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란 질환은 이제 아주 보편적인 질환이 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지자체에서 치매진단 받은 노인들에게 보조금 혜택을 줬지만 올해부터는 전국적으로 일 인당 매달 3만원선까지 혜택을 준다. 그러나 이 좋은 헤택을 받기 위해서는 신경외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아야 하고, 처방전에 치매 코드 번호가 등재되어야 하며, 해당되는 치매약이 들어가야 한다. 아리셉트 등이 대표적인 약이다.

내가 있는 이곳 시골 소도시에는 중소병원급이 3군데가 있는데 그 중 한 곳에만 신경외과 전문의가 있다. 모르고 다른 병원에서 아리셉트를 처방받아 먹게 되면 그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유독 선한 눈매의 아들에게 이 좋은 소식을 알려줬다. 그러나 아들은 난감해 한다. 어머니가 치매신데, 그깟 보조금이 뭔 의미랴? 이런 의미의 눈빛만을 보여주며 그저 고맙지만...이라고 말을 하고 그치신다. 한 마디 덧붙이시는 말은 "우리 엄마는 그리 심한 편이 아니어서..." 이다. 어머니의 치매 질환을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아들의 마음씀이 보여서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못했다. 전문의에게서 진단을 받게 되면 정말로 그 질환이 확정적으로 되어 우리 엄마가 치매인 게 세상 천지에 까발려지는 느낌일텐데, 그 느낌이 서글퍼 아들이 거부하는데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보태리.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어도 사람 마음의 상처를 토닥여주지 못한다면 그 제도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사람에게는 있는 법이니까.

간만에 치매 노인의 아들이 약국을 들렀다. 음.. 실은  한동안 안 오셨지만 눈썰미가 제로인 나는 그 사실도 몰랐다. 간만에 오셨건만 나는 어제 오신 손님처럼 반가이 맞으며 처방전을 받아 들었다. 당연히 어머니 약이라 생각을 했고 처방전을 입력하는데 이름을 보니 마치맞게 이름도 여자 것이었다. "어머니가 이번에는 치매약이 아니시네요? 이번엔 기관지약이랑 천식 흡입기만 나왔네요." 내 말을 들으시고는 아드님이 울컥 하시면서 "네~ 어머니가 이제는 더이상 치매약을 드시지 않으세요." 하신다. '어머. 어머니가 많이 호전되셨어요? 어머 좋으시겠어요' 라고 운을 떼려는 순간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들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실은..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가 벌써 두 달이 넘어 갑니다. 올 초에 돌아가셨으니까요."
"네? 어머..어쩌다가...어머님이..치매 약만 드신달 뿐 건강이 그리 나쁘진 않으셨잖아요. 어떡해요.. 아드님이 상심이 크셨겠어요.." 
"네. 치매만 있을 뿐 몸은 정정하셔서 동네 양로원도 다니고 하셨는데, 치매라고 사람들이 양로원에 못 오게 하셨어요. 계속 못 오게 하셔도 어머님이 양로원에 나가시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집에까지 사람들이 와서는 당신 어머니 양로원 못 오게 하라고 고성을 지르시고 한바탕 하고 가시더군요. 어머니가 그걸 보시고 너무 충격을 받으셔서 이틀 있다가 갑작스레 운명을 달리 하셨어요. 어흑, 그리 급작스레 가시다니"
"................"
"그런 일이. 그런 못된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지네들은 나이 안 먹나요? 지네들은 치매 안 걸린단 보장 있나요. 어떻게 자기들만 생각하고 그런 못된 짓을 할 수가..씩씩.."

한동안 말을 못 잇던 우리들은 그저 멍하니 있었고, 아저씨가 상황을 수습하면서 약을 달라 하신다. 알고보니 처방전은 아들의 것이었고, 아들의 이름은 여자 이름처럼 고운 이름이었다.

