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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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급류'는 22년 말에 출간되어 약 2년이 지난 올해 초부터 한국소설 베스트셀러 10위권 내에 꾸준히 오르며 주목을 받고있는 작품이다. 최근 한국소설 분야는 여성작가들이 시장을 거의 주도하는 느낌이라 모처럼 눈에 띄는 젊은 남성작가의 활약이 반갑기도 하다.


요즘 문학계의 새로운 트렌드인지 이 작품도 역주행이라는 표현을 내세워 홍보하고 있는데 나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인 점도 고려하여 오롯이 작품 자체만으로 판단하기 위해 일부러 작가와 내용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를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읽어보기로 했다.


일단 초반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내가 가장 먼저 받았던 인상은 아쉽게도 작가의 필력이 내심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는 그리 높지 않구나...였다. 상황과 배경, 인물 등을 묘사하는 모든 문장들은 거의 두줄을 넘지 않을 정도로 길이가 짧으며 비교적 직선적이고 단순한 표현법으로 구성되어 단조로운 느낌을 받았는데, 물론 이것은 스피디한 가독성이라는 무시 못할 장점도 있겠지만 반면에 웹소설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아마추어적인 냄새가 났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약 300페이지에 근접하지만 작은 판형에 활자의 크기까지 고려하면 실제로 200페이지를 겨우 넘기는 정도의 중편에 가까운 컴팩트한 분량에다가 간결하고 쉬운 문장에 시원시원하고 빠른 전개로 요즘 시대의 입맛에는 잘 맞는 것 같은데 작가가 어떻게든 장편의 외형을 갖추기 위해 애를 쓴 것인지 군더더기 문장들도 제법 보인다. 



'해솔이 도담의 팔을 잡고 떼어 내며 밀어냈다. 거부의 몸짓이었다...' 라는 구절에서 이 '거부의 몸짓이었다' 같은 문장은 사실 없어도 아무 지장 없고 오히려 빼는게 더 깔끔하다.



바로 이어지는 대목에서도 또다시 '네가 나한테 이런다는 거지...' 라는 대사를 해놓고 '연인들이 다툴 때 흔히 하는 말이었다' 라고 친철한 해설 같은 문장을 덧붙여 놓았는데 작가가 너무 불친절해도 문제지만 너무 친절한 것도 문제가 있다. 무슨 다큐멘터리 나레이션도 아니고 없어도 다 알아듣는 장면에서 굳이 군더더기 같은 부연설명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와의 화투씬에서 '아이구, 시원하다. 도담이 손이 약손이다' 같은 대사들을 비롯하여 뭔가 모르게 영화적 클리셰의 느낌이 나는 시퀀스들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꼭 필요해서라기 보다는 이쯤에서는 이런 장면이 한번쯤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 전형적이지만 무난한 대사로 이루어진 상황을 적당히 만들어 넣은 듯한 느낌인 거다.



초반부에 나온 중성부력에 관한 아빠의 대사나 첫 키스의 추억을 상징하는 귀신 새가 중후반부에 다시 나오는 방식도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떡밥회수 스타일의 클리셰 중 하나다. 



혹시 작가가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전체적인 시퀀스의 구성과 연결, 그리고 대사들이 영화적 또는 연극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문맥의 흐름상 '엄마'라는 명칭이 훨씬 자연스러움에도 굳이 '미영'과 '정미'라는 이름을 쓰는 모습에서 나는 이 작가가 각본을 쓰던 버릇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해봤다.  



작품의 내용도 역시나 그동안 영화나 소설에서 숱하게 다루어 왔던 치유를 통한 내면의 성장...이라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식상한 코드를 내세우고 있다. 이런 경우 독자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눈에 띄는 확실한 차별점이 필요한데 이 작품은 그 차별점을 치유 과정으로 넘어가기 위한 트리거 역할의 어떤 '사건'으로 선택했고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에나 나올 법한 초강력 설정을 집어넣었다.


