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
S. K. 바넷 지음, 김효정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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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출판사가 '인플루엔셜'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신생업체인데, 최근에 상당히 참신하면서도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영화 예고편같은 경우에도 최근에는 기존의 하이라이트 영상편집 방식에서 벗어나 무삭제 예고편이라 해서 일부 구간을 편집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을 쓰기도 하는데, 이 출판사도 그러한 무삭제 예고편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초반 약 1/3 정도에 해당하는 분량만 떼내어 티저북이라는 이름으로 별도 제작해서 신청자들에게 무료배포하는 형식으로 작품 홍보를 하는 식이다. 일단 초중반부까지만 읽어보고 뒷부분이 궁금하다면 본책을 사보라는 그런 전략...



실제로 네이버에서 이 책의 리뷰를 검색하면 티저북에 대한 글들이 많다. 어차피 요즘 포털사이트의 리뷰들이야 거의 대부분 홍보 아니면 광고인데, 이 책의 경우는 정식 출판이 되기도 전에 티저북으로 아예 미리 홍보를 한 셈이다. 출판사의 이런 새로운 홍보전략이 과연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했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꽤 성공적인 마케팅이라 봐야겠다.


작가 'S.K.바넷'은 1954년생으로 현재 60대 중반이고 소개란에도 나와있듯이 필명인데, 찾아보니 본명이 '제임스 시겔'이다. 제임스 시겔은 예전에 '탈선'이란 작품을 썼던 작가다. 원제가 '디레일드(Derailed)'인데... 2003년도에 발표되었던 소설이고 우리나라에는 2006년에 번역소개되었다. 2005년에는 클라이브 오웬과 제니퍼 애니스톤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이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영화의 각본에도 직접 참여했었다.



당시에 영화와 책을 모두 다 봤기때문에 대충 어떤 스타일인지 기억나는데, 일단 이 작가는 스토리를 정말 재미있게 끌고가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작품도 다른건 몰라도 재미면에서는 충분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런데 굳이 왜 필명을 썼을까 하는 의문은 들었다. 이미 알려진 작가가 갑자기 필명을 쓰는 경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주로 기존의 스타일을 벗어난 시도를 하고싶을 때 많이들 쓴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J.K.롤링'도 범죄 스릴러 장르의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제임스 시겔은 2000년대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몇권의 책을 발표했지만, 앞서 언급한 디레일드 한 작품 이외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주지사나 대통령 선거운동 등 주로 정치 관련 일에 몸담아오다가 실로 오랜만에 다시 소설가로 컴백한 작품이 바로 이 '세이프'인데, 작가로서 이미 잊혀져간 이름은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보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책을 읽어보니 예전 '탈선'때와 비교하면 글쓰는 스타일이 좀 달라졌다. 비교적 단순하고 쉬운 글쓰기로 스토리와 반전에 승부를 거는 스타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작품은 문장들을 나열하는 과정에서 어지러울 정도로 기교가 많이 들어가 있다. 이런 것도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등장인물의 현재 생각과 과거 기억들이 별다른 구분없이 뒤섞이며 서술되는 형식이라 평범한 장면도 뭔가 감각적인 느낌을 주는 듯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예를들어 여기 '사진을 갖고 있어요'라는 말은 이 장면에서 긴장감을 폭발시키는 중요한 대사인데, 이런 식으로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계속 환청처럼 맴도는 듯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식의 대사와 생각이 뒤섞이는 현란하고 감각적인 서술법을 적극 활용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커버하는 것은 확실히 영리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술방식의 기교에만 너무 신경을 쓴 탓인지 스릴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빌런'에 대한 캐릭터 구축이 부실해서 절대악을 대면한다는 당위성과 공포감도 부족하고 감정이입이 힘들다보니 후반부의 긴장감은 아무래도 좀 반감되는 느낌이다.


