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 펄롱이 이렇게 일하러 나가고 싶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며칠째 뭔가 가슴에 얹힌 것 같았지만 펄롱은 평소처럼 옷을 입고 비첨스 감기약을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고 야적장으로 걸어갔다. 일꾼들이 벌써 나와정문 밖에 서서 추위에 손을 호호 불고 발을 구르며 서로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펄롱이 지금까지 데리고 있었던 일꾼들은 다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게으름 피우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사람한테서 최선을 끌어내려면 그 사람한테 잘해야 한다고, 미시즈 월슨이 말하곤 했다.

좋은 사람들이 있지, 펄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듯 크리스마스는 다른사람들에게서 가장 좋은 면과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거 알지? 적을 가까이 두라고들 하지. 사나운 개를 곁에 두면 순한 개가 물지 않는다고 잘 알겠지만."
펄롱은 갈색 카펫 위에 서로 엮인 검은 고리 무늬를 내려다보았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미시즈 케호가 펄롱의 소매를 건드리며 말했다. "말했듯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 수녀들이 안껴 있는 데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펄롱이 뒤로 물러서며 미시즈 케호를 마주 보았다. "그사람들이 갖는 힘은 딱 우리가 주는 만큼 아닌가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냐." 미시즈 케호는 말을 멈추고는 극도로 현실적인 여자가 가끔 남자들을 볼 때 짓는표정, 철없는 어린애 보듯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일린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사실 꽤 많았다.
"내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미시즈 케호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 정말 열심히 살아서, 나만큼이나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딸들도 잘 키우고 있고, 알겠지만 그곳하고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뿐이라고."
펄롱은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곧 누그러졌다.

잠시 멈춰서 생각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떠돌게 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한 해 일을 마치고 여기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게 싫지 않았다. 머리를 자르고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눈이 쌓여 있었고 인도 위에 먼저 간사람과 뒤따라온 사람의 발자국이 양쪽으로 뚜렷하면서도 또 그다지 뚜렷하지 않게 남아 있었다.

추위와 피로가 온몸을 덮쳐왔다. 조금씩이지만 눈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린 눈이 온 세상 위로 내려앉았다. 펄롱은 왜 편안하고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아일린은 벌써 자정미사 준비를 하면서 펄롱이 어디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거였다. 그러나 펄롱의 하루는 지금 무언가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펄롱은 언덕을 계속 올라가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갔다. 어둠과 적막 속에서 수녀원 바깥쪽을 따라 돌며 수녀원을 둘러보았다. 뒤쪽의 거대하고 높다란 담 꼭대기에도 깨진 유리가 박혀 있었다. 눈이 쌓였는데도 뾰족한 끝이 보였다. 내부는 보이지 않았고 검게 칠한 3층 유리창에는 쇠창살이 달려 있었다.

펄롱은 이발소에 있을 때 상상했었다.
지금은 문이 잠겨 있을 거라고, 아니면 다행히도 아이가 그안에 없을 거라고, 아니면, 만약 자기가 그렇게 한다면, 아이를 업고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가능할지, 아니면 어떻게 할지, 정말 뭔가를 할 것인지, 진짜로 거기 갈 것인지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게 펄롱이 두려워하며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다만 아이가 이번에는 펄롱의 외투를 순순히 받아 들었고 기꺼이 부축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펄롱은 어렵지 않게 아이를 데리고 진입로를 따라 나와 언덕을 내려가 부잣집들을 지나 다리를 향해 갔다. 강을 건널 때 검게 흘러가는 흑맥주처럼 짙은 물에 다시 시선이 갔다. 배로강이 자기가 갈 길을 안다는 것, 너무나 쉽게 자기 고집대로 흘러 드넓은 바다로 자유롭게 간다는 사실이부럽기도 했다. 외투가 없어서 추위가 더 선뜩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 누구도 세라에게 말을 걸거나 펄롱에게 어디로 데려가냐고 묻지 않았다. 펄롱은 말하거나 설명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최대한 상황을 넘기며 계속 갈 길을 갔다. 가슴속에 설렘과 함께, 아직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맞닥뜨릴 것이 분명한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솟았다.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샤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펄롱은 미시즈 월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근에 펄롱은 가끔 다른 삶, 다른 곳을 상상했고 혹시 그런 기질이 자기 핏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아버지도, 갑자기 불쑥 영국행 배를 타고 떠나버린 건 아니었을까?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

차가 수녀원에 가까워지면서 창문으로 비치는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펄롱은 마치 자기 자신을 만나러 가는듯한 기분이었다.

