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잘 변명하지 않는다.
극심한 오해에 쌓이는 경우에조차도, 그동안 지내왔던 나를 못 믿을거면 차라리 나를 의심해라! 라고 생각한다. 나의 생활을 보고도 나를 못 믿고, 그것에 대해 나에게 물어보지조차 못한다면 나를 의심해도 마땅하다 생각한다. 내가 그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또한 내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의심이 많은 사람이든, 사건이 의심하게끔 돌아가든 상관없이, 그런 상황에서 나를 변호해 줄 사람이 없다면 그것 또한 내 잘못이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명명백백하게 내 잘못으로 보이는 경우조차, 나를 변호하고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주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슬프지만 그들의 오해를 애써 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믿고픈대로 믿으라고 놔둘 수 밖에.
단계가 있다. 넘어서면 안 되는 역치도 또한 있다. 그 수위를 넘어서면, 슬프지만 더 이상은 함께 가지 못한다. 다만 함께 했던 추억은 좋게 가지고 가도록 노력하겠지만, 애써 잊으려하는 어리석은 짓 따윈 하지 않겠지만, 그렇겠지만, 그 사람은 이제 내게는 과거에 머무는 사람으로 변한다. 나의 미래의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 그 의미가 얼마나 서글픈 느낌인지 아는 나로서는 그 단계가, 그 역치가 몇 번이나 도래했지만 애써 못 본 척 넘어갔다. 미래의 순간에 없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노력이 헛되었다는 걸, 뒤늦게 나는 절감한다.
왜 그렇게 생각할까. 왜 진작에 물어보지 않았을까. 사실이 아님을 왜 알아차리지 못할까. 나를 그동안 그토록 몰랐단 말인가. 그래. 생각해보니 나 역시 타인을 그토록 몰랐다. 내 편한대로, 내 좋을대로 멋대로 재단했던 것이다. 타인을 보는 시각은 좋을 때는 같은 지점을 보지 싶어도, 다만 미묘한 각도의 오차 수준으로 간주하지만, 틈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할 때의 균열은 이윽고 숱하게 잔금이 생긴 방탄 유리처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된다. 비록 산산조각 나지 않더라도. 아니, 오히려 깨어져서 그 진상을 맨눈으로 볼 수 있는게 훨씬 낫다. 균열이 간 방탄 유리는 더 이상 유리의 기능을 못할 뿐더러 시야조차 가려서 한치앞을 볼 수 없게 만든다.
나도 반성한다. 그리고 노력해서 안 되는 지점은 진작에 놔 버려야 됨을 또 한 번 절감한다. 친구를 억지로 곁에 둘 수는 없으니까. 서로 같은 지점을 봤던 친구일지라도 어느 순간 시점이 달라져서 현저히 차이가 나면,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서로 멀어지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 친구의 마음 속에 내가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지만. 그 친구를 더 이상 다독일 수 없다는 게 눈물겹지만. 내 진정성을 의심하는 말투에 억울하지만, 이제 다 놓으련다.
나는 아직도 울지 않고 있다. 너무 커다란 상처여서 우는 법도 까먹었나보다. 커다랗게 벌어진 내 상처를 오도카니 쳐다보다가,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쳐다보다가, 하늘 한 번 보고, 눈 한 번 끔뻑거리고, 고개를 숙인다. 음악을 듣는다. 다행히 다른 친구가 선물해 준 음악들이 내게 잔뜩 있다. 내가 어떤 상황인 줄도 모르면서 그저 의기소침한 나를 위해 귀 터지게 들으라고 준 음악들을 들으면서, 벌어진 상처가 조금씩 아문다. 이 상처가 언제 나을지 모르겠지만, 음악으로 나를 위무하는 멋진 방법을 알아냈다. 음악이 내게 조금씩 다가온다. 음악은 깊은 슬픔에 침잠해 있는 나를 건져내어, 빨랫줄에 널어 말린다. 내 속울음을 음악이 빨아들이고 있다. 내 슬픔을 빨아들인 음악이 부풀어 구름이 되어 둥둥 떠다닌다. '너무 슬퍼 말아요. 이리로 와서 내 속에 들어와요. 음악 속에 들어와서 같이 음악이 되어 봐요.' 이 아픔이 가시는 날, 그날에서야 나는 아마 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날은 음악이 비가 되어 다시 내게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