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이 났다고요? 그럼 빨리 사직서를 제출하세요. 그러면 실업 급여는 받을 수 있도록 권고사직으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사직서를 내지 않으면 무단결근으로 해고하게 되며 이 경우 실업 급여를 못 받게 됩니다."

황대리의 이야기는 간단했지만 명료했다. 경비는 아프지 말든지, 아프면 그만두든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대학병원에 입원한 직원에게 이튿날 전화로 해고 통보라니. 결근 사유가 질병임을 할면서도 무단결근으로 해곤하다는 것은 억지였다. 아파트 경비원을 할 때도 병이 날 경우, 국공립 병원의 진단서를 첨부하면 한 달의 기간에 한해 무급 휴가가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적어도 취업규칙상으로는 그랬다. (임계장이야기 244페이지)


가끔 집으로 가져오는 음식 중 일부를 아파트 경비 초소에 가져다드린 적이 있다. 시골에서 가져온 단감 몇 개, 비타민 음료, 여름에 집으로 들어오다가 사 온 냉커피. 일상에서 소소하게,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이려니 싶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니 선뜻 보이게 되는 호의다. 그런데 그렇게 한 번씩 보이는 호의에도 경비 아저씨는 고맙다며 고개 숙여 인사하신다. 나이가 지긋하신, 조금 젊으신 분은 어쩌면 나에게 나이 차 있는 큰 오빠 정도로 보이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인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오히려 인사받는 내가 민망할 때가 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실까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경비분들의 고충이 이해되기도 한다.


저자는 젊은 날 회사에 소속되어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외국 파견을 나가기도 하면서 한국에서 혼자 가정을 책임지는 아내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사업을 하면서 가진 것 모두를 잃기도 했다. 취업하려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지만, 회신을 주는 곳은 없었다. 스스로 눈높이를 좀 낮춰야겠다고 마음먹고 끝까지 매달린 경비 업무 일을 따내게 되었다. 경비 교육을 받기 위한 십만 원 남짓의 돈이 없어서 친구에게 빌렸다. 그렇게 얻은 일터였다. 쉽게 물러날 곳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남들에게 경비 일을 한다고 일부러 말하지는 않지만, 그는 자기 일을 고마워하며 책임을 다한다. 그런 그에게 아파트 경비 일은, 크지 않은 금액이지만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감사한 일이기도 하면서, 스스로 아파트 시설물이라고 주문을 외우며 자존감에 상처받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경험이 낯설지 않은 건, 이미 비일비재하게 접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전 입주민 대표에게 아는 척하지 않았다고 경비를 주시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도대체 전 입주민 대표의 존재는 뭐란 말입니까?!), 쓰레기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은 입주민들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 날벼락을 맞기도 하는(왜 음식물 쓰레기를 일반 쓰레기 속에 몰래 숨겨 버리시는 건가요?!), 밤에 몰래 쓰레기장에 내다 버린 보라색 여행용 가방의 주인을 찾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쓰레기 수거 비용 3천 원 아껴서 부자 되시려고요?!), 입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뿌려진 왕소금을 이물질이라고 부르며 치워달라고 경비를 부르는 일에 허탈해한다.


경비원과 입주민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나면 어느 편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입주자의 승리다. 경비원과 트러블이 있다고 입주자가 이사를 나가는 경우는 없다. 나가는 쪽은 언제나 경비원이다. 말이라도 잘못 덧붙였다가는 그 자리에서 계약 만료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계약이 끝나는 1~2개월 후에는 무조건 연장 없이 계약 만료, 즉 해고다. 정규직이 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의 설움이겠다.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64페이지)


굳이 아파트가 아니어도 이런 진상들을 마주하는 일은 흔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한 나라의 대통령도 그러면 안 되는데 입주민이라고 갑질 행태로 사람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사람,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계급으로 나누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나는 가방끈의 길이로 상식을 생각하진 않는다. 이렇게 비매너에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이들이 무식하다고 보인다. 아파트 경비에게 신경 쓰고 대우해주라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이분들이 자기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며 일하는, 하나의 인격체로 살아가는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며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왜 그걸 자주 잊고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식으로 하찮게 여기느냔 말이다. 혹시 지금 외제차를 타고 비싼 아파트에 산다고 당신이 그 아파트의 경비와 다른 삶으로 인생 마무리할 거로 장담할 수 있을까?


저자가 3년여의 세월을 아파트 경비로 일하면서 틈틈이 적은 메모 같은 글을 책으로 엮어낸 글이다. 그도 인생 살아오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시쳇말로 잘 나가던 때도 있었고 실패도 겪었다. 그런데도 사람을 위아래로 나눠서 보지 않았다. 그의 아파트 경비 경험은 세상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었을 것 같다. 그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에 많은 생각에 잠겼으리라. 본인도 아파트에 실거주하면서 입주민과 경비를 동시에 살아가고 있지만, 인간다움을 잊지 않고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습이 그의 행동 곳곳에서 보인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 세상에는 내가 다 모르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 많구나. 사람이 이렇게 잔인하고 마음이 작을 수가 있을까 싶어 안타깝기까지 했다. 경비 초소에서 졸고 있는 그를 지적하며 마치 내가 좋은 사람이니까 이런 것도 말해주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 걸렸으면 너는 끝이야.’라는 뉘앙스로 훈계하는 입주민 때문일까. 그는 스스로 투명인간이라 표현하며, 경비원 복장을 하는 순간 자기 안의 모든 감정을 버린다.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입주민이 부당하게 대우해도 그런 일이 없던 것처럼 뒤돌아서야 하는 자세로 일한다.


