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 엮음, 김정욱 사진 / 비(도서출판b)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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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고 쓴 글은 여럿이다.

시를 읽고 쓴 글의 소용은 새로운 시를 만나는 것, 시를 보는 새로운 눈을 만나는 데 있다.

김사인이 읽은 시는 56편이지만 그가 읽은 시집은 못잡아도 56권이다.

56권의 시집에서 56편의 시가 다시 부름을 받은 것이다.

비교적 짧은 감상의 글이지만 그 글 속에 녹아있는 것은 한 권의 시집이며, 한 사람의 시인에 대한 시 읽기인 것이다.

김사인의 독법대로 한 편 한 편 섬기는 마음으로 읽어보았다.

내가 읽은 느낌을 잊어버리기 전에 김사인이 어루만진 시의 느낌과 섞어 읽는다.

대부분은 김사인이 읽은 느낌에 압도되어 내가 읽은 시의 느낌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어느 순간, 내가 시를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김사인의 글 또한 시적인 것이어서 시를 읽는 감각으로 읽게 된다.

서로 다른 시인의 시들이 모여 한 권의 시집이 되는 것이 쉽지 않을텐데, 이 책에 실린 시들은 낯선 시들이 모여 한 식구가 되었다.

시는 설명하는 대신 어루만졌을 때의 그 느낌으로 읽는 것이리라.

시도, 시에 대해 쓴 글도 모두 어루만지게 되는데 그 느낌이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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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안도현 / 열림원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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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은 발신자와 수신자가 한 사람과 한 사람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청소년의 것인가, 어린이의 것인가 하는 범주 구분은 그래서 크게 쓸모 있지 않다. 그간 어른인 발신자가 청소년과 어린이를 향해 띄우는 이야기가 눈높이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종 난처한 일이 생기고는 했다. 그때의 수신자는 어린이 대부분, 청소년 대부분이었다. 범주를 정하는 일은 발신자의 운신의 폭을 좁혀 오히려 상상력을 방해했다.

그래서 청소년의 것은 청소년이 써야한다는 말은 틀렸다. 우선 그들의 경험과 사고의 폭이다. 문학에 깊이가 생길 수 없다. 또한 그들이 표현하는 우리말의 수준이다. 문학은 언어로 구축되는 예술이다. 언어를 다루는 것은 문학의 기본이다. 청소년들이 다루는 언어의 양과 질은 문학 언어로 다져진 시인과 소설가 보다 나을 수가 없다. 미숙한 발신자는 위험하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미숙한 문학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천재가 있어야 하는 이유다.

문학은 이 두 가지가 있고 나서야 문학이 된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작은 패를 달고 있는 <짜장면>을 읽는 동안 글은 그가 누구든 단 한 사람의 독자를 만나러 여행을 시작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삐삐 시대에 열일곱에서 열여덟을 보낸 가출 소년이 인생이란 짬뽕 국물을 숟가락으로 함께 떠먹는 일이란 것을 알게 되고 그 애와 내가 수없이 만났기 때문에 겨울이 지나갔다.”고 주관적이 되며, “양파는 가슴속에 아무것도 감추고 있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짜장면 집 배달부로 일하는 동안 발견하며 이제 한 꺼풀 허물을 벗는 게 내가 이해한 이야기의 형상이다.

불안한 십대의 표상으로 등장한 오토바이와 두 번의 목숨과 바꾼 사고는 흔히 흔들리는 십대의 모습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들은 선생이나 아버지, 짜장면 집 주방장 같은 억압에 반항하되 자주 어설프고 결국 압도당하며 반성문을 쓰는 것으로 타협한다.

이 동화를 읽으면서 떠 오른 몇 가지 상념들.

집이란 어른이 되어 한번 떠나면 더 이상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런데 왜 그렇게 그 집을 떠나고 싶었을까.

미술 선생에게 반항했던 소년처럼 나는 누군가에게 반항을 해본 적이 있던가.

내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는가, 아버지와 내가 오로지 발신자와 수신자가 되어 눈을 마주쳤다고 느꼈던 것을 떠올려 보았더니 놀라워라, 몇 가지가 안 된다는 것.

글을 읽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재미가 있겠지만 문장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는 것. 좋은 문장과 마주쳤을 때 내가 느끼는 기분은 흔히들 말하는 명품과 만났을 때 느끼는 그 기분과 같겠지.