"아..네..이 흡입기는 ...그러니까...그러니까..."(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못해, 말을 더듬고 있으려니)
"어머니 쓰시던 거랑 같네요. 어머니 쓰시던 거 어깨 너머로 봐서 대충 알 거 같애요. 어머니 쓰시던 흡입기를 이제 제가 쓰게 생겼어요. 어머니 아들이니까 같은 질환에 걸리나봐요. 하하하."

그럼요. 어머니 아들이니까요. 아침에 흡입기를 쓸 때마다 어머니와의 추억에 잠길 아들이 눈에 밟힌다. 어머니 생전에도 매일같이 안부를 묻던 아들은 이제 흡입기를 쓸 때마다 하늘에 어머님의 안부를 묻는다. 어머니. 그곳도 살 만 하지요? 어머니 닮은 아들은 어머니 쓰시던 흡입기를 이제 같이 쓰네요. 어머니 계실 때 같이 썼으면 어머니한테 사용법도 물어보고, 어머니와 사이좋게 흡입기를 쓸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왜 이렇게 급히 가셨대요?  

  

 <엄마 아들>

스피리바 뚜껑을  열
속뚜껑을 또 열어 캡슐을 넣고
단추를 누른다. 엄마 맞지요?
순서가 틀리면 말씀해주셔요
그러면 캡슐 안의 가루가 충진된다고 약사님이 알려줬어요
이제 우리 같이 해봐요. 엄마도 같이 해요

먼저 숨을 내쉬고
폐 속 공기를 죄다 빼내어 새처럼 가볍게
급히 스피리바를 입에 갖다대고
힘차게 빨아들여요. 후우우욱, 쭈우우우욱
폐 속 공기로 새처럼 자유로이, 폴짝 뛰면
구름 위에 엄마 손이라도 잡겠어요

자. 이제 숨을 멈춰야 해요
약물이 폐에 가득 차려면 숨을 뱉지 말고 가만히
아, 이때는 무슨 생각을 해야 참을 수 있을까요?
엄마가 양로원에서 사람들과 즐거이 노니는 생각을?
치매라고 울 엄마 쫓아내지 않고
하늘 양로원에선 고운 울 엄마가 인기 짱이겠지요!
아, 더 참을 수 없어요
스피리바를 입에서 떼내고 천천히 숨을 내뱉어요. 푸우우우우

자, 마무리로 입을 헹굽시다
엄마 먼저 가글가글, 꼬로로록
나도 따라서 꾸루룩
우리 엄마 참 잘 했어요
이제 엄마 입술에 루즈 발라줄께요
새색시처럼 고운 분홍빛 루즈를
우리 엄마 이쁘게 하고
하늘 양로원 나들이 가실 때
아저씨들이 침 흘리면 모른 척 눈웃음도 쳐주세요

엄마, 나 연습 많이 해 놓을께요
다음에 엄마가 보시고
우리 아들 참 잘 했네 나 닮아서
흡입기도 잘 써요 칭찬할 준비나 하셔요, 엄마....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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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4-1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아이도 약국에서 흡입기 구입할 때 약사님으로부터 사용법 설명을 열심히 들었던 생각이 나네요. 저는 한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었던지라.
충격으로 그렇게 운명을 달리하실 수도 있군요. 나쁜 사람들...집에까지 찾아와 그렇게까지 할게 뭐 있대요?

달사르 2011-04-18 13:55   좋아요 0 | URL
네. 저게 생각보다 하기가 어렵더라구요. 병원에서 설명해주는 곳도 있고, 약국에서 설명듣기도 하구요. 아이가 흡입기를 써봤군요. 요새는 기관지 천식 때문에 아이들도 꽤 쓰더라구요.

네. 치매기가 있는 어르신인데도 양로원 친구들이 자기를 핍박한 거는 마음에 와 닿았나봐요. 충격이 너무 크셔서, 이틀을 내리 서럽게 우셨다고 하시더라구요. 어머님 그렇게 보내시고 아드님 가슴에 대못이 박힌 느낌이어서 두고두고 짠한 느낌이 들어요.