사실 문장의 문학적인 감성이나 기술(記述)적인 테크닉, 그리고 서사를 쌓아가는 방법적인 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본다면, 작가의 필력이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확실히 자신의 작품으로 영화 각본까지 참여해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 작품도 마치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컴퓨터 해킹으로 중요한 단서를 손쉽게 풀어간다든지 중간중간 뿌려놓은 떡밥들을 막판에 회수하는 방식 등 후반부는 거의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화의 공식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도 이미 영화사에서 판권을 샀다고 하니까...


'유괴'라는 어쩌면 너무나 식상한 소재임에도 새롭고 재미있는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솜씨는 역시나 나쁘지 않다. 나중에 영화로 나온다고해도 킬링타임용에 걸맞는 재미는 충분히 보장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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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아웃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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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작으로 출간된지 무려 25년이 지난 옛날 작품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국내에서 재출간되었다. 요즘 우리나라 출판계에서는 철지난 일본소설 찾아내서 재출간하는게 유행인가보다. 전에 리뷰했던 '소문'이나 '요리코를 위해'도 모두 2~30년전 작품들이었다.


난 이 작품을 이미 오래전에 알고있었기 때문에 책을 구매한지도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이번 재출간 소식으로 드디어 그동안 책장에서 잠자고있던 2000년판 구판을 꺼내어 읽게되었다. 이 작품이 95년 당시 일본에서 워낙 대히트를 기록한 베스트셀러여서 5년 뒤인 2000년에 오다 유지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개봉을 했고 그 때 영화 개봉에 발맞춰서 책도 출간이 되었던 거다. 영화는 못봤지만 '일본판 다이 하드'라는 광고문구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작품은 영화 '다이 하드'의 플롯을 그대로 따라간다. 다이 하드는 1편이 1988년에, 2편은 90년에 나왔던 영화다. 중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 어떤 지점을 장악하고 인질들이 발생하며 우연히 홀로 고립된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며 싸워나간다는 플롯인데, 이 책의 내용도 장소의 차이만 있을 뿐 거의 흡사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 다이 하드 시리즈가 특별한 점은 악당들과 주인공의 독특한 캐릭터 묘사에 있다. 특히 주인공에게 밀리지않을 정도로 냉철하고 똑똑한 악당 캐릭터는 이후 수많은 액션영화들의 기준이 되었을 정도로 정말 혁신적이었다. 이 책은 초반부 테러의 장소가 되는 배경설명과 주인공 무리들의 캐릭터 빌드업, 그리고 테러리스트들의 범죄진행을 교차편집 형식으로 보여준다든지, 주인공과 대등한 머리싸움을 할 정도로 똑똑한 악당들의 묘사와 테러를 막기위해 혼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죽도록 개고생하는 주인공 등, 다이 하드가 새롭게 만들어낸 액션스릴러의 공식들을 대놓고 활용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흥미로운 서브캐릭터와 반전을 위한 요소들이 추가되어 내용을 좀더 풍성하게 만들고있긴 하지만, 이 작가가 다이 하드라는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거기에 93년에 나왔던 '클리프행어'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75년작 '아이거북벽'에서 참고한 듯한 흔적도 보이는데, 아뭏든 다이 하드라는 기본 뼈대에 여러 산악 액션영화들을 버무려서 그럴듯한 일본식 산악 액션스릴러로 재창조한 작품이 바로 이 '화이트아웃'이다.



작가의 필력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데, 다른 장점들이 부족한 부분을 많이 커버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문장에서 고급스러운 테크닉과 여유가 보이지않고, 투박하고 단순한 표현들과 설명하기에 급급한 듯한 묘사 등 노련함이 부족하다. 특히 내가 일본작가들의 글에서 가장 싫어하는 '지나친 디테일'이 많이 보인다. 대사와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데 혹시나 독자들이 모를까봐 지금 이 인물의 마음상태가 어떤지 또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하나하나 일일이 자세하게 설명해주려하는 일본 특유의 고질적인 강박증같은 거다. 그래서 중반부에는 남녀 주인공들의 지나친 심리묘사와 인물들의 독백인지 작가의 독백인지 분간이 안가는 시시콜콜한 부연설명때문에 진도가 늘어져서 좀 짜증나기도 한다.



