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문화/정주영

현대그룹 창시자로, 삼성그룹 이병철과 더불어 한국 기업사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대통령 후보로도 출마했고, 1998년에는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키며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자네. 해봤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유명한 어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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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유적•유물/공편도시 유적전시관

종로 일대에는 매장 문화재 전시관이 많다. 청진지구 유적전시장, 공평도시 유적전시관 등이 그것이다.

공평도시 유적전시관은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특별한 공간이다. 종로타워 뒤편에 위치하고, 26층 고층 빌딩의 지하 전체를 현장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무려 108개 동의 건물지 그리고 건물을 둘러싼 길과 천여 점이 넘는 생활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아예 권역 전체를 보존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도시의 생활 문화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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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이
망해 볼까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그 안에 포함된 사람은 물론이고 벗어난 사람에게도 특정 삶의 형태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미친다. 무엇보다 이성애 핵가족으로 상상되는 전형적인 생애 모델은 통계상으로도 더는 유의미하지 않다. 이른바 가족 하면 흔히 떠올리는 4인 가족 형태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지금은 기혼자가 되었지만, 결혼하지 않았다면 마흔 즈음에 파티를 열 계획이었다. 파티의 이름도 진작 정해 둔 터였다. ‘혼자라도 괜찮아, 당신들이 있잖아.’
그동안 뿌린 축의금을 회수하는 이벤트랄까. 마흔까지 살아온 나를 격려하고, 비혼으로 사는 것도 썩 괜찮다는 걸 전시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결혼 제도 안에 편입된 건 결혼식을 치르고도 한참 후였다. 알면서도 모른 척, 미루고 미루다 제도 안에 진짜로 편입됐을 때, 그 일은 그 문서에 적힌 그대로 ‘사건’이었다. 짝꿍이 들고 온 혼인신고 증명서에는 ‘사건명: 혼인신고’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이제 헤어지려면 법정을 가야 하는 몹시 귀찮은 사이가 되어 버렸다.

누구나 특별한 사람을
가질 권리

따지고 보면 고작 4만 원 때문이었다. 짝꿍은 공무원 조직 안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이다. 결혼을 증명하는 문서를 가져가면 가족수당 4만 원을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상하고 섭섭한 마음을 애써 돌려 말했다. "가족수당 4만 원 때문에 혼인신고를 하자고 말하지 말고, 좀 더 근사한 핑계를 대 줬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결혼을 정식으로 축하해."
마지막 말은 내가 나에게 해 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온갖 수선을 떨며 가족 결혼식도 하고, 친구들과 결혼 파티도 따로 하고, 신혼여행이라는 걸 다녀오고, 같이 살면서도 결혼이 실감 나지 않았던 터였다. 그 어떤 형식보다도 ‘법적 구속력’이라는 게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실은 조금 감탄했다. 하지만 ‘증빙’하지 않는 이상, 그놈의 복지 혜택마저도 받을 수 없다는 건 역시 이상했다. 4만 원을 복지라고 불러도 좋을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이다.

생애 주기가 길어지면서 다양한 결합을 경험하며 살 가능성도 이전보다 높아졌다. ‘정상가족’으로 엮이지 않으면서 함께 살기를 고민하고 시도하는 여러 실험들 역시 계속되고 있다. 그런 관계에서 가장 높은 허들은 결국 제도다. 국민의 삶이 변해 간다면 국가도 응당 그 변화에 응답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현실의 나는 왜 조심하거나 배려하는 사람이 됐을까.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건 우연일까.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조심하라’는 당부를 듣고 자랐다. 그 결과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다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 됐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나 때문일까" 먼저 자책했다. "좀 조심하지"라는 타인의 말에 담긴 염려를 모르지 않지만 그건 따져 보면 ‘내 잘못’이라는 소리였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사고는 생겼고, 살아갈수록 ‘살아남았다’는 감각만 자꾸 선명해졌다. 그저 운이 좋아서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만 삶에 쌓였다.

대학시절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나는 나와 내 주변 여성들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할 언어를 얻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고통이었다.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적당히’ 정체화하고 10년 넘게 살아온 나 역시 강남역 사건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무엇보다 내 뒤에 오는 여성들이 나보다는 덜 울퉁불퉁한 길을 걷길 바라게 됐다. 그러려면 지금 내 몫으로 주어진 싸움을 피해서는 안 됐다.

