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이 물음을 품고 살지만 동시에 이 물음에 대해서 대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화가 성립되기에는 그 대답이 너무 어렵거든요.
살아있음의 특징은 시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특정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고 늙어가며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하게 됩니다. 시간 속에서 산다는 것은 죽는 그날까지는 결코 멈출 수 없고 항상 움직이고 항상 변화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학에서 실존existence의 의미입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속한 사회 시스템과 역사라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두 번째는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이야말로 반드시 만나고 말, 그리고 이미 맞닿아 있으며 내가 감히 예측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는 절대적인 한계입니다. 내가 하루를 사는 만큼 죽음은 나에게 성큼 다가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사람, 모든 사건을 똑같이 신경 쓰며 살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대단히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도, 반드시 붙들고 살아갈 무언가가 있어도 삶의 허무가 전부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허무는 우리가 살아 있는 토대이기도 합니다.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있을 때 ‘빛’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처럼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언제 대체되더라도 적응하고, 어느 자리라도 대체할 수 있는 인재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사는 일이 엄청 불안하고 힘든 일인데도, 그만큼 배를 채우는 일을 보장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마음을 채워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자리를 채우고 누군가를 대체할 수 있다는 말은 나 역시 누군가에 의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거든요. 반드시 내가 아니어도 되는 것이지요. 나를 대체할 뿐만 아니라 소위 ‘상위호환’이라 부를 만한 사람도 세상에는 무척 많습니다.
머리로는 재빠르게 적응할 수 있습니다. 맞아요, 내 자리에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죠. 나도 그 정도는 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람인 척하는 거죠. 그러나 기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가치가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쓰다 버리는 소모품이 된 느낌, 꿀이 없으면 대충 올리고당, 설탕 등으로 쓰세요 같은 취급을 받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요리 선생님이 가끔 그런 말씀하시잖아요. "요리 못하는 사람들 여기서 올리브유 넣으라고 하니까, 올리브유 없으면 대충 카놀라유 넣으면 될 것 같죠?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요리 망치는 거예요." 요리스승의 팁을 보면 내 배 속으로 들어가는 요리에도 대체불가 품목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나는 대체가능하다니! 그래서 한번 이런 의문이 떠오르면 그 의문은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조금만 납득이 되지 않아도 도자기를 바로 깨뜨리는 엄격한 장인 같은 데카르트식 방법은 우리를 온갖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게 하는 한편, 우리를 주눅 들고 좌절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 보니 남는 게 없는 것 같거든요. 아니,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남는 게 없단 말이야?
게다가 흄은 아이디어끼리 자가 증식할 수 있다고 말하거든요. 흄은 단순한 아이디어들이 결합해 다시 복잡한 아이디어로 나아가며, 우리는 덕분에 어렵고 추상적인 생각,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까지 더하면 나라는 꽃다발은 그 꽃다발을 구성하는 꽃들 일부는 겹치지만 전체로서는 그 무엇과도 겹치지 않는 엄청나게 거대한 꽃다발이 될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그 사건이 내 마음에 남기는 것, 그로부터 얻은 생각은 서로 다를 테니까요.
흄이 말하는 ‘나’는 정해진 포장 안에 꽃을 채워 넣는다기보다 꽃들을 연결하여 지도를 만드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나의 경험이 바뀌지 않아도 지도는 얼마든지 변형되고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네이글은 우리가 왜 나의 의미를 묻게 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대체불가능한, 나라는 사람만이 가지는 의미 혹은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 묻는 것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도’ 가치 있는 존재로 생각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업무, 성과 등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것만이 나를 구성하고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과 또 다른 객관적인 가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물었던 ‘나의 의미’는 나라는 사람의 중요성과 무게에 관한 것입니다. 대체불가능한 의미라는 것은 쉽게 흔들리지 않을 중요성과 무게를 뜻했던 거죠.
흄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어떤 판단이나 평가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여지가 남지요. 지금 아는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 없고,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여지 말입니다. 지금까지 쭉 그래왔다는 것만으로는 어떤 확실성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과 그 해석은 시간이 흐르는 한 계속 열려 있으니까요.
내가 나의 삶에 큰 의미를 느껴도, 내가 나의 삶이 딱히 가치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실제로 나의 삶 전부를 담은 평가일 수는 없습니다. 나의 의미와 가치, 무게는 결코 일의 성과나 관계의 수와 빈도, 내 성격 유형 같은 기준에 붙들리는 사냥감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나에게는 언제나 누구도, 심지어 나 자신도 감히 다 쓸어 담아 정리할 수 없는 여지가 항상 존재합니다. 어떤 규정도, 평가도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부분, 놓치는 부분이 반드시 있는 것이죠.
