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평점 :
성해나의 단편소설집 '혼모노'는 올해 3월 출간된 이후 서서히 베스트셀러 순위권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약 3달이 지난 지금 현재 4주 연속 종합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화제작이다.
당연히 처음 듣는 이름인 작가 성해나는 1994년생으로 이제 30대로 접어드는 나이이며, 2019년 등단 이후 약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문학상 수상 경력과 함께 주목받는 젊은 작가로 활약을 해오다가 드디어 시쳇말로 떡상의 순간을 맞이한 것 같다.

나 같은 경우 책을 고를 때 보통 정보수집과 더불어 경험에 의한 직관이나 본능에 의존하는 편이라 베스트셀러 1위라고 무작정 따라 사는 행위를 극도로 꺼리는데, 때로는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무념무상의 낚시꾼처럼 여기저기 아무데나 던져보다가 뜻밖의 월척을 낚는 재미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본작 '혼모노'는 실로 오랜만에 낚아보는 혼마구로급 초대형 월척이었다.

처음 두어 페이지를 넘어가는 시점부터 이미 작가의 필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하면서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잡게 되었는데 이후에는 계속 들뜬 흥분감을 느끼며 읽었던 것 같다. 얼마 전 김초엽이나 최은영 같은 작가들의 글을 접했을 때는 평단의 찬사와 화제성에 비해 솔직히 겨우 이 정도 가지고 그렇게 호들갑이었나 하는 실망감도 없지 않았던 터라, 어쩌면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호들갑을 떠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보다 지명도도 낮은 이 성해나 작가의 글이 오히려 훨씬 뛰어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그야말로 '진짜' 작가를 발견한 것 같은 짜릿한 도파민에 취하는 경험을 했다.
https://blog.aladin.co.kr/771302103/15906992
https://blog.aladin.co.kr/771302103/15710942
적어도 글로 먹고 사는 프로작가라면 응당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들이 있을 터인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눈여겨 보는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어휘력'이다.
비슷한 뜻의 대체 용어들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읍', '이욕', '주견', '속신' 같이 일일이 사전으로 확인해야 할 정도로 평소 흔하게 쓰지 않는 단어를 굳이 골라 쓴다든지, 심지어 처음에는 '감탄'이 오타난 것이라 무심코 넘어갈 뻔 했던 '가탄'이나, 흔히 '심상치 않다'로 부정어와 관용적으로 붙여 쓰던 '심상'이란 단어를 단독으로 쓰는 등, 다양한 어휘를 습관과 타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발상으로 활용하는 모습에서 그동안 한글이라는 언어 탐구에 진심을 쏟아왔을 작가의 학구열이 느껴지기도 하고...






거기에 젊은 세대답게 짜친다는 표현이나 모임에서 문자로 은밀한 소통을 하는 장면 등, 요즘 감성의 거침없고 감각적인 언어 활용은 물론, '두벌자식이 더 곱다'는 속담 같은 나보다 훨씬 윗세대나 겨우 알아들을 법한 예스러운 언어까지도 캐릭터에 맞춰서 두루두루 조화롭게 구사하는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다. 이 정도면 내가 어휘력에서 늘 높게 평가하는 정유정 작가와 견주어도 별 손색이 없는 느낌이다.



내가 단편집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이유 중에는 보통 한두 편에 힘을 주고 나머지는 거의 구색 맞추기용으로 느껴질 정도로 편차가 들쭉날쭉한 경우가 많다는 점도 포함되는데, 이 작품은 각각 50페이지 정도의 비슷한 분량으로 수록된 총 7편의 단편이 저마다 독립적이고 개성 넘치는 소재와 내용임은 물론 그 퀄리티와 재미마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일정하다는 점에서도 놀랍고...
영화, 현대미술, 무속, 건축, 스타트업 회사원, 부자들의 일상, 음악 등 다양한 소재 속에서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뭔가 의미심장한 메시지나 포인트들을 꽉꽉 눌러담은 것도 대단하지만, 이러한 소재들을 정말 리얼하고 깊이감 있게 다루는 솜씨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가 영화에 관심이 많다보니 첫번째 편인 '길티 클럽'에서 영화와 관련한 썰을 푸는 것만 보고도 일찌감치 감을 잡았지만, 작품별로 다루고 있는 각 분야에 대해 이 작가가 거침없이 펼쳐보이는 디테일들은 전문적인 지식과 고증 자료를 충분히 확보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힘든 내용들이다.
타르코프스키 같이 영화학도들이나 겨우 알 듯한 작품들은 그렇다치고 정말 매니아가 아닌 이상 쉽게 떠올리기 힘든 '스크리너' 같은 용어를 자연스럽게 녹여넣는걸 보면 작가가 보유한 영화 관련 지식이 어느 정도로 높은지 대충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고, '구의 집'에서도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이름이 굳이 나오지 않더라도 건축 설계 과정의 초기 현장답사 장면을 간략하면서도 현실감있게 묘사한 부분만으로도 작가가 갖추었을 치밀한 자료조사와 전문성은 능히 짐작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특수분야의 전문용어 따위로 확연히 드러나는 장면보다 '우호적 감정'이나 '잉태기'에서 스타트업 회사원들의 현장감 있는 대화라든지 부유층들의 일상을 현실감 있게 묘사하는 부분에서 오히려 더 감탄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이 작가가 실제로 그런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이 있다거나 부유층 자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니까...
'스무드'에서처럼 제프 쿤스 같은 실존 인물을 과감하고 능청스럽게 활용하는 발상도 기발하고, 내가 오토바이에 관심이 많다보니 '메탈' 편에서 너무나 익숙한 용어인 '밤바리'가 나올 때는 슬며시 웃음도 나왔으며, '혼모노'에서는 무당이 자신의 신체를 칼로 그을 때 피가 나지 않아야 접신이 되었음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어 그제서야 영화 '파묘'에서 김고은이 허벅지와 뺨을 그었음에도 왜 피가 안 난 것이지 비로소 이해하게 된 점도 덤으로 얻은 흥미로운 정보였다.