이 위는 이렇게 고요한데 왜 평화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걸까?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펄롱은 검게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 표면에 불 켜진 마을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게 참 많았다. 펄롱은 마을의 모습과 물에 비친 그림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마음 한편에는 오늘이 월요일 아침이어서 다른 건 다잊고 그냥 도로로 나가 평일 일상의 노동에 기계적으로 빠져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이 너무나 공허하고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왜 펄롱은 다른 남자들처럼 미사 마치고 맥주 한두 잔 마시면서 쉬고 즐기고 저녁 배부르게 먹고 불가에서 신문을 보다가 잠들 수 없는걸까?

펄롱은 억지로 자동차 키에 손을 뻗어 시동을 걸었다. 다시 길로 나와 펄롱은 새로 생긴 걱정은 밀어놓고 수녀원에서 본 아이를 생각했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은 그렇게 했지만 펄롱은 다른 아이들이 그토록 반기는 것을 겁내는 자기 아이를 보니 마음이 아팠고 이 아이가 용감하게 세상에 맞서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가끔 까만 머리카락에 눈빛이 똘망똘망한 딸들이 작은 마녀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여자들이 힘과 욕구와 사회적 권력을 가진 남자들을 겁내는 건 그럴 만하지만, 사실 눈치와 직관이 발달한 여자들이 훨씬 깊이 있고 두려운 존재였다. 여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측하고, 밤에 꿈으로 꾸고, 속마음을 읽었다.

펄롱은 자기 빵을 까맣게 태워버리고는 잘 지켜보지 않고 불에 너무 가까이 갖다 댄 자기 탓이라며 그냥 먹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목구멍에서 울컥 치밀었다. 마치 이런 밤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일요일 밤에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심란한 걸까?
펄롱은 어느새 또 미시즈 윌슨 집에서 지내던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펄롱은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아서, 색전구와 음악 등등 때문에 어쩐지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서, 또 조앤이 합창단에서 노래할 때 합창단의 일원으로 완전히 어우러진 듯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에, 또 레몬 냄새가 그정든 옛 부엌에서 크리스마스 무렵의 어머니를 떠올리게했기 때문일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곧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과를 머릿속으로 돌려보고 실제로 닥칠지 아닐지모르는 문제를 고민하느니보다는.

펄롱은 생각했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펄롱은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문을 닫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으며 최고 속도로 엉뚱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가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바닥에서 기어다니며 걸레질을 해서 마루에 윤을 내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또 수녀를 따라 예배당에서 나올 때 과수원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안쪽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는 사실, 수녀원과 그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있는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 조각이 죽 박혀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또 수녀가 석탄 대금을 치르러 잠깐 나오면서도 현관문을 열쇠로 잠그던 것도.

강한 타격은 아니었으나, 그때까지 아일린과 같이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뭔가 작지만 단단한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끝내 펄롱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것을 그냥 넘기지도 말로 풀어내지도 못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들 모두 저마다 추위에 대해 또 비에 대해 한마디씩 하며 서로 이게 무슨 의미냐고 — 이 날씨가 어떤 조짐은 아니냐고— 아니 또 이렇게 매운 날이 닥칠 줄누가 알았겠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학교로 갔고 엄마들은 고개를 숙이고 빨랫줄로 달려가는 데이제 익숙해졌거나 아니면 아예 빨래를 내다 걸 생각조차 안 했고 해지기 전에 셔츠 한 장이라도 말릴 수 있으리란 기대도 안 했다. 그러다가 밤이 왔고 다시 서리가 내렸고 한기가 칼날처럼 문 아래 틈으로 스며들어, 그럼에도 묵주기도를 올리려고 무릎 꿇은 이들의 무릎을 할퀴었다.

"속이 빈 자루는 제대로 설 수가 없는 법이지."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다. 빈주먹만도 못했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 예배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 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많은 사람들이 이 물음을 품고 살지만 동시에 이 물음에 대해서 대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화가 성립되기에는 그 대답이 너무 어렵거든요.