우리는 여자애들이 야망을 가질 때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꺾어 버리고 길들여 왔는지 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고 나니까. 나는 유력 정치인과 바람 난 적 없고, 과도한 사이버 불링을 당한 적도 없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비슷한 일을 무수히 겪으며 깎여 나가고 작아졌다. 실수나 실패로 내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실패나 실수를 이전보다 덜 두려워하게 됐다. ‘내가 해도 될까’ ‘잘할 수 있을까’ ‘못 할 것 같아’라는 생각을 물리치는 데 저 문장만 한 부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래희망도 생겼다. 모건 부인처럼 ‘같이 망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실패하고 실수해야 잘하는 방법도 알 수 있게 된다고, 두렵다면 함께 망해 주겠다고, 그러니 우리 더는 조심하지 말자고 손 내밀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나이 먹는다면 뒤에 오는 여성들에게 지금보다는 조금 덜 미안할 것 같다.

여러 개의
진실 앞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종교가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종교가 있는데 왜 엄마는 하필 개신교를 택했을까. 왜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종교를 믿어야 할까. 다만, 그런 마음이 당장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교회 울타리 안의 사람들은 다정했으며, 그때의 나에게는 그 울타리가 필요했다. 나는 ‘우리’를 벗어나는 방법을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연약한 믿음을 탓하며 기도하는 일이었다. 의심하지 않는, 흔들림 없는 사람들의 믿음과 맹목이 부러웠다.

교회라는 건물 밖에 ‘진짜 믿음’이 있다면? 교회에 매주 출석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면? 나의 질문 역시 자꾸만 교회 바깥을 향해 뻗어 나갔다. 습관으로 믿음을 유지하고 싶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 만들어진 관계 때문에 믿는 ‘척’을 한다는 사실이 점점 용납하기 힘들어졌다. 앎은 실천되어야 했다. 삶이 내게 준 충동 앞에 똑바로 서자고 마음먹었다.

교회와의 단절은 예상보다 쉬웠지만 그로 인해 생긴 엄마와의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아파도, 내게 조금의 무슨 일이 생겨도, 엄마는 그게 내가 교회에 가지 않기 때문에 받는 ‘벌’이라고 퍼부었다. 정확히 내가 교회를 벗어난 그 이유로, 엄마는 나를 비난했다. 지긋지긋한 기복신앙이었다. 나는 교회라는 껍데기를 버린 거지 신앙을 포기한 게 아니라는데도 엄마는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나도 엄마의 ‘무지’를 나무라며 함께 퍼부었다. 그땐 돌려줄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인 것 같았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성경 구절을 줄줄 외던 딸, 성가대에 서고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딸의 난데없는 변심과 반항 앞에 엄마도 당황하지 않았을까. 교회와 교회 커뮤니티는 엄마에게 예나 지금이나 전부와 다름없었다. 그걸 부정하는 딸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 같지 않았을까. 나는 그런 엄마의 괴로움과 상실감을 못됐지만 조금은 즐겼다.

신앙이 엄마를 버티게 했다는 건 조금 뒤늦게 깨달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할머니 덕분이었다. 2011년 최저 생계비 취재를 위해 한 달간 서울 달동네에 들어가 살았을 때였다.
바로 옆방인 노부부의 집에서는 자주 나지막한 찬송가가 들려왔다. 얇디얇은 벽을 타고 무람없이 공유되는 소리야말로 가난의 맨얼굴이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한 달 간의 취재가 끝나고 짐을 싸던 내게 할머니는 미숫가루 한 사발을 들고 왔다. "아가씨, 교회 다녀? 교회 다녔으면 좋겠다." 대답 대신 나는 물었다. 엄마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세요?" 할머니가 지긋이 웃었다. "교회에서는 내가 평생 들어 보지 못했던 예쁜 말만 해 줘." 맥이 풀렸다. 그 할머니도, 어쩌면 엄마도 교회가 아니었다면 삶의 비참을 견딜 수 없었겠구나. 나는 할머니에게 교회에 다니겠다는 약속 대신 "저도 예수를 믿어요"라고 대답했다.
다만 나는 할머니도, 엄마도 아니었기 때문에 삶의 비참을 다르게 견디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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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다가도 슬픔이 묵직하게 방문하면 마음 둘 곳을 몰라 서성인다. 가능하면 몰려오는 감정을 피하지 않고 맞선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굉장한 재능 중 하나다. 꼭 그만큼 삶이 넓고 깊어진다. 싫어하는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 가면서 살고 싶다.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싫어하는 것들이 나를 침범해 올 때 숨거나 도망갈 수 있는 요새를 짓는 기분이 든다.

