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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의 밤
블레이크 크라우치 지음, 이은주 옮김 / 푸른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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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의 밤'은 애플 TV+를 통해 올해 5월부터 방영 중인 드라마의 원작소설이고 미국에서는 2016년에 발표되었으니까 생각보다 조금 오래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는 22년에 번역 소개되었고 처음 나왔을 때는 표지 디자인이 이렇지 않았는데 최근에 드라마 방영이 확정되면서 배우 얼굴이 들어간 포스터를 그대로 활용한 지금의 새로운 표지로 변경된 것 같다.


그런데 포스터 자체도 그렇지만 솔직히 이 표지 디자인은 좀 문제가 있다. 누가 봐도 복제인간을 다룬 SF물이 연상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이 작품의 중반부에 드러나는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반전 장치이기도 해서 책을 읽기도 전에 미리 스포를 당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굉장히 작은 사이즈의 특이한 판형으로 제작되었다. 외형은 서양의 '페이퍼백' 스타일인데 가격은 16,800원으로 전혀 페이퍼백 답지 않다. 페이퍼백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서양에서 오로지 싼 값에 책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제본방식이고 질낮은 재생종이에 떡제본이라 읽다보면 책등이 휘어지고 꺽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소장용이 아니라 가볍게 한번 읽고 버릴 생각으로 구매하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 같은 경우는 이도저도 아닌 참 이상한 컨셉으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품질 낮은 문고판 사이즈에 가격은 또 페이지수로 적용해서 제값을 다 받고 있으니까... 아뭏든 요즘 국내 출판사들의 일관성 없는 제본과 가격정책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작가 블레이크 크라우치는 1978년생으로 현재 40대 중반이고 소설가이면서 TV드라마의 시나리오 작가 겸 제작자로도 활동 중인 것 같다. 특히 자신이 원작자이면서 각색에도 참여한 '웨이워드 파인즈' 시리즈가 유명한 모양이다. 프로필을 보면 본업이 소설가인지 드라마 작가인지 살짝 헷갈리는 측면이 있는데 내가 볼 때 이 작가는 작품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미리 영상 제작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스타일인 듯 하다. 책을 읽다보면 플롯의 진행이나 인물들의 대사, 컷 전환 방식 등에서 전형적인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차피 출판계와 영화계가 긴밀하게 맞물려서 돌아가는 시대라 그다지 특별할 건 없지만 그래도 작가가 작품의 영상화에 비중을 많이 두는 경우에는 소설 자체의 완성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가 보여주는 필력은 예상외로 뛰어나서 한편의 소설로서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만족감을 충분히 선사한다. 작가가 글도 잘 쓰지만 대단히 똑똑하고 노련한 사람이란게 몇페이지만 읽어봐도 바로 느껴진다.



이 작품의 원제는 'Dark Matter'이다. '암흑물질'이라고 불리는 천체물리학 관련용어인데 책에서도 간단히 설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제목처럼 이 작품은 최근 마블 시리즈 덕분에 너무나 익숙해진 용어인 멀티버스 즉, 다중우주를 소재로 한 SF스릴러다. 그래서 책 내용 중에 양자역학이니 초끈이론, 또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일반인들은 말해줘도 잘 모르는 고차원적인 내용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작가 후기에 현역 물리학 교수의 자문도 받았다고 나올 정도로 나름 자료조사를 충분히 해서 과학 이론상 허술한 구성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쓴 모습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어려운 학문적 이론은 스토리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베이스로만 활용하고 독자들은 그런거 자세히 몰라도 아무 문제없이 스토리를 따라가며 즐길 수 있도록 헐리우드의 시나리오가 여지껏 잘 해왔던 방식으로 아주 능숙하게 처리를 해놓았다.


약간 호흡이 느리다는 단점은 있지만 드라마 시나리오 경험이 많아서인지 대사도 좋고 기승전결의 깔끔한 구성 안에서 중반부 이후 몰아치는 전개는 몰입도가 굉장하다. 다만 지금 현재의 삶이 가장 소중하다는 걸 말하고 싶어하는 작품의 메세지는 알겠으나, 사랑하는 여자를 얻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는 주인공의 고군분투는 복잡한 이론과 거창한 스케일에 비해 뭔가 모르게 좀 궁색한 느낌을 주는 면이 있다.



애플 TV+의 드라마는 '조엘 에저튼'과 '제니퍼 코넬리'가 주연을 맡았다. 조엘 에저튼은 '제로 다크 서티'라는 영화에서 후반부 특수부대원 역할로 '크리스 프랫'과 함께 단역으로 나왔을 때 개인적으로 인상깊어서 눈여겨 봤던 배우인데 감독, 각본, 제작 등 다방면으로 재능도 많고 또 진중한 이미지라 상당히 믿음직스럽다. 제니퍼 코넬리야 내 나이 또래면 누구나 다 아는 배우니까... 그런데 얼마전 '탑건 매버릭' 때보다는 덜 예쁘게 나오는 것 같아서 좀 아쉽다. 어쨌든 예고편을 보니 소설의 내용이 영상으로 잘 구현된 느낌이 든다.