도대체 입주민들이 아파트에서 자기 업무를 하는 경비노동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기에 이런 이야기하는 걸까. 스스로 아파트의 움직이는 시설물로 주문을 걸면서 하루를 사는 기분이 어떤 건지, 이 책을 읽고서야 조금 알게 됐다. 작가 장강명이 이 책을 추천하면서 했던 말, 이 글을 읽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30년 넘게 아파트에 살면서도 알지 못했던 경비노동자의 삶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장강명의 추천사에 공감한다. 혹시라도 내가 하는 한 마디가 그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내가 귀찮아서 제대로 하지 않은 일에 그들의 노동이 증가하게 되는 원리가 적용되는 곳이 아파트였다. 오늘도 분리수거에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다고 투덜대면서 들어왔던 것을 급히 반성한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누군가의 일은 더 늘어나고, 그들의 자존감에 상처가 되는 일을 만든다. 물론 아파트에 사는 사람 모두가 진상 입주민은 아니다. 그 안에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 근무 위치가 변한 것을 알고 안부를 묻는 입주민도 있다. 사람 온기를 넣어주는 이들이 훨씬 많겠지만, 일부 입주민 때문에 받은 상처는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이 건넨 온기를 넘어설 때가 많을 거다.


나락에 떨어져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고 알지 못했던 타인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특히 그 거울 앞에 선 나의 모습 또한 눈에 들어온다. 몸이 낮아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의 눈높이가 움직인다. 나의 한심함을 뼈저리게 통감하면서 지금 나의 처지가 나의 선생이 되었음을 느낀다.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130페이지)


이분들의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 건, 아마도 내 주변에 아파트나 건물 경비 일을 하시는 분을 종종 봐서 그럴 거다. 대부분 아파트 경비 일을 하시며, 꼬박 24시간을 근무하고 24시간을 쉰다. 퇴근하고 지친 몸을 뉘면 피곤해도 쉽게 잠이 오지 않고, 혹시라도 개인적인 볼일을 하루가 빠듯하다. 남들은 하루 일하고 하루 쉬니까 좋겠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루를 쉰다고 해서 그 하루가 느긋하게 흐르는 것도 아니다. 가족과 얼굴도 보고 소박한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도 있는 시간. 한 개인의 노동 기록이지만, 누구나 비슷하게 품고 사는 하루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하루를 들여다보는 일에 누구라도 선뜻 동참해주었으면 싶다. 그 작은 경비 초소에서의 하루가 어떻게 흐르는지, 언젠가의 내가, 내 가족이, 내 지인이 그 자리에서 보낼 하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감해주기를.


현실적인 경비 업무 교과서가 아닐까 싶다. 좀 더 깊고 무겁게 얘기해도 되겠지만, 이 책은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이론에만 머물지 않은, 실전 경험담이 그대로 담겼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말보다 더 적나라하게 다가올 것 같다. 얼마 전에 읽은 임계장 이야기중간착취의 지옥도와 같이 읽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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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원 #경비노동자 #계약직 #갑과을 #경비업무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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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1-11-22 2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ㅠ 임계장이야기 펑펑 울면서 읽었네요. 이번 책도 임계장이야기에서 들었던 입주민 진상 부리는 문제는 여전하네요.ㅠ경비노동자들이 일보다는 사람들한테 더 치이는 것 같아요.맘 아파요.

구단씨 2021-11-22 22:01   좋아요 4 | URL

제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런 주제의 책 많을 것 같아요.
최근에 이 주제의 책을 몇권 읽었는데, 진짜 힘들었어요. 인간이 왜 그럴까 싶었네요.
좀 더 무거운 내용도 있긴 한데, 그보다는 이 내용 자체가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scott 2021-12-09 16: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코로나 무섭게 확진자 급증 중 ㅠ.ㅠ
건강 잘 챙기세요

구단씨 2021-12-09 22:33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여기도 확진자 급증입니다. 언제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mini74 2021-12-09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1-12-09 22:3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주말 지나면 추워진다네요!! 건강 챙기셔요.

그레이스 2021-12-09 16: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12-09 22:3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좋은 책 많은데 다 읽을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

독서괭 2021-12-09 16: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임계장 이야기는 읽었는데,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라는 책도 있군요. 문득 오늘 경비원분들께 귤이라도 좀 갖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구단씨 2021-12-09 22:35   좋아요 3 | URL
좋은 생각이십니다. ^^
각자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 일에 서로의 관심이 필요한 것 같아요.

새파랑 2021-12-09 17: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당선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1-12-09 22:3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독서 목록에 항상 부러움이... ^^
차곡차곡 보관함에 넣고 있어요.

이하라 2021-12-09 18: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1-12-09 22:3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추워져서 자꾸 방안에 있게 되네요. 책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

서니데이 2021-12-09 2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구단씨 2021-12-09 22:3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페이퍼 속에 항상 책 한권씩 있어서 책 소개 받는 기분이 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