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샷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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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미권에서는 작품이 성공할 경우, 같은 주인공을 내세운 시리즈물을 계속해서 발표하는 작가들이 꽤 많은 것 같다. 패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나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보슈 시리즈, 그리고 제프리 디버의 링컨라임 시리즈 등이 대표적인데, 여기 리 차일드의 잭리처 시리즈도 늦게나마 국내에 적극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작가의 글은 시리즈의 첫작품인 '추적자'에 이어 두번째 만남이다. 개인적으로 스탠드얼론에 비해 시리즈물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데, 그것은 회를 거듭할수록 참신함은 떨어지고 타성에 젖은 범작들이 줄을 잇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이미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추적자에서 보여준 힘있고 개성넘치는 작가의 필력이 인상깊었으나, 굳이 후속시리즈물까지 챙겨볼 마음은 없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하지만 난데없이 '톰 크루즈'가 본작의 판권을 사서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접하니, 도저히 궁금해서 찾아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작품 '원샷'은 잭리처 시리즈의 9번째에 해당하며 2005년도에 발표된 것으로 나온다. 약간 거칠었던 데뷔작에 비해 확실히 안정적이며 세련된 느낌이다. 드라마틱하면서도 맛깔나는 대사들, 적절한 타이밍의 컷전환, 그리고 투박함과 섬세함이 공존하는 작가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마치 7,80년대 미국드라마의 한 에피소드를 보는 듯한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었다. 떠돌이 주인공이 어느 마을에 도착하면 그곳에는 악당들이 있고, 주인공은 마을 주민을 도와 모종의 음모와 갈등을 해결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는... 그 당시에는 이런 낭만적인 소재의 드라마들이 꽤나 많았다. 이 작품의 구성과 분위기가 딱 그런 정도다. 데뷔작으로도 충분히 짐작했지만, 이것으로 잭리처 시리즈의 컨셉은 확실하게 파악이 된 듯하다.

<사족> 영화화하기에 분명 매력적인 작품이기는 하나, 톰 크루즈가 주도하는 영화라면 아무래도 스케일을 키우기위해 많은 부분 각색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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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칼의 날 동서 미스터리 북스 93
프레데릭 포사이드 지음, 석인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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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흔히 쓰는 인터넷 용어 중에 '넘사벽'이란 표현이 있는데, 아마도 스릴러라는 장르에 있어서 '프레드릭 포사이드'가 차지하는 위치가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과연 그는 첩보스릴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며 그 이름만으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느끼게한다. 본작 '자칼의 날'은 이러한 포사이드의 데뷔작이면서도 또한 대표작이며, 오늘날의 그를 있게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1971년에 발표된 이 작품을 이렇게 뒤늦게 읽게된 이유는 이미 오래전에 영화로 먼저 접해버려서 그 내용을 너무나 잘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벌써 40년이나 지난 작품이다보니 국내에서도 그동안 여러 출판사의 출판과 절판을 거쳤고, 현재는 2곳의 출판사에서 발행중에 있다. 고민끝에 여기 알라딘에서 서비스하고있는 미리보기를 이용해 처음 몇페이지의 번역상태를 신중하게 비교해보고 고른 것이 바로 동서문화사판이었다. 거기에 분권보다 단권으로 이루어진 책을 선호하는 개인적인 취향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 책은 판형이 작은 문고판인 관계로 작품이 가지고있는 무게감에 비해 현저히 소장가치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고, 누구의 얼굴인지 분간하기도 힘든 괴상한 표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불만이었다. 그러던 차에 얼마전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우연히 발견한 절판본은 그동안 답답했던 기분을 일거에 해소시켜 주었는데, 원하던 책을 그것도 최상의 상태로 보존된 책을 발견하는 기쁨이란 헌책방을 돌아다녀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자그마한 혜택이 아닐까 싶다. 