그래도 나는 왠지 모르게 재미 면에서는 드라마가 소설을 못 따라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제인 'Dark Matter'와 아무 연관성이 없는 '30일의 밤'이란 국내제목은 약 30번에 걸쳐 다중우주를 돌아다니는 주인공의 행적을 상징하는 의미로 지은 것 같은데 '암흑물질'과 같은 딱딱한 직역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인 것 같다. 만약 '30일의 밤'이라는 드라마에 관심은 있는데 나처럼 애플TV를 볼 수 있는 여건이 안된다면 이 원작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훌륭한 대안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LbGbfUyuB68&t=1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624287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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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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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은 1993년생으로 이제 막 30대로 접어든 젊은 여류작가이다. 20대 중반에 '관내분실'이라는 단편으로 등단하면서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받은 이후 단숨에 한국SF문학계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스타작가로까지 올라선 것 같다.



'지구 끝의 온실'은 그동안 중단편만 써왔던 작가가 처음으로 내놓은 장편소설인데, 21년 8월에 출간된 즉시 베스트셀러를 기록함과 동시에 수많은 나라와 출판계약을 맺고 영화판권까지 팔렸다는 소개란만 봐도 현재 그녀가 가진 위상과 인기를 실감하게 만든다.



SF문학은 과학적 근거와 오류 등을 디테일하게 따지는 골수매니아과 덕후들이 워낙 많아서 그 유명한 베르나르 베르베르마저 과학적 고증 측면에서는 사정없이 비판받을 정도로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받는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데 심지어 SF장르의 불모지라고도 불리는 한국에서 젊은 여성작가가 이렇게 두각을 보이는 현상이 신기하기도 하다.


일단 김초엽 작가는 무엇보다 포항공대 출신이라는 과학 기반의 강력한 스펙과 함께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예술가적 자질, 그리고 청각장애라는 핸디캡까지 독자의 입장에선 인간적 호감을 가질만한 능력과 스토리를 고루 가지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나같은 경우 이 작가를 유명하게 만든 단편들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첫 장편인 이 작품으로만 그녀의 실력과 특징을 가늠한다는게 그리 적절치 않은 느낌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하는 취향이라 굳이 이 작품을 골라봤는데 그래도 문학계에서 이렇게까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정도는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이 작품은 영화에서도 흔하게 차용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세계 종말이나 인류 멸망의 원인은 핵전쟁이나 천재지변 등 여러가지 선택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더스트'라는 이름의 먼지처럼 자가증식하는 화학 유기체로 설정을 했다. 2064년부터 2070년까지 약 5년간의 더스트 시대를 거치면서 지구는 초토화되었고 주인공 아영이 활약하는 작품속 시점은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흐른 2129년이니까 이 작품의 시대적 설정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뒤의 미래가 되겠다.



앞으로 40년 정도가 지나면 책에서처럼 '호버카'로 불리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라든지 마치 에이리언 시리즈의 비숍이나 데이빗 같은 수준의 인조인간이 만들어질 지는 모르겠으나 아뭏든 이 책에서는 더스트 시대에 이미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설정이다. 냉정하게 본다면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영화적 허용처럼 소설적 허용으로 넘어가도 되리라...


'돔 시티'의 경우는 불과 5년이 안되는 더스트 시대를 격는 와중에 한 도시를 커버할 정도의 거대한 돔을 설치한다는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들지만 그래도 정찰과 전투 목적의 드론이나 음식 대용으로 섭취하는 영양 캡슐, 동물 로봇 등 작품 속의 다양한 장치들은 근미래에 충분히 등장 가능할 법한 정도로 묘사되어 있다. 더스트의 모태가 되는 나노 테크놀로지라는 것도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분야겠지만 화학 및 생화학을 전공했던 작가의 이력이 뒷바침하는 만큼 충분한 검토를 거쳐서 나온 설정임을 말해주는 듯 하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아바타'라는 영화를 위해 나비족의 언어인 나비어를 비롯하여 판도라 행성에 관한 세계관을 규정하는 설정집을 따로 만들었는데 그 분량이 어머어마해서 거의 백과사전 수준으로 두껍다더라는 과장섞인 일화까지 전해질 정도로 SF장르는 세계관과 설정 구축이 빈틈없이 탄탄하게 마련되어야 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물론 김초엽 작가가 그 정도까지 치밀하게 준비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미래의 모습은 본인의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굉장히 고심해서 구상하고 또 디테일하게 설계한 결과물임이 충분히 느껴진다.