어떻게 보면 무리수에 가까운 초반의 이런 충격적 설정은 시선끌기용으로는 상당히 괜찮은 작전이고 또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한편으론 아무리 봐도 너무 작위적이고 편의적으로 가져다 쓴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개인적으로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라든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오히려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함과 동시에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오로지 해솔과 도담이라는 두 남녀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데만 집중할 뿐 주변인물들의 존재는 그저 주인공 서사 구축을 위한 들러리 정도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두 주인공의 심리에만 감정이입한 독자라면 감동적인 사랑이야기라며 극찬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상황이든 일단 중립기어 넣고 지켜보는 습관이 있는 나에게는 감정이입이 그리 쉽지 않았다.



나같은 경우 작중 주인공과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둔 50대 유부남의 입장에서 글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부모들이 어떤 계기와 과정으로 서로에게 끌렸는가 하는 점 등, 불륜이라는 파멸적이고 그릇된 선택에 대한 어른들의 뒷이야기가 무척 궁금했으나 이 책에서는 그저 불륜부모의 자식이라는 설정만 필요했는지 부모의 서사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도담의 아빠 창석은 도담에게 그저 수영을 가르쳐준 적 있었던 성실한 소방관이었을 뿐 엄마와는 실제로 어떤 부부관계였는지 또 불륜녀인 미영과는 어떤 감정의 교감이 있었는지 따위의 보충적인 심리상태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가족을 배신한 아빠라는 평면적 캐릭터로만 남는다. 심지어 배신당한 당사자인 엄마 정미의 심리상태마저도 완전히 제거되어 존재감이 없다. 


이것은 향후 스토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담의 정신적 상처 역시 평면적으로 그려지는 원인이 되어 안그래도 비현실적인 사건이라 그 상처의 실체나 강도가 별로 설득력있게 와닿지도 않는데 자기들끼리만 아파하고 달래주는 모양새니 이럴거면 굳이 그런 설정의 사건이 왜 필요한가 싶은 거다.  


만약 작중 인물들이 불륜에 의해 이혼을 하고 원하는 대로 새로운 가족을 결성했다고 가정한다면 부부이자 사돈이고, 새엄마이자 시어머니이고, 새아버지이자 장인어른이 되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콩가루집안 탄생이라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설정이라 기본적으로 이들의 복잡미묘한 심리와 이해관계 등 다뤄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작가는 애초부터 젊은 남녀의 기구한 인연에 얽힌 러브스토리를 만들 목적으로 말도 안되는 기괴한 설정을 가져와서 스토리 진행에 방해되는 요소는 미리 사고사로 없애버린다는 너무나 작가 편의적인 간단한 방법으로 안일하게 처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작가는 확실히 젊은이들의 감정과 사랑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만 어른들의 농익고 숙성된 사랑 쪽은 취향이 아닌 것 같다. 남녀의 성행위를 묘사하는데 있어 작가가 사용한 최고 수위가 겨우 '안았다' 정도인 걸 보면 언제나 청소년 관람가 수준을 넘지 않는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닌가 싶다. 



본작 '급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반부를 거쳐 후반으로 갈수록 어설픈 허세를 부리기 보다는 자신의 페이스로 일관된 톤을 유지하는 작가의 진정성이 호감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문맥과 문장의 구성이나 단어의 선택 등에서 문학적 기교나 깊이감 등, 별다른 내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을 뿐 그렇다고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초반의 실망감은 어느새 잊고 그럭저럭 내용을 즐길 수 있었던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정대건은 1986년생으로 현재 40대로 접어드는 나이이며, 찾아보니 놀랍게도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의 영화감독이었다. 



작가의 커리어를 확인하니 비로소 내가 품었던 의혹들이 일거에 해소되며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이 정도면 돗자리 깔아야 되는거 아닌지 모르겠다. 정식으로 개봉한 장편 극영화는 2017년작인 '메이트'가 현재로서는 유일하고 그 이후로는 소설들을 계속 발표하며 작가로 전향한 듯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데, 예전에 리뷰했던 '곰탕'의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김영탁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아마도 이 책이 계속 잘 팔린다면 머지않아 본인이 직접 감독한 영화제작 소식을 듣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84tOD4mFhEk&t=326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82889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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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났음의 불편함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란 옮김 / 현암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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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에밀 시오랑은 1911년에 태어나서 1995년에 사망한 루마니아 출신의 철학자다. 대충 살펴보니 20대에는 베를린에서 칸트, 헤겔,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독일 철학을 탐구했고 30대부터는 파리에 살면서 프랑스어로 쓴 책들을 발표하며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으로 나온다. 