행복하다는 것은 만족한다는 뜻이거든요. 일반적으로 행복이란 감정적으로 흡족한 기분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삶이 적절하게 나아가고 있다/잘못되지 않았다는 자기 삶에 대한 가치 판단까지 결합한 것을 의미합니다.
‘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하고 있어서 자신 있게 행복하게 말할 수 있다’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 문장 속에서 ‘자신’은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하지만 문장 뒤에 숨은 진짜 의미는 어떨까요? 주어진 역할은 말 그대로 나에게 기대되는 역할, 해야 할 일의 집합이지 나 자신이 아닙니다.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 역에 걸맞게 ‘해야 하는 것’을 수행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사회 속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 스스로가 나를 어른에 걸맞다고 평가하는지와 별개로, 나의 일상에 타인에 대한 그리고 타인을 위한 많은 의무를 무척 많이 포함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보통의 삶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지는 둘째치고, 무엇을 보통이라 생각하든 보통은 본래 어려운 거예요. 보통의 삶에는 보통의 의무들이 함께하기 때문이고, 그 의무는 나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기력 등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보통이라는 것은 이상한 말입니다. 누구나 그렇다는데 막상 내 옆사람의 삶이 나와 똑같지는 않거든요. 내 삶이 보통이든 보통이 아니든, 혹은 보통 따위는 본래 없는 것이든 어찌 되었든 우리는 일단 세운 삶의 궤적을 쉽게 뒤틀지 못합니다. 이미 내가 선택해서 이만큼이나 걸어온 길이니까요. 이제와서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지금과 같은 보통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또 다른 의무에 눈을 뜰 필요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 해야 하는 것에 포함되는 것은 나의 사회적 역할이나 타인에 대한 의무만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돌보아주어야 하는, 늘 돌봄이 필요한 존재에는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의무에는 타인에 대한 의무도 있지만 나 자신에 대한 의무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나를 돌볼 의무도 있는 것이죠.
사람을 수단만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대하라고 합니다. 어떤 역할로서 나를 바라보는 일은 그 일을 잘해내는 도구, 방법으로서 나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 역할을 위해서 나 자신은 수단이 되는 것이죠. 물론 우리에게는 수단이 필요합니다. 목표만 성대하고 수단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잖아요. 나 자신이 있으려면 역할을 다하여 관계도 맺고 먹고는 살아야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요. 그러나 나는 단지 그 역할들을 위한 수단일 뿐인가요? 나는 나로 살기 위해 다른 수단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모든 수단을 낳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내 삶 자체가 목적입니다. 당신이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잘하지 못해도, 당신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당신 목적으로서 이렇게 존재하고 수많은 이야기를 그려왔습니다. 나 자신을 그런 존재로 대해주고 있나요?
대표적인 것이 내가 가진 소질 및 재능을 계발하는 일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하면 좋을지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그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기분 좋아지는 일을 해도 좋습니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역시 행복하게 해줘도 좋아요. 어른이라고 해서, 수많은 의무가 있다고 해서 자신을 늘 뒷전으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돌보는 일,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음미할 수 있는 일 역시 내 삶의 의무 중 하나입니다. 타인에 대한 의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나에 대한 의무입니다. 내가 스스로를 인격적으로 잘 대해주지 않으면서 타인에게‘만’ 인격적으로 잘 대하려 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점차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무감해지기 때문입니다.
괜찮아요, 문제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문제가 아주 많아도 괜찮아요.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삶, 그리고 지금을 살아내는 나의 하루하루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살아서 문제일 수도 있지요. 또한 문제가 있다고 해서 현재의 내 삶에 좋은 일 따위는 하나도 없다고, 나는 내게 지금 주어진 그 어떤 것에도 감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괜찮아요. 문제 있을 수 있지요, 아쉬울 것 없지만 죽고 싶을 수도 있고요. 그게 무슨 큰 흉이라고요.
‘문제’라는 말의 의미는 고작 ‘물음표를 붙인 무엇’일 뿐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를 다 풀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로 ‘자신있게’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돌보는 의무를 우리의 일상 속에 포함해주어야 합니다.