무엇보다 내가 감탄했던 부분은 작가가 이러한 배경 설정에 관해 설명충을 등장시키거나 해서 굳이 주입식으로 브리핑하듯이 설명을 하는 구차하고 촌스러운 수법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어떤 세계관인지 감을 잡기 힘들어도 읽다보면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인물들의 대사나 상황묘사를 통해 적절한 타이밍에 하나씩 자연스럽게 파악이 되도록 정교한 수순처리를 해놓았는데 솔직히 이 부분은 경력이 짧은 신인작가의 솜씨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



다만 글쓰기 측면의 작가적 역량에 한정해서 본다면 이 작가의 필력은 그다지 인상적으로 와닿지는 않는다. 물론 순수문학이 아닌 장르문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사와 서술 문장들 모두 딱히 흠잡을데가 없을 정도로 준수한건 분명하지만 프로 글쟁이다운 기교나 문학적 감성이 거의 보이지 않고 문장들이 대체로 모범생의 답안처럼 너무 정직하고 딱딱한 편이긴 하다. 그리고 스토리의 전개에 있어서도 딱히 불필요하다거나 군더더기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전체적으로 루즈한 느낌이 있어서 다소 지루하다는 인상을 주는 편이다. 역시 이 작가도 장편이 처음이어서 그런지 긴 호흡을 효율적으로 컨트롤하는 능력이 아직은 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쉽게 느낀 부분은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비전이랄까... 아뭏든 그런 측면이었다.


이 작품이 19년에 발생한 '코로나' 사태에서 어느 정도 영감을 받았다는 것도 알겠고... 거대한 재앙을 극복하려는 인류의 노력과 그 와중에 위기를 전화위복 삼아 세상을 리셋하고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 하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인간 군상들에 의해 충돌하고 반목하는 이해관계들... 윌리엄 골딩의 위대한 고전 '파리대왕'이 떠오르는 부분도 더러 보이는데... 아뭏든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제법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브 플롯들이 마치 작품 속의 '모스바나' 덩굴처럼 뒤엉켜있어 그 속에서 뿌리와 줄기를 형성하는 핵심주제를 찾기가 어려웠다.


거기에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놀랍게도 이 책에서는 남성 캐릭터가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금방 죽는 용도 등의 별 의미없는 엑스트라를 제외하면 정말로 아예 없다. 심지어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윤재'라든지 '대니' 같은 누가 봐도 남자로 생각되는 이름도 알고보면 모두 여성 캐릭터다. 그래서 주인공들을 비롯한 '프림 빌리지'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활동을 보노라면 작가가 혹시 '아마조네스 왕국'을 꿈꾸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후반부 등장하는 동성애 코드도 회심의 반전장치라고 하기엔 작가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 성향만 드러낼 뿐인 장면이라 너무 뜬금없다.


작가가 작품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들은 대충 어떤건지 알겠는데 내게는 이것들이 페미니즘적 시각과 묘하게 엮여있는 모습으로 보여서 전체적으로 나와는 코드가 좀 안맞는 느낌이었고 하여튼 여러모로 아쉬웠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얘기하다보니 또 단점들만 수두룩하게 지적한 것 같은데 현재 한국 문학계에서 가장 핫한 작가 중의 한명인 김초엽은 나이에 비해 그 명성에 걸맞는 깊이감을 보여주는 실력자임은 분명하다는 생각이고 또한 앞으로의 발전가능성도 대단히 높아보인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자신의 단점도 알아서 스스로 보완해 나가리라 믿는다. 다만 자신의 주타겟층을 계속해서 여성 독자들로 한정짓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너무 노골적인 페미니니즘적 성향은 조금씩 줄여나가는게 어떨까 싶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T-hOs_4iVt0&t=4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610468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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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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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에 나왔던 '완전한 행복' 이후 3년만에 발표된 신작 장편소설이고 예약구매 특전은 작가의 사인이 들어간 하드커버 양장본이다. 처음에는 이 책도 김애란처럼 당연히 인쇄된 사인이겠거니 하고 무심코 넘겼었는데 나중에 혹시나해서 손끝으로 만져보니까 표면에 미세한 굴곡이 느껴지더라... 아무래도 작가가 한권 한권 일일이 직접 사인한 진짜 친필사인본이 맞는 것 같고... 이러면 좀... 대박인 듯... 양장본도 한정수량으로 특별히 제작했다고 하니까 차별성도 확실하고... 이전 사인들과 다르게 이번에는 귀여운 새 그림을 추가로 넣었는데 아마도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공달'이라는 이름의 앵무새를 표현한 것 같다.



심지어 그림실력도 예사롭지가 않다. 아뭏든 나는 이 책에 작가의 손길이 직접 닿았다고 생각하니까 읽기도 전에 살짝 감동부터 먼저 받았다.


이 책은 신국판보다는 약간 작지만 그래도 요즘 나오는 책 치고는 비교적 큰 사이즈의 판형에 활자와 여백을 키우는 식의 꼼수 같은거 없이 정석적인 인쇄방식으로 약 520페이지를 꽉 채운 분량이라 간만에 장편다운 장편을 대하는 느낌을 준다. 자고로 이 정도는 돼야 장편소설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작가 정유정은 1966년생으로 어느덧 50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젊은 작가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강했었는데 이제는 여류작가들 중에 최고참 언니로서 관록을 보여주는 위치에 서 있는 것 같다. 세월이 이렇게나 빨리 흐르는가 싶어 새삼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참...