이 동화를 읽고나니 속없는 양파의 하얀 살을 씹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알싸하지만 달고 물이 많아 시원해지는, 그 맛마저 쉽게 사라져 버리는 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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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요시노 겐자부로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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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좀 부담스럽죠?

이렇게 대놓고 물으니 순간 말문이 막힐 것도 같습니다.

필연적으로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생각하며 읽어야 해요.

그래서 단 한 마디라도 그 대답을 찾았다면 이 책은 내 책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오래된 책이죠. 1930년대 후반에 기획되어 출판되었으니 거의 80년이 넘은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아직도 여러 사람들이 읽고 공부하는 책이라면 그만한 비밀이 있는 것이라 믿어요. 일단 믿고 읽어보는 것도 중요해요.

1930년대는 일본이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힘을 끝없이 뽐내려했던 시대죠. 거기에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은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였죠.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오랜 전쟁으로 힘들었을 때죠.

전쟁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은 사라지게 만듭니다. 이런 혼란한 시기에 글을 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본 청소년들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책을 기획하게 됩니다.

이 책도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죠.

이 책은 구성이 재밌어요. 소설 같은 구성이지만 다루는 주제는 철학입니다.

중학생인 주인공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와 함께 삽니다.

아버지 역할을 삼촌이 대신하는데, 삼촌이 조카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편지 형식의 글로 남기는군요.

코페르가 일상 생활에서 느끼고 경험하고 체험하면서 궁금해 하는 것들을 삼촌과 이야기를 나누고 삼촌은 코페르의 생활을 철학적으로 해석해 줍니다.

삼촌은 조카에게 많은 문제들을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우선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경험, 체험, 생각, 깨달음 등 그 순간의 느낌을 기억해라

나폴레옹은 영웅일까?

고마움은 무엇일까?

생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공부는 왜 해야하는가? 등등.

어때요? 이 책이 이런 질문을 하고 삼촌이 조언을 한다면 한 번 읽어볼만 하지 않을까요?

어려워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삼촌이 질문만 하고 대답을 해주지 않는 게 아니라 분명한 대답을 주고 있어요.

대신 독자가 눈여겨 읽어야 삼촌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어요.

코페르의 삼촌이 나의 삼촌이라고 상상하고 들어보세요.

나에게도 코페르 삼촌같은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독자가 있을거예요. 저는 그랬어요. 어른도 모르는 게 많거든요. 이렇게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알려주는 지도 같은 삼촌이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헤맬 때 큰 도움을 받죠.

저는 생산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말에 크게 공감을 했어요.

날마다 뭔가를 쓰는(소비) 삶은 살지만 그 소비가 생산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못하니까 불만스러워요.

생산을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생산이고, 학원에 가서 열심히 보충하는 것 또한 생산이죠.

친구들과 신나게, 깊게, 아름답게 사귀고 노는 것도 생산이라고 봐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학원비 내고(소비하고) 아무것도 얻는 게(생산하는 게) 없다면 억울하겠죠?

이 책을 읽고 만약 요시노 겐자부로 아저씨가 묻는 말에 하나라도 대답을 찾았다면 그게 바로 생산하는 것이라는 말씀!

그러니까 독서는 생산하기에 딱 좋은 행위가 맞아요.

미처 다 읽지 못한 채 이 책을 들고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읽기를 바래요.

혹시 이 글을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다면, 청소년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한번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오래전에 세상에 나온 책이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읽을만한 책이라고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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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염바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55
이세기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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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시를 읽지 못했다. <먹염바다>도 여름 끝무렵에 사놓고는 가을 끝에야 읽는다.

바다 가까이 살았지만 강릉 바다는 바라보기 좋은 곳이지, 생활의 바다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잘 모른다. 태생이 강원도 산골이라 고등어 자반을 생선으로 알고 자랐다.

강릉 바다는 바라보기에도 벅찬 대상이었다.

 

그런데 "허옇게 물살 이는 소리" 가 들렸다.

굴봉 쪼는 소리도 들릴 것만 같고, 검은 바다 위에 쏟아지는 눈도 보이는 것 같다.

바다 곁에 사는 사람들이 쓰는 말은 낯설지만 몰라도 그만이다.

한반도 서쪽 어느 곳 거기 안도현 시인의 <북항>에 눈이 내리고 있다.

 

시를 읽으니 때가 낀 유리를 빡빡 닦아낸 기분이 들어 좋다.

맑아졌다.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해 보았다.

 

최원식의 해설은 시같다고 생각하며 이런 해설도 있구나 감동하며 읽었다.

