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이 물음을 품고 살지만 동시에 이 물음에 대해서 대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화가 성립되기에는 그 대답이 너무 어렵거든요.

살아있음의 특징은 시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특정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고 늙어가며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하게 됩니다. 시간 속에서 산다는 것은 죽는 그날까지는 결코 멈출 수 없고 항상 움직이고 항상 변화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학에서 실존existence의 의미입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속한 사회 시스템과 역사라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두 번째는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이야말로 반드시 만나고 말, 그리고 이미 맞닿아 있으며 내가 감히 예측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는 절대적인 한계입니다. 내가 하루를 사는 만큼 죽음은 나에게 성큼 다가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사람, 모든 사건을 똑같이 신경 쓰며 살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대단히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도, 반드시 붙들고 살아갈 무언가가 있어도 삶의 허무가 전부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허무는 우리가 살아 있는 토대이기도 합니다.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있을 때 ‘빛’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처럼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언제 대체되더라도 적응하고, 어느 자리라도 대체할 수 있는 인재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사는 일이 엄청 불안하고 힘든 일인데도, 그만큼 배를 채우는 일을 보장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마음을 채워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자리를 채우고 누군가를 대체할 수 있다는 말은 나 역시 누군가에 의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거든요. 반드시 내가 아니어도 되는 것이지요.
나를 대체할 뿐만 아니라 소위 ‘상위호환’이라 부를 만한 사람도 세상에는 무척 많습니다.

머리로는 재빠르게 적응할 수 있습니다. 맞아요, 내 자리에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죠. 나도 그 정도는 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람인 척하는 거죠. 그러나 기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가치가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쓰다 버리는 소모품이 된 느낌, 꿀이 없으면 대충 올리고당, 설탕 등으로 쓰세요 같은 취급을 받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요리 선생님이 가끔 그런 말씀하시잖아요. "요리 못하는 사람들 여기서 올리브유 넣으라고 하니까, 올리브유 없으면 대충 카놀라유 넣으면 될 것 같죠?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요리 망치는 거예요." 요리스승의 팁을 보면 내 배 속으로 들어가는 요리에도 대체불가 품목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나는 대체가능하다니! 그래서 한번 이런 의문이 떠오르면 그 의문은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조금만 납득이 되지 않아도 도자기를 바로 깨뜨리는 엄격한 장인 같은 데카르트식 방법은 우리를 온갖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게 하는 한편, 우리를 주눅 들고 좌절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 보니 남는 게 없는 것 같거든요. 아니,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남는 게 없단 말이야?

게다가 흄은 아이디어끼리 자가 증식할 수 있다고 말하거든요. 흄은 단순한 아이디어들이 결합해 다시 복잡한 아이디어로 나아가며, 우리는 덕분에 어렵고 추상적인 생각,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까지 더하면 나라는 꽃다발은 그 꽃다발을 구성하는 꽃들 일부는 겹치지만 전체로서는 그 무엇과도 겹치지 않는 엄청나게 거대한 꽃다발이 될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그 사건이 내 마음에 남기는 것, 그로부터 얻은 생각은 서로 다를 테니까요.

흄이 말하는 ‘나’는 정해진 포장 안에 꽃을 채워 넣는다기보다 꽃들을 연결하여 지도를 만드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나의 경험이 바뀌지 않아도 지도는 얼마든지 변형되고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네이글은 우리가 왜 나의 의미를 묻게 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대체불가능한, 나라는 사람만이 가지는 의미 혹은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 묻는 것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도’ 가치 있는 존재로 생각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업무, 성과 등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것만이 나를 구성하고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과 또 다른 객관적인 가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물었던 ‘나의 의미’는 나라는 사람의 중요성과 무게에 관한 것입니다. 대체불가능한 의미라는 것은 쉽게 흔들리지 않을 중요성과 무게를 뜻했던 거죠.

흄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어떤 판단이나 평가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여지가 남지요. 지금 아는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 없고,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여지 말입니다. 지금까지 쭉 그래왔다는 것만으로는 어떤 확실성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과 그 해석은 시간이 흐르는 한 계속 열려 있으니까요.

내가 나의 삶에 큰 의미를 느껴도, 내가 나의 삶이 딱히 가치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실제로 나의 삶 전부를 담은 평가일 수는 없습니다. 나의 의미와 가치, 무게는 결코 일의 성과나 관계의 수와 빈도, 내 성격 유형 같은 기준에 붙들리는 사냥감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나에게는 언제나 누구도, 심지어 나 자신도 감히 다 쓸어 담아 정리할 수 없는 여지가 항상 존재합니다. 어떤 규정도, 평가도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부분, 놓치는 부분이 반드시 있는 것이죠.

행복하다는 것은 만족한다는 뜻이거든요. 일반적으로 행복이란 감정적으로 흡족한 기분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삶이 적절하게 나아가고 있다/잘못되지 않았다는 자기 삶에 대한 가치 판단까지 결합한 것을 의미합니다.

‘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하고 있어서 자신 있게 행복하게 말할 수 있다’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 문장 속에서 ‘자신’은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하지만 문장 뒤에 숨은 진짜 의미는 어떨까요? 주어진 역할은 말 그대로 나에게 기대되는 역할, 해야 할 일의 집합이지 나 자신이 아닙니다.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 역에 걸맞게 ‘해야 하는 것’을 수행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사회 속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 스스로가 나를 어른에 걸맞다고 평가하는지와 별개로, 나의 일상에 타인에 대한 그리고 타인을 위한 많은 의무를 무척 많이 포함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보통의 삶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지는 둘째치고, 무엇을 보통이라 생각하든 보통은 본래 어려운 거예요. 보통의 삶에는 보통의 의무들이 함께하기 때문이고, 그 의무는 나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기력 등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보통이라는 것은 이상한 말입니다. 누구나 그렇다는데 막상 내 옆사람의 삶이 나와 똑같지는 않거든요. 내 삶이 보통이든 보통이 아니든, 혹은 보통 따위는 본래 없는 것이든 어찌 되었든 우리는 일단 세운 삶의 궤적을 쉽게 뒤틀지 못합니다. 이미 내가 선택해서 이만큼이나 걸어온 길이니까요. 이제와서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지금과 같은 보통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또 다른 의무에 눈을 뜰 필요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 해야 하는 것에 포함되는 것은 나의 사회적 역할이나 타인에 대한 의무만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돌보아주어야 하는, 늘 돌봄이 필요한 존재에는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의무에는 타인에 대한 의무도 있지만 나 자신에 대한 의무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나를 돌볼 의무도 있는 것이죠.

사람을 수단만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대하라고 합니다. 어떤 역할로서 나를 바라보는 일은 그 일을 잘해내는 도구, 방법으로서 나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 역할을 위해서 나 자신은 수단이 되는 것이죠. 물론 우리에게는 수단이 필요합니다. 목표만 성대하고 수단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잖아요. 나 자신이 있으려면 역할을 다하여 관계도 맺고 먹고는 살아야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요. 그러나 나는 단지 그 역할들을 위한 수단일 뿐인가요? 나는 나로 살기 위해 다른 수단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모든 수단을 낳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내 삶 자체가 목적입니다. 당신이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잘하지 못해도, 당신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당신 목적으로서 이렇게 존재하고 수많은 이야기를 그려왔습니다. 나 자신을 그런 존재로 대해주고 있나요?