내 마음에는 할머니 무덤도 있고, 아빠 무덤도 있고, 종현의 무덤도 있다. 살아 있는 일은 마음에 그렇게 몇 번이고 무덤을 만드는 일임을, 슬픔은 그 모든 일을 대표하는 감정이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인사하고 돌아서는 내 등을 뾰족한 것이 지그시 눌러 왔다. 두꺼운 점퍼를 입었지만 느낄 수 있는 날카로움이었다. 아저씨는 나긋한 목소리로 그것이 칼임을 알렸다. 본관 건물 뒤쪽으로 나를 몰았다.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했다. 바지와 속옷이 차례로 벗겨지는 동안 나는 오줌을 지렸다. 나지막한 소리로 욕하는 그에게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너무 무서우면 목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동시에 찾아왔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토막 쳐진 기억 속에서도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이 수치심은 오랜 시간 내게 벌어진 일을 해석하는 데 방해가 됐다.

발도 키도 크는데, 몸무게만큼은 좀체 늘지 않았다. 2차 성징은 더디게 왔다. 차라리 남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남자가 아닐까 상상했다. 생리를 하지 않는 건 그때의 경험 때문일까 싶었다

‘지나간다’는 말 안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 웅크리고 있는지. 몇 번쯤 죽음을 결심했다. 고등학교 2학년 봄방학을 앞두고 생리가 시작됐을 때, 나는 그걸 작은 신호로 받아들였다. 나는 망가지지 않았다고, 나도 정상 범주 안에 속해 있다고 안도했다.

계절이 거듭되는 동안 반복되던 악몽도 잦아들었다. 살아남았으므로 살아 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잘’ 살고 싶었다. 뒤늦게 진학한 대학에서 만난 페미니즘은 문자 그대로 복음이었다. 별생각 없이 신청한 페미니즘 교양 수업 하나가 삶의 지축을 바닥부터 흔들었다. 교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 보고 나온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교수는 과거 부천 성고문 사건 속 ‘권 양’이었다. 내 눈앞에 권인숙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 있었다. 자신의 삶이 빠뜨린 함정에서 걸어 나와 마침내 살아남은 사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서 있었으므로, 나는 처음으로 과거가 나를 반드시 망가뜨리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 뒤에도 내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부인과 도망이 필요했다. 여성으로 사는 일은 일상의 크고 작은 성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페미니즘 덕분에 삶에서 아주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생존자’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을 때 몇 번이고 발음하며 입 안에서 굴려 봤다.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니 감격스러웠다. 내가 경험한 폭력을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어느 것도 사소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를 둘러싼 풍경도 달라졌다. 나는 혼자가 아니고, 내가 당한 일은 내 잘못이 아니며, 나는 이 고통을 ‘자원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고통과 더불어 살아갈지, 어디에 서서 고통을 바라보아야 할지에 따라 고통은 다르게 해석된다."

말하고 난 후에야 ‘다음’을 꿈꿀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가고 싶었다.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의 자리로 온전히 이동하고 싶었다. 말하는 동안은, 글로 적는 동안은 그럴 수 있었다. 11살 어린이를 성폭행하고 암매장한 사건으로 떠들썩하던 2006년이었다. 그즈음 나는 용서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어요’라고 일기장에 적고 또 적었다. 그건 내가 다시 쓰는 역사였다. 그 안에서 과거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 됐다. 비참을 기어코 안도할 수 있었다. 내게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큰 숙제였다. 나는 그 해석을 몇 번이고 고쳐 썼다. 증오를 연민으로 바꾸기 위해 애썼다.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았다. 평생 그 기억에 갇혀 살 수는 없었다. 계속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사는 일’은 별개였다. 먼지 쌓인 묵은 기억은 편히 쉬지 못했다. 몸이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성폭력 관련 기사를 가능하면 피해 다녔다. 혹시나 내가 관련 사건을 취재하게 될까 봐 어디선가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내려앉곤 했다.