이 작가의 글은 대부분 아포리즘에 기반을 둔 스타일로 쓰여지는 특징이 있는데 아포리즘(Aphorism)은 격언, 잠언, 경구 등으로 해석되는 짧은 글귀를 뜻한다.



본작 '태어났음의 불편함'은 1973년에 발표되었고 역시나 아포리즘으로 채워진 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막연하고 추상적인 글귀는 취향이 아니라서 심지어 시도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본의 아니게 이런 스타일의 글을 접하게 되니 첫대면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아주 오래전 우리나라에 칼릴 지브란의 책들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 책을 처음 펼치면서 문득 지브란이나 혹은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작가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극이라는 뉘앙스로 시작하는 이 책은 가면 갈수록 작가의 특이한 사고방식에 도무지 공감하기 어려운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그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어떤 통찰에 압도당하는 듯한 특별한 느낌도 있었다.


일단 이 작가는 독일 철학은 물론 바흐의 음악과 도스토옙스키와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문학, 그리고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등의 각종 종교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축적된 자신의 가치관이나 일상적 상념들을 다소 현란한 스킬의 함축적인 언어로 담아내기 때문에, 한번은 고사하고 두번 세번 읽어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난해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지만 신중하고도 오랜 담금질 끝에 뽑아낸 언어 조합의 결과물이란 점 또한 충분히 느껴진다.



책 초반에 나오는 글귀 중 하나로 언뜻 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현학적인 말장난인가 싶기도 한데 천천히 반복해서 읽다보면 그 '진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만큼 이 작가는 태어났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살아있음 그 자체를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심지어 사산아를 부러워하기까지 하는 작가의 성향을 마주하다보면 그 극단적인 염세주의적 또는 회의주의적 또는 허무주의적 사고방식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솔직히 이 정도면 작가가 일찌감치 자살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신기한데 자살은 너무 늦은 선택이기 때문에 소용없는 짓이라는 알쏭달쏭한 견해를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는 젊은 시절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하며 이 책에서도 잠과 밤에 대한 언급이 많은 편이다. 깨어있을 때 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므로 차라리 잠들어 있는게 훨씬 낫다고 여기는 작가에게 밤에 잠이 오지 않는 증상 또한 정말 치명적인 고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살면 살수록 살아있다는 것이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뭔가를 하려고 애쓰는 것 보다 낫다... 나는 모든 것이 덧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에 탁월한 능력이 있고, 그래서 나의 장점은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만일 내게 아이들이 있다면 당장 목 졸라 죽일 것이다... 태어남이 실패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삶은 견딜 만해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는 나를 견딘다...



아뭏든 이 시오랑의 염세주의는 거의 인간혐오 수준으로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정말이지 쇼펜하우어도 울고 갈 듯 하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이 책에서 얼핏얼핏 감지되는 작가의 정치적 성향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말하는 진보가 정치를 넘어 훨씬 광범위한 의미를 포함했을 것이라 애써 부정해봐도 히틀러에 대해 다소 후한 평가를 내리는 견해를 보노라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이문열 작가가 꼴보기 싫은 극우 인사라 해도 그의 찬란했던 문학적 성취까지 폄하하는 성격은 아니기 때문에 비록 동의할 순 없어도 그냥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 성향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보다는 오히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언급된 부분 등에 더 눈길이 사로잡혔는데, 이렇게 극단적이고 까다로운 시오랑을 매료시킨 포인트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서 다음에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다는 건 무엇인가'라는 말은 누구나 한번쯤 떠올려보는 진부한 명제가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 시대에 가진 것이 많고 매일매일이 행복해서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삶이 고달파서 죽지 못해 살거나 천국같은 다음 생을 기약하며 매일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이라는 나훈아의 노래가사도 있듯이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조금씩 비워내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을거다.