대표적인 것이 내가 가진 소질 및 재능을 계발하는 일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하면 좋을지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그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기분 좋아지는 일을 해도 좋습니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역시 행복하게 해줘도 좋아요. 어른이라고 해서, 수많은 의무가 있다고 해서 자신을 늘 뒷전으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돌보는 일,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음미할 수 있는 일 역시 내 삶의 의무 중 하나입니다. 타인에 대한 의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나에 대한 의무입니다. 내가 스스로를 인격적으로 잘 대해주지 않으면서 타인에게‘만’ 인격적으로 잘 대하려 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점차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무감해지기 때문입니다.

괜찮아요, 문제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문제가 아주 많아도 괜찮아요.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삶, 그리고 지금을 살아내는 나의 하루하루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살아서 문제일 수도 있지요. 또한 문제가 있다고 해서 현재의 내 삶에 좋은 일 따위는 하나도 없다고, 나는 내게 지금 주어진 그 어떤 것에도 감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괜찮아요. 문제 있을 수 있지요, 아쉬울 것 없지만 죽고 싶을 수도 있고요. 그게 무슨 큰 흉이라고요.

‘문제’라는 말의 의미는 고작 ‘물음표를 붙인 무엇’일 뿐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를 다 풀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로 ‘자신있게’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돌보는 의무를 우리의 일상 속에 포함해주어야 합니다.

공허한 행복을 채우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수고를 동반합니다. 당신을 당신으로서 살리고, 다른 사람의 삶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자기 삶의 기쁨을 공허하지 않게 느낄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돌볼 에너지를 당신의 일상 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남겨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삶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나씩 알아가다 보면 조금씩 알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밥 한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 소위 ‘슬럼프’라 부르는 것이 찾아왔습니다. 예전에는 재미있던 것이 재미가 없어지고, 하고 싶어서 열심히 해도 모자를 마당에 하고 싶은 마음도 떨어졌고요.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 성취감이 직접적으로, 이전보다 크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른이 되고 보니 무엇인가를 해내면 해낼수록 오히려 새롭게 잘해내야만 하는 과제가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많이 했다고 일이 쉬워지는 것도 아니고요. 어떻게 익숙해졌다 한들, 또다시 어려운 일이 새로 등장합니다, 책임져야 할 것은 점점 더 많아지고요.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세울 때 우리의 등을 밀어주는 궁극적 동기는 인생의 행복인 셈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지금 의욕이 없고 어떤 목표를 세우면 좋을지 혼란스럽다는 것은 어쩌면 나의 지금 이 상태,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나의 단기 혹은 중장기 목표가 인생의 궁극 목적인 행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신호일 수도 있지요. 행복한데,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의욕이 없고 무얼 향해 살아야 하는지 잘 보이지 않는 일은 없을 것 같거든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 같은 행복을 위해서는 개별 목표와 성취, 지금의 만족감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만족감을 위해서는 순간적인 만족감을 오히려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적 성취와 그에 따른 만족을 지나치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면 삶 전반의 균형을 잃기 쉽고, 그것 역시 개별적이고 일시적인 성취이지 인생 전체의 만족을 보장하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이상하거나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만의 개인적인 문제도 아니고요.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하면 우리의 행복은 항상 공사가 진행 중인 건축물 같은 것이고,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길고 긴 이야기의 끝에 나 자신의 삶을 어떻게 느끼는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의 특성, 곧 ‘사람다움’을 균형 있게 발휘하며 사는 삶을 살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동양철학인 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의 사랑은 좋은 세계를 만드는 일까지, 그 범위가 무척 넓어지지만 그렇다고 나를 뒷전으로 두라는 말은 아닙니다.

만일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도 관심이 없고, 평소에도 내 몸은 전혀 돌보지 않는다면요. 나에서 출발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하는데, 내가 나에게 관심이 없고 나를 아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를 아끼는 삶이란 나 자신을 아는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소크라테스 본인이 한 말로 잘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는 원래 아테네 델포이 신전의 현판에서 유래한 격언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 대신 자신의 영혼을 살피고 돌보라는 말로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안다는 것은 내 영혼 곧, 나의 마음을 살펴보고 돌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을 살피고 돌본다는 것은 내가 진짜 잘 살기 위해 나의 삶에 그만큼 관심을 갖고, 진짜 잘 사는 일이 무엇인지, 나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지, 나의 살아감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나의 마음이 제기하는 의문과 의혹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생각하는 일입니다. 진짜 ‘힐링’이란 이런 것입니다. 내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고, 달아나지 않고 내 마음을 진실하고 성실하게 마주 보는 일이요.

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떻게 죽는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가 중요하고, 말만 앞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았는지가 중요했지요. 말 그대로, 인생의 방향과 실천, 그 전체의 모습이 중요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단지 자신에게 내려진 판결을 수용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에 관심이 없고, 그리하여 정의롭지 않은 판결을 내리는 일에 부끄러움이 없었던 사람들 앞에서 끝까지 자신의 삶을 추구한 것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가치 있는 인생의 목적을 직접 보여준 것이지요. 여론보다, 법보다, 전통보다 소중한 것을요.

소크라테스가 권하는 성찰은 마음의 반성이기도 하지만 조금씩 다르게 움직이는 행동이며 실천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은 완벽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에 더 가깝지만요. 우리는 대신 이렇게 바꾸어 말하면 어떨까요? 내가 늘 안녕하기를 바라는 것이 내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고, 진실로 내가 안녕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늘 스스로 질문할 수밖에 없다고요.

나는 내 삶이 어렵고 괴로워도 내 삶에서 나를 치우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가끔은 정말 그런 기분이 들지만, 그렇게 느끼는 까닭은 지금의 내 삶이 달라지고 나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렵고 괴로운 상태를 겪는 일이 싫은 것이지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내가 지금 행복을 느끼고 있다면 과연 이 행복에서 나를 제거하기를 바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의’ 행복은 될 수 없으니까요. 나로 살면서 계속해서 내가 한쪽으로 치워진 무대 세트처럼 살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내 삶을 나의 것으로 느끼고 싶고, 내 삶을 내 것으로 느끼며 사는 내가 안녕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부디 안녕한 나의 삶을 위해 자주 묻고 대화하며 살피고 돌보아주세요, 나의 영혼을요. 습관이 된 생각 뭉치를 반사적으로 잇고 잇는 것이 아니라, 그런 습관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서서 마음을 기울여주세요.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나에게 묻고 또 듣고, 그러면서 정말로 생생한 ‘생각’을 해주세요.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에게 안부를 묻고 대화하듯이요.

나는 잘 살고 있나요? 가장 소중한 나의 삶을 그만큼 돌보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는 순간의 확답보다 진실한 물음과 대화의 시간, 돌봄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안녕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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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타이밍을 놓친 관계의 응어리
with 자크 데리다

조건부 용서, 너의 마음이 편안하기 위해

그래서 데리다는 용서의 본성이 무조건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어도, 도무지 용서할 수 있는 선을 넘었어도 그런 것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이 용서라는 것입니다.