달사르 2011-04-18 13:56   좋아요 0 | URL
참,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
제 블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도 종종 찾아뵐께요. hnine님. ^^

2011-04-18 14: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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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8 18: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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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16: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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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3: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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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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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0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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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0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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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14: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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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1998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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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만으로 온전히 알 수 있는 세계, 시의 세계
온갖 이론으로 중무장해도, 전혀 못 알아먹을 수도 있는 세계, 시의 세계

시의 세계는 참 공평하다. 예전에 박노해 시인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노동자 시인이라며 사람들이 신기해했을 때 나도 덩달아 신기해했지만, 이제는 알겠다. 초등학생 시인도 가능하고, 늦깍이 시인도 가능한 세계가 시의 세계라는 것을. 쓰는 족족 시가 되는 사람과 일 년에 한 줄의 시도 못 쓰는 사람이 동일인일 수도 있는 것이 시의 세계라는 것을. 시의 세계는 처음 들어설 때는 무척 넓은 문이지만 조금씩 들어가다 보면 입구가 점차로 작아져서 나중엔 호리병처럼 정신의 변형이 있지 않은 이상 더 깊이  들어가기 힘이 든다. 시를 쓴 시인의 감성이 온전히 세계의 속살과 맞닿는 일이니 이는 당연한 일이겠다. 정신의 골격을 바꾸어 흐물흐물 해파리처럼 유연한 정신으로 탈바꿈하고 나서 들어간 시의 세계는 너무나 광대하고 신비로워 그간의 고통을 벌충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그건 그런 고통을 감수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시의 세계.

황지우. 그의 이전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작품은 그에게 그런 정신의 변형이 일어나는 과정을 담은 투병기다. 그는 실험을 한다. 그의 몸을 가지고, 그의 정신을 가지고. 그는 전략을 세우고 넓디넓은 시의 세계를 탐방한다. 환자로서 병을 앓으면서 병을 가지고 깨달음을 실행했던 유마힐처럼. 그는 우울, 상실감, 분열, 환각, 공포, flight of ideas 증세와 관련된 '유사- 광증'을 실험했으며 그 이유는 우리 삶에 유지되고 있는, 그래서 더욱 지옥 같은 혼돈에 대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병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모든 착란적인 것이 시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착란적인 것'은 시적이다, 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여기서 착란적이라는 단어를 선적이라는 단어로 대치해도 무방하다)

자기의 온 몸을 내던져 미지의 세계에 풍덩 빠지는 자세라니, 너무 멋지다. 이는 예술가의 본연의 자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술가는 순간의 번득이는, 찰나적인 감성으로 만 하룻동안 얼마든지 다른 사람처럼 살 수 있다. 연극배우처럼, 글을 쓰는 소설가나 시를 쓰는 시인 또한 그 작품을 쓰는 순간만큼은 그 작품 속 인물로 변해서 살아 간다. 제대로 사느냐 겉치레로 흉내만 내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건 작품이 말을 해 줄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황지우의 그런 실험 정신에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게다가 황지우의 탐침은 내가 앞으로 할 작업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더 유심히 보게 된다. 물론 나는 내 몸을 대상으로 유사 체험을 하진 않을테고, 관찰을 할 생각이다. 양귀자 식의 관찰 말이다. 그러나 탐침과 관찰은 언제라도 혼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어서 일개 독자에 불과한 나이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 혼용을 허락한다. 내가 너그러운 마음이라고 하는 이유는 나는 시의 세계에 갓 입문한 초보 독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의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하겠는가 말이다. 나의 이런 노력, 탐침과 관찰의 혼용은 시인이라면 얼마든지 마땅히 흔쾌하게 받아줄 일이 되는 것이 자명한 이치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착란적인 것, 어떤 선적인 것은 어떤 것일까. 작품을 들여다 보자. 