사실 나도 어지간히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좀 있는 편이었는데 마치 비관주의의 끝판왕 같은 이 시오랑 작가 덕분에 거울치료를 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접근으로 시야가 넓어지면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등 잘 살았냐 못 살았냐 따위를 구분짓는 온갖 기준들은 어차피 인간들 스스로가 만든 허상일 뿐이라는 위안과 함께 뭔가 치유를 받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생각과는 대척점일 수 있는 '카르페 디엠 (Carpe diem)'이란 말이 자꾸만 머리에 맴돌았는데, 편견없이 마음을 비우고 읽다보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철학적 명제에 대해 각자 여러 방향으로 활발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을 제공하는 책이란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작가가 특히 프랑스어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정제된 언어로 글을 쓰는 스타일로 알려져있는 만큼 이 책의 번역도 그 뉘앙스가 온전히 전달되는 명징한 문장으로 다듬어져 가독성이 높고 이해를 돕는 꼼꼼한 주석 등 대단히 훌륭한 완성도로 처리된 느낌이다.


나는 그가 생전에 한번이라도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생겨서 구글 검색으로 웃는 모습이라도 한번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 정도가 가장 밝은 표정이더라...



아무리 염세주의를 연구하고 그런 사상에 동화되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학문적인 영역일 뿐 시오랑의 실제 삶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희로애락을 골고루 겪으며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본 경험도 많았으리라 믿고 싶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jR7mvl9IPKg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806053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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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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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의 역사 추리소설 '흑뢰성'은 2021년 발간 직후 그 해 일본의 모든 미스터리 관련 상을 석권했던 화제작으로 소개되고 있다.


저자 요네자와 호노부는 1978년생으로 현재 40대 후반의 중견작가이며 우리나라에서 '빙과'라는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원작자로 널리 알려져있고, '빙과'의 성공에 이어 주로 고교생 주인공들을 내세운 학원 미스터리물을 계속 발표하면서 수많은 수상과 함께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화 등 인기작가로서의 명성을 다져온 인물이다.



본작 '흑뢰성'은 흔히 센코쿠시대라고 부르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 탐정물로 대표되는 고전 추리 작법을 접목시킨 팩션 미스터리 장르이다. 작가가 그동안 발표해왔던 청소년 성향의 작품들과는 전혀 결이 다른 소재와 내용이어서 자신의 창작 스펙트럼을 넓혀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이기도 하는데, 어쨌든 결과적으로 현지에서는 평단과 대중의 호평 속에 전례없는 성과를 거둔 것 같다. 


제목 '黒牢城'의 '牢'는 우리 뢰 즉, 소 같은 짐승을 가두는 우리 또는 감옥을 뜻하니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검은 감옥의 성' 정도가 되겠다. 무협지에서 최종 보스의 은신처 같은 곳이 떠오르는 뭔가 있어보이고 느낌있는 제목인데 의외로 작품 속에서 이 '흑뢰성'이라는 명칭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유일한 배경이자 무대가 아리오카성이라는 곳이고, 그 성의 성주이자 주인공이 매번 컴컴한 지하 감옥에 내려가서 실마리를 찾는 구성이라 책을 읽다보면 왜 이런 제목이 지어졌는지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된다.


이 작품은 팩션이기 때문에 대부분 역사적 실존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아라키 무라시게는 당시 패권을 장악하던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다이묘 즉, 지금의 오사카 근처인 셋쓰라는 지역의 영주 위치까지 올라선 장수인데, 갑자기 주군인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고 대항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혼자 도피했다가 은둔생활 중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까지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이 책에서는 무라시게가 모반을 일으킨 이후 셋쓰의 아리오카성에 칩거했던 기간 중에서 성을 버리고 도망가기 전의 약 1년간 벌어진 사건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겨울부터 이듬해 봄, 여름, 가을까지 총 4편의 에피소드가 연작으로 이어지는 구성이고 한 계절당 하나씩 독립적인 사건이 벌어졌다가 해결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책 말미를 보면 월간지에 단편 형식으로 실었던 에피소드를 묶어서 펴낸 것으로 나온다.



