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속의 비밀 1~2 세트 - 전2권
댄 브라운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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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브라운의 신작 '비밀 속의 비밀 (The Secret of Secrets)'은 작가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예고된 바와 같이 작년 9월 9일 미국 현지에서 공개되어 2주차부터 시작해 7주 연속 아마존 차트 소설 부문 종합 1위를 찍은 걸로 나오는데, 사실 이 정도면 지금의 댄 브라운으로서는 충분히 선방이고 나름 체면치레는 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선 이 책이 공개된 지 3달 가까이 지난 11월 말이 되어서야 뒤늦게 별다른 홍보도 없이 조용히 번역되어 나왔다. 추리 스릴러 분야에 관심이 많은 나조차도 발매 소식을 몰랐을 정도니 좀 충격인긴 하다. 더 충격인 건 출간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오르지도 못 했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때 전세계를 호령했던 댄 브라운의 위상이 이 정도까지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세월이 참 무상하긴 하다.



미국이란 나라가 레전드 스타들에 대한 리스펙이라든지 예우하는 문화가 발달되어 그럴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우리나라는 변화에 민감한 민족이라 그런지 빨리 적응하고 빨리 잊고... 하여튼 그런 면이 좀 있는 것 같다.  



어쨌든 8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댄 브라운의 이번 신작은 체코 '프라하'가 배경이다. 지난번 '오리진'을 읽었을 때 미스터리는 살짝 뒷전으로 밀리고 오히려 스페인 명소를 소개하는 데에 열을 올리는 식의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어서 작가의 방향성이랄까 집필 스타일이 예전에 비해 뭔가 좀 달라진 것 같다는 의심을 했었는데, 이번 작품을 읽고나니 그 방향성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https://blog.naver.com/joonjoo2/224000392042


이 책은 정말로 한 권의 프라하 관광안내서에 가깝고 미스터리 요소는 거의 양념으로 끼얹어진 수준이다. 애초에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비롯한 스토리의 흐름 자체가 프라하의 각종 명소들을 차례로 소개하고 설명하기 위해 짜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프라하시의 전폭적인 지원과 홍보비를 받고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는데, 실제로 책 뒷부분 감사의 말을 담은 작가 후기에 프라하시 관광본부가 떡하니 있는 걸 보고 쓴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작가의 명성이나 영향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한편으론 안그래도 365일 관광객으로 미어터지는 프라하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상반된 생각과 충돌하면서 고개가 갸우뚱해지긴 한다.



댄 브라운의 스타일을 하루이틀 겪은 바도 아니고 어느덧 로버트 랭던과 함께 떠나는 유럽여행이라는 컨셉으로 굳어진 상황인 건 알지만 이번 작품은 특유의 서스펜스나 스릴감마저 대폭 줄어든 느낌이라,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긴장감 속에서 유럽 명소와 유명 미술품들을 덤으로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던 이전 작품들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심지어 이번 작품의 주된 소재로 선택된 인간의 뇌와 의식에 관한 첨단과학은 작가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인지는 모르겠으나, 따지고 보면 굳이 프라하에서 사건이 벌어져야 할 이유나 당위성이 별로 없기 때문에 주제와 배경 장소가 좀 따로 논다는 느낌도 들었던 것 같다. '천사와 악마'에서의 이탈리아나 '다빈치 코드'에서의 프랑스처럼 소재와 무대가 찰떡같이 어우러졌던 전성기 대표작들을 생각하면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이 작품은 포시즌스 호텔에서 아침을 맞이한 랭던이 단 하루 동안 프라하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건을 해결하는 모험 활극을 그리고 있다.



새벽 조깅 코스에 굳이 카를교를 건너는 동선을 넣어서 카를교에 대한 잡다한 유래와 상식을 설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프라하성은 물론, 스타로마크 구시가지 광장의 천문시계도 깨알같이 등장하고, 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으로 알뜰하게 묘사되는 조핀 궁전과 댄싱 하우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등장하는 크루시픽스 바스티온, 추격 액션 장면에 활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페트르진 전망대, 거울 미로와 페트르진 푸니쿨라...



클레멘티눔과 악마의 성경이라 불리는 코덱스 기가스, 프라하의 미국 대사 관저인 페체크 빌라, 구 유대인 공동묘지, 후반부 주요 배경인 폴리만카 공원과 R2-D2 닮았다는 환기구 등...



예상했던 그대로 프라하의 핵심 명소들이 총망라되어 나온다. 이 정도면 그냥 프라하 여행은 직접 안 가봐도 충분할 것 같다. (어차피 갈 기회도 없겠지만...)