최두석 시인과 박영근 시인의 표지 해설은 읽어 본 해설 가운데서도 가장 정확하다.

시인을 잘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인과 시를 사랑하지 않고서야 그런 속깊은 글을 쓰지 못하리라.

 

그 맨 처음이 시들이다.

시와 해설과 표지 글이 있어 비로소 <먹염바다>가 되었다.

외우고 싶은 시 한편을 얻었다.

 

 이번 겨울만큼은 부디 사그라들지 말거라 개오동나무야 하니

 

 그러마 한다.

 

 할머니 감자탕집 뒷간 지키는 강아지도 그러마 하고 이마를 스치는 바람도 그러마 한다

 

 꾸벅꾸벅 조는 할매야 미안타 영하까지 내려온 이 한밤 녹아내리는 한밤인데

 

 한 잔 더 묵자 할매야 하니

 

 그러마 한다

 

 흐릿한 유리창 밖 네거리 싸락눈만 내리고

 

<싸락눈>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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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 - 내면의 힘을 키워주는 이재복의 옛이야기 교육서
이재복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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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혹은 옛이야기가 아동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원종찬의 말을 기억한다. 그가 내세운 근거는 근대 이전에는 아동기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당연히 그들을 위한 문학, 혹은 이야기가 따로 없었다는 것.

 

그럼에도 이 책은 옛이야기, 혹은 신화가 아이들에게 유용하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옛이야기나 신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상징하는 것이다.

옛이야기나 신화가 지금도 읽히는 것은 이야기나 신화가 담고 있는 상징 때문이다. 그 상징은 한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힘과 같다. 아이들은 옛이야기를 통해 감성을 배우고, 옳고 그름을 알며 지혜를 배운다.

 

저자가 옛이야기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꿈이다. 꿈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꿈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해석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꿈이 옛이야기가 되고, 옛이야기는 꿈이 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대신 하는 것으로 발전한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아이들이 꾸는 꿈에 대해 자세하게 다룬다. 꿈이 그 아이의 심리상태나 현재 상태를 알려주는 메시지라는 것. 독자가 무의식이나 꿈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옛이야기나 신화는 옛 사람들의 내면을 드러내 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일종의 경전과 같은 의미가 있다(134).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올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말문학이기 때문이다. 말문학이 갖고 있는 주술적인 힘이 있어서 가능하다.

옛이야기나 신화가 글문학이 아니라 말문학이라는 것은 중요한 차이다. 지금 다시 만들어 지는 이야기가 글문학이 아니라 말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 책이 현실적으로 나에게 유용했던 것은 을 적어보는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꿈을 적어보고 앞뒤 문맥이 통하지 않는 미완성 꿈이 갖는 의미를 해석해 보는 일이 의외로 재미있었다.

 

이렇게 꿈을 적어보고 나름대로 해석을 하다보니 옛이야기의 환상성이나 신화의 비현실성이 이해가 된다. 나처럼 판타지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이 작업이 효과가 있다.

판타지는 상징이라고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꿈을 적어보고 해석하고 생각하다보면 그 말에 동의하게 된다. 나로서는 판타지에 대해 갖고 있던 이질감을 약간이나마 벗어낼 수 있었던 것이 큰 수확이다.

 

옛이야기는 그것이 담고 있는 상징, 혹은 의미 해석이 중요하다. 옛이야기를 즐겼던 층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유통시키고 얻고자 했던 것이 이야기를 즐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이야기 하나가 단순히 재미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져 유통 된 것이 아니라는 것.

옛이야기와 같은 내면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는 환상적인 이야기는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진실의 세계를 드러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인과관계의 합리적인 사실성보다는 인물들이 드러내는 욕망(행동의 세계관)의 진실성에 더 무게 중심이 두어질 수 밖에 없는 거지요.”(206)

 

이불을 뒤집어 쓰고 덮었다 벗었다 하면서 보았던 전설의 고향이 떠오른다. 마지막 해설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 이야기가 하고자 했던 뜻이 정리되고는 했다.

그렇게라도 이야기가 전승되었는데, 지금은 말문학으로서의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줄어들었다. 무릎 배고 옛날 얘기해달라고 할 할머니도 없다. 글은 많아졌는데 이야기로서의 말은 부쩍부쩍 줄어들고 있다.

앞 세대가 뒷 세대에게 전해 줄 말이 없다는 것이다. 해줄 말이 없다고 생각하니 이것도 문제구나 싶다. 줄어든 이야기의 시간과 공간을 무엇이 채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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