작가는 무라시게가 모반을 감행한 이유 등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의 공백 부분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교묘하게 메워가면서 밀실 살인 트릭을 활용한 첫번째 에피소드를 비롯하여 각각의 에피소드 모두 탐정과 독자가 두뇌게임을 하며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 주력하는 정통 고전 추리소설의 대표적 트릭과 작법을 기본 골격으로 해서 스토리를 펼쳐간다.


이 작가의 필력은 깔끔한 대사 처리와 흡인력있는 전개 등 흠잡을 데가 별로 없을 정도로 탄탄하면서도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굳이 중간에 한번씩 상황을 요약해주는 일본 작가 특유의 쿠세는 보이지만, 작품의 특성상 잠재적 용의자에 해당하는 서브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읽다보면 누가 누군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어서 여기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시대극에 걸맞는 예스러운 어투와 철저한 고증을 반영한 듯한 디테일한 상황묘사 역시 전력을 다한 작가의 노력에 비례해서 진중한 무게감으로 고스란히 다가오는 매력이 있다. 


또한 이 책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는 적절한 주석을 비롯하여 분위기에 어울리는 대사톤과 반말과 존댓말의 미묘한 변화까지 맛깔스럽게 살려내는 뛰어난 완성도의 번역도 가독성을 높여주고 있어 만족감을 더해준다.



다만 탐정 역할을 겸하는 무라시게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최후의 방편으로 자신이 직접 지하감옥에 가둔 간베에를 찾아가서 사건 해결의 힌트를 얻는다는 설정은 마치 '양들의 침묵'에서 스탈링이 한니발 렉터에게 자문을 구하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작가와 독자 간의 페어플레이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사건 현장을 보지도 않고 오로지 무라시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수수께끼를 간파하는 간베에의 전지전능함은 애초에 경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수준이다. 게다가 각 에피소드 초중반까지 흩어진 단서들을 조합하면서 이런저런 추리를 해봐도 막상 진범과 범행수법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게 되면 대부분 황당할 정도의 우연적 상황과 의외성에 기댄 결과를 마주하기 때문에 그동안 주어진 단서들은 별 의미없는 연막에 불과했다는 허무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같은 경우 두번째 에피소드의 범인이 밝혀지는 장면에 이를 때 쯤에는 나머지 에피소드들의 전개 스타일과 해결 방식 또한 비슷하게 반복될 것이라 훤히 예상되면서, 이런 식이면 굳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애써 추리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과 함께 사건 해결을 위한 적극적 참여자가 아닌 그냥 구경꾼으로서 관망하는 입장이 되었던 것 같다.



어쨌든 본작 '흑뢰성'은 장르소설에서 보기 힘든 책 말미의 수많은 참고문헌이 증명하듯이 작가가 공들인 역사 고증을 바탕으로 정통 고전 추리물의 추억을 되살려낸 솜씨로 오랜만에 일본 추리소설의 저력과 자존심까지 다시 한번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기발한 트릭이나 반전 같은 미스터리의 임팩트가 기대에 비해 다소 약하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시대극이라는 측면에서 보여주는 재미가 그 이상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사실 그동안 일본 평단은 호들갑이 너무 심해서 신뢰감이 거의 바닥인 상태였는데 이번 만큼은 나도 어느 정도 인정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cBNiVpCIagA&t=359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769879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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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의 밤
블레이크 크라우치 지음, 이은주 옮김 / 푸른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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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의 밤'은 애플 TV+를 통해 올해 5월부터 방영 중인 드라마의 원작소설이고 미국에서는 2016년에 발표되었으니까 생각보다 조금 오래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는 22년에 번역 소개되었고 처음 나왔을 때는 표지 디자인이 이렇지 않았는데 최근에 드라마 방영이 확정되면서 배우 얼굴이 들어간 포스터를 그대로 활용한 지금의 새로운 표지로 변경된 것 같다.