살아있음의 특징은 시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특정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고 늙어가며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하게 됩니다. 시간 속에서 산다는 것은 죽는 그날까지는 결코 멈출 수 없고 항상 움직이고 항상 변화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학에서 실존existence의 의미입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속한 사회 시스템과 역사라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두 번째는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이야말로 반드시 만나고 말, 그리고 이미 맞닿아 있으며 내가 감히 예측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는 절대적인 한계입니다. 내가 하루를 사는 만큼 죽음은 나에게 성큼 다가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사람, 모든 사건을 똑같이 신경 쓰며 살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대단히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도, 반드시 붙들고 살아갈 무언가가 있어도 삶의 허무가 전부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허무는 우리가 살아 있는 토대이기도 합니다.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있을 때 ‘빛’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처럼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언제 대체되더라도 적응하고, 어느 자리라도 대체할 수 있는 인재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사는 일이 엄청 불안하고 힘든 일인데도, 그만큼 배를 채우는 일을 보장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마음을 채워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자리를 채우고 누군가를 대체할 수 있다는 말은 나 역시 누군가에 의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거든요. 반드시 내가 아니어도 되는 것이지요.
나를 대체할 뿐만 아니라 소위 ‘상위호환’이라 부를 만한 사람도 세상에는 무척 많습니다.

머리로는 재빠르게 적응할 수 있습니다. 맞아요, 내 자리에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죠. 나도 그 정도는 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람인 척하는 거죠. 그러나 기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가치가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쓰다 버리는 소모품이 된 느낌, 꿀이 없으면 대충 올리고당, 설탕 등으로 쓰세요 같은 취급을 받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요리 선생님이 가끔 그런 말씀하시잖아요. "요리 못하는 사람들 여기서 올리브유 넣으라고 하니까, 올리브유 없으면 대충 카놀라유 넣으면 될 것 같죠?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요리 망치는 거예요." 요리스승의 팁을 보면 내 배 속으로 들어가는 요리에도 대체불가 품목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나는 대체가능하다니! 그래서 한번 이런 의문이 떠오르면 그 의문은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조금만 납득이 되지 않아도 도자기를 바로 깨뜨리는 엄격한 장인 같은 데카르트식 방법은 우리를 온갖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게 하는 한편, 우리를 주눅 들고 좌절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 보니 남는 게 없는 것 같거든요. 아니,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남는 게 없단 말이야?

게다가 흄은 아이디어끼리 자가 증식할 수 있다고 말하거든요. 흄은 단순한 아이디어들이 결합해 다시 복잡한 아이디어로 나아가며, 우리는 덕분에 어렵고 추상적인 생각,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까지 더하면 나라는 꽃다발은 그 꽃다발을 구성하는 꽃들 일부는 겹치지만 전체로서는 그 무엇과도 겹치지 않는 엄청나게 거대한 꽃다발이 될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그 사건이 내 마음에 남기는 것, 그로부터 얻은 생각은 서로 다를 테니까요.

흄이 말하는 ‘나’는 정해진 포장 안에 꽃을 채워 넣는다기보다 꽃들을 연결하여 지도를 만드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나의 경험이 바뀌지 않아도 지도는 얼마든지 변형되고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네이글은 우리가 왜 나의 의미를 묻게 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대체불가능한, 나라는 사람만이 가지는 의미 혹은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 묻는 것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도’ 가치 있는 존재로 생각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업무, 성과 등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것만이 나를 구성하고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과 또 다른 객관적인 가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물었던 ‘나의 의미’는 나라는 사람의 중요성과 무게에 관한 것입니다. 대체불가능한 의미라는 것은 쉽게 흔들리지 않을 중요성과 무게를 뜻했던 거죠.

흄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어떤 판단이나 평가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여지가 남지요. 지금 아는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 없고,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여지 말입니다. 지금까지 쭉 그래왔다는 것만으로는 어떤 확실성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과 그 해석은 시간이 흐르는 한 계속 열려 있으니까요.

내가 나의 삶에 큰 의미를 느껴도, 내가 나의 삶이 딱히 가치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실제로 나의 삶 전부를 담은 평가일 수는 없습니다. 나의 의미와 가치, 무게는 결코 일의 성과나 관계의 수와 빈도, 내 성격 유형 같은 기준에 붙들리는 사냥감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나에게는 언제나 누구도, 심지어 나 자신도 감히 다 쓸어 담아 정리할 수 없는 여지가 항상 존재합니다. 어떤 규정도, 평가도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부분, 놓치는 부분이 반드시 있는 것이죠.

행복하다는 것은 만족한다는 뜻이거든요. 일반적으로 행복이란 감정적으로 흡족한 기분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삶이 적절하게 나아가고 있다/잘못되지 않았다는 자기 삶에 대한 가치 판단까지 결합한 것을 의미합니다.