이번 신작의 소개란을 보면 무슨 '욕망 3부작' 두번째 이야기 같은 문구가 보이는데 '악의 3부작'도 그렇지만 솔직히 나는 이런 타이틀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작가가 실제로 처음부터 의도했다기 보다는 출판사 측에서 마케팅의 일환으로 밀고 있는 느낌이 강한데, 자의든 타의든 이런 것들은 작가가 차기작을 구상하는데 있어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는 악의 3부작이 이미 끝났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무시무시한 악에 관한 또다른 이야기는 더 이상 볼 수 없는건가 싶은 생각도 들기 때문에 어쨌든 이런 타이틀로 인해서 작가의 자유의지가 구속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사실 지금까지 나온 정유정의 작품들은 각각의 개성이 다 다르고 소재와 주제 역시 독립적이고 독창적이라 무슨 무슨 3부작 이런 식으로 묶는다는 것 자체가 좀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전작인 '완전한 행복'만 하더라도 욕망 3부작의 첫번째로 분류하고 있는데 난 이걸 악의 3부작에 포함시켜 4부작의 네번째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유정 작품들은 3부작이니 뭐니 하는 계보 따위는 하등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욕망 두번째 작품이니까 첫번째를 먼저 읽고 읽어야 하나 하는 바보같은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 본작 '영원한 천국'도 욕망에 관한 이야기라고 열심히 소개하고는 있지만 내가 직접 읽어본 바로는 정작 이 작품은 욕망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



정유정의 작품들에는 대부분 판타지적인 요소가 들어간다는 특징이 있다. 작가의 상상력이 자유롭고 또 뛰어나서 그럴 수도 있겠는데 희한하게도 읽다보면 이게 판타지 소설이라는 생각이 잘 안든다. 인물들의 캐릭터 구축력이나 대사, 상황묘사들에서 워낙 리얼리티가 강하기 때문에 판타지 설정이 분명히 있음에도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느낌이 훨씬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거기에 치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한 디테일도 뛰어난 편인데 만약 자료조사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은 압도적인 필력으로 뻔뻔하게 밀어붙여서 아예 다른 생각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정유정 작가의 글에서는 섬세함도 물론 있지만 전체적으로 남성 작가에게서도 쉽게 보기 힘들 정도의 강한 힘이 느껴진다. 만약 작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글만 읽는다면 남자가 썼다고 착각할 확률이 높다. 나같은 경우는 '7년의 밤'으로 이 작가를 처음 접했는데 당시 나는 그 책 읽으면서 진짜로 여류작가가 쓴게 맞는지 중간에 작가의 사진을 몇번이나 다시 확인하고 그랬었다. 이 작품도 처음 사랑에 빠지는 남녀의 섬세한 감정과 함께 정말 아름답고 격정적인 사랑을 묘사하는 부분이 많이 나오지만, 말랑말랑하면서도 섬세한 여성스러운 시각보다는 묵직하고 속깊은 남성적 시각에서 그려내는 느낌이 훨씬 더 강하다. 


이 작품은 그동안 정유정 작가가 보여준 여러가지 특징들이 총집약된 결정체라는 생각이 든다. 판타지 설정을 통한 기발한 상상력은 이제는 아예 가상현실이라는 SF적인 요소로까지 확장되었고 거기에 특유의 어둡고 기구한 운명을 살아가는 개성있는 캐릭터들...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서술 테크닉과 실감나는 생활밀착형 대사들에 드라마틱한 상황설정들... 기교와 함께 절제미도 놓치지 않는 고급스런 문장들에 뭔가 엄청난 대작을 읽고있는 듯한 큰 스케일 등... 지금껏 작가로서 다져온 온갖 스킬들을 아낌없이 담아 화려하고 성대하게 내놓은 느낌이다.



정유정은 프로다운 현란한 기교도 돋보이지만 동급 작가들에 비해 어휘를 구사하는 폭도 월등히 넓다. 특히 작가가 등장인물들의 과거사를 빠르게 요약 기술하면서 캐릭터를 동시에 설명해주는 부분은 이게 영화로 치면 흔히 몽타주씬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될텐데,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에 리듬감과 완급조절까지 완벽해서 감정이입과 동시에 이야기 속으로 깊숙하게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라 늘 그렇지만 정말 경이롭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정유정의 작품들은 대부분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있어서 유머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와중에 가끔씩 튀어나오는 정유정식 유머감각도 매력이 넘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며 줄기차게 도전은 했지만 문제는 어머니가 너무 많았다는 식의 표현을 보노라면 노련한 작가의 관록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가 있다. 나중에 어머니를 만드는 일에 휘말린 건 아닐까 하면서 다시 한번 써먹는 센스도 기가 막힌다.



다만 그동안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았던 리얼 그 자체의 찰진 대사들이 이 작품에서는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고 오히려 어색한 문어체가 더러 보인다는 점은 좀 의외였는데 이를테면 '한기준일세', '오느라 고생했네' 같은 팀장의 대사는 실생활에서는 거의 접하기 힘든 화법이다.