다만 프라하에도 분명히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있을 터인데 폴 에번스의 조각품 '호기심 캐비닛' 정도가 비중있게 등장할 뿐, 이전 작품들에 비해 미술품에 대한 소개가 거의 없다시피 한 점은 좀 의외였다.



사실 이번 작품은 초반부터 그 똑똑한 랭던이 마치 이성을 잃은 듯이 세계적인 도시의 특급 호텔에 화재경보를 울리며 난장판을 만든다는 상황 자체가 납득하기 힘들 뿐더러 나에겐 너무 억지스럽게 느껴져서 이후 진행되는 스토리 역시 그다지 자연스럽게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스토리의 기본 플롯 조차도 주인공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어떤 문서가 거대 조직에 위협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영문도 모른 채 쫓기게 된다는 식의... 지난번 '콘돌의 6일' 리뷰 때도 언급했듯이 존 그리샴의 '펠리컨 브리프' 같은 히트작에서 이미 충분히 우려먹었던 너무나 익숙한 설정이라, 아무래도 댄 브라운이 이번에는 솔직히 날로 먹으려는 속셈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모로 좀 쉽고 편하게 글을 쓰고 싶었던 것처럼 느껴지긴 한다.


https://blog.naver.com/joonjoo2/224032833913


한편 작가 자신이 워낙 유명인사여서 그런지 책을 읽다보면 엄청난 인맥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전작 '오리진'에서 너무 대놓고 테슬라를 홍보하는 장면이 있어 아마도 일론 머스크와 개인적 친분이 있을 것 같다는 짐작을 한 바 있었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나 그의 이름과 뉴럴링크가 언급되는 걸 보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읽고 리뷰하면서 친숙해진 이름인 마이클 폴란도 작중에서 랭던의 동료로 나오는 걸 보면 실제로 가까운 사이가 아닐까 싶다. 


https://blog.naver.com/joonjoo2/223645953716


이런 인맥이 사실이든 아니든 댄 브라운은 이 작품에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기 힘든 최신 고급정보를 바탕으로 꽤 흥미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기 때문에, 나 같은 경우에는 '인공 뉴런' 같은 단어를 처음 들어봤을 정도로 문외한이지만 이 책을 통해 뇌과학 기술이 현재 어디까지 발전하고 있는지 새롭게 알게 된 부분도 많아서 소설적 재미와는 별개로 나름 유익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본작 '비밀 속의 비밀'은 소장가치를 높여주는 고급스런 디자인의 박스와 함께 지금껏 국내에 출간된 댄 브라운의 작품들이 늘 그러했듯 번역도 흠잡을 데 없이 유려하고 가독성이 좋다.



결론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미스터리 스릴러로서의 재미는 가장 떨어지는 쪽에 속한다... 그렇지만 프라하를 좋아하거나 뇌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정도로 마무리하고 싶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Ye-Vqn0Ym7Q&t=4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428852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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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돌의 6일 버티고 시리즈
제임스 그레이디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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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콘돌의 6일 (Six Days of the Condor)'은 1974년에 발표된 스파이 스릴러물이며 바로 다음해인 1975년에 개봉된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 '코드네임 콘돌'의 원작소설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출간과 동시에 당시 헐리우드 특급스타들이 대거 투입된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막대한 판권료와 함께 작가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뀔 정도로 거대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49년생으로 현재 70대 중반인 작가 제임스 그레이디가 대학시절에 구상을 해서 불과 20대 초중반에 발표한 데뷔작이란 점을 고려하면 더욱 놀라운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첫 작품이 너무 큰 성공을 거둔 탓인지 이후에 이어진 꾸준한 집필활동에도 불구하고 결국 데뷔작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채 '원 히트 원더'로 머물고 만 듯한 점은 조금 아쉽기도 하다.


이 책은 미국 현지에서의 높은 평가와 화제성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약 40년이 지난 2016년에 뒤늦게 번역 소개되었으나, 이마저도 절판된 상태라 지금은 중고책으로밖에 구할 수 없는 실정이다. 