어렸을 적 낮잠 자다 일어나 아침인 줄 알고 학교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와
똑같은, 별나도 노란빛을 발하는 하오 5시의 여름 햇살이
아파트 단지 측면 벽을 조명할 때 단지 전체가 피안 같다
내가 언젠가 한번은 살았던 것 같은 생이 바로 앞에 있다  
(중략)                    <아주 가까운 피안>

일상에서 무심결에 순간적으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갈 때 어떤 서늘함을 느끼고, 거듭 생을 사는 느낌을 받을 때의 그 희열을 누구나 한 번 쯤은 느껴봤을 것이다. 위 시를 읽다보면 찰나적인 착각, 착란은 충분히 선적일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 황지우의 예민한 더듬이는 이를 좀더 깊이 느꼈을 테고, 이 속에서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그림자를 감지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지점을 찾고 싶어 탐침을 한 게 아닐까.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서 오히려 더 간절한 그런 느낌을 좀더 깊이, 좀더 오래 알고자 황지우는 유사 광증을 실험했을 것이다. 광증의 세계에서는 이런 느낌이 오래도록 제대로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 결과물을 우리는 책으로 읽고 있지만, 황지우에게는 아직도 과정 중에 있는 일일 터이다. 물론 독자 역시 시를 두고두고 읽으면서 황지우가 숨겨놓은 겹 언어를 찾아내어 자신들만의 과정을 발견하리라 황지우는 바랄 것이다. 그건 그의 시의 세계를 좀더 폭넓게 하는 일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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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1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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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8 12: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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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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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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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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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00: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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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0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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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14: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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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잘 변명하지 않는다.

극심한 오해에 쌓이는 경우에조차도, 그동안 지내왔던 나를 못 믿을거면 차라리 나를 의심해라! 라고 생각한다. 나의 생활을 보고도 나를 못 믿고, 그것에 대해 나에게 물어보지조차 못한다면 나를 의심해도 마땅하다 생각한다. 내가 그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또한 내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의심이 많은 사람이든, 사건이 의심하게끔 돌아가든 상관없이, 그런 상황에서 나를 변호해 줄 사람이 없다면 그것 또한 내 잘못이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명명백백하게 내 잘못으로 보이는 경우조차, 나를 변호하고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주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슬프지만 그들의 오해를 애써 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믿고픈대로 믿으라고 놔둘 수 밖에.

단계가 있다. 넘어서면 안 되는 역치도 또한 있다. 그 수위를 넘어서면, 슬프지만 더 이상은 함께 가지 못한다. 다만 함께 했던 추억은 좋게 가지고 가도록 노력하겠지만, 애써 잊으려하는 어리석은 짓 따윈 하지 않겠지만, 그렇겠지만, 그 사람은 이제 내게는 과거에 머무는 사람으로 변한다. 나의 미래의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 그 의미가 얼마나 서글픈 느낌인지 아는 나로서는 그 단계가, 그 역치가 몇 번이나 도래했지만 애써 못 본 척 넘어갔다. 미래의 순간에 없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노력이 헛되었다는 걸, 뒤늦게 나는 절감한다.

왜 그렇게 생각할까. 왜 진작에 물어보지 않았을까. 사실이 아님을 왜 알아차리지 못할까. 나를 그동안 그토록 몰랐단 말인가. 그래. 생각해보니 나 역시 타인을 그토록 몰랐다. 내 편한대로, 내 좋을대로 멋대로 재단했던 것이다. 타인을 보는 시각은 좋을 때는 같은 지점을 보지 싶어도, 다만 미묘한 각도의 오차 수준으로 간주하지만, 틈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할 때의 균열은 이윽고 숱하게 잔금이 생긴 방탄 유리처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된다. 비록 산산조각 나지 않더라도. 아니, 오히려 깨어져서 그 진상을 맨눈으로 볼 수 있는게 훨씬 낫다. 균열이 간 방탄 유리는 더 이상 유리의 기능을 못할 뿐더러 시야조차 가려서 한치앞을 볼 수 없게 만든다.