아마도 이 부분은 가상세계를 다루고있는 작품의 설정상 현실에 비해 살짝 이질적인 느낌을 내기 위해 작가가 일부러 이런 화법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전작들 중에 '진이, 지니'와 은근히 결이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소재와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분리한 초현실적 또는 과학적 접근법을 통해 그 속에서 삶과 사랑에 대한 가슴뭉클한 스토리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유독 생각이 많이 나더라. 


그리고 굉장히 복잡한 플롯과 구성으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고있다는 면에서는 또 다른 작품도 떠올랐는데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이란 영화다. '꿈 속의 꿈'이라는 다중 플롯을 구사한 작품인데, 정유정도 이 작품에서 '가상세계 속의 가상세계'라는 다층구조로 복잡한 구성을 꾀하면서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겨두고 있다. 그래서 읽다보면 대부분 명료한 서사를 보여주었던 그녀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뭔가 앞뒤가 안맞는 부분도 군데군데 보이면서 혼란스럽다는 인상도 받게 만든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가상세계인지... 도입부에 공달의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의뢰건은 뒤에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그냥 해상을 불러들이기 위한 핑계였는지... 경주와 동생, 그리고 해상과 제이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재회의 에피소드가 나올 것이라 기대했건만) 초반부에 비중있게 다룬 것에 비해 너무 흐지부지 처리된 것은 아닌지...  후반부 경주는 이미 롤라에 접속해있는 상태라 유심이 필요없을텐데 칼잡이와 유심을 둘러싼 공방전을 왜 하는 것인지... 등등 다 읽고나서도 이해가 안되는 사소한 부분들 때문에 영 개운하지가 않은데, 어쩌면 작가 자신도 때때로 본인이 펼쳐놓은 복잡한 다중 플롯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반부 해상과 제이, 그리고 후반부 경주와 지은의 러브스토리는 가상현실을 둘러싼 설정상의 오류 같은 자잘한 단점들을 모조리 덮고도 남을 만큼 위력적으로 아름다워서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을 읽는 즐거움을 만끽했던 것 같다. 



매번 그랬듯이 정유정 특유의 절절한 문장들은 가슴에 날아와서 사정없이 꽂힌다. 물론 살짝 오글거리는 부분도 있었다. 남녀가 서로의 공통분모를 발견하면서 사랑에 빠지는거야 현실에서도 흔한 일이겠지만 '람슈타인'은 아무래도 좀 너무 나간 듯... 



각자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한국인 남녀가 이집트에서 우연히 만나 람슈타인으로 동질감을 느낀다? 이건 마치 내가 멕시코에 놀러갔다가 '루이스 미겔'을 좋아하는 아름다운 한국 여성과 만날 확률보다 더 희박할 것 같은데... 아뭏든 정유정 작가는 알고봤더니 락 음악 매니아였던 걸로...


이번 작품 '영원한 천국'은 제목처럼 죽지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싶어하는 인간들의 근원적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거창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풀어놓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져볼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경험은 결국 '사랑'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상대를 위해 목숨까지 버려도 아깝지않은 사랑... 비록 곧 꺼질 불꽃과 같은 찰나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그냥 그렇게 느꼈다.


정유정은 역시 믿고 읽는 작가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한 시간이었고, 행복했고... 이변이 없는 한 다음 작품도 당연히 예약구매할 생각이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z39wNCFtbpg&t=6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571195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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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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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정유정의 신작을 예약구매하려고 둘러보던 차에 마침 이 책도 예약구매 이벤트와 함께 화제가 되고있는 듯 해서 겸사겸사 같이 구매를 했는데 사실 김애란 작가는 내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말랑말랑한 연애소설이나 청소년 성장소설류는 별로 취향이 아니라서 표지디자인과 제목만으로도 대충 감이 오는 책들은 대부분 거르는 경향이 있다보니 이 작가 역시 일찌감치 나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 같다. 


영화계와 마찬가지로 출판계에도 과장광고와 선동적인 호들갑으로 초반끗발을 노리는 마케팅이 만연한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젊은 거장의 13년만의 신작'이라는 떠들썩한 홍보문구를 앞세운 이 책 역시 빛좋은 개살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작가의 화려한 수상이력이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와 많은 독자들의 애정어린 기대감에서 어느 정도의 신뢰가 생겼고 거기에 개인적으로 늦은 나이에 유튜브 활동을 하면서 독서의 스펙트럼을 넓혀보려는 나름의 유연함이 더해져서 결과적으로 예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작가 김애란은 1980생으로 현재 40대 중반이니 작가로서는 가장 원숙미를 발휘할 시기로 보인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작가도 주로 단편소설들을 많이 써왔는데 그중에 무려 10편 이상의 작품들이 메이저 문학상 수상은 물론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바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작가가 이렇게 화려한 스펙을 자랑할 동안 아무것도 몰랐으니 그동안 나의 독서취향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또한번 깨닫게 되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어쨌든 장편소설은 이번이 두번째이고 2011년에 발표된 첫번째 장편인 '두근두근 내 인생'은 강동원 주연의 영화로도 나왔었는데 역시나 지레짐작으로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고 판단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이번 예약구매 특전은 작가의 친필사인본에 감사인사를 담은 엽서 정도이고 그마저도 인쇄형식이라 그다지 가치가 높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열혈팬들에겐 나름 의미가 있을 듯 싶다. 책을 받아보니 약간 변형된 4x6판 정도의 작은 사이즈에 약 230페이지 분량으로 예상에 비해 훨씬 더 소박한 느낌이다. 