과감한 행동만이 전부일까

어쩌면 반복되는 나쁜 기억에서 나를 보호하고,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짓고 싶어 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이제야 깨닫게 된 무엇인가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그 응어리가 떠오를 때마다 다짐하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전부가 좋지는 않았으나 그 안의 무언가만큼은 여전히 가치 있는 것으로 간직하고 싶을 수도 있고요. 이제와 굳이 다시 꺼낼 수 없는 마음, 꺼낼 수 없는 말이 자꾸 떠오른다면, 그 말이 나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내가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정작 그 본성을 나의 삶에서 실감할 수 있을 때는 용기라는 특성을 단지 간직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 특성을 꺼내어 발휘할 때입니다. 그래서 현대철학의 용기론은 지금 여기서 어떻게 행동할지의 결단과 함께 용기가 발현될 때 비로소 용기가 내 삶 안의 ‘리얼’한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용서를 위한 조건이 잘못된 것이라는 뜻도 아니고요. 다만 용서를 조건과 한계가 있는 것으로만 생각할 때, 용서의 무게가 오히려 피해를 겪은 사람에게 넘어올 수 있다는 점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나온 관계에 대한 내 마음속 응어리가 과연 어떤 것이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살펴보는 일입니다.

나의 마음에 묻다, 전부 아니면 전무에 갇히지 않기 위해

더욱 중요한 것은 대담함, 과감함과 같은 힘을 잘 조절할 수 있는 인내심 곧, 절제의 능력이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절제를 어떤 기준에서 발휘하면 좋을지 아는 일입니다. 결국 절제를 다스리는 기준을 제시하는 사고 능력, 그 기준을 아는 힘이 근본적인 것이지요. 그래서 용기에는 반드시 심사숙고가 필요하며, 심사숙고를 통해 서로 다른 능력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용기입니다.

관계가 남긴 흔적, 관계의 응어리는 감히 타인이 규정할 수 없습니다. 타인에게는 너무 쉬웠던 한마디가 내게는 깊이 상처가 된 일도 있으니까요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 일들은 비 오는 날이면 쑤시는 무릎처럼 이따끔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한편으로 진정 악의적인 말과 행동, 오직 나를 공격하고 상처 내기 위한 목적으로 던져진 것들은 아예 기억 저편으로 묻어버리려 애를 씁니다. 떠올리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밉다, 싫다, 원망한다고 말하기보다 차라리 꺼려진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은 것들입니다.

13. 취향에 도덕이 필수조건인가요?
with 임마누엘 칸트

우리는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이 영화는 우리 모두의 기억을 건드립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 경험했을 관계의 기쁨과 슬픔, 예기치 못했던 사건을 돌아보게 하지요.

우리가 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누구도 당신의 마음속을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절대자라면 당신의 마음속의 느낌을 일일이 조정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테고요.
그럼에도 우리가 애매모호 걸쩍지근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그 느낌이 ‘행동’과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당신 마음의 응어리를 흘려보내고 놓아주고 싶어 할 때 반드시 우리가 알던 그 같은 용서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요. 상대가 당신이 바라던 그 모든 조건을 채워도 용서할 마음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상처 준 상대는 이미 스스로 자유로워졌고, 끝나지 않은 기억은 당신의 마음속에만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용서를 구하며 바라는 것은 사실 상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는 아닐까요? 그래서 조건부 용서는 때로 하고 싶어도, 청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것이 됩니다. 반대로 조건부 용서를 하거나 받더라도, 어떤 응어리가 전부 사라진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용서는 불-가능하다

전통적으로 용기는 동서철학을 막론하고 인간의 이성, 종합적 사고 능력처럼 인간이 본래 가진 자질로 생각되었습니다.

반드시 입을 열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지요. 내가 나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필요는 없고, 단지 누군가의 뒤에 서서 그 사람에게 동조하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될 때조차 나서기가 두려워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직접적인 피해자라서 내가 피해를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이 일을 모르게 될 때에도 두려움이 앞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만나고 헤어짐은 사람의 일이라, 별일 없이 멀어지기도 하고 별일인 줄 알았으나 지나고 나니 그다지 별일이 아닌 것을 알아 다시 시작하려고 해도 관계에서 생겨난 응어리가 가시지 않아 결국은 잘 되지 않기도 합니다.

영화 ‘우리들’ 이야기

지금에 와서 무엇을 어쩌자는 것은 아닌데, 여전히 마음에 남아 문득문득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들, 이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후회, 회한, 미련, 반성, 아니면 분노 혹은 원망일까요?

음악에 대해서 어떤 정서를 느끼는 일과 그 음악에 대해서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좋은 일인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문제 영역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용기 있는 행동이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판단의 우선순위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판단을 모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그 판단은 동시에 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행동하겠다는 그 결단을 내리기란 어렵습니다. 우리를 슬프고 무력하게 하는 것은 내가 행동할 만큼, 다른 사람의 시선과 다른 여러 가지 위험을 감수할 만큼 용감한 선택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내 마음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요.

우리의 평범한 삶, 평범한 관계에서 용서를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약간의 가감과 번역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용기는 이미 있어요, 용기의 씨앗

지금 여기의 내 삶에서 용기를 ‘낸다’고 했을 때, 확실히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일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마음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삶은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는 목적에 맞게 제작되는 시계와 다릅니다. 스스로의 결심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던지고 자기 인생에 직접 참여하며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실존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용기의 본질’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구체적인 선택을 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결국 마음의 용기를 현실이 되게 하는 것이 나의 구체적인 행동이니까요.

용기의 핵심은 위험을 무릅쓰는 대담함, 과감함에 있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무엇을 물어보고 있는지를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전부 다 허용하거나 전부 다 금지하거나와 같은 꽉 막힌 세계에 갇히게 되거든요.

14. 용기를 내는 방법
with 플라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가장 피해를 덜 보고, 어떻게 해야 가장 좋게 바뀌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어떤 것이 나의 마음에 의혹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작은 씨앗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나쁜 일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의 악행에 대해서도 결코 무감각하거나 참지 않는 일, 현실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등 욕망만을 쫓으려고 경거망동하지 않는 일부터요. 그렇게 생각하면 용기는 언제나 나에게 말을 걸며 여러 신호를 보내는 중입니다.

내 마음에 진실할 용기

마음의 거리낌을 느끼면서도 그 상태 그대로 머무는 일은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어떤 대답도 돌려주지 않고 나 자신을 방치하는 일입니다. 나의 의문을 무시하고 억누르는 일이죠. 내가 나를 상대해주지 않고, 내 마음을 내 삶에서 따돌리는 그 상태를 내가 참고 있는 거예요. 내가 행동하지 않는 것이 나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에 진실하지 못한 채, 내 마음과 내 삶을 분리시키고 그 상태를 그대로 두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장 알아야 할 것은 지금 내가 나 자신에게 진실한지이고, 또한 내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진실하지 못한 채 내버려두어 나를 내 삶에서 소외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마음에 걸릴 때, 이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 일이 중요합니다. 참지 않는 일 말입니다. 지금 당장의 행동을 참지 않는 일이 아니라, 자꾸만 걸리는 마음을 억눌러버리고 참지 않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해도 용기는 이미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 용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곧바로 행동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감해서 용감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해서 머리 아프고 가슴이 답답한 와중에도 그 마음을 도무지 모르는 척 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용감한지도 모른 채 일단 움직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은 의문을 제시하는 나의 마음부터 움직이게 해주세요.