작가 후기를 제외한 작품 본편은 약 200페이지 분량으로 거의 중편소설에 가깝지만, 제목처럼 주인공 콘돌이 급박한 상황에서 펼치는 약 1주일간의 활약상이 압축되어 담겨있기 때문에 실제로 읽어보면 내용이 빈약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즐길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작품 전반에 걸쳐 디테일하게 묘사되는 CIA라는 거대한 정보기관의 비밀스런 활동이나 미국 고위 권력층 인사들의 관용적인 화법으로 구성된 흥미로운 대사들이 주는 쾌감이 대단한데, 작가가 젊은 나이에 오로지 자료조사만으로 구현해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때로는 싼마이스러운 표현들이 섞여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게감 있고 능숙한 필력을 바탕으로 한 품위있고 고급스런 문장들을 읽는 재미가 좋았고 기본적으로 작가의 유머감각이 뛰어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사소한 장면만 보더라도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해 고개를 끄덕였다는 일차원적 서술 대신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식으로 쿠션을 한번 넣는 모습에서 작가의 위트를 엿볼 수가 있다.



무려 50년 전에 쓰여진 70년대 소설인 만큼 문장의 구성이나 플롯의 전개방식이 요즘 정서와 비교한다면 어쩔 수 없이 다소 올드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곳곳에 포진해있는 과감하고 흥미로운 액션 시퀀스들과 남녀 주인공들의 뜬금없는 정사씬 등, 다채로운 눈요깃거리에 스토리의 진행 속도도 빨라서 세월의 격차는 금새 잊혀지게 만든다.


나는 초반부에 곧바로 등장하는 학살씬을 보면서 언뜻 오래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이언 플레밍의 007시리즈 중에서 '닥터 노'라는 작품의 초반부 암살씬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별 생각없이 작성했던 문서가 거대한 권력층의 비리를 노출시키는 위협이 되면서 그 누군가가 어느 순간 갑자기 이유도 모른 채 살인청부업자들에게 쫓기게 된다는 매력적인 설정은 존 그리샴의 대표작 '펠리컨 브리프'에서도 멋지게 그려진 바 있지만, 이 작품이 훨씬 전에 나온 만큼 그러한 설정의 원조를 영접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중반부 여자의 집이 노출되어 집 안에서 격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여자를 감시하던 키 큰 남자는 그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동안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후반부 콘돌이 정당방위가 아닌 상태에서 저지른 살인이 약물에 약간 취했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따위의 뒷맛이 개운치 않은 몇몇 의문점들은 거슬리기도 했지만, 작품 전체의 재미와 만족도가 워낙 출중하기 때문에 사소한 옥에 티 정도로 넘어가고 싶다.



영화는 'Three Days of the Condor'로 제목을 6일에서 3일로 살짝 바꾸면서 주인공의 활약상을 좀더 스피디하게 압축한 구성을 꾀하고 있다.


책 말미에 영화와 관련한 회고를 담은 작가 후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작품은 정식으로 출판하기 전 원고 검토 과정에서 이미 헐리우드의 초거물급 제작자인 디노 드 로렌티스의 눈에 띄어 전격적인 판권계약이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거물 제작자의 안목은 물론 당시 미국 출판계와 영화계 간의 긴밀한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단 최전성기의 로버트 레드포드와 페이 더너웨이를 캐스팅했다는 것 자체가 제작자의 파워와 함께 이 영화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지표다. 



거장 시드니 폴락 감독은 액션 스릴러 장르와는 매칭이 잘 안되는 면이 있지만 로버트 레드포드와 각별한 사이임을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 가능하고,



'프렌치 커넥션'을 찍었던 오웬 로이즈먼 촬영감독을 기용해 액션 쪽을 보완한 측면도 보인다. 음악을 맡은 데이브 그루신 역시 그의 성향과 어울리는 장르는 아니지만, 이 영화에 아낌없는 투자가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그 외에도 내가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고 '정복자 펠레'에서 보여준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스웨덴 출신의 명배우 막스 폰 시도우 또한 영화에 품격과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다.



이렇게 헐리우드 초A급 배우들과 제작진들을 투입한 이 영화의 제작비는 2천만달러라고 나오는데, 70년대 기준으로는 막대한 예산이라 할 수 있는 규모이고 그만큼 흥행에 자신감이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월드와이드 2천7백만달러라는 수익은 사실상 흥행실패로 봐야 하는 성적표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주인공 콘돌이 초반부터 CIA에 쫓기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턱없이 부족해서 긴박한 상황임에도 영문을 몰라 감정이입하기 힘들다는 점이 가장 큰 단점으로 다가온다. 한마디로 원작소설을 읽지않은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워서 재미가 없고, 소설을 읽은 사람은 오히려 흥미로운 디테일들이 다 빠져서 재미가 없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영화는 당대 최고의 꽃미남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의 스타 파워를 최대한 살려서 여주인공과의 위기 속 로맨스에 방점을 찍으려 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CIA라는 거대 권력기관의 정보력과 기술력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더 컸던 원작소설과는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어쨌든 기대와 달리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이 되어버린 것 같다.