활자 크기나 페이지의 여백을 고려하면 사실상 중편소설에 가까워서 16,000원이라는 책값이 무척이나 불편해지는데 어차피 한두번 겪는 일도 아닌지라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만약 예전 책들의 표준 판형이었던 신국판 사이즈로 찍었다면 150페이지도 넘기기 힘들 분량을 온갖 꼼수를 써서 억지로 늘리고 늘려서 그것도 고작 200페이지를 넘겨놓고 장편소설이라 우기고있는 꼴이니 이제는 단편, 중편, 장편의 기준조차 잘 모르겠다. 


본작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이렇듯 단편이 주종목으로 보이는 작가의 장편 흉내를 내는 중편소설에 딱 봐도 청소년 성장소설처럼 보이는 분위기 등 내가 별로 선호하지 않는 요소들이 허들처럼 자리잡고 있어서 애초에 기대를 접고 그냥 정유정의 신작을 기다리는 동안 워밍업 삼아 가볍게 접근하자는 생각으로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일단 이 책도 다 읽고 난 느낌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워낙 많이 쓰고 요즘에는 막 아무데나 갖다붙이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작품 만큼은 나도 모르게 한마디로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그냥 미쳤다...


어떻게 오직 글만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단번에 홀리게 하는 재주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난번 최은영의 '밝은 밤' 리뷰 때 지적했던 것처럼 이 작품도 단편을 주로 썼던 작가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장편답지 않은 호흡이 느껴지기는 한다. 단편처럼 각각의 시퀀스에 여백이 많다는 특징도 동일하다. 하지만 이 김애란의 글에서는 이것들이 전혀 단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전혀... 


이 작품도 역시나 이렇다할 중심서사 없이 자잘한 상황들이 단편적으로 이어져있는 형태라 기승전결이 불분명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다 읽고나서도 메인 줄거리나 주제가 무엇인지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묘한 리듬감이 기승전결을 대체하는 역할을 충분히 해주고 있기 때문에 서사에 대한 아쉬움이 딱히 느껴지지 않는다. 어떻게보면 작품 곳곳에 설사 미흡한 부분이 있다 치더라도 작가가 압도적인 필력으로 무지막지하게 찍어눌러서 그냥 닥치고 읽게 만드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리뷰했던 콜린 후버처럼 이 작가도 본인 스스로 글을 잘 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국어 선생님이 자유롭게 단어를 연결해서 지어보라고 한 뒤 어떤 건 왜 시가 되고 어떤 건 그렇지 않은지 나중에 얘기해보자고 하는 장면이라든지 폭력이니 상처니 하는 얘기 너무 뻔하다는 부분 등 뭔가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읽다보면 은연 중에 그런 자신감에서 스며나오는 기운들이 얼핏얼핏 감지가 된다.  



내가 국내 현역 중견작가들 중에서 탑클래스 필력으로 꼽는 정유정의 경우 지난번 '완전한 행복' 리뷰 때는 경이롭다고까지 표현했을 정도였는데, 이 김애란도 감히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수준이라 생각되고 어떤 면에서는 더 뛰어난 부분도 보일 정도니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특히 이 작가의 문장들은 너무나 정교해서 구석구석 모든 부분 하나하나 천천히 곱씹으며 읽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이 작품은 3명의 주인공들이 모두 고등학생이라 크게 보면 청소년 성장드라마의 테두리에 들어가는 건 맞다. 하지만 작가의 내공이 비범한 만큼 단 한 부분도 성장과 치유에 관한 식상한 코드가 보이지 않아서 좋았고 여류작가 특유의 페미니즘적 시각이 보이지 않는 점도 좋았다. 세 주인공 이름이 지우, 소리, 채운인데 나는 초반부가 넘어갈 때까지 지우의 경우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헷갈려서 답답했을 정도였다. 작가가 남녀의 갈등에 관한 문제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이들의 성별이 무엇이든 작품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도 하다.


