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증명 - 상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9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 해문출판사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추리소설을 얘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모리무라 세이이치이며, '인간의 증명'은 그의 대표작이자 작가후기에도 있듯이 본인 스스로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기도 하다. 1975년작이니만큼 그 명성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쩌다보니 이렇게 뒤늦게 읽게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폭넓은 인기를 구가하고있는 미야베 미유키를 비롯하여 많은 일본작가의 작품들이 소위 '사회파'라는 장르의 테두리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작품 속에 그 시대의 사회상이나 이슈 등을 다루고있어 독자들의 공감대를 훨씬 쉽게 끌어낼 수 있는 장점 때문인 듯 한데,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이런 사회파 추리소설을 정착시킨 1세대작가에 해당한다. 지금은 굳이 사회파라고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일본의 추리문학 자체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색깔로 자리잡은 듯 싶기도 하다.

본 작품도 중반쯤 읽다보면 전쟁, 혼혈인, 가정불화, 자녀들의 일탈, 그리고 불륜 등 당시의 여러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소재들이 대거 등장한다. 하지만 스토리는 정말 태평스럽게 흘러가고, 서로 연관을 짓기힘든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바람에 스피디한 요즘 취향과는 확실히 거리가 먼 다소 느긋하고 편안한 글읽기를 요구하고 있다.

대부분의 일본추리소설이 그들의 국민성처럼 꼼꼼하고 디테일한 특징을 자랑하듯,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사건을 맡은 형사들은 정말 독자들이 혹시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징그러울 정도로 세세하게 제시하고, 의논하고, 또 직접 수사를 하러간다. 현실에서 사건현장인지 아닌지 확실치도 않은 장소에서 발견된 낡은 밀짚모자를 과연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할 수가 있을까? (물론 작가가 작정하고 모티브로 삼은 소재인만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다소 지루하던 초반부를 넘어가면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조각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며 전체적인 그림의 윤곽이 그려진다. 특히 중반부 눈덮인 외딴 산골온천으로 조사를 가는 두 형사의 모습은 잠시 현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데, 무척 인상깊다. 이 책의 제목이 '인간의 증명'인 이유도 기나긴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에 가서야 밝혀진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인간'을 부정하고 인간에 대한 복수심만으로 살아온 형사가 결국 범인의 '인간성'에 모든걸 걸게 되는 기막힌 반전과 아이러니는, 이 작품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이며 한 인간이 겪어가는 치유의 여정이기도 하다. 

 <사족> 무엇보다 이 작품은 배경이 되는 장소가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마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연상케 할 정도인데, 작가후기에 보면 밀짚모자와 시, 그리고 키리즈미(霧積)온천은 모두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추억에서 비롯된 것이라 밝히고 있다. 일본의 군마현과 나가노현 경계지점에 있다는 키리즈미는 산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로 소설 속의 온천여관도 실제로 존재하는 모양이다.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책에 묘사한 대로 물레방아의 모습도 보이고, 밀짚모자를 주제로 한 시, 그리고 모리무라 세이이치와 '인간의 증명'에 관한 안내문도 보인다. 이 작품 덕분에 많은 유명세를 치른 것 같기도 한데,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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