그런데 포스터 자체도 그렇지만 솔직히 이 표지 디자인은 좀 문제가 있다. 누가 봐도 복제인간을 다룬 SF물이 연상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이 작품의 중반부에 드러나는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반전 장치이기도 해서 책을 읽기도 전에 미리 스포를 당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굉장히 작은 사이즈의 특이한 판형으로 제작되었다. 외형은 서양의 '페이퍼백' 스타일인데 가격은 16,800원으로 전혀 페이퍼백 답지 않다. 페이퍼백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서양에서 오로지 싼 값에 책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제본방식이고 질낮은 재생종이에 떡제본이라 읽다보면 책등이 휘어지고 꺽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소장용이 아니라 가볍게 한번 읽고 버릴 생각으로 구매하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 같은 경우는 이도저도 아닌 참 이상한 컨셉으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품질 낮은 문고판 사이즈에 가격은 또 페이지수로 적용해서 제값을 다 받고 있으니까... 아뭏든 요즘 국내 출판사들의 일관성 없는 제본과 가격정책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작가 블레이크 크라우치는 1978년생으로 현재 40대 중반이고 소설가이면서 TV드라마의 시나리오 작가 겸 제작자로도 활동 중인 것 같다. 특히 자신이 원작자이면서 각색에도 참여한 '웨이워드 파인즈' 시리즈가 유명한 모양이다. 프로필을 보면 본업이 소설가인지 드라마 작가인지 살짝 헷갈리는 측면이 있는데 내가 볼 때 이 작가는 작품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미리 영상 제작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스타일인 듯 하다. 책을 읽다보면 플롯의 진행이나 인물들의 대사, 컷 전환 방식 등에서 전형적인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차피 출판계와 영화계가 긴밀하게 맞물려서 돌아가는 시대라 그다지 특별할 건 없지만 그래도 작가가 작품의 영상화에 비중을 많이 두는 경우에는 소설 자체의 완성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가 보여주는 필력은 예상외로 뛰어나서 한편의 소설로서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만족감을 충분히 선사한다. 작가가 글도 잘 쓰지만 대단히 똑똑하고 노련한 사람이란게 몇페이지만 읽어봐도 바로 느껴진다.



이 작품의 원제는 'Dark Matter'이다. '암흑물질'이라고 불리는 천체물리학 관련용어인데 책에서도 간단히 설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제목처럼 이 작품은 최근 마블 시리즈 덕분에 너무나 익숙해진 용어인 멀티버스 즉, 다중우주를 소재로 한 SF스릴러다. 그래서 책 내용 중에 양자역학이니 초끈이론, 또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일반인들은 말해줘도 잘 모르는 고차원적인 내용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작가 후기에 현역 물리학 교수의 자문도 받았다고 나올 정도로 나름 자료조사를 충분히 해서 과학 이론상 허술한 구성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쓴 모습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어려운 학문적 이론은 스토리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베이스로만 활용하고 독자들은 그런거 자세히 몰라도 아무 문제없이 스토리를 따라가며 즐길 수 있도록 헐리우드의 시나리오가 여지껏 잘 해왔던 방식으로 아주 능숙하게 처리를 해놓았다.


약간 호흡이 느리다는 단점은 있지만 드라마 시나리오 경험이 많아서인지 대사도 좋고 기승전결의 깔끔한 구성 안에서 중반부 이후 몰아치는 전개는 몰입도가 굉장하다. 다만 지금 현재의 삶이 가장 소중하다는 걸 말하고 싶어하는 작품의 메세지는 알겠으나, 사랑하는 여자를 얻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는 주인공의 고군분투는 복잡한 이론과 거창한 스케일에 비해 뭔가 모르게 좀 궁색한 느낌을 주는 면이 있다.



애플 TV+의 드라마는 '조엘 에저튼'과 '제니퍼 코넬리'가 주연을 맡았다. 조엘 에저튼은 '제로 다크 서티'라는 영화에서 후반부 특수부대원 역할로 '크리스 프랫'과 함께 단역으로 나왔을 때 개인적으로 인상깊어서 눈여겨 봤던 배우인데 감독, 각본, 제작 등 다방면으로 재능도 많고 또 진중한 이미지라 상당히 믿음직스럽다. 제니퍼 코넬리야 내 나이 또래면 누구나 다 아는 배우니까... 그런데 얼마전 '탑건 매버릭' 때보다는 덜 예쁘게 나오는 것 같아서 좀 아쉽다. 어쨌든 예고편을 보니 소설의 내용이 영상으로 잘 구현된 느낌이 든다.