한편 김애란 작가는 '이야기가 끝나기를 바라며, 아니 어떤 식으로든 끝나지 않기를 원하며', '시작되는 동시에 끝나는 기분', '얼마나 같고 또 다를지', '돈을 미워하는지 좋아하는지', '꼭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라면서', '누군가를 잡은 손과 놓친 손이 같을 수 있다' 등등 문장에서 단어의 대구를 이루는 형식을 즐겨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작품에서는 '시작과 끝'에 관한 메세지가 상당히 두드러지고 특히 이야기의 끝이 있어서 좋다는 지우와 반대로 시작이 있어 좋다는 소리의 대화는 각자 다른 결말로 대구를 장식하게 되는 의미심장한 장면이기도 하다. 또한 제목으로도 쓰여진 '거짓말과 진실'에 관한 문답 역시 수미쌍관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김래원 주연의 '해바라기' 같은 영화만 봐도 초반부에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 울지 않겠다, 싸우지 않겠다는 3가지 약속이 결국 마지막에 가서 모두 깨어지는 서사구조로 이루어져 있듯이 이러한 수미쌍관식 서사는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구성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아주 교묘하면서도 정교하게 짜여져있어 차원이 다른 작가의 내공을 엿볼 수가 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시작과 끝'이나 '거짓과 진실'이라는 화두에 너무 집착해서 해석하려 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하고싶은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각자 다른 포인트에서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특정 장면이 하나라도 의미있게 와닿았다면 그냥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나같은 경우는 올해 암으로 어머니를 여의었고 마침 큰딸이 웹툰을 공부하고 있으면서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이 깊은 상황이라 마치 내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구태의연한 말을 의기양양하게 하고 삶에서 진부한 교훈을 추출해 남들에게 설파하기를 즐기지만 본인은 그 교훈대로 살지 않는 사람', '빈말 못하고 솔직하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하지만 실은 그게 어떤 무능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 '사람들 가슴속에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때로 가장 좋은 구원은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구하는 것', '이제 누구의 자식도 되지 마. 가족과 꼭 잘 지내지 않아도 돼', '너는 너의 삶을 살아. 나도 그럴게'... 



때로는 송곳처럼 가슴을 후벼파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읽는 사람을 움찔하게 만드는 문장들이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려든다. 


비록 짧은 분량이지만 그안에 꽉 들어찬 내용들이 마치 에스프레소처럼 농축되어있는 느낌이라 나는 천천히 음미하다보니까 다 읽는데 5시간도 더 넘게 걸렸던 것 같다. 후반부에는 눈물도 제법 흘렸고...


나는 감히 이 작품을 지금 이 시대 한국문학의 정점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보물같은 작가를 알게되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고 또 영광스러운 시간이었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J4KVGhXGpYQ&t=4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56044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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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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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은 2021년에 출간되어 그 해 국내 모든 온라인 서점에서 '올해의 책' 또는 '올해의 소설'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평론가나 일반독자 대부분에게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고 지금도 꾸준히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은영은 1984년생으로 이제 불혹의 나이로 접어드는데 서른 즈음인 2013년에 등단한 이후 약 10년간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하면서 상당히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전도유망한 기대주라 할 수 있겠다. 데뷔작인 '쇼코의 미소' 때부터 이미 그녀의 골수팬이 된 독자들을 비롯하여 두터운 팬층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작 '밝은 밤'은 그동안 중단편소설들만 써오던 그녀가 처음으로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전작들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녀가 어떤 스타일로 글을 쓰는지 전혀 모르는 백지상태라 소개팅 같은 첫만남에서 미지의 낯선 상대를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는 듯한 묘한 설렘도 느꼈던 것 같다.


일단 내가 책을 읽으면서 처음 받았던 인상은 글이 참 담백하고 순수하다는 점이었다. 문장에는 기교가 거의 없는 편이고 모호한 표현을 쓰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작가다운 깊은 사유가 묻어나오는 감각적인 문장들이 곧곧에 포진해있어 필력이 탄탄하다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다만 작가가 나름 힘을 준 문장들이 그리 노련하다거나 세련된 느낌까지는 아니어서 평단의 찬사를 받는 인기작가라는 점을 고려한 기대감에는 살짝 못미친다는 느낌도 함께 받았던 것 같다.



초반 몇페이지를 읽다보면 마주치게 되는 이런 글은 확실히 읽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한 기운으로 감싸며 한참동안 문장을 곱씹어보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한다. 마음이란 것이 꺼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따뜻한 물로 씻고 햇볕에 잘 말려서 좋은 향기가 나는 상태로 가슴에 다시 넣고싶다는 이런 표현은 물론 소설 속 주인공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용도로 쓰여진 문장이긴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보다는 평소 한번씩 해왔던 작가 자신의 개인적 상념들이 자연스럽게 투영된 것이라고 보는 쪽이다. 왜냐하면 이런 한없이 착하고 따뜻한 생각은 이혼과 함께 삶에 찌들려 다소 냉소적인 경향을 보이는 지연의 캐릭터와 약간 상충되면서 그리 잘 붙지가 않는 표현이라 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이 최은영이라는 작가 본인의 성격과 성향이 실제로 굉장히 착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보게 되었다.