나약한 우리를 인정하고, 서로의 용기로 있어주세요

‘아니 근데’의 마음이 더욱 자유롭게 활개치기 위해서는 나의 움직임이 작은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큰일은 쉽게 하기 어렵고, 결과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면 내 마음은 다시 무거워집니다. 두려움도, 불안도, 실망도 커지거든요.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움직일 때, 작고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좋다고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의외로 많은 선택지가 보입니다.

용기는 일생일대 단 한 번의 기회가 아니고, 단 한 명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용기의 필수 조건에는 완벽함이나 성공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용기가 없을 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용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 마음속 용기의 씨앗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음의 숨이 있습니다. 숨을 언제까지 참을 수는 없거든요. 언젠가 우리는 아주 작고 미약한 숨이라도 내뱉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숙하여도 피어난 그 모습 그대로의 용기를 지켜보며, 또 다음의 기회를 서로에게 허용하며 서로의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 용기의 또 다른 씨앗이자 밑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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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만 애쓴다고 느껴질 때
with 아리스토텔레스

친구 사이에 대한 고민은 친구가 있는 한 계속됩니다. 나이가 든다고 친구에 대한 애정, 기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여전히 서운하고 여전히 속상하지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도 다툰다고 하잖아요. 물론 선연락, 연락횟수, 빈도를 일일이 따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매일같이 얼굴 보고 신나게 수다를 떨고 친구가 나를 먼저 찾아도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게 서운하고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뭐가 되었든 너와 나 사이 관계의 저울이 균형을 잃고, 어느 한쪽으로 과하게 기울어져 있을 때가 문제가 되지요.
그것은 우정의 본성이 서로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균형 잡힌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우정은 어떤 유형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의 유형을 서로에 대한 친애의 마음이 무엇에 근거하는지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쓸모 있는 우정’입니다. 생존 활동을 하며 유익함을 나누는 친애 관계가 바로 이 유형에 속합니다. 말하자면 좋은 비즈니스 관계라고도 할 수 있겠죠.

두 번째 유형은 ‘즐기는 우정’입니다. 말하자면 ‘놀이 친구’라고 할 수 있겠네요. 친구 그룹 중에서도 이것을 할 때는 유독 이 친구와 죽이 잘 맞는다, 평소에 아주 가깝지는 않아도 저것을 할 때는 꼭 이 사람한테 연락한다! 하는 사람이 있죠. 그 사람과의 관계가 이 유형의 우정에 포함됩니다.

마지막 유형은 서로에 대한 ‘인간적 존경심’으로 친애 관계가 형성된 친구 사이입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장 귀하고, 가장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우정은 바로 이 유형입니다. 유용함 덕에 친해진 관계는 더 이상 서로가 유익하지 않을 때 깨어지기 쉽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권유하는 친구 사이, 좋은 우정은 서로가 서로를 그 사람 자체로 좋아하는 관계입니다. 그 사람이 내게 쓸모 있는 것을 줄 수 있거나 나를 신나고 재미있게 해주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같이 즐겨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어도 상대를 좋아하고, 가까운 관계로 계속 교류하며 지내고 싶은 것이죠. 말 그대로 그 사람이라는 인간 자체에 반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경한다면, 거리 두기

좋은 사람, 충실한 삶이란 인간의 본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답게 잘 사는 사람, 좋은 사람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웰빙well-being이라는 개념은 이런 생각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웰빙은 말 그대로 잘 존재함이라는 뜻이니까요.

이성적이라는 것은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 힘을 중심으로 나머지 것, 생존 본능, 감정, 기타 욕망 등을 조화롭게 조정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정치적 동물이란 ‘인간은 반드시 공동체 속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내가 내 인생을 충실히 살려고 할 때 내가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입니다. ‘충실히 산다는 것은 가능하면 좋은 선택을 하고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내 삶의 매 순간마다 이를 실천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아무리 내가 머리 터지게 고민해도 그 사람의 바로 그 입장, 그 시선,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이 내 것이 아닌 이상 내가 생각하는 최선은 내 입장의 최선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그와 나의 동등함에 대한 인정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친구 역시 나처럼, 나와 동등하게 자기 나름의 삶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는 마음이요.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정에 거리 유지가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상대에게 나처럼,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반응하고 선택할 것을 강요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에는 시간을 들여서, 균형을 잡아가며

일단 철학자들은 친구를 천천히 만들라고 조언합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속도보다는 조금 속도를 낮추고, 지금까지보다 더 많이 살펴보는 것이 핵심입니다. 나와 그 사람이 서로 추구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견주어 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살펴보아야겠지요. 중요한 일일수록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대가 내가 상대에게 하는 것에 정확하게 비례해서, 혹은 내가 상대를 대하듯 나를 대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똑같이 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똑같이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에요. 상대는 나와 다른 사람이고 다른 환경에서 다르게 자랐으니, 말이나 행동이 나와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만일 기본적인 친애와 존중이 무너졌다고 느낀다면 그 관계에는 이제 다른 판단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노력, 나를 낮추고 친구만을 배려하는 노력이 우정에 필요한 전부는 아닙니다.

나를 나의 친구처럼

사람은 ‘상대가 나를 존중하고 있으며 우리가 거리감이 있는 것은 단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에도 마음이 아플 수 있습니다. 우리 둘은 서로 다른 사람이라서 서로 대하는 것이 다르고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지요. 누구에게는 가족이나 애인이 무척 중요한 관계이겠지만 또 누구에게는 친구 관계가 가족이나 애인보다 더 중요한 삶의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이렇게 친구를 대하듯이 대해주세요. 적절한 거리 두기가 어려울 때는 앞뒤 좌우 어디로도 여유 공간이 없다고 느껴질 때거든요. 자신의 슬픔, 실망, 분노 등을 마음 깊은 곳에 숨기고 괜찮은 척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때 우리 마음에도 조금의 여백이 생깁니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 만큼의 공간이 생기는 것이지요. 정말 개선하거나 새로이 시도해보고 싶은 것은 그때부터 생각하고 실천해도 좋습니다.

11. 부모와 잘 지내는 법을 모르는 당신에게
with 율곡 이이

어느 날 부모님의 등이 작아 보이면 그때 어른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고 보니, 어린 나이에 나를 낳아 나의 부모 노릇을 하던 그때의 엄마 아빠는 너무나 젊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부모 됨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 더욱 여러 가지 마음이 들 것입니다. 이제야 이해가 되기도 하고, 더 미안하기도 하고, 더 애틋하기도 하고요.

부모와 잘 지내는 법을 모르는 당신에게
from 율곡 이이 선생님

먼저 율곡은 자기 멋대로만 행동하지 않고 부모님께 자세히 말씀드리고, 그 행동을 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더라도 혹시나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을 때는 그 행동을 바로 실천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부모님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어서 때로는 부모님이 사람다운 도리에 맞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도 있으니까요. 부모라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니거든요. 율곡은 만일 그렇다면 씩씩거리며 화내는 태도가 아니라 차분하게, 표정도 좋게 하며 말투도 부드럽게 부모님께 다시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옳은 일이라면 그 같은 부드러운 태도로 반복해서 부모님을 납득시키라고요.