헌책방에서 찾아낸 대성판은 약 450페이지, 동서판은 465페이지다. 하지만 판형과 활자크기의 차이로 인해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글자수 역시 제법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어느 한쪽이 내용의 일부를 축약하거나 삭제했을 것이라는 의혹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먼저 동서판을 초반 100여 페이지까지 읽고난 뒤, 대성판으로 바꿔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나갔다. 확실히 앞서 읽었던 책에서는 보이지않던 몇몇 대사와 문장들이 곳곳에 추가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고판의 경우는 판형에 맞춰 활자를 빡빡하게 넣고 문단을 이어붙인 형태의 편집을 해서인지 글을 읽는 호흡이 너무 빠르다는 느낌이 들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지면의 여유가 있는 대성판은 훨씬 편안한 글읽기를 할 수 있었다. 어떻게보면 작은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하마터면 소중한 작품을 가위질당한 사실도 모른채 읽게되는 불상사를 겪을뻔 한 것이다.

이 작품은 도입부 대통령의 암살미수사건을 비롯하여 시작하자마자 정말 숨쉴틈없는 전개를 보여준다. 특히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과거사를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압축해서 보여주기때문에, 문장에 담겨있는 내용의 정보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밀도가 높다. 또한 알제리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있는 만큼, 이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요구하는 부분도 많아 냉전시대 이후의 세대들에겐 다소 딱딱하고 어렵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주인공 자칼이 등장하면서 전개되는 일련의 흥미로운 씬들은 시종일관 건조한 문체임에도 불구하고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책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다.

오래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읽었을 때 느꼈던 그 놀랍고도 강렬했던 전율을 이 작품을 통해 비로소 다시한번 맛보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향수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라면 바로 그르누이가 발디니의 제자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틱한 장면인데, 이 작품에서는 자칼이 총기제작전문가와 만나서 나누는 대화들이 그와 흡사한 짜릿함을 주고있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서로 맞부딪치며 만들어가는 섬세하고 흥미로운 상황들이 암살자라는 독특한 소재와 맞물려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청부암살자가 주인공이다. 물론 지금이야 이것이 그다지 주목할만한 부분이 아니겠지만, 이 책이 발표된 시기가 1970년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당시만 하더라도 세계는 소련, 중국을 위시한 공산국가들과 미국을 대표로 한 자유진영이 팽팽하게 대립하던 냉전시대였다. 악의 입장에서 악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고 획기적인 발상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샤를 드골 대통령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있는 이상, 이 작품에서 자칼이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결과는 이미 나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묘하게도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자칼이 제발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질없는 기대를 하게된다. 그만큼 작가의 캐릭터구축력이 치밀하다는 반증인데, 다른 캐릭터와 달리 주인공인 자칼은 과거사에 대한 별도의 설명없이 오직 행동과 대사만으로도 충분히 입체적인 인물로 다가온다. 물론 그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또다른 주인공 르벨 총경 역시 대단히 매력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두 맞수의 불꽃튀는 추격전은 후반부에 가서 거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스릴을 선사하며 절정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자칼의 날'은 대가의 솜씨가 과연 무엇인가를 확실히 느끼게 해준다. 알제리역사와 총기에 관한 심도깊은 지식, 그리고 자칼이 위조전문가를 죽인후 자신의 담배갑에 담배재를 털고 비벼끄는 세심한 동작 하나하나까지 놓치지않는 놀라운 디테일 등, 단 한문장도 허투루 쓰여진 곳이 없다. 거대한 스케일을 유지하면서도 작품성과 재미를 골고루 추구하는 묵직한 필력은 그가 이미 급수가 틀린 작가임을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다.