헐리우드의 큰 별이었던 로버트 레드포드가 지난달에 세상을 떠났다. 영화 '코드네임 콘돌'은 그래도 그의 가장 빛나던 시절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 중 하나라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고 또 영원히 기억될 것 같다.



영원한 '선댄스 키드' 로버트 레드포드를 추모하며...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jGAtF92vQfw&t=17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403283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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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를 든 사냥꾼
최이도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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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를 든 사냥꾼'은 현재 디즈니+ 등의 OTT를 통해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의 원작소설이다. 재작년인 23년 말에 발표되었고 작가는 최이도라는 생소한 이름이라, 이쪽 분야에서 계속 활약을 해왔던 작가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모출판사의 공모전에 '연쇄살인봇'이라는 단편소설을 하나 응모한 것 외에는 별다른 이력이 나오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작가 프로필도 대학에서 경찰행정학을 전공했고 직관적이기보다는 추론적인 편이며 대체로 배운 것을 기반으로 글을 쓴다는 식의 별 알맹이가 없는 내용 밖에 없어서 언제나 그렇듯 작품으로 판단해야겠지만 읽기도 전에 뭔가 모를 불안감이 스쳐간 것은 사실이다.



아무튼 이 작품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범죄스릴러 장르이고 특이하게 사체를 부검하는 국과수의 법의관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장르에 도전하는 요즘 작가들이 전문지식의 부족함을 커버하기 용이한 '도메스틱 스릴러'를 선택하는 경향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설정이긴 하다.  


참고로 법의관이 주인공인 작품으로는 퍼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국내에도 시리즈 대부분이 번역되어 나왔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고, 나도 시리즈 첫번째 편인 '검시관'이 생각보다 만족스러워서 후속작들까지 꽤 사모으기도 했다.



어쨌든 법의관이라는 전문직을 선택했다면 그 분야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니 경찰행정학 전공에 배운 것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굳이 내세웠던 작가의 프로필 대로 우리나라 경찰기관과 국과수 등의 전문적인 수사과정을 디테일하고 리얼하게 제대로 묘사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작가만의 장점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도입부에 곧바로 법의관인 주인공 세현이 등장하여 피살자의 사체를 부검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액살이나 일혈점 같은 전문용어라든지 안구의 피맺힘을 살펴보는 장면을 포함한 부검순서 등은 분명 취재를 통한 자료조사 없이는 묘사하기 힘든 부분이라 작가가 고증을 위해 나름 노력한 흔적들이 눈에 들어오긴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뭔가 어설프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었는데 일단은 부검 과정을 옆에서 함께 지켜보며 체험하는 듯한 현장감이 좀 부족한 듯 했다. 부검실에 놓여있는 사체의 외형이 먼저 한눈에 들어오도록 전체적인 묘사가 우선되어야 독자들도 현장의 모습을 그려가며 부검 과정을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을텐데, 피해자의 얼굴 생김새와 체형은 물론 사망시의 자세나 표정 등 기본적인 모습은 전혀 언급도 없이 심한 부패 상태와 열려있는 복부에 꿰맨 실 따위의 부분적인 정보만 툭툭 던지듯이 묘사하니 현장감은 물론 주인공의 부검 실력 조차도 그다지 설득력있게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부검 장면은 가해자의 성격이나 능력치 등 캐릭터를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앞으로 주인공이 상대할 범인이 어떤 인물인가 하는 점을 독자들이 미리 인지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검을 통해 범인의 정신상태와 피지컬, 범행수법과 특징, 더 나아가 범행동기까지 유추해서 스릴과 공포감을 느끼며 주인공의 심리에 감정이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함에도 이 책에서는 그저 범인이 주인공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임을 알려주는 용도 외에는 딱히 의미있는 장면으로 활용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초반부터 범인을 밝히면서 시작하는 스릴러 타입을 선택했으면 당연히 그의 존재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서사가 설득력있게 제공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중간중간 주인공의 꿈이나 회상을 통해 살인마 조균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해도 거의 실체가 없는 허상을 마주하는 듯한 별 영양가 없는 내용들 뿐이라 스토리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인공들의 고군분투에도 그다지 공감과 몰입이 되지 않는다.