나도 반성한다. 그리고 노력해서 안 되는 지점은 진작에 놔 버려야 됨을 또 한 번 절감한다. 친구를 억지로 곁에 둘 수는 없으니까. 서로 같은 지점을 봤던 친구일지라도 어느 순간 시점이 달라져서 현저히 차이가 나면,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서로 멀어지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 친구의 마음 속에 내가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지만. 그 친구를 더 이상 다독일 수 없다는 게 눈물겹지만. 내 진정성을 의심하는 말투에 억울하지만, 이제 다 놓으련다.

나는 아직도 울지 않고 있다. 너무 커다란 상처여서 우는 법도 까먹었나보다. 커다랗게 벌어진 내 상처를 오도카니 쳐다보다가,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쳐다보다가, 하늘 한 번 보고, 눈 한 번 끔뻑거리고, 고개를 숙인다. 음악을 듣는다. 다행히 다른 친구가 선물해 준 음악들이 내게 잔뜩 있다. 내가 어떤 상황인 줄도 모르면서 그저 의기소침한 나를 위해 귀 터지게 들으라고 준 음악들을 들으면서, 벌어진 상처가 조금씩 아문다. 이 상처가 언제 나을지 모르겠지만, 음악으로 나를 위무하는 멋진 방법을 알아냈다. 음악이 내게 조금씩 다가온다. 음악은 깊은 슬픔에 침잠해 있는 나를 건져내어, 빨랫줄에 널어 말린다. 내 속울음을 음악이 빨아들이고 있다. 내 슬픔을 빨아들인 음악이 부풀어 구름이 되어 둥둥 떠다닌다. '너무 슬퍼 말아요. 이리로 와서 내 속에 들어와요. 음악 속에 들어와서 같이 음악이 되어 봐요.' 이 아픔이 가시는 날, 그날에서야 나는 아마 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날은 음악이 비가 되어 다시 내게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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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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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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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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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0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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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건 때문에 사 년 정도 모아놨던 글들을 순식간에 다 날려 버렸다. 아깝다고, 안타까워하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컸지만(나 스스로도 무척 안타까웠지만) 내 고민을 같이 다 날리고 새로 시작하고픈 마음도 조금 있었다고 해야겠다. 그런 마음의 근간에는 양귀자가, 그리고 양귀자를 소개해 준 분에 대한 존경심이 자리를 했다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나는 사람을 잘 존경하지 않는다. 속까지 해맑은 사람을 잘 못 봤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에게 치열하게 사는 모습을 잘 못 봤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김훈의 글을 좋아하고 김훈의 고민에 공감하지만 존경심이 생기진 않는다. 하루키의 글에 매력을 느끼고 하루키가 계속 신간을 내주기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지만 역시나 존경하지는 않는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지은 수전 손택. 새로이 진가를 알게 된 고 문익환 목사. 그리고 몇 명. 최근 들어 존경하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 무척 감사한 마음이다.

 글 한 편을 읽고서 단박에 누군가를 존경하게 되었다면 우스우려나. 그러나 나의 고민 지점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글 속에 들어 있고 내가 지향하는 지점을 넘어서 저 위에 우뚝 서 있는 양귀자를 알게 된  순간, 아니 기쁠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글이 부끄러웠다. 나는 내 약국에 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의 관심을 두었나. 약국을 벗어날 수 없으니 시간 때우기 식의 관심이었나. 그들에 대한 존경심의 관심이었나. 연민이었나. 쓸쓸함에 대한 재해석이었나. 약국 손님에 대한 글이 하나씩 늘 때마다 내 마음 속 아픔도 동시에 하나씩 늘었다. 내가 쓴 글을 읽어보면 실제의 그들과 미묘하게 약간씩 달랐다. 그 순간의 장면을 사진 찍듯이 고대로 묘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솔직하게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뭐가 하나 빠져 있었다. 온갖 재료로 맛있게 요리한 음식에 정작 가장 중요한 소금간이 빠진 것처럼. 그 빠진 무엇 하나 때문에 글이 하나씩 늘 때마다 나의 의기소침 또한 같이 늘어났다.