그리고 살림살이 또한 언급합니다. 살림을 맡아서 스스로 부모님을 위한 좋은 음식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요. 다만 그 시절에도 그만큼의 경제적 여유를 모두가 갖출 수는 없었는지, 많은 사람이 부모의 양육을 받지만 자기 힘으로 봉양하기는 어렵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또한 삶 전반의 태도와 특별한 상황에 대한 코치도 있습니다. 밖에 나갔다고 엄마 아빠는 아예 잊고 망나니 같은 행동을 하는 일, 그렇게 망나니처럼 노는 일만으로 허송세월하지 않는 것도 효도의 중요한 요건입니다.

좋은 관계, 부모라고 예외가 아니다

모두 다 제대로 실천하려면 어렵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그 실천이 어마무시하게 어려운 행동은 아닙니다.

핵심은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미리 충분히 설명하고 의논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과의 대화를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것도 포함해서요. 곧, 충실한 의사소통을 하라는 것이죠.

문제는 우리가 밖에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는 기본적인 예의를 부모에게는 잘 챙기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정말로 못되게 군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애정이 아니라 의무 관계라 힘들어요

의무의 핵심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주인공이 나이기 때문에 의무감은 부담감과도 이어집니다. 남에게 떠넘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리광 부리지 말고 어른의 책임을 다하라는 관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가 이 관계를 의무로 느끼는 것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나에게 부모를 기꺼이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무라 여겨지는 것을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의무’라고 인식하면 그 일은 강제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기쁘게 선택했다는 기분이 잘 들지 않는 것이지요.

가족은 비즈니스 관계, 고객 응대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인데 그게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부모를 애정하고 싶은 것이지요. 효를 강조하는 유학에서도 그 근본은 정 곧, 마음에 있는 것이지 각 잡듯 딱 맞추어 획일화된 예절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이상적인 가족, 실제로 우리에게 없었던 것

예외는 때로 애정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퇴행적인 행동 곧, 어른 같지 않은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이 관계를 신뢰하고 안전하게 느낀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열심히 세운 마음의 벽을 가까운 이에게는 좀 낮추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리광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애정이 공경보다 넘치는 것을 주의하라는 율곡의 말을 우리는 ‘가족’ 혹은 ‘부모 자식 관계’, ‘애정’에 대해 의심 없이 믿었던 생각을 돌아볼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부모 자식 관계에서 애정이 전부가 아니듯, 부모에 대해 때로 의무감을 느끼거나 애정보다 더 큰 의무감을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꼭 이상한 일이라거나 나쁜 관계라는 뜻은 아닙니다

타인을 대할 때 갖는 최소한의 호의와 신뢰를 오히려 부모에게는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요. 그 경우 부모에게 남들에게 하듯 잘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 관계를 대하는 일 자체를 더 힘겹게 만듭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제 나는 어리고 부모만 성인이었던, 이미 내가 경험해본 시기를 지나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겪어본 적 없는, 나와 부모님 모두가 성인인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맡게 되는 역할도 더 많아지고 다양해집니다. 이유도, 형태도 관계마다 다르지만, 어찌 되었든 나와 부모 모두 이 관계에서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순간을 겪으며 이 관계를 새로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결코 같지 않지만 동시에 같은 관계?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은 그 시대적 조건에 따라 가족을 다르게 규정해왔습니다. 어떤 철학자에게는 가족의 핵심 요건에 사랑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대신 경제적 관계가 들어가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집에서 그 집의 경제의 한 축으로서 노동을 담당하는 노예 역시 가족으로 간주하거든요.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가족 규정에도 공통적인 것은 부모 자식 관계는 비대칭 관계라는 생각입니다.

부모가 나를 먹여 살렸듯 내가 성인이 되어 부모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어서만은 아닙니다. 저마다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느끼고 결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대칭적 관계입니다. 나와 부모는 동등한 존재입니다.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이끌고 싶기 때문에 때로는 부모와 충돌하고 대립하며, 때로는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고요. 부모님 역시 당신 나름의 생각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살아왔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이 서로 다른 인생은 결코 같아질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은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가능하면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열린 마음과 그 마음을 실천할 최소한의 여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의사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남겨두고, 관계가 잘되지 않을 때 잠시 쉬어가거나 도망칠 수 있는 용기도 남겨둡시다. 너무 여력이 없으면 관계를 잘 맺고 싶다는 마음마저 닳아버리니까요.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숙제는 사회가 개인의 전체 생애주기에서 관계를 위한 마음과 에너지를 충분히 허용하는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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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돈을 버는 것과 어른의 의미
with 주희

잠금 해제 1단계, 돈 문제가 아니다

부모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은 물론이고, 생계를 위한 벌이 자체도 인간인 이상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추구해야 할 가치는 아니라는 거예요. 경제적 독립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잠금 해제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하는데, 나만 아직’ 같은 마음이 들지요? 그것은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인 판단입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다 하는 것도 아니고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해야 하는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가치인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압박감이 삶의 문젯거리가 되는 것은 돈을 당장 벌어오는지, 얼마만큼 벌어오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몫은 어디에 있을까

문제는 경제적인 독립이 아니라 삶의 가치들 간 충돌 혹은 평가입니다. 어떤 것을 보다 우선으로 두어야 하는지,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등의 문제이죠.

모든 과정 중에 사람이 주기적으로 부딪히는 저 압박감, 지금이라도 당장 돈이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의 가장 큰 원인은 자기 평가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생각하는 거죠.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나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음에도, 여전히 ‘나는 다른 사람만큼의 한 사람 몫을 다하고 있는가?’라고 물으면 어쩐지 그렇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는 것이지요. 그 한 사람 몫이라는 것을 판단하기 위해 사람들이 가장 크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대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활동이고요.

‘어른답게’의 필수 조건, 돈이 되지 않는 노동

부모님에게 경제적 원조를 받지 않아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내가 더 이상 돌봄을 받기만 하는 역할로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일 때는 그런 생각을 잘 하지 않잖아요. 관계가 바뀌었기 때문에 내 역할도 바뀐 거죠. 하지만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나의 역할이 경제 활동만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이라면 극단적으로 말해 부모님이 나를 키우며 들였던 금액만큼 돌려줄 수 있으면 되겠죠. 그러나 누군가를 키우고, 돌보고,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일은 돈으로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만큼 자라난 것도, 내가 흔들리고 의심하면서도 계속 나아가고 있는 것도, 우리의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도 실은 전부 돈을 벌 수 없는 노동 덕분입니다.

이것이 잠금 해제 2단계입니다. 돈을 벌 수 없는 노동, 그러나 전체 사회의 뿌리가 되는 일을 우리는 이미 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 관계 속의 나로 살며 다시 관계를 돌보고, 사회 안의 무수한 관계를 만드는 일이죠. 그러므로 현재 경제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 하나만으로 내게 주어진 역할을 회피한다거나, 한 사람 몫을 하고 있지 못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길 위의 우리, 독립보다 중요한 것

우리의 과정은 이 사회 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자리를 만드는 일,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한 관계를 엮어가는 일에 더욱 가까운 것 같습니다.