하지만 충분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한 댐과 발전소 시설의 구조라든지 주변 산들과 날씨 등 전체적인 배경묘사가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그려져서 글을 읽고 있음에도 영상으로 보는 듯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점은 아주 훌륭하다. 생소한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이런 액션스릴러에서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내용전개에 필요한 부분 이외의 군더더기 장면들이 별로 없어서 비교적 스피디하게 진행되며 쓸데없는 감정과잉과 신파같은 요소도 없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처리는 마치 '쇼생크 탈출'의 엔딩이 연상될 정도로 깔끔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방법으로 마무리한 점도 정말 좋다. 아마 우리나라였으면 틀림없이 울고불고 눈물 짜내는 씬으로 처리했을텐데...


작품에 등장하는 오쿠토와댐은 아무래도 작가가 만들어낸 설정인 것 같다. 실제로 검색이 되지않는 명칭인데 주변지역과 산이름을 참고하면 아마도 예전에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나가노와 후지산 사이에 있는 미나미알프스 지역의 험준한 산악지대가 주요 배경무대인 것 같다.



이 책은 초반부 악당들이 댐을 장악하고 여주인공이 인질로 잡히는 부분부터 대충 스토리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해서, 이거 계속 읽어야하나 하고 잠시 망설이게 되는 부분도 있는데, 중반 이후 고정관념을 벗어난 반전 형식의 전개와 함께 휘몰아치는 마지막 클라이막스 액션 시퀀스 등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요소들이 확실하게 읽는 재미를 주고있다.


비록 헐리우드 영화의 설정을 빌려오긴 했지만, 이런 다양한 소재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일본작가들이 많다는 것은 확실히 부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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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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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이벤트로 작가의 친필 사인본을 준다고 했고, 선착순 500부 한정이었나 해서 기대도 안했는데 받고보니 사인본이었다. 생각보다 엄청 빨리 주문했나보다. 별것 아닐수도 있겠지만 한사람의 팬으로서 기분이 좋은건 어쩔수 없다.


요 네스뵈가 오랜만에 내놓은 스탠드얼론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또 믿는 작가이지만, 사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최근작 몇편은 아직도 구매를 하지 않았다. 갑자기 번역가가 바뀌어서 나왔던 '박쥐'를 읽었을 때 영 느낌이 별로여서 그 후로는 노진선씨 번역이 아니면 아무래도 구입을 좀 망설이게 된 것이 그 이유다. 그래도 항상 기본 이상은 하는 작가니까 기회되면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하고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이 마침 내가 선호하는 독립된 작품에다가 번역가도 믿음직한 분이라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구매했던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김승욱씨는 예전에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익숙해진 이름인데, 최근 핫해진 '듄' 시리즈도 이 분 번역이다. 장르소설 뿐만 아니라 여러 유명 인문학, 순수문학 등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고 깊이와 무게감이 느껴지는 스타일이어서 이제까지 이 분 번역으로 읽었던 책들은 대부분 만족스러웠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본작 킹덤은 영문제목도 'The Kingdom'이고 작년 2020년에 발표된 최신작이다. 요 네스뵈는 1960년생이니까 우리나이로는 환갑이 되는 시점에 발표한 작품이 되겠다.


일단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느낌부터 먼저 말하자면, 한마디로 그냥 끝내준다!



요 네스뵈의 필력이야 범죄스릴러 장르에서는 당연히 최상급에 해당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놀랍게도 그 이상의 한차원 더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번역가의 내공과 스타일에 따른 미묘한 차이일수도 있겠지만, 이제까지 익숙하게 알고있던 요 네스뵈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의 작품들에서는 범죄스릴러 장르라는 큰 틀 안에서 등장인물들의 거의 모든 대사와 행동들이 마지막 결말을 향해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역할로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각각의 장면들이 그 자체만으로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순수문학에 가까운 훨씬 풍성한 디테일과 감정선을 담아내고 있다.