'양들의 침묵'에서 똑같이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압도할 정도로 엄청난 카리스마와 존재감을 발산했던 한니발 렉터를 떠올려 본다면 캐릭터 소개나 활용법에서 너무나 비교되는 부분이 있다.



작가는 모든 사연과 비밀을 아껴두었다가 마지막에 몰아서 한방에 터트리는 전략을 짠 것 같은데 황당한 건 후반부 반전과 결말을 다 보고나서도 여전히 살인마에 대해 알게된 게 없다는 점이다. 조균은 어떤 이유로 살인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왜 그런 살해방식을 사용하는 것인지, 살인 과정에 어린 딸은 왜 끌어들이는 것인지, 어떤 정신질환이나 트라우마가 있는 것인지, 피해자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지 등등... 끝까지 뭐 하나 제대로 설명되는 게 없다. 


솔직히 다 읽고나면 이 책이 정말로 범죄스릴러 장르가 맞긴 한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정작 작가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각자 어릴적 트라우마가 있는 두 남녀의 치유와 러브스토리인데 여기에 자극적인 요소로 사이코패스 살인마 설정을 가져다 붙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얼마 전 리뷰했던 '급류'와도 상당히 비슷한 구석이 있다. 


https://blog.aladin.co.kr/771302103/16371187


어쨌든 이 책은 살인마 조균과의 대결보다는 오히려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다는 세현이 하필이면 어릴 적 트라우마를 공유하는 정현과 동종 직업군에서 운명적으로 우연히 만나서 서로를 치유해가며 서서히 호감을 가지는 과정에 스토리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조균에 대해서는 설명이 턱없이 부족하고 마치 편집이 튀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급하게 건너뛰며 전개되는 느낌이라면, 세현과 정현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는 커피 마셔라, 물 마셔라 따위의 세상 한가하게 꽁냥꽁냥하며 별 쓰잘데기 없는 대사와 장면들로 느릿느릿하게 진행된다. 이 책을 스릴러로 생각하고 읽는다면 선택과 집중이 완전히 반대로 되어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경찰대학 출신의 정현이 동료 일반 형사들과 겪는 미묘한 갈등이라든지 엉뚱한 범인 쫓는 헛발질 출동 씬 등, 범죄 수사물의 전형적인 클리셰도 적당히 챙겨넣었지만, 어차피 러브스토리가 중심이고 범죄스릴러는 양념에 불과한 수준이라 긴장감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이런거 저런거 다 떠나서 주인공들의 수사 과정이나 러브스토리 자체도 그냥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두 남녀가 서로를 알아가면서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계기가 되는 여러가지 자잘한 상황과 대화들이 대부분 작위적으로 느껴지거나 그다지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가 이야기꾼으로서의 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당연히 외모이고 독자의 감정이입에도 큰 영향을 주는데 이 작가는 왜 주요 캐릭터들의 이목구비조차 묘사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세현은 찢어진 눈에 마른 얼굴, 정현은 젊고 건장한 체형... 이 정도가 전부이고, 나머지 석우, 혁근, 창진 같은 경찰 동료들은 그냥 이름 정도만 부여되어 있는 수준이다. 이렇게 캐릭터들의 생명력이 약하니 대사에 힘이 실리지도 않고 갈등에 공감하기도 어렵다. 책 속에서 자기들끼리는 서로 아픔을 이해하고 호감도 느끼는데 독자는 강건너 불구경하는 느낌인 것이다.



박스 테이프에서 지문 채취하고 CCTV에서 큰 차 뒤져보라고 조언하는 정도 외에 법의관으로서 특별히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장면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정현이 계속해서 그녀를 대단한 실력자라고 찬양하는 등의 말로만 캐릭터를 설명하는 방식도 역시나 필력 부족의 결과물이다.



게다가 세현은 어릴 적 고아가 된 상황에서 어떻게 먹고 살며 의대 6년까지 보낼 수 있었는지, 성형은 무슨 돈으로 한 것인지, 겨우 10살 정도의 나이에 옆에서 시체처리 몇번 거들었다고 의대 동기들이 놀랄 정도로 해부의 달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인지, 그녀도 따지고 보면 분명 범죄자인데 촉법소년이라 용서하고 무시해야 하는 것인지, 조균은 또 20년 동안 어떻게 먹고 살며 새로운 가족을 꾸린 것인지 등등... 납득하기 어려운 수많은 의문점들은 애초에 아빠와 미성년자인 딸이 한 팀이 되어 연쇄살인을 저지른다는 황당한 설정에서부터 이미 개연성은 개나 줘버린 듯한 모양새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한다. 