‘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하고 있어서 자신 있게 행복하게 말할 수 있다’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 문장 속에서 ‘자신’은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하지만 문장 뒤에 숨은 진짜 의미는 어떨까요? 주어진 역할은 말 그대로 나에게 기대되는 역할, 해야 할 일의 집합이지 나 자신이 아닙니다.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 역에 걸맞게 ‘해야 하는 것’을 수행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사회 속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 스스로가 나를 어른에 걸맞다고 평가하는지와 별개로, 나의 일상에 타인에 대한 그리고 타인을 위한 많은 의무를 무척 많이 포함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보통의 삶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지는 둘째치고, 무엇을 보통이라 생각하든 보통은 본래 어려운 거예요. 보통의 삶에는 보통의 의무들이 함께하기 때문이고, 그 의무는 나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기력 등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보통이라는 것은 이상한 말입니다. 누구나 그렇다는데 막상 내 옆사람의 삶이 나와 똑같지는 않거든요. 내 삶이 보통이든 보통이 아니든, 혹은 보통 따위는 본래 없는 것이든 어찌 되었든 우리는 일단 세운 삶의 궤적을 쉽게 뒤틀지 못합니다. 이미 내가 선택해서 이만큼이나 걸어온 길이니까요. 이제와서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지금과 같은 보통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또 다른 의무에 눈을 뜰 필요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 해야 하는 것에 포함되는 것은 나의 사회적 역할이나 타인에 대한 의무만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돌보아주어야 하는, 늘 돌봄이 필요한 존재에는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의무에는 타인에 대한 의무도 있지만 나 자신에 대한 의무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나를 돌볼 의무도 있는 것이죠.

사람을 수단만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대하라고 합니다. 어떤 역할로서 나를 바라보는 일은 그 일을 잘해내는 도구, 방법으로서 나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 역할을 위해서 나 자신은 수단이 되는 것이죠. 물론 우리에게는 수단이 필요합니다. 목표만 성대하고 수단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잖아요. 나 자신이 있으려면 역할을 다하여 관계도 맺고 먹고는 살아야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요. 그러나 나는 단지 그 역할들을 위한 수단일 뿐인가요? 나는 나로 살기 위해 다른 수단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모든 수단을 낳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내 삶 자체가 목적입니다. 당신이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잘하지 못해도, 당신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당신 목적으로서 이렇게 존재하고 수많은 이야기를 그려왔습니다. 나 자신을 그런 존재로 대해주고 있나요?

대표적인 것이 내가 가진 소질 및 재능을 계발하는 일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하면 좋을지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그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기분 좋아지는 일을 해도 좋습니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역시 행복하게 해줘도 좋아요. 어른이라고 해서, 수많은 의무가 있다고 해서 자신을 늘 뒷전으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돌보는 일,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음미할 수 있는 일 역시 내 삶의 의무 중 하나입니다. 타인에 대한 의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나에 대한 의무입니다. 내가 스스로를 인격적으로 잘 대해주지 않으면서 타인에게‘만’ 인격적으로 잘 대하려 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점차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무감해지기 때문입니다.

괜찮아요, 문제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문제가 아주 많아도 괜찮아요.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삶, 그리고 지금을 살아내는 나의 하루하루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살아서 문제일 수도 있지요. 또한 문제가 있다고 해서 현재의 내 삶에 좋은 일 따위는 하나도 없다고, 나는 내게 지금 주어진 그 어떤 것에도 감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괜찮아요. 문제 있을 수 있지요, 아쉬울 것 없지만 죽고 싶을 수도 있고요. 그게 무슨 큰 흉이라고요.

‘문제’라는 말의 의미는 고작 ‘물음표를 붙인 무엇’일 뿐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를 다 풀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로 ‘자신있게’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돌보는 의무를 우리의 일상 속에 포함해주어야 합니다.