복잡미묘한 캐릭터의 심리를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각도로 보여주기 때문에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와 몰입도가 증가해서 그냥 저절로 감정이입이 된다. 문장 하나하나가 현란하면서도 또 너무 튀지는 않게 잘 억제된 노련한 기교가 느껴지고, 대사들 또한 군데군데 적절하게 수위조절된 유머와 함께 너무나 고급스럽다. 딱 필요한 만큼만 보여주고 절묘한 타이밍에 끊어주는 장면전환 또한 일품이다.


사건해결과 범인찾기에 몰두하는 스토리가 아니다보니 그럴수도 있겠지만, 글에서 전에 없던 여유와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때로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로맨스 소설을 읽고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인물들간의 미묘하고 섬세한 심리묘사를 다층적으로 겹겹이 쌓아간다. 아니 이 양반이 어디 가서 고급문학수업 과정을 별도로 마스터했나 싶을 정도로 분명히 한 단계 레벨업이 된 글솜씨이고 정말 글 자체가 예술이다. 60대의 나이로 접어든 기념으로 스스로 각성이라도 한 것인지... 특히 로위가 섀넌에게 속에 품었던 말을 고백하는 장면 같은 묘사는 정말 기가 막힌다.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는 배경이 주로 오슬로와 베르겐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전부 생소한 지명들만 나와서 또 구글지도를 찾아봤다. 하지만 부달호수니 후켄이니 하는 지역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고, 노토덴이라는 도시만 겨우 나오는데 아마도 그쪽 근처가 주무대인 것 같다.



북유럽의 낯선 지역만큼이나 결코 흔하게 접할 수 없는 개성있는 인물들의 기이하면서도 운명적인 드라마가 계속해서 여운을 남긴다.


살인이나 잔인한 폭력 시퀀스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정적인 장면들로 채워져있음에도, 시종일관 무섭고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폭풍전야같은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요 네스뵈의 작품에서 의미없이 쓰여지는 장면은 단 한군데도 없으며 결말을 위한 복선들이 지뢰밭 수준으로 깔려있음을 잘 알고있기 때문에, 이 작품 역시 단 한문장도 허투루 넘기지않도록 집중해서 읽으려 했는데, 사실 그렇게 애쓸 필요도 없이 그냥 읽다보면 저절로 초집중 모드가 된다. 주인공 로위가 애용하는 중요한 아이템으로 씹는 담배가 자주 나오는데 대화상대나 기분에 따라 이것을 아랫입술에 끼울 때가 있고 윗입술에 끼울 때가 있다. 이것도 분명 복선 중에 하나일 것이라 예상하고 끼우는 위치가 어떤 의미일까 하면서 읽는 중간에 분석해보기도 했다. 결국엔 별 의미없었고 혼자 오버해석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이런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도 집중해서 읽게만드는 힘이 있다.


처음에는 두꺼워서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지만, 읽다보면 점점 줄어드는 분량이 아까울 정도로 계속 더 읽고 싶어지는 책... 이 책은 그런 책이었다.


요 네스뵈의 모든 작품들 중에 단순히 범죄스릴러적인 재미면에서는 아직까지도 '레오파드'나 '레드브레스트'같은 작품을 좀 더 우선순위에 놓고싶지만, 문학적인 완성도를 따진다면 단연코 이 작품 '킹덤'이 1등이다.


김승욱씨의 묵직하면서도 수준높은 번역이 큰 부분을 차지했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이제는 대적할 상대가 없는 어나더레벨의 작가로 거듭난 것 같다.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작품을 읽게되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고, 다음 작품도 하루빨리 번역되어 나오길 손꼽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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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코를 위해 (스페셜 리커버 에디션)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모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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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읽었던 '소문'처럼 여고생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이 책들이 요즘 고등학생들에게 화제가 되고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동일한 출판사에서 최근에 재출간된 책이라는 점도 재미있다. 