본문 속 '이해가 안 되면 그냥 받아들이면 돼요'라는 문장은 마치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서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 책이 드라마화가 된 것은 아무래도 연쇄살인마 부녀가 20년 만에 다시 대결을 펼친다는 흥미로운 설정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내가 볼 땐 개연성 엉망에 대사도 너무 별로라 많은 부분에서 각색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만약 내가 감독이라면 당연히 조균 캐릭터만이라도 존재감을 살려내는데 주력을 하겠지만 드라마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하긴 하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3JF1inMtXuA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926619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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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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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의 역사 추리소설 '흑뢰성'은 2021년 발간 직후 그 해 일본의 모든 미스터리 관련 상을 석권했던 화제작으로 소개되고 있다.


저자 요네자와 호노부는 1978년생으로 현재 40대 후반의 중견작가이며 우리나라에서 '빙과'라는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원작자로 널리 알려져있고, '빙과'의 성공에 이어 주로 고교생 주인공들을 내세운 학원 미스터리물을 계속 발표하면서 수많은 수상과 함께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화 등 인기작가로서의 명성을 다져온 인물이다.



본작 '흑뢰성'은 흔히 센코쿠시대라고 부르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 탐정물로 대표되는 고전 추리 작법을 접목시킨 팩션 미스터리 장르이다. 작가가 그동안 발표해왔던 청소년 성향의 작품들과는 전혀 결이 다른 소재와 내용이어서 자신의 창작 스펙트럼을 넓혀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이기도 하는데, 어쨌든 결과적으로 현지에서는 평단과 대중의 호평 속에 전례없는 성과를 거둔 것 같다. 


제목 '黒牢城'의 '牢'는 우리 뢰 즉, 소 같은 짐승을 가두는 우리 또는 감옥을 뜻하니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검은 감옥의 성' 정도가 되겠다. 무협지에서 최종 보스의 은신처 같은 곳이 떠오르는 뭔가 있어보이고 느낌있는 제목인데 의외로 작품 속에서 이 '흑뢰성'이라는 명칭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유일한 배경이자 무대가 아리오카성이라는 곳이고, 그 성의 성주이자 주인공이 매번 컴컴한 지하 감옥에 내려가서 실마리를 찾는 구성이라 책을 읽다보면 왜 이런 제목이 지어졌는지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된다.


이 작품은 팩션이기 때문에 대부분 역사적 실존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아라키 무라시게는 당시 패권을 장악하던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다이묘 즉, 지금의 오사카 근처인 셋쓰라는 지역의 영주 위치까지 올라선 장수인데, 갑자기 주군인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고 대항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혼자 도피했다가 은둔생활 중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까지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이 책에서는 무라시게가 모반을 일으킨 이후 셋쓰의 아리오카성에 칩거했던 기간 중에서 성을 버리고 도망가기 전의 약 1년간 벌어진 사건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겨울부터 이듬해 봄, 여름, 가을까지 총 4편의 에피소드가 연작으로 이어지는 구성이고 한 계절당 하나씩 독립적인 사건이 벌어졌다가 해결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책 말미를 보면 월간지에 단편 형식으로 실었던 에피소드를 묶어서 펴낸 것으로 나온다.



작가는 무라시게가 모반을 감행한 이유 등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의 공백 부분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교묘하게 메워가면서 밀실 살인 트릭을 활용한 첫번째 에피소드를 비롯하여 각각의 에피소드 모두 탐정과 독자가 두뇌게임을 하며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 주력하는 정통 고전 추리소설의 대표적 트릭과 작법을 기본 골격으로 해서 스토리를 펼쳐간다.


이 작가의 필력은 깔끔한 대사 처리와 흡인력있는 전개 등 흠잡을 데가 별로 없을 정도로 탄탄하면서도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굳이 중간에 한번씩 상황을 요약해주는 일본 작가 특유의 쿠세는 보이지만, 작품의 특성상 잠재적 용의자에 해당하는 서브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읽다보면 누가 누군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어서 여기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시대극에 걸맞는 예스러운 어투와 철저한 고증을 반영한 듯한 디테일한 상황묘사 역시 전력을 다한 작가의 노력에 비례해서 진중한 무게감으로 고스란히 다가오는 매력이 있다. 


또한 이 책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는 적절한 주석을 비롯하여 분위기에 어울리는 대사톤과 반말과 존댓말의 미묘한 변화까지 맛깔스럽게 살려내는 뛰어난 완성도의 번역도 가독성을 높여주고 있어 만족감을 더해준다.