내가 만나고 사귀었던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명해 나가는 작업은 의외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그 삶들 속에 모든 삶의 비밀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의 실체가 정확하게 알려져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한 인물에 대한 보고서는 곧 그 인물의 삶이 박혀 있는 사회에 대한 보고서일 수도 있다.


양귀자는 시작점이 나와 달랐다. 양귀자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대놓고 표현을 했고, 그들에게 관심 있음을 드러냈다.  나는 양귀자가 관찰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모든 삶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하는 말을 읽는 순간 온전하게 알아차렸다. 양귀자의 삶의 철학이 저 한 마디에 집약되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양귀자의 글은 사람들에 대한 관찰에서 끝이 나지 않는 것 같다. 양귀자가 관찰한 사람들을 묘사하는 글을 읽노라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다 고만고만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소재로 해서 그려주는 글 솜씨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양귀자의 글을 읽고나면 주위 사람들을 괜히 안아주고 싶고, 이뻐요~하고 등을 토닥여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게 바로 양귀자의 글의 힘인가 보다.  양귀자의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나는 내가 그동안 가지던 궁금점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사람들을 이야기의 소재거리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아픔도 소재거리 속에 포함된 아픔이었던 것이다. 아픔이라고 같은 아픔이 아닌 것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자신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 나는 약국 사람들을 묘사하는 글을 쓰고 나서 이제는 더 이상 이전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건 과한 진실이다. 실지보다 더 슬픈 진실은 부담스러운 법이다. 양귀자는 삶을 가볍게 털어내는 글을 쓴다. 도장을 파고 나서 부스러기를 털어내야 도장의 기능을 할 수 있듯, 이제 부스러기는 아끼지 말고 털어내야겠다.  

양귀자는 또한 유머가 있다. 글 중간 중간에, 짖궂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연민이 들어가는데, 이 연민의 감정이 또 나와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부분 역시 내게 약한 부분이다. 내게 모자라는 부분을 발견하는 건 상당한 즐거움이다. 내게 모자라는 부분을 자각할 때의 그 스릴은 말로 하지 못할 기쁨이다. 누가 지적해주지 않아도 자신의 모자란 부분은 사람들이 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다만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자각 단계까지 이르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양귀자의 책을 읽고 나서, 약국에서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가 이전에 비해 조금 달라졌다. 물론 하루종일 약국을 봐야 하니 진상이 올 경우 피곤한 표정을 감출 수 없지만, 분명한 그 무언가가 달라졌다. 약국에 오는 단골들을 좀 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좀 더 따뜻한 눈으로 보는 즐거움을 내게 가르쳐 준 양귀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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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6 07: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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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6 10: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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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1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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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8 1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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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3 17: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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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8 1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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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1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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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8 1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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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1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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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8 1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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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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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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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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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0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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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몸 속 빈 공간에서
바람소리 들린다
   

소리에 홀린 나는
당신의 갈빗뼈를 끄집어내어
바람의 활(弓)을 잡는다
  

당신의 얼굴 보석같은 눈에서
맑은 물 두둑, 떨어진다
  

서늘함에 놀란 나는
당신의 이마에 새겨진 오선지에 
입술로 음표를 그린다
  

바람의 오선지를 타고
눈물의 음표는
어디든지
 

한가득 바람을 hole에 담고
나는 당신과 함께
어느 곳이든지
 

당신은 그렇게
음악이다 그리고 나는
hole에 공명하는
음악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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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6 07: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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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0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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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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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00: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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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0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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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14: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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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0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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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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