그래도 나는 왠지 모르게 재미 면에서는 드라마가 소설을 못 따라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제인 'Dark Matter'와 아무 연관성이 없는 '30일의 밤'이란 국내제목은 약 30번에 걸쳐 다중우주를 돌아다니는 주인공의 행적을 상징하는 의미로 지은 것 같은데 '암흑물질'과 같은 딱딱한 직역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인 것 같다. 만약 '30일의 밤'이라는 드라마에 관심은 있는데 나처럼 애플TV를 볼 수 있는 여건이 안된다면 이 원작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훌륭한 대안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LbGbfUyuB68&t=1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624287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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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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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은 1993년생으로 이제 막 30대로 접어든 젊은 여류작가이다. 20대 중반에 '관내분실'이라는 단편으로 등단하면서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받은 이후 단숨에 한국SF문학계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스타작가로까지 올라선 것 같다.



'지구 끝의 온실'은 그동안 중단편만 써왔던 작가가 처음으로 내놓은 장편소설인데, 21년 8월에 출간된 즉시 베스트셀러를 기록함과 동시에 수많은 나라와 출판계약을 맺고 영화판권까지 팔렸다는 소개란만 봐도 현재 그녀가 가진 위상과 인기를 실감하게 만든다.



SF문학은 과학적 근거와 오류 등을 디테일하게 따지는 골수매니아과 덕후들이 워낙 많아서 그 유명한 베르나르 베르베르마저 과학적 고증 측면에서는 사정없이 비판받을 정도로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받는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데 심지어 SF장르의 불모지라고도 불리는 한국에서 젊은 여성작가가 이렇게 두각을 보이는 현상이 신기하기도 하다.


일단 김초엽 작가는 무엇보다 포항공대 출신이라는 과학 기반의 강력한 스펙과 함께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예술가적 자질, 그리고 청각장애라는 핸디캡까지 독자의 입장에선 인간적 호감을 가질만한 능력과 스토리를 고루 가지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나같은 경우 이 작가를 유명하게 만든 단편들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첫 장편인 이 작품으로만 그녀의 실력과 특징을 가늠한다는게 그리 적절치 않은 느낌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단편보다는 장편을 선호하는 취향이라 굳이 이 작품을 골라봤는데 그래도 문학계에서 이렇게까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정도는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이 작품은 영화에서도 흔하게 차용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세계 종말이나 인류 멸망의 원인은 핵전쟁이나 천재지변 등 여러가지 선택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더스트'라는 이름의 먼지처럼 자가증식하는 화학 유기체로 설정을 했다. 2064년부터 2070년까지 약 5년간의 더스트 시대를 거치면서 지구는 초토화되었고 주인공 아영이 활약하는 작품속 시점은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흐른 2129년이니까 이 작품의 시대적 설정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뒤의 미래가 되겠다.



앞으로 40년 정도가 지나면 책에서처럼 '호버카'로 불리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라든지 마치 에이리언 시리즈의 비숍이나 데이빗 같은 수준의 인조인간이 만들어질 지는 모르겠으나 아뭏든 이 책에서는 더스트 시대에 이미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설정이다. 냉정하게 본다면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영화적 허용처럼 소설적 허용으로 넘어가도 되리라...


'돔 시티'의 경우는 불과 5년이 안되는 더스트 시대를 격는 와중에 한 도시를 커버할 정도의 거대한 돔을 설치한다는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들지만 그래도 정찰과 전투 목적의 드론이나 음식 대용으로 섭취하는 영양 캡슐, 동물 로봇 등 작품 속의 다양한 장치들은 근미래에 충분히 등장 가능할 법한 정도로 묘사되어 있다. 더스트의 모태가 되는 나노 테크놀로지라는 것도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분야겠지만 화학 및 생화학을 전공했던 작가의 이력이 뒷바침하는 만큼 충분한 검토를 거쳐서 나온 설정임을 말해주는 듯 하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아바타'라는 영화를 위해 나비족의 언어인 나비어를 비롯하여 판도라 행성에 관한 세계관을 규정하는 설정집을 따로 만들었는데 그 분량이 어머어마해서 거의 백과사전 수준으로 두껍다더라는 과장섞인 일화까지 전해질 정도로 SF장르는 세계관과 설정 구축이 빈틈없이 탄탄하게 마련되어야 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물론 김초엽 작가가 그 정도까지 치밀하게 준비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미래의 모습은 본인의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굉장히 고심해서 구상하고 또 디테일하게 설계한 결과물임이 충분히 느껴진다.