공허한 행복을 채우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수고를 동반합니다. 당신을 당신으로서 살리고, 다른 사람의 삶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자기 삶의 기쁨을 공허하지 않게 느낄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돌볼 에너지를 당신의 일상 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남겨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삶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나씩 알아가다 보면 조금씩 알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밥 한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 소위 ‘슬럼프’라 부르는 것이 찾아왔습니다. 예전에는 재미있던 것이 재미가 없어지고, 하고 싶어서 열심히 해도 모자를 마당에 하고 싶은 마음도 떨어졌고요.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 성취감이 직접적으로, 이전보다 크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른이 되고 보니 무엇인가를 해내면 해낼수록 오히려 새롭게 잘해내야만 하는 과제가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많이 했다고 일이 쉬워지는 것도 아니고요. 어떻게 익숙해졌다 한들, 또다시 어려운 일이 새로 등장합니다, 책임져야 할 것은 점점 더 많아지고요.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세울 때 우리의 등을 밀어주는 궁극적 동기는 인생의 행복인 셈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지금 의욕이 없고 어떤 목표를 세우면 좋을지 혼란스럽다는 것은 어쩌면 나의 지금 이 상태,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나의 단기 혹은 중장기 목표가 인생의 궁극 목적인 행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신호일 수도 있지요. 행복한데,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의욕이 없고 무얼 향해 살아야 하는지 잘 보이지 않는 일은 없을 것 같거든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 같은 행복을 위해서는 개별 목표와 성취, 지금의 만족감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만족감을 위해서는 순간적인 만족감을 오히려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적 성취와 그에 따른 만족을 지나치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면 삶 전반의 균형을 잃기 쉽고, 그것 역시 개별적이고 일시적인 성취이지 인생 전체의 만족을 보장하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이상하거나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만의 개인적인 문제도 아니고요.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하면 우리의 행복은 항상 공사가 진행 중인 건축물 같은 것이고,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길고 긴 이야기의 끝에 나 자신의 삶을 어떻게 느끼는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의 특성, 곧 ‘사람다움’을 균형 있게 발휘하며 사는 삶을 살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동양철학인 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의 사랑은 좋은 세계를 만드는 일까지, 그 범위가 무척 넓어지지만 그렇다고 나를 뒷전으로 두라는 말은 아닙니다.
만일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도 관심이 없고, 평소에도 내 몸은 전혀 돌보지 않는다면요. 나에서 출발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하는데, 내가 나에게 관심이 없고 나를 아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를 아끼는 삶이란 나 자신을 아는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소크라테스 본인이 한 말로 잘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는 원래 아테네 델포이 신전의 현판에서 유래한 격언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 대신 자신의 영혼을 살피고 돌보라는 말로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안다는 것은 내 영혼 곧, 나의 마음을 살펴보고 돌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을 살피고 돌본다는 것은 내가 진짜 잘 살기 위해 나의 삶에 그만큼 관심을 갖고, 진짜 잘 사는 일이 무엇인지, 나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지, 나의 살아감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나의 마음이 제기하는 의문과 의혹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생각하는 일입니다. 진짜 ‘힐링’이란 이런 것입니다. 내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고, 달아나지 않고 내 마음을 진실하고 성실하게 마주 보는 일이요.
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떻게 죽는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가 중요하고, 말만 앞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았는지가 중요했지요. 말 그대로, 인생의 방향과 실천, 그 전체의 모습이 중요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단지 자신에게 내려진 판결을 수용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에 관심이 없고, 그리하여 정의롭지 않은 판결을 내리는 일에 부끄러움이 없었던 사람들 앞에서 끝까지 자신의 삶을 추구한 것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가치 있는 인생의 목적을 직접 보여준 것이지요. 여론보다, 법보다, 전통보다 소중한 것을요.
소크라테스가 권하는 성찰은 마음의 반성이기도 하지만 조금씩 다르게 움직이는 행동이며 실천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은 완벽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에 더 가깝지만요. 우리는 대신 이렇게 바꾸어 말하면 어떨까요? 내가 늘 안녕하기를 바라는 것이 내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고, 진실로 내가 안녕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늘 스스로 질문할 수밖에 없다고요.
나는 내 삶이 어렵고 괴로워도 내 삶에서 나를 치우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가끔은 정말 그런 기분이 들지만, 그렇게 느끼는 까닭은 지금의 내 삶이 달라지고 나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렵고 괴로운 상태를 겪는 일이 싫은 것이지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내가 지금 행복을 느끼고 있다면 과연 이 행복에서 나를 제거하기를 바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의’ 행복은 될 수 없으니까요. 나로 살면서 계속해서 내가 한쪽으로 치워진 무대 세트처럼 살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내 삶을 나의 것으로 느끼고 싶고, 내 삶을 내 것으로 느끼며 사는 내가 안녕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부디 안녕한 나의 삶을 위해 자주 묻고 대화하며 살피고 돌보아주세요, 나의 영혼을요. 습관이 된 생각 뭉치를 반사적으로 잇고 잇는 것이 아니라, 그런 습관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서서 마음을 기울여주세요.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나에게 묻고 또 듣고, 그러면서 정말로 생생한 ‘생각’을 해주세요.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에게 안부를 묻고 대화하듯이요.
나는 잘 살고 있나요? 가장 소중한 나의 삶을 그만큼 돌보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는 순간의 확답보다 진실한 물음과 대화의 시간, 돌봄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안녕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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