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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1998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평점 :
느낌만으로 온전히 알 수 있는 세계, 시의 세계
온갖 이론으로 중무장해도, 전혀 못 알아먹을 수도 있는 세계, 시의 세계
시의 세계는 참 공평하다. 예전에 박노해 시인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노동자 시인이라며 사람들이 신기해했을 때 나도 덩달아 신기해했지만, 이제는 알겠다. 초등학생 시인도 가능하고, 늦깍이 시인도 가능한 세계가 시의 세계라는 것을. 쓰는 족족 시가 되는 사람과 일 년에 한 줄의 시도 못 쓰는 사람이 동일인일 수도 있는 것이 시의 세계라는 것을. 시의 세계는 처음 들어설 때는 무척 넓은 문이지만 조금씩 들어가다 보면 입구가 점차로 작아져서 나중엔 호리병처럼 정신의 변형이 있지 않은 이상 더 깊이 들어가기 힘이 든다. 시를 쓴 시인의 감성이 온전히 세계의 속살과 맞닿는 일이니 이는 당연한 일이겠다. 정신의 골격을 바꾸어 흐물흐물 해파리처럼 유연한 정신으로 탈바꿈하고 나서 들어간 시의 세계는 너무나 광대하고 신비로워 그간의 고통을 벌충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그건 그런 고통을 감수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시의 세계.
황지우. 그의 이전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작품은 그에게 그런 정신의 변형이 일어나는 과정을 담은 투병기다. 그는 실험을 한다. 그의 몸을 가지고, 그의 정신을 가지고. 그는 전략을 세우고 넓디넓은 시의 세계를 탐방한다. 환자로서 병을 앓으면서 병을 가지고 깨달음을 실행했던 유마힐처럼. 그는 우울, 상실감, 분열, 환각, 공포, flight of ideas 증세와 관련된 '유사- 광증'을 실험했으며 그 이유는 우리 삶에 유지되고 있는, 그래서 더욱 지옥 같은 혼돈에 대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병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모든 착란적인 것이 시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착란적인 것'은 시적이다, 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여기서 착란적이라는 단어를 선적이라는 단어로 대치해도 무방하다)
자기의 온 몸을 내던져 미지의 세계에 풍덩 빠지는 자세라니, 너무 멋지다. 이는 예술가의 본연의 자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술가는 순간의 번득이는, 찰나적인 감성으로 만 하룻동안 얼마든지 다른 사람처럼 살 수 있다. 연극배우처럼, 글을 쓰는 소설가나 시를 쓰는 시인 또한 그 작품을 쓰는 순간만큼은 그 작품 속 인물로 변해서 살아 간다. 제대로 사느냐 겉치레로 흉내만 내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건 작품이 말을 해 줄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황지우의 그런 실험 정신에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게다가 황지우의 탐침은 내가 앞으로 할 작업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더 유심히 보게 된다. 물론 나는 내 몸을 대상으로 유사 체험을 하진 않을테고, 관찰을 할 생각이다. 양귀자 식의 관찰 말이다. 그러나 탐침과 관찰은 언제라도 혼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어서 일개 독자에 불과한 나이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 혼용을 허락한다. 내가 너그러운 마음이라고 하는 이유는 나는 시의 세계에 갓 입문한 초보 독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의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하겠는가 말이다. 나의 이런 노력, 탐침과 관찰의 혼용은 시인이라면 얼마든지 마땅히 흔쾌하게 받아줄 일이 되는 것이 자명한 이치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착란적인 것, 어떤 선적인 것은 어떤 것일까. 작품을 들여다 보자.
어렸을 적 낮잠 자다 일어나 아침인 줄 알고 학교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와
똑같은, 별나도 노란빛을 발하는 하오 5시의 여름 햇살이
아파트 단지 측면 벽을 조명할 때 단지 전체가 피안 같다
내가 언젠가 한번은 살았던 것 같은 생이 바로 앞에 있다 (중략) <아주 가까운 피안>
일상에서 무심결에 순간적으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갈 때 어떤 서늘함을 느끼고, 거듭 생을 사는 느낌을 받을 때의 그 희열을 누구나 한 번 쯤은 느껴봤을 것이다. 위 시를 읽다보면 찰나적인 착각, 착란은 충분히 선적일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 황지우의 예민한 더듬이는 이를 좀더 깊이 느꼈을 테고, 이 속에서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그림자를 감지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지점을 찾고 싶어 탐침을 한 게 아닐까.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서 오히려 더 간절한 그런 느낌을 좀더 깊이, 좀더 오래 알고자 황지우는 유사 광증을 실험했을 것이다. 광증의 세계에서는 이런 느낌이 오래도록 제대로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 결과물을 우리는 책으로 읽고 있지만, 황지우에게는 아직도 과정 중에 있는 일일 터이다. 물론 독자 역시 시를 두고두고 읽으면서 황지우가 숨겨놓은 겹 언어를 찾아내어 자신들만의 과정을 발견하리라 황지우는 바랄 것이다. 그건 그의 시의 세계를 좀더 폭넓게 하는 일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