무엇보다 내가 감탄했던 부분은 작가가 이러한 배경 설정에 관해 설명충을 등장시키거나 해서 굳이 주입식으로 브리핑하듯이 설명을 하는 구차하고 촌스러운 수법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어떤 세계관인지 감을 잡기 힘들어도 읽다보면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인물들의 대사나 상황묘사를 통해 적절한 타이밍에 하나씩 자연스럽게 파악이 되도록 정교한 수순처리를 해놓았는데 솔직히 이 부분은 경력이 짧은 신인작가의 솜씨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



다만 글쓰기 측면의 작가적 역량에 한정해서 본다면 이 작가의 필력은 그다지 인상적으로 와닿지는 않는다. 물론 순수문학이 아닌 장르문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사와 서술 문장들 모두 딱히 흠잡을데가 없을 정도로 준수한건 분명하지만 프로 글쟁이다운 기교나 문학적 감성이 거의 보이지 않고 문장들이 대체로 모범생의 답안처럼 너무 정직하고 딱딱한 편이긴 하다. 그리고 스토리의 전개에 있어서도 딱히 불필요하다거나 군더더기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전체적으로 루즈한 느낌이 있어서 다소 지루하다는 인상을 주는 편이다. 역시 이 작가도 장편이 처음이어서 그런지 긴 호흡을 효율적으로 컨트롤하는 능력이 아직은 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쉽게 느낀 부분은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비전이랄까... 아뭏든 그런 측면이었다.


이 작품이 19년에 발생한 '코로나' 사태에서 어느 정도 영감을 받았다는 것도 알겠고... 거대한 재앙을 극복하려는 인류의 노력과 그 와중에 위기를 전화위복 삼아 세상을 리셋하고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 하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인간 군상들에 의해 충돌하고 반목하는 이해관계들... 윌리엄 골딩의 위대한 고전 '파리대왕'이 떠오르는 부분도 더러 보이는데... 아뭏든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제법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브 플롯들이 마치 작품 속의 '모스바나' 덩굴처럼 뒤엉켜있어 그 속에서 뿌리와 줄기를 형성하는 핵심주제를 찾기가 어려웠다.


거기에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놀랍게도 이 책에서는 남성 캐릭터가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금방 죽는 용도 등의 별 의미없는 엑스트라를 제외하면 정말로 아예 없다. 심지어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윤재'라든지 '대니' 같은 누가 봐도 남자로 생각되는 이름도 알고보면 모두 여성 캐릭터다. 그래서 주인공들을 비롯한 '프림 빌리지'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활동을 보노라면 작가가 혹시 '아마조네스 왕국'을 꿈꾸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후반부 등장하는 동성애 코드도 회심의 반전장치라고 하기엔 작가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 성향만 드러낼 뿐인 장면이라 너무 뜬금없다.


작가가 작품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들은 대충 어떤건지 알겠는데 내게는 이것들이 페미니즘적 시각과 묘하게 엮여있는 모습으로 보여서 전체적으로 나와는 코드가 좀 안맞는 느낌이었고 하여튼 여러모로 아쉬웠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얘기하다보니 또 단점들만 수두룩하게 지적한 것 같은데 현재 한국 문학계에서 가장 핫한 작가 중의 한명인 김초엽은 나이에 비해 그 명성에 걸맞는 깊이감을 보여주는 실력자임은 분명하다는 생각이고 또한 앞으로의 발전가능성도 대단히 높아보인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자신의 단점도 알아서 스스로 보완해 나가리라 믿는다. 다만 자신의 주타겟층을 계속해서 여성 독자들로 한정짓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너무 노골적인 페미니니즘적 성향은 조금씩 줄여나가는게 어떨까 싶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T-hOs_4iVt0&t=4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610468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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