다만 탐정 역할을 겸하는 무라시게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최후의 방편으로 자신이 직접 지하감옥에 가둔 간베에를 찾아가서 사건 해결의 힌트를 얻는다는 설정은 마치 '양들의 침묵'에서 스탈링이 한니발 렉터에게 자문을 구하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작가와 독자 간의 페어플레이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사건 현장을 보지도 않고 오로지 무라시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수수께끼를 간파하는 간베에의 전지전능함은 애초에 경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수준이다. 게다가 각 에피소드 초중반까지 흩어진 단서들을 조합하면서 이런저런 추리를 해봐도 막상 진범과 범행수법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게 되면 대부분 황당할 정도의 우연적 상황과 의외성에 기댄 결과를 마주하기 때문에 그동안 주어진 단서들은 별 의미없는 연막에 불과했다는 허무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같은 경우 두번째 에피소드의 범인이 밝혀지는 장면에 이를 때 쯤에는 나머지 에피소드들의 전개 스타일과 해결 방식 또한 비슷하게 반복될 것이라 훤히 예상되면서, 이런 식이면 굳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애써 추리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과 함께 사건 해결을 위한 적극적 참여자가 아닌 그냥 구경꾼으로서 관망하는 입장이 되었던 것 같다.



어쨌든 본작 '흑뢰성'은 장르소설에서 보기 힘든 책 말미의 수많은 참고문헌이 증명하듯이 작가가 공들인 역사 고증을 바탕으로 정통 고전 추리물의 추억을 되살려낸 솜씨로 오랜만에 일본 추리소설의 저력과 자존심까지 다시 한번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기발한 트릭이나 반전 같은 미스터리의 임팩트가 기대에 비해 다소 약하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시대극이라는 측면에서 보여주는 재미가 그 이상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사실 그동안 일본 평단은 호들갑이 너무 심해서 신뢰감이 거의 바닥인 상태였는데 이번 만큼은 나도 어느 정도 인정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cBNiVpCIagA&t=359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769879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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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러티
콜린 후버 지음, 민지현 옮김 / 미래지향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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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후버는 지난번 '우리가 끝이야'라는 작품이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이 작가의 글을 한번쯤은 더 읽어보고 싶다고 얘기한 바 있다. 작가에 대해서는 그 리뷰에서 충분히 다루었기 때문에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https://blog.aladin.co.kr/771302103/14833020


이번에 읽은 이 '베러티'는 2018년에 출간되었으니까 나온지 이미 5년이 넘었음에도 지금도 여전히 아마존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노출될 정도로 인기가 있는 작품이고 국내에 번역된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판매량이 높은 걸로 나온다.


제목 베러티(Verity)는 '진리', 또는 '진실'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냥 여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 최진실씨의 진실 정도로 비유하면 딱 맞을 것 같은데, 어쨌든 책을 다 읽고나면 이 제목이 상당히 복선적인 의미로 쓰였다는 것도 알게된다.



역시 이 작가는 글을 잘 쓴다. 문장을 구성하는 스킬이나 플롯을 다루는 솜씨가 확실히 프로작가답다. 시선을 압도하는 첫 시퀀스부터 계속해서 강력한 흡인력으로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도 거의 최고 수준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로 지난번 S.A. 코스비의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 리뷰 때 비유법을 예로 들면서 프로 수준에 못 미치는 작가의 실력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 콜린 후버는 같은 비유법을 써도 이렇게 사용한다.



약간의 과장이라면 과장 섞인 비유이긴 하지만 그만큼 이 여자의 심리를 아주 생생하고 또한 맥락에 어울리는 표현으로 처리를 하고있다.



그리고 이런 문장은 'like ~' 즉, '~처럼'이라는 대놓고 비유하는 조사를 쓰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비유법을 섞어넣은 표현이라 할 수 있겠는데, 실제로 이 집이 굉장히 호화로운 저택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인물의 심리와 주변공간을 한꺼번에 묘사하는 효과를 노리는 상당히 감각적이면서도 고급스런 스킬을 구사하고 있다.


무슨 '담배 끝이 용의 눈처럼 붉게 타올랐다' 같은 맥락도 없고 밑도 끝도 없는 마구잡이식 비유와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똑같은 아마존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그 필력은 이렇게 천차만별인 것이다.


https://blog.aladin.co.kr/771302103/15011369


그런데 내가 볼 때 이 콜린 후버라는 작가는 자기가 글을 잘 쓴다는 사실을 본인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에 나오는 두 여주인공은 모두 직업이 소설가인데 한명은 무명작가이고 다른 한명은 누구나 다 알 정도의 베스트셀러 스타작가로 설정되어 있다. 그 스타작가의 이름이 베러티다.