이 책은 소문보다 훨씬 더 오래된 무려 30년전인 1993년에 나왔던 옛날 작품이다. 국내에는 거의 20년이 지난 시점인 2012년에 처음 번역되었다가 절판되었는데, 최근 2017년에 작가가 출간된지 약 25년이 지난 이 책을 몇군데 수정한 후 일본에서 '신장판'이란 이름으로 개정판을 낸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작년인 2020년 이 신장판을 기준으로 재출간을 했고, 올해에는 스페셜 리커버 에디션이란 명목으로 표지를 또 새롭게 바꾸었다. 역시나 반전을 비롯하여 각종 광고문구가 요란하다.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는 1964년생으로 현재 50대 중반이다. 출판년도에 비해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않은 것으로 봐서 상당히 이른 나이에 작가로 데뷔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작가후기를 보니 역시나 20대 중반인 대학생때 이 작품을 썼다고 나온다. 본명은 야마다 준야(山田純也)이고 이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이름은 필명인데, 무슨무슨 '~타로' 로 끝나는 에도시대에나 유행했을 법한 고풍스런 이름에서도 옛날 정서를 좋아하는 듯한 작가의 취향이 살짝 엿보이는 부분이 있다. 


극중에서 1989년에 죽은 요리코는 17살의 고등학생으로 묘사되고 있으니 나와 비슷한 동년배에 해당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고등학생때를 떠올리며 되도록이면 그 시절의 느낌으로 읽으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오래된 작품은 당시의 교통수단이나 통신수단,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수준 등, 아무래도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만 봐도 요즘 정서로는 말도 안되는 행위이고, 미필적 고의니 무책임한 결말이니 하면서 온갖 비판이 쏟아질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고전추리소설의 정서로 읽는다면 또 그럭저럭 용납되는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실제 작가의 필명과 동일한 이름의 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1930년대를 풍미했던 엘러리 퀸이 이런 스타일로 유명했었다. 아마도 작가가 개인적으로 엘러리 퀸을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다. 작품 전반부에 사건의 개요를 알려주는 노리코 아빠의 수기가 나오고, 그 다음부터는 주인공 탐정이 등장하여 이 수기를 단서로 해서 사건의 비밀을 하나씩 역추적해나가는 구성이다. 즉, 초반에 작가가 독자들에게 퍼즐조각을 뿌리듯이 거의 모든 힌트를 알려주고, 이후에는 독자가 탐정과 함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전형적인 고전추리기법이다. 철저하게 주인공 탐정의 시점으로만 진행이 되기 때문에 탐정과 독자는 모든 정보를 공유하며 마지막까지 페어플레이를 하게되는 것이다.


확실히 고전적인 스타일을 추구한 작품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내용이 어떤 정형화된 틀 안에서 인위적으로 짜여져있는 느낌이다. 범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범행수법은 무엇이었나에 모든 촛점이 집중된 방식이고, 탐정이 만나고다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용의자에 해당되기 때문에 독자들이 수수께끼를 풀기위한 단서를 주는 용도 이상으로는 등장하지도 않고,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행동들이 단순히 기능적으로만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예전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들에서는 실컷 뜸을 들일대로 들이다가 마지막에 포와로 탐정이 굳이 모든 용의자들을 전부 불러모아서 앉혀놓고, 또 굳이 사건의 전모를 장황하게 설명한 후, 그제서야 범인을 지목하곤 했었다. 그에 비하면 이 작품은 생각보다 탐정이 진범을 밝혀내는 타이밍이 좀 빠르다(사실 장편이라기엔 중편에 가까울 정도로 분량이 짧은 점도 한몫하고있다). 예전에 나왔던 고전들보다는 확실히 군더더기없고 스피디한 진행이지만, 상대적으로 너무 퍼즐풀기에만 급급해서 여유가 없는 아쉬움이 있다. 좋은 아이디어를 노련하게 포장하는 관록이나 노련미는 확실히 부족하다.



예를들어 이런 '담배연기로 직조된 장막'이나 '찰나의 노스텔지어' 또는 '속마음을 상형문자화하는 듯한 동작'같은 문장들은 작가가 글이 밋밋하게 보이지않도록 문학적 표현을 넣으려고 애쓴 부분들이다. 그런데 군데군데 나오는 이런 표현들이 오히려 좀 과한 느낌이다. 억지로 쥐어짜낸 듯한... 마치 앳된 여고생이 성인처럼 보이려고 너무 진한 화장을 한 느낌이랄까...