경제적 독립은 그 와중에 요청되는 것 중 하나일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 우리의 길이 완성되거나, 나를 진정 위하는 삶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거꾸로 사람다운 삶을 사는 일, 관계를 돌보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경제적 독립이라는 미션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러나 그 모든 것, 경제적 독립, 좋은 관계 등을 위한 가장 밑바탕은 나 자신의 힘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삶에서 ‘독립적’인 어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입니다. 어른은 관계를 고려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려는 존재니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독립보다는 관계가 아닐까요? 나를 죽이거나 억누르지 않고, 상대를 기만하거나 억누르지 않는 관계 말입니다. 그런 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은 나 혹은 누군가, 우리에게 소중한 여러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경제적 독립이 아닌, 그것 이외의 다른 중요한 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서로에게 허용해주세요.

8. 어디에 돈을 써야 할까요?
with 공리주의

사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돈이 별로 없어서 쪼개어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취미 생활에 돈을 쓰는 일에 자기 자신부터 부담을 느끼게 되긴 합니다. 취미를 즐기다가도 문득 ‘너 지금 이럴 때니? 이런 데 쓸 돈이 어디 있어?’라고 스스로를 나무라며 자발적인 반성의 시간을 갖기도 하고요. 하지만 취미 생활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취미 생활이 그만큼 내 삶의 낙이 되어주기 때문이지요. 양쪽 다 좋은 것인지는 알겠는데 어쨌든 지금은 선택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소비 우선순위 리스트, 공리주의와 상담하기

내가 기쁨을 느끼는 어떤 활동에 아예 돈을 쓰지 말라고 하는 것이 현명한 답변이 되기 어렵다는 점은 우리 모두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숨구멍은 남겨둬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공리주의는 상대적으로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쉬운, 세속적인 윤리학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리주의가 무턱대고 행복 최고! 다수 최고!를 외치는 것은 아닙니다. 공리주의는 정치학이기도 하거든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개인에게 더 좋은 행동을 알려주는 원칙이기도 하면서, 그 원칙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개인과 사회의 근본 원칙이 되려면 모두에게 가치 있고 바랄 만한 것이어야 하는데, 사람마다 바라는 것이 다양해도 그 근본은 결국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역시 모든 국가 구성원의 행복 추구권을 인정하고, 가능한 한 최대의 행복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공리주의는 생각보다 훨씬 여러 가지 안배를 해둡니다.

통계가 행복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확률을 생각해보라고요. 행동 하나에 대응하는 행복에 대한 구체적인 점수 산정에는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행복이 고통에 비해 압도적인 비율을 점유하는 것이라고요.

결국 자기 계발이든 취미 활동이든 누가 아무리 즐겁다고 해도, 혹은 내가 지금까지 아무리 즐거웠어도 지금 이 순간 그 행동을 선택했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행복과 괴로움을 전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곧, 습관적인 선택이 행복이라는 귀결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통계는 설명하지만 약속하지는 않거든요.

자기 계발이란 무엇인가

사람만 행복을 느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이 다른 종과 다르게 ‘더욱’ 혹은 ‘고유하게’ 행복을 느끼는 영역이나 활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뇌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컴퓨터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쓴다’고 할 때, 그 일이 꼭 괴로움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죠.

무엇이 되었든 취미를 만들고 유지하는 일에 도전해본 사람은 취미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취미를 갖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고요.

자기 관리와 자기 계발의 관계

자기 계발이라는 용어는 조금 더 교묘하게 사용됩니다. ‘관리’라는 표현이 은연중에 지시하는 이 사회의 시스템이나 타인의 평가를 희미하게 만들고, ‘계발’이라는 표현을 통해 나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강조하는 척 하면서, 사람이 ‘다른 무엇을 위한 쓸모’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전제를 덮어버리거든요.

말의 의미대로 하자면 자기 계발에 취미 활동은 얼마든지 포함될 수 있고,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익한 활동인 취미 활동이 죄책감의 원인이 되고, ‘지금 네가 감히’라는 사치로 치부되는 것은 나라는 존재와 나의 인생을 이윤을 남겨야 할 투자 상품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기 계발은 재테크의 일종입니다.

‘언제나’ 삶의 기쁨이 함께한다는 것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너무 퍽퍽해진 요즘 세상에서 ‘취미’라고 부를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사실 취미는 단지 말초적인 자극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취미 활동을 지속해나가는 데 우리는 많은 에너지를 쏟습니다.

투자 대비 성과는 미래의 약속입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판돈으로 배팅하라고 요구하지요. 현재는 언제나 미래의, 심지어 내가 잘 해내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한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물론 때로는 그런 순간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쩌다 올지도 모르는 대박만큼이나, 평범한 현재의 기쁨 또한 필요합니다. 오늘의 매일을 그 자체로는 기쁘지도 의미 있지도 않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며 살 수는 없거든요. 자기 계발보다 취미 활동이 낫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취미 활동 역시 때로는 공허한 현재를 가리는 수단으로만 활용되기 때문입니다. 즉, 중요한 것은 취미 활동과 자기 계발 중 무엇이 더 가치 있느냐가 아니라 ‘지금 우리는 그 자체로 기쁨과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닐까요?

9. 나는 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일까요?
with 한나 아렌트

실수일까 실패일까

사실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이 전부 다 잘될 리는 없지요. 그래서 굳이 ‘실패’라는 말을 쓰는 것이 거창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패’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일을 잘못하여 뜻한 대로 되지 아니하거나 그르침’이라고 나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인생은 거의 ‘실패하는 인생’입니다. ‘에브리데이 실패데이’ 같은 것이죠.

인생의 대부분이 실패의 순간이라면 굳이 새롭게 ‘실패’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겠죠. 현실에서 우리가 느끼는 ‘실패’는 더 무거운 것들입니다. 옷에 음식을 흘리고, 넘어지고, 버스를 놓치는 정도는 귀여운 실수로 넘어갈 수 있지 않나요. 굳이 무거운 ‘실패’의 이름표를 붙이는 이유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아마 우리는 국어사전의 구분과 달리, 내가 쉽게 넘길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일의 그르침, 잘못됨을 실패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실수가 곧 실패로 남기도 하고, 실패했지만 쉽게 넘어가기도 하거든요. 결국 ‘실패’라는 규정은 내가 조심했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내가 감당할 만한지에 달려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반복되는 실패, 내가 못나서일까

더욱 힘겨운 실패는 반복되는 실패입니다. 우리는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는 말을 농담거리로 삼곤 하지만, 실제로 그 주인공이 바로 나일 때는 전혀 웃을 수 없습니다. 뼈저리게 아프죠. 어떤 실패에는 결코 내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여러 번 실패한다고 해서 그 후의 시간을 겪어내는 일이 만만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실패, 아는 고통이 더 무서워요. 이 뒤로 얼마나 아프고 쓰라릴지, 얼마나 긴 시간을 감당해야 하는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고 그런 만큼 더 무섭습니다. 아는 괴로움이라 해도 괴로움을 겪는 시간은 단축되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앞선 실패와 그 이후의 괴로움이 누적되고 중첩돼서 상처가 덧나는 기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렇게 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 내 ‘실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입니다. 내가 충분히 주의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인 거죠.