이 작품이 첩보스릴러 역사에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이후 등장한 수많은 아류작들이 증명하듯 다른 작가들에게 깊은 영감과 모티브를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켄 폴레트'의 출세작인 '바늘구멍(Eye of the Needle,1978)', '잭 히긴스'의 대표작 '독수리는 내리다(The Eagle has Landed,1975)', 그리고 '토머스 해리스'의 데뷔작 '블랙 선데이(Black Sunday,1975)' 같은 유명작품들 역시 모두 자칼의 플롯을 차용해서 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모종의 대형음모를 준비하는 악을 주인공으로 스토리를 이끌고, 그러한 음모를 추적하는 선이 따라붙는다는 플롯...  

이 독특한 설정은 주인공이 결국 목적을 이루지못할 것이라는 결과가 예측됨에도 불구하고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응원하게되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작가의 필력이 충분히 뒷받침되어야만 하겠지만, 플롯 자체가 가지고있는 힘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아마도 이러한 플롯을 창조한 포사이드 자신도 그 매력을 쉽게 잊지 못했던 것 같다. 1984년 'The Fourth Protocol'란 작품으로 또한번 비슷한 형식을 선보였던 것인데, 이 작품 역시 오래전 영화로 먼저 접했다. 국내에서는 '제4의정서', 또는 '소련KGB:제4의핵'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적이 있으며, 영화는 '소련KGB'란 제명으로 국내에 개봉되었고 '피어스 브로스넌'과 '마이클 케인'이 주연을 맡았다. 

본작 '자칼의 날'은 1973년 '하이눈'과 '지상에서 영원으로' 등으로 유명한 '프레드 진네만'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으며, 영국출신의 명배우 '에드워드 폭스'가 주인공 자칼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영화는 원작을 충실히 화면으로 옮겨 원작팬들에게 또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 후 1997년에는 '브루스 윌리스'와 '리처드 기어'가 출연한 리메이크작이 다시한번 만들어졌는데, 이 영화는 자칼이라는 이름과 플롯만 가져다 썼을뿐 시대적 배경과 분위기가 전혀 달라서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원작에서 묘사하는 자칼의 이미지와 더할나위없이 어울리는 에드워드 폭스 

 


브루스 윌리스의 캐스팅과 함께 블록버스터 액션으로 변질되어버린 리메이크작

적어도 첩보스릴러 및 스파이물에 관한한 포사이드의 영향을 받지않은 작가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만큼, 그가 장르소설계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1938년 영국 켄트지방에서 태어난 '프레드릭 포사이드'는 현재 70대중반의 나이임에도, 아직까지 꾸준하게 작품을 발표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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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미닛 룰 모중석 스릴러 클럽 22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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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즘 국내에 번역소개되는 크라임스릴러 장르의 대부분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영미권 또는 일본의 철지난 작품들이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소재가 고갈난 미국영화계에서 뒤늦게 눈을 돌려 쓸만한 작품들을 발굴하려는 움직임과 맞물려, 국내출판계에서도 이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모감독이 판권을 구매했다느니, 영화화가 결정됐다느니 하는 기약없는 광고문구도 넘쳐나고, 발표된지 10년이 넘은 소설들도 마치 최신작인양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독자들로서는 그동안 몰랐던 실력있는 작가들을 새롭게 접한다는 의미에서 분명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출판기획자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무분별하게 선택된 작품들은 과장광고와 졸속번역 등, 적지않은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잘 모르는 작가의 소설을 읽고자 할 때에는 먼저 구글을 통해 작가의 공식웹사이트를 살펴보고 프로필과 원작의 출판년도 등을 확인하는 버릇이 자연스레 생겨버렸다.

'로버트 크레이스'라는 작가도 이번에 처음 접하는데, 1953년생이니 2006년에 발표된 본작은 거의 50대중반에 접어들 즈음 집필이 되었다는 얘기다. 작가의 나이와 출판년도를 알게되면 작품의 배경이랄까 작가의 사고방식 등에 대해 사전에 어느 정도 이해와 준비가 된 글읽기가 가능하다.