이 작품은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분명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이 조금씩 보이지만, 불과 약관의 나이에 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대부분 눈감아주고 싶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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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권일영 옮김 / 모모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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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딸이 고등학생인데 최근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소설이라고 한다. 불과 한달 전에 출간된 책이라 당연히 최신작이겠거니 생각했으나, 알고보니 일본에서는 무려 20년 전인 2001년에 발표되었던 작품이고, 국내에는 2009년에 한번 번역되었다가 절판되었던 것을 올해 재출간한 것이었다. 추리소설 쪽은 늘 관심을 두는 분야라서 베스트셀러는 웬만하면 다 아는데, 이 제목은 처음 들어봤을 정도이니 당시에는 그다지 화제작이 아니었을거라 짐작한다. 이 작품이 현재 일본에서도 다시 역주행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주목받는 상황이 좀 의아하기도 하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읽다보면 그냥 요즘 나온 책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작품의 소재와 배경이 올드하다거나 구닥다리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 유명한 아이폰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해가 2007년이다. 이 책이 쓰여진 2001년은 아직 2G 폴더폰에 인터넷은 윈도우 98을 쓰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고생들은 요즘 사람들의 SNS활동과 전혀 다를바없이 단순 통화기능 이상의 용도로 휴대폰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마치 스마트폰의 시대가 올 것을 미리 예측하고 아예 미래를 배경으로 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시대를 앞서간 소재와 통통 튀는 대사들이 인상적이다.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일본의 추리작가들은 거의 상향평준화되어 있기때문에, 국내에 번역소개될 정도의 작품이라면 아무리 생소한 이름의 작가라 하더라도 어지간하면 평타 이상 치는 정도의 완성도는 보장한다고 봐도 된다. 이 작가 역시 처음 접하지만 대단히 안정적이고 높은 수준의 필력을 보여준다. 특히 일본작가 특유의 지나치게 디테일한 묘사는 개인적으로 질려하는 부분인데, 이 작가의 경우에는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조율되어 있는 점이 좋았다. 물론 중반부 경찰의 수사과정이나 부서간 신경전 등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는 늘어지는 부분을 좀 걷어내고 스피디한 진행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인물들간의 대사들이 각 캐릭터의 성격을 나타내는 역할과 함께 잘 짜여져있고, 군데군데 튀지않는 유머도 적당히 배치되어 빈틈없고 노련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의 가장 강력한 세일즈포인트는 역시나 '반전'이다. 마지막 한 문장에 모든 것이 뒤바뀐다거나 일본 역사상 최고의 반전이라는 소개란의 떠들석한 광고는 책을 읽기도 전에 흥분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렇게 궁금하던 마지막 문장에 이르면 확실히 어떨떨해지기는 한다. 그냥 평범했던 추리소설이 마지막 반전 하나로 좀 더 특별하게 변한 것은 분명한데, 그 반전으로 인해 정말 광고처럼 모든 것이 뒤바뀌는 정도는 결코 아니다. 작가가 보너스 개념으로 슬쩍 끼워넣은 장치라고나 할까... 마치 영화가 끝난 뒤 나오는 쿠키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단지 그 쿠키영상이 본편보다 더 강렬해서 쿠키만 기억나는 케이스라 할 수도 있겠다. 어떻게보면 없어도 그만인 반전이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소문'이란 매개체를 통해 젊은 세대들을 이용했던 기성 세대가 확대 재생산된 소문으로 인해 도리어 몰락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되고있어서 나름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책에 묘사되어있는 20년 전 일본 여고생들의 모습은 요즘 우리나라 여고생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급변하는 문화적 차이로 인해 부모와 자식세대가 소통이 잘 안되는 웃픈 상황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먹는 악순환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착찹한 상황 등, 이 책은 일본 추리물답게 그 시대의 사회상을 통해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겉으로는 마냥 삐딱할 것만 같은 학생들이 실상은 크고작은 마음의 상처와 어른들이 미처 파악하기 힘든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놓치지않고 보여준다. 덕분에 미운오리새끼같은 딸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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