이 순간, 똑같이 반복되는 실패는 내가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는 뼈아픈 증거로 다가옵니다. 나를 의심하고, 탓하고, 후회하게 되지요. 내가 스스로 지난 실패의 경험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 것 같거든요. 반복된 실패는 나를 긍정할 수 없게 하고, 나의 두려움을 키워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인간의 조건, 액션!

인간의 조건을 생각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은 활동activity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계속해서 움직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을 말할 때는 활동이 핵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은 목숨을 유지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모든 활동입니다. 먹고, 자고, 숨 쉬고, 화장실 가고, 휴식을 하는 활동 등은 모두 나의 생명을 유지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노동에 포함됩니다. 한편 작업은 노동이 아닌 활동 중 사물과 관계하는 활동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 곧, 인공물을 만드는 제작이 바로 작업 활동입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노동, 곧 직업 활동으로서 노동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 행위는 우리의 사회적 삶,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그와 관련되어 하는 활동, 말과 행동 모두를 뜻합니다. 예능을 보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감상을 남기고,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친구를 만들고, 직장 동료와 소통하고, 투표를 하는 등 다른 사람에게 내 의견을 밝히고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전부 행위입니다.

예측 불가하고 되돌릴 수 없는

탄생과 행위의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반드시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정지된 상태라면 무슨 일이든 간에 새로 일어날 수도 생겨날 수도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같은 행위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행위는 시간, 자연, 서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조건 속에서 발생하고, 그 조건은 계속 변합니다. 다른 조건은 둘째치고라도, 시간은 계속 흐르니까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는 말처럼요. 흘러가버린 강물은 지금의 강물과 같지 않죠. 그래서 우리의 행위는 매번 새롭고, 매번 태어납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한번 태어난 것은 결코 없었던 것처럼 되돌릴 수 없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잖아요.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복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러나 복구 불가능성은 새로운 가능성과 이어져 있습니다. 어쨌든 과거와는 똑같을 수 없으니까요.

예상과 기대는 언제나 우리를 배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 번 생겨난 행위를 결코 뒤로 돌리거나 무를 수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행동합니다. 멈추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사는 동안 우리는 매번, 그리고 항상, 가슴 밑바닥의 의심과 함께 복구 불가의 영역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확실한 일에 도전하고 싶어지지만 더 확실한 일이라고 해봤자 그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예측 불가능한 행위의 본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 삶의 어쩔 수 없는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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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와 나의 상처를 대하는 법
with 칼 야스퍼스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상처가 시작되는 까닭은 다양하고, 때로 어떤 상처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 혹은 ‘깊은 괴로움이나 깊은 아픔’으로 불릴 만한 상처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토록 깊은 상처를 껴안고, 그와 씨름하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이해하는 일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타인의 상처를 위로하거나 그를 지지하기보다 오히려 그를 미워하거나 비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다시 나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요.

전문가들은 우울감과 우울증을 구분합니다. 살아가며 우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꼭 질병의 ‘증상’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제 저녁을 많이 먹고 체해서 그 뒤로도 며칠 소화불량을 앓으며 고생한 것과 특정한 위장‘병’이 있는 것이 같지 않은 것처럼요. 마음의 상처도 어떤 것은 넘어져 무릎을 쏠리는 정도의 상처이지만 어떤 것은 ‘고통’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붙일 만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워’라는 표현을 잘 쓰지는 않지요. 대신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어서 미칠 것 같아’라는 식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그러나 어떤 표현을 쓰든 그 상처에는 우리가 좀처럼 어쩌지 못하는 깊은 어두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고통의 본성 ‘아무도 모른다’

전통적으로는 통증과 고통을 구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요. 통증은 신체의 상처이고 고통은 심리적 상처, 곧 괴로움을 겪는 내적 상태, 마음의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통증은 영어 pain과 대응하고, 영어 suffering의 번역어는 고통(괴로움)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몸과 마음의 상처가 이렇게 딱 떨어지게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고통’이라는 말 자체에 통증과 괴로움이라는 말이 함께 들어 있는 것처럼요.

고통은 몸의 상처, 마음의 상처로 딱 잘라 나눌 수 없고, 몸과 마음은 함께 영향을 받고 함께 작용합니다. 아픔은 몸과 마음 전체에 걸쳐 있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고통을 고통으로 만드는 핵심은 오직 ‘나만 그렇게 느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표현으로도 이 고통을 타인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거나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거죠, 내가 얼마나 그리고 어떤 식으로 이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그러니 공감도, 이해도 좀처럼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고립된 기분을 느낍니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르니까요. 그러니 아플 뿐만 아니라 깊이 외로워집니다.

더욱 심각한 일은 이 고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거예요. 알 수 있으면 좀 낫지 않겠어요? 어떻게든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희망이 생기니까요.
그런데 그런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통입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도 이해할 수 없고, 그러므로 당사자가 어떤 식으로든 컨트롤 할 수 없으니까 고통입니다. 그래서 나만이 아는 괴로움이면서 동시에 나에게도 너무 낯설고, 정말 모르겠고, 그래서 지금 내가 겪는 일에 대해 어떤 긍정적인 반응, 예를 들면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래도 희망을 품는 일 같은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고통을 겪는다는 일의 정체입니다.

고통이 데리고 오는 친구

불행은 혼자만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도 친구들을 데리고 옵니다. 죄책감과 비난, 고립감, 무력감이라는 이름의 친구들이지요. 처음에 사람들은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안쓰러워하고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비난의 태도를 보이기 쉽습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거든요. 내가 위로해줘도 바뀌는 건 없는 것 같고요.
게다가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은 이전과는 같은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가벼운 인사조차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웃음이 잘 나오지 않고,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거나 인간관계에 꼭 필요한 행동을 하는 것조차 어렵게 느끼게 됩니다.

친밀한 사이라면 이런 일이 더욱 괴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관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배려나 기쁨의 순간을 느끼기는 어려운데 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고통을 겪는 당사자는 더욱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나 때문에 상대방까지 힘들어지는 것 같으니까요. 자기 자신이 고통과 고통에 따라붙는 부정적인 특징을 야기하는 원인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지금이 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그 도무지 알 수 없는 고통, 아무리 애를 써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나 죄책감은 내가 ‘한계 상황’에 놓여 있다는 신호입니다. 한계 상황이란 지금까지 살아오던 것처럼 흘러가는 것이 불가능할 때, 이 상황을 내치거나 제거하는 일이 불가능할 때, 그러므로 이 상황마저 다시 나의 삶으로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과거와는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과거와 지금 이 막다른 곳에 몰린 듯한 느낌마저 모두 나라는 사람, 나의 인생 안에 속한다는 것을 결국은 받아들이고 소화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우리 삶에서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것이며, 고통을 겪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결실은 ‘살아남는’ 일입니다. 고통과 함께 살아가고, 살아남을 때 비록 우리가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한계선은 변화하게 됩니다.