코맥 매카시의 영향을 받았는 지는 모르겠으나 따옴표 없는 대사들도 느낌있게 잘 어울리고, 단문과 장문이 적절히 섞이며 물 흐르듯 이어지는 서술 문장들 또한 가독성이 어마어마하다. 이 작가는 기본적으로 글을 참 맛있게 쓰는데다가 흥미로운 스토리를 긴장감있게 끌어가는 필력까지 고루 갖추고 있다보니 문장 자체를 읽는 재미도 남다르고... 하여튼 전체적으로 거의 흠잡을 데가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에게서 굳이 아쉬운 점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작가가 문화 예술 방면으로 얼마나 지식이 깊고 풍부한지는 이미 충분히 잘 알겠는데 약간 과도하다 싶은 지점까지 아슬아슬하게 티를 내는 것 같다... 정도가 있겠다.
이를테면 부유층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루이스 부뉴엘'을 좋아한다는 접점 같은 것인데, 부르주아를 조롱했던 루이스 부뉴엘이니 당연히 모순과 풍자의 의미로 넣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감독 이름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현실성이 좀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들뢰즈-가타리 읽기' 역시 우리나라 고학력자 귀농인들이 실제로 들뢰즈와 가타리를 공부하는 사례가 있으니 썼겠지만 아무래도 살짝 고차원적이고 현학적인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밖에는 문장의 기교 면에서 감탄을 자아낼 만한 현란함이나 노련미가 보이지는 않는다... 정도를 쥐어짜듯 겨우 꼽을 수 있겠는데, 이건 작가 취향에 관한 부분일 수 있어서 다소 억지스럽긴 하다. '부도체 같은 그들에게 열정이 흐름을 알 수 있게 해준 음악' 같은 문장을 보면 현란한 기교 없이 간결한 구성으로도 작가만의 내공이 충분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혼모노'라는 제목부터가 일베 사이트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도 상당히 신경쓰이지만, 본문 속에서 디시 인사이드와 일베를 언급하고 태극기 부대를 주요 소재로 사용한 점, 그리고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보수 성향으로 동질감을 얻는다는 구절이 혹시 작가의 정치적 성향이 반영된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던 것인데... 이문열 작가의 언행이 어떻든 그의 찬란했던 문학적 성취는 늘 인정해왔듯이 이 작가 또한 설사 나와 반대 성향이라 하더라도 작가적 역량 만큼은 계속 응원할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스무드'의 태극기 부대 장면은 한번 더 곱씹어보게 되는데, 내가 경상도 지역에서 다양한 나이대의 고객을 상대하는 1인 자영업자다보니 어르신들은 대부분 무지성 극보수 성향임을 피부로 알게 된다. 대화중 어쩌다 정치적 발언이 나올 때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때로는 별 것 아닌 간단한 서비스 정도라 그냥 가셔도 된다고 손사래를 쳐도 밥값이나 해라... 담배값이나 해라... 마수걸인데 그러면 안된다며 기어이 만원 짜리 한두장을 손에 쥐어주는 사람은 언제나 그런 어르신들이다. 나는 '한국인의 정'이란 말이 아직 의미를 가진다면 그 지분의 상당 부분은 구세대 어르신들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양가적 감정에 마음이 아팠다.
한편 '메탈'에서 '람슈타인'이 등장했을 때는 자동적으로 정유정의 최근작 '영원한 천국'이 떠오르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물론 노래 가사 때문에 선택한 그룹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나 선배 작가에 대한 오마주의 의미도 함께 담은 것이 아닐까 하는 오지랖성 추측도 해봤다.

https://blog.aladin.co.kr/771302103/15824346
'길티 클럽'의 클라이막스는 주인공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펑 하고 터지는 장면이었다. 처음에 나는 뭐가 터졌다는 건지 즉각적으로 와닿지 않아서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곰곰히 생각하니 대단한 것 같았던 나의 우상이 결국 나와 다를 바 없는 별볼 일 없는 존재였다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맹목적이고 일그러진 팬심이 무너지며 현타가 온 순간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 젊은 트로트 스타를 향한 시니어 팬들의 과도한 집착에 대해 약간 풍자하는 느낌도 받았는데...

어쨌든 나는 이 성해나 작가의 다음 작품이 나오면 고민없이 바로 사서 읽겠다고 마음먹었을 정도로 이번에 정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만약에 작가가... 태극기 부대 그런 의미 아니고... 오마주 역시 아니고... 그냥 본인이 좋아하는 그룹이라 넣었고... 펑 터진 것도 그런 이유 아니고... 트로트 팬 풍자 아니다... 그래도 좋게 봐줘서 고맙다... 라고 한다면... 그 때는 나도 안에서 무언가가 펑 터질 것 같다.
작년은 내게 김애란 작가를 알려준 해였다면 올해는 성해나 작가가 그 자리를 채워주는 것 같다. '역시 혼모노는 다르네'라는 작중 대사는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알고보니 혼모노는 바로 작가였기 때문에...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3GRf_814iJY&t=94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935135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