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否認)과 망각의 바다를 헤엄쳐, 세상에 승희와 단원고 학생들의 흔적을 그리고 진실을 전하고자 했던 그의 간절함이 활자의 징검다리를 건너 사람들의 가슴에 닿았으면 좋겠다. 그의 눈물이 진실과 고통에 대한 세상의 어루만짐으로 한자락 쉬어갈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이틀, 삼일 지나는 동안 나는 더 무섭고 두려웠던 게 뭐냐면, 구조하러 갔는데 내 딸은 죽고 다른 애들만 살아오면 흑과 백이 갈린다는 거였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누구는 카카오톡이 되네, 누구는 살아 있다고 연락이 왔네, 몇명은 구조할 수 있네 그러는데 우리 승희는 아무 연락도 안 되니까 귀를 막고 싶었죠. 근데 사실 한명이라도 살아오면 그건 행운아 아니에요? 그게 우리 딸이면 좋겠지만, 승희가 아니라면 왜 하필 내 딸이 죽었냐는 생각이 들 테고. 그때 그 비참함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환장할것만 같았어요.
사실 나도 이틀짼가 배 타고 사고현장에 갔었어요. 배꼬리만 겨우 보이는데 바닷물이 차갑잖아요. 이불을 둘러싸고 갔는데도 얼어죽을 만큼 추웠죠. 바다에 뛰어들어 죽어버릴까 그런 생각도 했는데 용기가 안 났어요. 죽으면 큰애는 어떻게 하지, 남편은… 그러면서 죽지도 못하고 배꼬리만 바라보다 왔어요. 아무도 승희를 지켜주지 않는데 나는 따라 죽지도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죠. 엄마라는 사람이 그랬어요.
맨 위쪽에 있어서 문만 열어줬으면, 나오라고만 했으면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게 그렇게 원통했는데, 찾을 때는 그나마 위쪽에 있어서 바닥에 안 깔리고 빨리 나왔으니 그거 하나는 낫다 싶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죽으면 영혼은 떠나고 육신만 남는데 합동장례를 치르기로 했으면 진상규명이나 특별법 만드는 게 더 빨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은 나처럼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죠. 차라리 그렇게 했으면 정부에서 어떻게 못했지 싶고.
승희 데리고 안산으로 올라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승희를 (안산병원 영안실) 냉동고에 안치하고 다음 날 장례식 치를 준비를 해야 해서 집으로 가려는데, 우리가 진도 내려갈 때 차를 단원고 옆에다 주차하고 갔었거든요. 차를 탔는데 승희 아빠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는 거예요. 매일 넷이 타다가 셋이 탄 그 느낌, 앞으로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화장하고 납골당에 안치할 때까지 정말 꿈만 같았죠.
옛날에 어른들이 자식 앞세우곤 못 산다고 했는데 그 말이 다 맞아요. 공원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건강하게 오래 사시겠다고 운동하는 걸 보면 우리 아이들은 열일곱에 죽었는데 하면서 분노가 막 치밀어올라요. 누가 마흔살에 죽었다고 하면 아 20년만, 우리 딸도 23년만 더 살았으면, 그렇게밖에 말이 안 나와요. 우리 승희는 없는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듯 돌아가고 사람들이 웃으며 돌아다니는 걸 보면 화가 나고. 억울하고 용납이 안 돼요. 왜 하필 내 딸이 그 나이에 죽었는지…
우리 애들은 갑자기죽은 것도 아니고 사고 나고서도 한참을 연락하다 죽었잖아요. 엄마가 걱정하니까 우리 살아서 갈 건데 왜 걱정하냐고 화내고 간 아이도 있는데. 그런데도 교통사고라느니, 놀러가다 죽은 건데 왜 그러냐느니 하니까 상처가 돼요. 세월호는 달라요, 뭔가 있다고요. 의문이 너무 많다고요.
그동안 힘들었죠, 지금도 힘들고. 그래도 끝까지 갈 사람들은 언젠가는 진상이 규명된다 그렇게 말해요. 10년이든 20년이든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고. 근데 마음은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못 나오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 반에서도 죽은 아이가 26명이니 부모만 해도 최소 마흔명이 넘는데, 반밖에 안 움직였어요. 제 나름의 사정이 있고 누구는 일 다니고 또 누구는 싫어서 안 나오기도 하고. 다른 반도 똑같거든요. 함께하지 못한 부모들은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나중에는 ‘나도 할 걸’ 하고 후회할 것 같아요. 내가 진도에서그랬잖아요. 나는 그 후회를 안 만들기 위해서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움직여요. 내가 오늘도 승희를 위해 뭔가 했구나, 내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이렇게라도 해야 내가 맘이 편해요. 그것도 안 하면 죄인이 될 것 같고… 언젠가는 이것도 끝이 있겠죠. 승희한테 엄마 진짜 열심히 했다고, 네가 헛되이 간 것만은 아니라고 말할 날이 오겠죠. 아,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요즘엔 거실에서 엄마랑 자요. 늘 동생이랑 같이 잤는데 한밤에도 너무 생각나고 외로워서. 동생 꿈을 자주 꾸는데 그냥 동생이 평소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제가 잠수부가 되어 애들 찾으러 가는 꿈도 꾸고. 제가 거인이 돼서 배를 끌어올리는 상상도 많이 하고. 꿈에서는 정말 현실같이 동생이랑 같이 있는데 깨어나면 동생이 없으니 그때가 엄청 힘들어요. 한번은 동생이 너무 보고 싶어서 눈 감고 동생을 만지는 느낌을 생각했어요. 눈 감고, 얼굴, 코, 입… 그뒤로 매일 동생의 촉감을 상상해요. 잠잘 때마다 동생의 하나하나 그 촉감. 매일 그런 상상밖에 안 해요. 아직 내 인생은 반도 안 넘었는데… 앞길이 뻔해요. 대학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그저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동생 곁에 갈 수 있겠지… 아, 그냥 그런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요.
소연이가 그렇게 되고 방 정리를 허는듸 상장이 많이 나왔시유. 그걸 정리허는듸 눈물이 얼매나 나오던지… 걸핏하면 눈물이 나왔어유.팽목항에서도 너무 울어서 가족 분들이 울보아빠라고 놀렸어유. 다른 건 기억이 잘 안 나고 울었던 기억밖에 없구만요.
제가 가장 궁금한 건 ‘우리 애를 살릴 수 있었는데 왜 못 살렸나’ 그거예요. 선장이 빠져나올 때 애들을 나오라기만 혔어도 다 살았는듸. 왜 그런 말을 안 혀서 죽였는지… 내일모레면 5개월이 다 돼가잖어유.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유. 힘이 있으면 바로 감방 보내잖아유. 빽 있으면 시민들을 갖고 놀려고 하고. 가끔 집에 들어가 있으면 술 생각밖에 안나유. 술만 먹어유.
제가 걱정인 건… 일이 다 해결되고 함께혔던 분들이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면 저는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들어유. 여기 와서 그려도 히히덕거리고 웃고 있지만 다 해결된 다음에는 어떻게 이겨낼지 걱정이 돼유. 지금도 술기운에 사는데… 제가 앞으로 살 계획을 소연이허고 함께허것다고 꿈꿨는듸 이제 모든 게 사라져버린 것 같어유.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깜깜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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