어서 좀 쉴 곳을 찾고 싶었다고 말이다. 그럴 때 우리가 보고 만난 누군가는 굉장한 의지가 된다. 나와 비슷해서 바라보고 연민을 느끼면서도, 내가 가고 싶지 않은 길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서 혐오스러운 대상. 가까워서 편안한데 그게 불편해서 멀어지고 싶은. 상대가 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그곳에 기대고 싶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야 할 텐데, 그 정도의 시간을 건너왔다면 그 존재가 지금 내 옆에 있어야 맞을 것 같은데, 없다. 그 존재는 이미 사라진 그 시간과 함께 나에게 남아 있지 않다. 잘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또 지금을 살아가는 일에 다시 바쁘다고 핑계를 대면서. 일부러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럴 기회조차 없이 살아왔다. 우리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문득, 이런 책을 만나면, 주인공의 기억과 시간을 같이 거슬러 오르면서 찾아오는 이 감정에 잠깐 묶이곤 한다. 후회를 가득 안고서. 하아.


이 어두운 침실에서 문득 아주 선명하게 떠오르는 깨달음이 있었다. 그에게서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 그는 여기서 모든 것을 망치고 모든 것을 잃는 순간에 내가 얼마나 가까이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였다. 그는 나보다 딱 세 걸음 앞서가는 내 운명이었다. (하버드 스퀘어 272페이지)


아마도 칼라지의 인생을 조금 엿본 다음에는 이 사회의 차별과 적대, 세상사에 무관심했던 그 자신을 더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을 거다. 거리를 떠돌고, 다른 이의 집에 얹혀살면서, 택시 운전을 하고 시를 쓰는 칼라지. 물론 칼라지에게도 험난한 사건이 많았고, 현재에도 칼라지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려움에 부닥쳐 있다는 게 맞겠지. 그런데도 그와 닿을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두 사람의 우정과 끈끈함이 오래 갈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 밖으로 두 사람의 길을 너무 다르게 열리고 있었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세상에 맞선 칼라지와 하버드의 삶을 인정하며 꾸려나가려는 그는 더 가까워질 수 없었다. 오히려 서로를 알기 전보다 멀어졌다고 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미래를 하버드에 걸었으니까. 그의 인생이 칙칙한 카페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칼라지의 사이다 같은 말에 계속 빠져 있을 수도 없었다. 그에게 현실은 하버드 안에 있었고, 그가 올라야 할 곳을 바라보는 게 그의 삶을 완성할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찾은 하버드 광장에서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너무도 닮았던 칼라지와 자신을 다시 보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대로 뒤돌아선 자신을 혼내고 있을까. 그도 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다른 선택이 그에게 최선이 될 수 없었음을.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도. 칼라지와 제대로 된 인사를 못 했기에, 풀지 못한 숙제로 오랜 세월 그의 가슴에 남아 있던 건 아닐까 싶다. 살아오는 동안 내내 그의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것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누가 묻지 않았지만, 오늘의 그가 불행하지도 않았지만, 그에게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건 그만이 알겠지만, 그와 너무 닮은 한 사람이 그렇게 존재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종종 꺼내 보고 싶어질 것 같다. 세상에 맞서고 싶은 자신을 대신했던 사람, 그러지 못하고 숨죽인 자신의 모습을 아는 유일한 사람,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고 그저 스치듯 한번 보고 싶은 사람.


누구나 비슷하게 겪는 어떤 마음을 마주하는 것 같다. 그립고 아쉽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 혹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의 선택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데도 자꾸 생각나는 건 무슨 마음인지 정의할 수 없지만, 이렇게 계속 남아 있을 것 같다고. 그냥,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머물러 있지 않은 어떤 마음, 아마도 계속 이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야겠지.


안드레 애치먼의 많은 작품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그가 가진 배경이 많이 담겼다고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마치 작가의 분신처럼, 같은 배경을 가진 이가 소설을 이끌어가면서 매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자전적 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소설에 잘 녹아 있다. 이방인과 방랑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던 시절의 그, 그런데도 쉽게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렀던 그의 경험이 이야기의 바탕이 된다니 소설이 더 생생하게 들린다. 물론 소설에 담긴 모든 것이 그의 인생은 아닐 것이다.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표현하면서 독자에게 그 경계를 서성이게 한다. 아마 전작도 그랬을 테고, 다음 작품도 그러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아무렴 어떠하랴.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간을 듣는 일은 행복하다. 독자의 감정을 쥐고 흔드는 능력이 타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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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마음에 덧붙입니다.

안드레 애치먼의 <하버드 스퀘어>를 읽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말씀 남겨주세요.

제가 두 권을 가지고 있어서 한 권을 나눔하려고 합니다. 

좋은 책 같이 읽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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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2-16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드레 에치먼 작품은 아직 안읽어봤는데 리뷰를 보니 완전 좋을거 같아요~ 감정을 흔든다니 ㅋ 이번달에 꼭 한권은 읽어봐야 겠습니다 ^^

2022-02-16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6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2-02-16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오늘까지 기다려 보시고 안 계시면 저에게
보내주시죠.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아니 새파랑님 보내달라는 뜻인가요?
표현이 어떤 의민지 잘 모르겠네요.
구단씨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ㅎㅎ

2022-02-16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6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6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2-02-18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오늘 책 받았습니다.
나눔해 주셔서 넘 고맙습니다.
구단님 메모 글도 예쁘구요.ㅎ
즐겁게 읽도록하겠습니다.
즐거운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mini74 2022-03-08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넘 재미있게 읽은 책 ㅎㅎ 구단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새파랑 2022-03-08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축하드립니다~! 좋은 책, 좋은 리뷰였어요^^

그레이스 2022-03-08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축하드려요~~

서니데이 2022-03-08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하라 2022-03-08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희선 2022-03-08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 님 축하합니다 안드레 애치먼이 쓴 이 소설에는 자기 경험이 더 많이 들어간 듯하네요 사람한테는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자꾸 떠오르는 때가 있기도 하겠습니다


희선

독서괭 2022-03-09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2관왕 축하드립니다~^^

thkang1001 2022-03-09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2관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