공허한 행복을 채우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수고를 동반합니다. 당신을 당신으로서 살리고, 다른 사람의 삶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자기 삶의 기쁨을 공허하지 않게 느낄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돌볼 에너지를 당신의 일상 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남겨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삶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나씩 알아가다 보면 조금씩 알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밥 한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 소위 ‘슬럼프’라 부르는 것이 찾아왔습니다. 예전에는 재미있던 것이 재미가 없어지고, 하고 싶어서 열심히 해도 모자를 마당에 하고 싶은 마음도 떨어졌고요.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 성취감이 직접적으로, 이전보다 크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른이 되고 보니 무엇인가를 해내면 해낼수록 오히려 새롭게 잘해내야만 하는 과제가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많이 했다고 일이 쉬워지는 것도 아니고요. 어떻게 익숙해졌다 한들, 또다시 어려운 일이 새로 등장합니다, 책임져야 할 것은 점점 더 많아지고요.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세울 때 우리의 등을 밀어주는 궁극적 동기는 인생의 행복인 셈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지금 의욕이 없고 어떤 목표를 세우면 좋을지 혼란스럽다는 것은 어쩌면 나의 지금 이 상태,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나의 단기 혹은 중장기 목표가 인생의 궁극 목적인 행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신호일 수도 있지요. 행복한데,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의욕이 없고 무얼 향해 살아야 하는지 잘 보이지 않는 일은 없을 것 같거든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 같은 행복을 위해서는 개별 목표와 성취, 지금의 만족감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만족감을 위해서는 순간적인 만족감을 오히려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적 성취와 그에 따른 만족을 지나치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면 삶 전반의 균형을 잃기 쉽고, 그것 역시 개별적이고 일시적인 성취이지 인생 전체의 만족을 보장하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이상하거나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만의 개인적인 문제도 아니고요.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하면 우리의 행복은 항상 공사가 진행 중인 건축물 같은 것이고,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길고 긴 이야기의 끝에 나 자신의 삶을 어떻게 느끼는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의 특성, 곧 ‘사람다움’을 균형 있게 발휘하며 사는 삶을 살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동양철학인 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의 사랑은 좋은 세계를 만드는 일까지, 그 범위가 무척 넓어지지만 그렇다고 나를 뒷전으로 두라는 말은 아닙니다.

만일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도 관심이 없고, 평소에도 내 몸은 전혀 돌보지 않는다면요. 나에서 출발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하는데, 내가 나에게 관심이 없고 나를 아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를 아끼는 삶이란 나 자신을 아는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소크라테스 본인이 한 말로 잘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는 원래 아테네 델포이 신전의 현판에서 유래한 격언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 대신 자신의 영혼을 살피고 돌보라는 말로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안다는 것은 내 영혼 곧, 나의 마음을 살펴보고 돌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을 살피고 돌본다는 것은 내가 진짜 잘 살기 위해 나의 삶에 그만큼 관심을 갖고, 진짜 잘 사는 일이 무엇인지, 나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지, 나의 살아감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나의 마음이 제기하는 의문과 의혹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생각하는 일입니다. 진짜 ‘힐링’이란 이런 것입니다. 내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고, 달아나지 않고 내 마음을 진실하고 성실하게 마주 보는 일이요.

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떻게 죽는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가 중요하고, 말만 앞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았는지가 중요했지요. 말 그대로, 인생의 방향과 실천, 그 전체의 모습이 중요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단지 자신에게 내려진 판결을 수용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에 관심이 없고, 그리하여 정의롭지 않은 판결을 내리는 일에 부끄러움이 없었던 사람들 앞에서 끝까지 자신의 삶을 추구한 것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가치 있는 인생의 목적을 직접 보여준 것이지요. 여론보다, 법보다, 전통보다 소중한 것을요.

소크라테스가 권하는 성찰은 마음의 반성이기도 하지만 조금씩 다르게 움직이는 행동이며 실천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은 완벽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에 더 가깝지만요. 우리는 대신 이렇게 바꾸어 말하면 어떨까요? 내가 늘 안녕하기를 바라는 것이 내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고, 진실로 내가 안녕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늘 스스로 질문할 수밖에 없다고요.

나는 내 삶이 어렵고 괴로워도 내 삶에서 나를 치우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가끔은 정말 그런 기분이 들지만, 그렇게 느끼는 까닭은 지금의 내 삶이 달라지고 나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렵고 괴로운 상태를 겪는 일이 싫은 것이지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내가 지금 행복을 느끼고 있다면 과연 이 행복에서 나를 제거하기를 바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의’ 행복은 될 수 없으니까요. 나로 살면서 계속해서 내가 한쪽으로 치워진 무대 세트처럼 살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내 삶을 나의 것으로 느끼고 싶고, 내 삶을 내 것으로 느끼며 사는 내가 안녕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부디 안녕한 나의 삶을 위해 자주 묻고 대화하며 살피고 돌보아주세요, 나의 영혼을요. 습관이 된 생각 뭉치를 반사적으로 잇고 잇는 것이 아니라, 그런 습관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서서 마음을 기울여주세요.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나에게 묻고 또 듣고, 그러면서 정말로 생생한 ‘생각’을 해주세요.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에게 안부를 묻고 대화하듯이요.

나는 잘 살고 있나요? 가장 소중한 나의 삶을 그만큼 돌보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는 순간의 확답보다 진실한 물음과 대화의 시간, 돌봄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안녕하기를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