책을 계속 읽다보니 이러한 나의 추측은 점점 확신으로 바뀔 수 밖에 없었는데,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너무 착하고 따뜻하다. 그래서 오히려 독이 되는 부분이 있다. 솔직히 나는 중간중간 늘어지는 느낌에 살짝 지루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는데 스토리가 큰 변곡점 없이 너무나 평탄하게만 흘러간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비록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의 굴곡진 삶이 액자 형식으로 끼어들어 집중도를 올려주는 역할을 어느 정도 해주긴 하지만 그것 역시 이미 지난 얘기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담담하게 풀어내니까 아주 드라마틱하게 와닿지는 않았던 것 같다. 초반부 지연이 할머니와 조우하는 시점부터 대다수의 순수문학이 그러하듯 나는 혹시나 이 작품도 결국 서로의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리는 내용이 아닐까 했는데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너무나 여자 여자한 느낌이 강하다. 30대 여자 주인공과 그녀의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까지 4대를 아우르는 여성들의 인생을 다루면서 한국 특유의 가부장 문화를 꼬집는 부분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분량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새비 아저씨를 제외하면 모조리 함량미달의 인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하나같이 우리나라 여성들이 질색하는 남자들 뿐이다.



밖에서 다른 사람과 정치얘기나 축구얘기에 열올릴 줄이나 알지 정작 아내와 자식은 나몰라라 하는 한량 그 자체인 남자라는 존재의 비루한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남자가 잘못했음에도 여자도 잘한 건 없다며 오히려 남자를 옹호하는 그 당시의 보편적 정서도 빠짐없이 끼워넣는다. 이 책은 작가를 모르는 상태로 글만 읽어도 여자가 쓴 글임을 대번에 알 수 있을 만큼 여성성이 강한 것이다. 물론 '82년생 김지영' 같은 노골적인 페미니즘 소설들과 비교하기에는 그 수위가 한참 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남성보다는 여성들의 공감대에 어필하는 부분이 훨씬 많다는 점은 분명하다.


아뭏든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나름 보여주고 싶은 것은 많았던 것 같은데 그것들이 너무 나열식으로만 펼쳐져 있어서 장편소설이라는 긴 호흡의 형식에 걸맞는 기승전결의 견고한 짜임새를 보여주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중단편만 써왔던 작가라 그럴 지도 모르겠다. 장편의 큰 틀 안에서 각각의 에피소드와 분량을 적절히 안배해서 컨트롤하는 기술이 아직은 좀 부족한 듯 하다. 이혼이라는 상처를 안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주인공과 전쟁통의 역경을 억척스럽게 헤쳐나왔던 할머니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우정, 거기에 천문관측이라는 주인공의 직업과 연관해서 거대한 우주에서 본다면 찰나에 불과한 별 의미없는 인간의 삶을 환기시키는 구절도 주기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엮여서 하나의 큰 줄기를 타고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이야가가 별다른 인과관계 없이 흩어져 있다보니 다 읽고나서도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바로 와닿지가 않는다.


특히 이 작품은 캐릭터 구축력이 많이 아쉬운데 주인공이자 화자인 지연은 가장 중요한 캐릭터임에도 정보가 너무 빈약해서 감정이입이 힘들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했다고만 간단히 언급하고 있어 그녀가 지금 어느 정도로 마음의 상처가 있는 것인지 또한 현재의 심리상태가 어떤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최소한 전남편과의 이혼과정에 대한 디테일한 설정이나 전사는 넣었어야 했다. 나는 솔직히 지연이 어떤 사람인지 책을 다 읽고나서도 잘 모르겠다. 


심지어 죽은 언니인 정연에 대해서도 엄마와의 가장 큰 갈등원인임에도 설명이 전혀 없다. 정연의 죽음에 어떤 스토리가 있었는지 모르니 엄마와의 갈등에 공감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후반부 결혼식 전날 모녀의 언쟁은 거의 클라이막스(물론 이 장면이 후반부에 배치되어 클라이막스라고 한 것이지 이 작품은 기승전결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내용적으로는 전혀 클라이막스라 할 만한 장면은 아니다)에 해당되는 중요한 장면인데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둘이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건 치명적일 정도다. 



연을 끊고 살다시피한 엄마와 할머니 사이의 갈등 또한 설명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다. 일부러 여백을 많이 둬서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버리는 단편이나 중편은 캐릭터의 전사를 생략해도 상관없지만 감정이입을 통해 긴 호흡으로 끌고가는 장편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



하지만 영화든 소설이든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소재에 드라마틱한 전개보다는 한없이 평범하고 별거없는 자잘한 일상사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보게 만드는 이런 류의 이야기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당연히 이 책도 그런 쪽으로 어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잔잔하고 따뜻한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나 여성분들이라면 더욱더 감동적인 여운을 음미하게 만드는 작품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다.


리뷰를 하다보니 이상하게 단점만 말한 것 같은데 원래부터 나는 남들이 모두 좋다고 하니까 그냥 따라서 좋다고 하는 그런 성격이 못된다. 결론은 너무나 따뜻하고 착하고 좋은 작품이지만 약간은 심심하고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젊은이들이 읽는다면 부모와 친구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새삼 안부전화라도 걸고 싶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같은 경우는 당연하겠지만 읽는 내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돌아가시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분명 더 자주 찾아뵙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을 것 같은데... 뒤늦게 마음이 쓰라린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B8kC3_XoxfU&t=277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520780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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