이 작품은 일단 플롯 자체가 너무나 단순하고, 익숙하며, 또한 캐릭터를 입체적인 인물로 그리는데 있어서도 아쉬운 부분이 보인다. 일생을 은행털이와 자동차절도, 그리고 마약 등 그야말로 쓰레기같은 제멋대로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주인공이, 초반에 등장하자마자 마치 정의의 사도가 된 듯 아들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않는 모습은 너무나 생뚱맞아서 감정이입하기가 힘들 정도다. 소설의 대부분은 두 주인공이 의혹을 파헤치는 조사과정으로 채워져있으며, 복선이나 액션도 거의 없다. 의외의 범인도 그리 놀랍지않고, 예측가능한 스토리가 그저 예상했던 결말로 이어질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은근한 매력이 있다. 이렇다할 임펙트도 없이 계속되는 조사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않게 읽혀지는 것은 이 작가의 내공이 결코 만만치않음을 보여준다. 태양이 내리쬐는 무덥고도 따뜻한 LA의 여러 모습과 함께 시종일관 낭만적인 느낌이 살아있는데, 얼마전에 읽었던 마이클 코넬리의 '블랙 에코'가 생각나기도 했다. 드라마각본가 출신이어서 그런지 확실히 대사들이 군더더기없이 깔끔하다. 특히 묘지에서 두 주인공이 함께 울면서 마침내 교감을 이루는 장면은 이 책의 매력이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책을 덮고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쁜남자로 그려지면 더욱 흥미로울 주인공이 시종일관 바른생활맨으로 행동하니 시시한 면도 있지만, 고전적인 스토리라인과 작가의 밝은 시선이 훨씬 돋보이고 마음을 편하게 한다. 문득 주인공이 즐겨입었다는 토미바하마 셔츠에 레이밴 웨이페어러 선글라스 차림으로 헐리우드거리를 거닐고 싶어진다. 


작품의 주요장소로 등장하는 헐리우드 사인 (Hollywood 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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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증명 - 상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9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 해문출판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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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본추리소설을 얘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모리무라 세이이치이며, '인간의 증명'은 그의 대표작이자 작가후기에도 있듯이 본인 스스로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기도 하다. 1975년작이니만큼 그 명성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쩌다보니 이렇게 뒤늦게 읽게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폭넓은 인기를 구가하고있는 미야베 미유키를 비롯하여 많은 일본작가의 작품들이 소위 '사회파'라는 장르의 테두리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작품 속에 그 시대의 사회상이나 이슈 등을 다루고있어 독자들의 공감대를 훨씬 쉽게 끌어낼 수 있는 장점 때문인 듯 한데,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이런 사회파 추리소설을 정착시킨 1세대작가에 해당한다. 지금은 굳이 사회파라고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일본의 추리문학 자체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색깔로 자리잡은 듯 싶기도 하다.

본 작품도 중반쯤 읽다보면 전쟁, 혼혈인, 가정불화, 자녀들의 일탈, 그리고 불륜 등 당시의 여러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소재들이 대거 등장한다. 하지만 스토리는 정말 태평스럽게 흘러가고, 서로 연관을 짓기힘든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바람에 스피디한 요즘 취향과는 확실히 거리가 먼 다소 느긋하고 편안한 글읽기를 요구하고 있다.

대부분의 일본추리소설이 그들의 국민성처럼 꼼꼼하고 디테일한 특징을 자랑하듯,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사건을 맡은 형사들은 정말 독자들이 혹시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징그러울 정도로 세세하게 제시하고, 의논하고, 또 직접 수사를 하러간다. 현실에서 사건현장인지 아닌지 확실치도 않은 장소에서 발견된 낡은 밀짚모자를 과연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할 수가 있을까? (물론 작가가 작정하고 모티브로 삼은 소재인만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다소 지루하던 초반부를 넘어가면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조각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며 전체적인 그림의 윤곽이 그려진다. 특히 중반부 눈덮인 외딴 산골온천으로 조사를 가는 두 형사의 모습은 잠시 현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데, 무척 인상깊다. 이 책의 제목이 '인간의 증명'인 이유도 기나긴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에 가서야 밝혀진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인간'을 부정하고 인간에 대한 복수심만으로 살아온 형사가 결국 범인의 '인간성'에 모든걸 걸게 되는 기막힌 반전과 아이러니는, 이 작품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이며 한 인간이 겪어가는 치유의 여정이기도 하다. 