내가 미처 돌보지 못하는 내 전체적인 상황과 내 삶에서 고통이 아닌 다른 순간들을 바라보면서 이 시간을 통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방법은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혼자 힘으로 힘들 때는 반드시 타인, 그것도 그런 역할을 하도록 정해진 전문가에게 찾아가는 일입니다.

고통이 우리의 관계를 지배하지 않도록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일이 필요합니다. 상대를 비난하고 나마저 같이 무너져, 관계의 든든한 축을 허물지 않을 만큼의 거리요. 고통이 우리의 관계를 전부 삼키지 않도록 나의 일상을 꾸려갈 수 있는 약간의 간격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곁에 있어줘야 한다는 마음에 감당하지 못할 일을 무리하게 도맡으려 한다면 상대가 미워지고 싫어지기 쉽거든요. 깨지지 않는 바위를 계속 두드리는 계란이 되면 무기력함과 좌절감을 느끼게 되니까요.

상대를 위해서라도 상대에게 마음을 쓰는 나 자신을 뒷전으로 두지 마세요. 내가 지쳐버리면 나중에 그 사람을 위해 정말 힘을 내야 할 때 손 하나 까딱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고통과의 동거는 어쩌면 장기 레이스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너무 애써서 무엇인가를 하려 하지 말고 감당할 수 있는 한에서 평범하게 곁에 있어주세요. 먹고 마시고 걷고 햇볕을 쐬고…. 상대가 잊고 있을 작고 사소한, 그러나 가장 필요한 일상의 순간을 함께하면서요.

6. 완벽주의와 번아웃
with 도가 철학

실제로 우리 사회는 몸이 부서지게 노력하는 것을 당연한 삶의 스펙처럼 요구하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몰아붙여 노력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러지 않을 때는 자신이 제대로,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노력의 끝은 번아웃?

세계보건기구 WHO는 2019년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을 만성적 직장스트레스 증후군으로 규정했습니다. 의학적 질병까지는 아니지만 건강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 증상이라는 것인데요. 번아웃 증후군은 소위 ‘하얗게 불태운 후’의 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겪게 되는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피로 상태로서 의욕이 떨어지고 공감 능력이 저하되며, 부정적 사고는 강화됩니다. 그러니 성격도 평소 자신의 모습과 달라지고, 증상이 심화되면 점차 모든 것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갖게 된다고 하네요. 처음의 스트레스 요인뿐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싫어지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지는 것이죠. 친밀했던 인간관계에 소홀해지는 것은 물론이고요. 밀레니얼 세대는 앞선 세대에 비해 더 어릴 적부터, 높은 확률로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다고 합니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단체로 ‘투 머치too much 노력 증후군’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표현도 그런 생각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마치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노력에는 한계가 없는 것처럼요.

노력에도 안전벨트가 필요해

노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일단 노력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노력하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은 노력을 북돋는 약이기도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무척 오만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나만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거든요. 그러나 하나의 일이 성취되기까지는 많은 조건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나의 노력은 일이 성공하기 위한 무수한 조건 중 하나일 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 노력을 통해 목표한 것을 반드시 얻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고 노력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런 만큼 노력에 한계선을 긋기 어려워집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노력을 강조하는 태도는 종종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사회구조적인 조건을 가리기 위한 위장 장치가 됩니다.

노력의 재료인 나의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휴식 없이 일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니까요. 사실 기계도 무조건 계속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계가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컴퓨터가 많은 곳은 컴퓨터의 정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온도와 습도를 조절합니다. 컴퓨터를 끌 때에도 강제로 종료하면 좋지 않습니다. 적절한 과정을 밟아 전원을 꺼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쉼 없이 끝없는 노력을 할 수는 없고, 노력을 할 때에도 여러 가지 조건을 참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력의 적정치는 그 사람의 상황, 상태,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나도 나 자신의 상태를 완벽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 고비를 넘어가는 과정이어서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지쳐서 잠깐 쉬는 게 좋겠다고 나 자신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는 일은 어렵거든요.

무위, 무리하지 않는 노력

‘무위’는 사실 쉬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무위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그 반대말인 ‘유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유위有爲란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고,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며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 일을 아예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도가의 무위 사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거나 노력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존재가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려는 노력은 자연스러운 거예요. 누구라도 노력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곧, 유위는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나를 지우며 다른 것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무위는 내 삶이 아닌 것에 ‘억지로, 무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노력이 단지 수고로운 게 아니라 괴로워지는 순간은 대개 내가 나와 멀어지는 일과 맞닿아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뜯어고치려 하기

세상에는 내가 선택할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는 조건이 있습니다.

동그라미가 네모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네모가 잘난 척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요. 장자는 그저 저마다 자신의 모습대로 살 뿐이며, 그 자신의 모습대로 충실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일은 일견 대단한 노력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부정하는 일과도 닿아 있습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삶을 만족스럽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나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무언가보다 그 변하지 않는 것을 바꾸려고 무리하게 노력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계속 바뀌지 않는 것에는 무력감을 느끼기 쉽거든요.

좋아하는 일이 싫어질 정도로 노력하기

시간이 흐르며 상황이 바뀌고 나의 신체가 변하고 감정이 변하듯이, 내가 선택하고 바꿀 수 있던 것, 내가 만족했던 상태 또한 변할 수 있습니다. 기쁨도 언제까지 영원할 수는 없어요. 사랑이 변하듯, 꿈도 변하고 들일 수 있는 노력의 모습이나 정도도 변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예전에 했던 만큼으로 유지하고 싶거나 혹은 지금보다 더 잘하고 싶을 거예요. 그 마음은 나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그러나 싫어질 정도로 노력하지는 않아도 됩니다.

좋아하는 일이 싫어지고 무서워진다는 것은 지금 그만큼의 여력이 되지 않는 나의 삶을 억눌러 끼워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나로 살기 위한 노력인가? 물어보기

그럴 때는 그 신호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한동안 안 하고 좀 쉬는 거죠.

그러나 이미 번아웃 상태가 되어버렸고 바로 그만둘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자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하니까 아마 그만두라고 할 것 같아요. 장자에게 내 삶을 갉아먹으면서까지 꼭 ‘해야 하는’ 것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쉽게 그만두기 어려운 현대인의 입장에서 타협하자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예전에 하던 것과는 다르게요. 7시간 하던 것을 2시간 할 수 있고, 열 번 하던 것을 한 번 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이나 잡다한 고민과는 거리를 두고 바로 눈앞의 아주 사소한 일들에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밥을 먹고, 햇빛을 보고, 산책을 하고, 계절과 함께 바뀌는 색을 알아차리는 것들이요. 여행을 가도 좋아요. 싫은데 억지로 ‘꼭’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됩니다. 놓아버리는 것도 너무 싫으면 그때는 그냥 ‘느슨하게’ 있으면 됩니다.

즐길 수 없을 때, 너무 힘들 때는 그저 버티는 것으로도 좋습니다. 내가 지금 즐기지 못하고 그저 버틴다고 해서 내가 나쁜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길을 간다고 해서 내가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변화하는 나를 느끼고 이해하고 사이좋게 같이 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두 가지만 기억하세요. 하나, 다른 방식의 노력은 노력이 아닌가? 둘, 이것이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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