초반에 로웬이라는 이름의 무명작가가 베러티의 글을 읽고 주눅들어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베러티는 대단한 작가다. 정말 글을 잘 쓴다'라고 한다.



일반 작가라면 이렇게 베러티가 그저 대단한 실력이라는 간접적인 정보만 가볍게 흘리는 선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끝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콜린 후버는 적당히 말로만 떼우면서 은근슬쩍 넘어가는게 아니라 대범하게도 작품 속에서 베러티가 쓴 자전적 소설을 액자구성 형식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다.



독자들에게 로웬의 느낌이 진짜인지 아닌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고 자신있게 패를 까는 것인데, 이건 자신의 필력에 대한 웬만한 자신감으로는 절대로 시도할 수 없는 설정이다.


물론 그 자전적 소설이 글쓰기 연습을 위한 습작이라는 아주 교묘한 안전장치도 빈틈없이 마련해두었지만, 어쨌거나 이 콜린 후버라는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 같고 또 실제로 그만큼 글을 잘 쓴다. 내가 지난번 리뷰 때 딱 한번 보고도 장르소설가로서는 필력이 최상급이라고 했지 않았나...


아뭏든 이 작가는 기본 베이스인 로맨스 장르에 스릴러적인 요소를 살짝 가미하는 스타일로 봤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반전을 포함한 스릴러 쪽에 비중을 훨씬 더 많이 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남녀간의 미묘한 감정선과 애정행위를 묘사하는 장면에선 로맨스 작가 본연의 모습이 제대로 발휘되어 확실한 팬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런 문장은 확실히 로맨스 장인다운 독특하면서도 감각적인 표현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가 묘사하는 성행위의 수위는 여전히 좀 낮은 편이다. 겨우 15세 관람가 정도? 아마 그래서 오히려 대중들의 사랑을 폭넓게 받고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 '베러티'는 흥미로운 스토리와 그것을 뒷바침하는 작가의 탁월한 필력 덕분에 쉴새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몰입감을 선사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반전이라는 설정 자체에 너무 욕심을 낸 것인지 뒤끝이 개운하지가 않고 작가가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한 것인지도 잘 와닿지 않는 점은 좀 아쉬움으로 남는다.


모든 소설이 반드시 갈등해소나 권선징악으로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법이 있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정리가 필요한데 이 작품은 그런 부분에서의 방향성이랄까... 그런게 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는 지난번에 읽었던 '우리가 끝이야'가 훨씬 낫다.


그리고 번역도 이 책은 출판사가 달라서인지 번역가가 다른데 그냥 무난한 정도이지 좋다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콜린 후버라는 작가의 필력을 번역이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는 느낌이었고, 특히 이 작가는 유머감각이나 통통 튀는 대사처리가 뛰어난데 그런 부분을 살려주는 번역가의 센스가 그다지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끝으로 여담 한가지 추가하자면 내가 지난번 '우리가 끝이야' 리뷰에서 남녀 구분없이 모두 '그'라는 3인칭대명사를 쓰는 걸 보고 작가가 약간 페미니즘 성향이 있는게 아닌가 라는 추측을 했었는데, 내 유튜브 영상 댓글에 영문판 원서를 읽으셨던 독자분이 너무나 감사하게도 '여성 3인칭은 분명히 'She'라고 되어있었다'라는 제보를 해주셨다.



'우리가 끝이야'는 결국 남녀를 구분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성향인지 아니면 진짜로 페미니스트인지 뭔지는 몰라도 하여튼 번역가의 지극히 개인적 성향에 의해 그런 표현법이 선택된 것임을 알게되었다. 사소한 단어 하나도 얼마나 큰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지 번역가들은 제발 좀 깊게 고민하면서 번역해주었으면 한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가 콜린 후버는 평균적으로 거의 1년에 2편 정도의 신작을 뽑아내는 다작 스타일임에도 대부분의 작품들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인데 물론 이것은 고정팬들의 관성적인 구매 때문일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도 가능하겠지만, 내가 이번에 두편째를 읽어본 결과 이 작가는 그만한 대접을 충분히 받을 만한 실력자임은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혹시나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재미있는 소설을 찾는다면, 콜린 후버의 작품들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서 읽어본다고 해도 크게 실망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Egel8sk5Mso&t=372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2878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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