 <사족> 무엇보다 이 작품은 배경이 되는 장소가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마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연상케 할 정도인데, 작가후기에 보면 밀짚모자와 시, 그리고 키리즈미(霧積)온천은 모두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추억에서 비롯된 것이라 밝히고 있다. 일본의 군마현과 나가노현 경계지점에 있다는 키리즈미는 산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로 소설 속의 온천여관도 실제로 존재하는 모양이다.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책에 묘사한 대로 물레방아의 모습도 보이고, 밀짚모자를 주제로 한 시, 그리고 모리무라 세이이치와 '인간의 증명'에 관한 안내문도 보인다. 이 작품 덕분에 많은 유명세를 치른 것 같기도 한데,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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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큰 윈도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8 링컨 라임 시리즈 8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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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영화를 인연으로 찾게된 '본 컬렉터'를 읽을 당시만 해도 이 링컨 라임 시리즈를 8편이나 읽게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 '코핀 댄서' 이후로는 그다지 큰 만족감을 준 작품이 없었음에도 이제는 거의 습관적으로 읽게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작가와 독자가 함께 타성에 젖어간다고나 할까...

꾸준하게 일정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가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라임 시리즈에 갖는 특별한 호감이라면 바로 번역가 유소영씨다. 이 시리즈가 여타 시리즈와 달리 유독 일관된 톤을 유지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한데, 이렇게 작가와 번역가의 궁합이 좋은 파트너쉽은 쉽게 찾아보기가 힘들다. 어쩌면 번역작품을 대하는 독자들에게 이보다 더 큰 행운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외국소설의 경우 번역가가 누구냐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천양지차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굳이 다른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제프리 디버에만 국한시켜서 유소영의 라임 시리즈와 다른 번역가들의 스탠드얼론 작품들만 비교해도, 도저히 같은 작가가 쓴 글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그 느낌이 서로 제각각임을 알 수 있다.

본작 '브로큰 윈도'의 경우처럼 마치 잘 숙성된 술의 향취를 음미하듯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부터 편안하고 기분좋게 몰입이 되는 것은, 번역가가 그만큼 작가의 스타일을 제대로 파악하고 잘 체화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디버는 확실히 영리하고 빈틈이 없다. 전작 '콜드문'에서는 너무나 작위적인 반전이 거듭되어 실망감도 없지않았는데, 이번에는 역으로 트레이드마크였던 반전이나 의외의 범인에 연연하지않는 과감한 모습을 보이고있다. 오히려 이것이 반대로 독자의 허를 찌르는 모습이다. 작가가 이런 부분에서 많이 고심한 것은 느껴지는데, 그래도 큰 임펙트가 없이 무난하게만 흘러가는 플롯은 그리 만족스럽지가 않다.

범인의 심리묘사나 장면전개의 노련함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 시리즈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모르겠지만, 디버와 유소영 작가의 찰떡궁합이 계속해서 좋은 선례로 남길 희망해본다.

<사족> 색스일행이 SSD본사에 갔을때 요청에 의해 직원이 시디를 건네주는 장면에서 '보석케이스에 시디를 넣어서...'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것은 '주얼케이스(Jewel Case)'를 번역한 듯한데, 보석이 아니라 그냥 일반 플라스틱 시디케이스를 지칭하는 말이다. 공시디 좀 구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단어일텐데... 살짝 웃음이 나왔다. 애교스런 옥에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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