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펭귄클래식 7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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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전은 실제로는 읽지도 않았으면서 읽은 것 같은 책이다. 오랜 세월동안 여러 곳에서 이야기되고 변형되다보니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나 구전 동화처럼 내가 다 아는 줄거리 같다. 디테일을 얘기하다 보면 , 그게 그런 내용이었나?“ 하게 되고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네.“ 라며 양쪽 어깨를 그저 으쓱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20살의 장미처럼 순백한 청년이 있었다. 청년이 너무 아름답고 매혹적이어서 어느 화가는 커다란 캔버스에 그를 그렸다. 청년의 초상을 본 화가의 친구는 간직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 중 하나인 젊음의 한가운데에 있는 청년이 머지않아 세월에 굴복하여 추악한 인형으로 쇠퇴할 것을 안타까워했다. 화가의 친구 말에 어느 순간 동의해버린 청년은 이 특별하게 젊은 순간의 그림이 그 대신 나이를 먹는다면 기꺼이 영혼이라도 내어줄 것을 고백해버렸다. 그렇게 해서 6월의 특별한 젊음을 가졌던 초상화는 세월을 먹게 되고 청년은 소멸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소유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청년은 도리언 그레이, 어느 화가는 바질 홀워드, 화가의 친구는 헨리 워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초상화에 젊음을 대가로 영혼을 판 도리언 그레이는 꿀에 취해 꿀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파리처럼 감각과 쾌락을 숭배하며 낮에는 믿기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밤에는 있음직하지 않은 일들을 실천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럴수록 청년의 영혼을 받은 초상화 속의 청년은 노화의 징후인 주름과 함께 감각과 쾌락의 찌꺼기인 죄악의 징후까지 드러나게 되었다. 부도덕과 타락 속에서 허우적대던 도리언 그레이는 죄악으로 물든 자신의 양심인 동시에 인생을 더럽힌 아름다움과 젊음을 파괴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자 칼로 자신의 초상화를 베었다. 동시에 자신이 저지른 죄의 징후와 노후의 징후가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 도리언 그레이가 온몸이 피로 물들어 쓰러졌고 순백의 영혼을 되찾은 초상화는 그 앞에서 장미의 순백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던 위의 줄거리로 인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내게 고전소설의 전형적인 정의를 확인시켜주었다. 처음으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제대로 읽어보았더니 역시나 이미 알고 있던 내용 그대로이다. 줄거리 면에서는 디테일로 들어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네.” 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알고 있던 내용 그대로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유미주의자이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유미주의자인 작가의 정신과 사상이 그대로 녹아있다. 작가가 추구하던 사상과는 별개로 어쨌든 이 작품은 청춘의 순간을 향락과 쾌락으로 채우고 난후 아름다움은 가면에 불과했고 젊음은 조롱과도 같았던 것임을 말하면서 왜 청춘의 제복을 이다지도 입으려고 했는지에 대해 후회하는 도리언 그레이를 보여주고 있다. 도리언 그레이는 소설 막바지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선행을 시작하면서 헨리의 생각에 반기를 들었다. (이 부분은 오스카 와일드가 평소의 소신(헨리의 말을 통해 본 유미주의적 소신)을 당시 영국 사회의 대세적 여론와 적당한 타협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도리언 그레이에게 영혼을 팔도록 영향을 끼치고 방관한 인물로 화가의 친구 헨리가 소설 속에 등장한다. 소설에서 대사의 대부분은 헨리의 것으로 7할을 넘게 차지하고 있다. 소설의 결말로 보자면, 헨리의 아름다움과 쾌락에 대한 생각은 결국 도리언의 인생을 실패로 만들었고 죄를 범하게 했다는 것이며 도리언은 죄를 범할 때마다 즉각적인 처벌을 받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지성과 교육에 의하여 내 머리는 소설의 결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이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소설을 읽는 내내 초반부터 등장하는 헨리의 생각에 나는 많은 부분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었다. 소설의 결말은 타당해보이지만 그래서 뭐가 잘못됐지? 누가 잘못된 거란 말이지?’라고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헨리의 생각은 대강 이러하다.

세상에서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보다 나쁜 건 단 하나뿐일세. 그건 남의 입에 전혀 오르내리지 않는 거라네.”

나이 든 주교는 그가 열여덟 살 청년일 때 들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니까 당연히 그는 항상 기쁨이 넘치지.”

우리가 모두 과도한 교육을 받느라 고통을 무릅쓰는 것은 바로 생존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어리석은 희망에 따라 더 오래 지탱할 수 있는 뭔가를 찾으려 하는데 그래서 우리 머릿속을 온갖 쓰레기와 사실들로 채운다네.”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깨닫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유인 셈이라오.”

사회의 공포는 도덕의 기초인데 그것은 신에 대한 공포가 종교의 비밀인 것과 같다.”

세상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충만하고 온전하게 살려고 한다면, 자신의 모든 감정에 형태를 부여하고, 모든 생각을 표현하고, 모든 꿈꾸는 것을 실현해야 한다고 믿어요.”

감각만큼 영혼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건 없다오. 영혼만큼 감각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것처럼.”

젊은 시절에 그 젊음을 만끽하시오. 지루한 것들에 귀를 기울이느라 황금 같은 시절을 허비하지 마시오. 젊음은 되찾을 수 없는 것이라오.”

도대체 누가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로 정의했는지 궁금하군. 인간은 여러 속성을 지녔지만 결코 합리적이지 않아.”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일은 대단히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가 있다네.”

남자가 결혼하는 이유는 피곤하기 때문이며 여자가 결혼하는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네. 피차 실망할 뿐이야.”

충실함 속에는 소유에 대한 욕구가 감춰져 있지. 혹시 남들이 집어 갈 거라는 걱정만 없으면 우리가 스스로 내팽개칠 것들이 많이 있다네.”

우리가 타인을 좋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염려하기 때문이네.”

사람들은 자신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상대에 대해서만 항상 친절할 수 있다네.”

무슨 일이든 너무 자주 반복하면 쾌락이 된단 말일세.”

 

직설적이고 도덕적으로 그릇된 말들일지는 몰라도 인간 내면 깊은 곳을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결과적으로 헨리는 나쁜 사람이지만 부분적으로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헨리는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인생의 큰 기쁨으로 여겼고 그 대상이 도리언 그레이였다. 20살이나 된 도리언은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고 헨리의 말과 생각에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도리언은 말미에 그가 말했던 거처럼 인생에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할 때마다 합당한 처벌을 받았어야했다. 아름답다는 이유로 부자라는 이유로 도리언은 쉽게 용서를 받았다. 그 결과,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도 화가 바질도 화가의 친구 헨리까지 인생의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겪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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