가해자 이름을 가리면 구분조차 어려운, 판에 박힌 듯한 크고 작은 성폭력 피해 사례를 기어코 직시해 겹쳐 보고 모아 보며 알게 됐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살아 있는’ 일이다. 고통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사회다. 수치심은 비밀 안에 싸여 있을 때에나 존재한다. 성폭력 생존자를 위한 가이드북 《아주 특별한 용기》의 저자들 역시 ‘침묵 깨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많은 생존자들은 다른 생존자들이 보여 주는 용기를 보면서 동기 부여가 된다.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책을 쓰고, 가해자(혹은 기관)를 고소할 때 그녀는 다른 생존자들에게 침묵을 깨라고 자극하는 중이다. 많은 여성들이 다른 생존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치유를 결심하게 된다." 성범죄 특성상 가해자가 피해자의 수치심과 침묵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가 가시화되면 추가 피해를 막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도 타인을 살리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해 많은 여성이 그 깨달음의 폐허 위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지치지 않고 증언을 이어 가고 있다.

존재가 있어야 부정도 할 수 있다는 말, ‘아니’라는 이름 안에 담긴 분명한 존재감은 우리의 삶을 바꿨다. 그해 여름, 불쑥 내 삶에 연루된 고양이 ‘아니’는 여러모로 내 삶을 흔들었다.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강렬히 그리고 속속들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존재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를 기르는 일은 전전긍긍을 동반한다. 그것이 고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약하고 작은 존재인 아니와 함께 살면서 어린 사람과 함께 사는 타인의 기쁨과 보람과 고단함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사랑은 피곤을 동반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임을 배웠다.

나 역시 아니를 통해 ‘현재’를 산다. 무엇보다 내가 구한 줄 알았던 고양이는 나를 구했다. 불현듯 암 환자가 되었을 때 특히 그랬다. 지독하게 이어지는 치료에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나는 간신히 아니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니의 남은 시간을 세어 보곤 했다.

우리는 기적 같은 ‘완치’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만, 암은 완치되지 않는다. 비관할 일이 아닌 의학적 사실일 뿐이다. 다만 진단 이후 5년 이상 생존한 환자는 병증이 호전되는 기간을 의미하는 관해기remission에 접어드는 것으로 본다. 5년 이상 살면 무엇이 좋은가. 골몰하는 사이 아니가 내게 다가와 제 머리를 콩콩 들이밀며 부볐다. 고양이의 ‘헤드 번팅’은 집사에게 자신의 페로몬을 묻히는 것으로, 집사를 자기 영역이라고 선언하는 애정 표현이다. 내가 병과 함께 5년을 버티면 우리 고양이는 아홉 살이 된다. 오래 사는 고양이는 스무 살까지도 살 수 있다고 하니, 아마도 자기 생의 절반쯤 되는 나이가 되는 셈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날이면 나는 가라앉는 몸과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애쓸 수 있었다. 아니를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책임지고 싶다는 생각은 부족한 ‘생의 의지’를 앞질렀고, 끝내 나를 구했다.

따로 자던 고양이가 이불 속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가을이다. 사람이 없는 집에도 고양이는 있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에어컨이, 한겨울에는 보일러가 쉬지 않고 돌아간다. 나는 더는 전기료 5400원을 내던 가구원이 아니다. 무엇보다 고양이 몸에서 가장 추워 보이는 귀가 따끈따끈하면 마음이 누긋해진다. 나는 잠든 고양이의 귀 끝을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특히 고양이 귀 끝 주름을 만질 때면 초보 집사 시절이 떠올라 매번 웃는다. 고양이 귀 끝은 마치 찢어진 것처럼 보인다. 초보 집사였던 나는 매끈하지 않은 고양이 귀가 찢어진 거라고 생각하고 울면서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인간이 있든 말든 침대 위로 올라와 가로로 길게 누워 버리는 고양이를 볼 때면 ‘역시 잘 키웠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고양이가 이렇게 제멋대로인 것이 안심이 된다.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제대로 한 일은 없는 긴 하루들의 반복 속에서 나는 자주 일을 좋아하는 건 역시 조금 슬프고 쓸쓸하다고 여긴다. 그런 삶이지만 고양이와 누울 수 있는 하루 몇 시간 덕분에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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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장소/목포

전라남도 서남단에 있는 시. 남해의 많은 도시가 그렇듯 목포 역시 이순신과의 연관이 깊다. 정유재란 때 목포 앞바다 고하도에서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유달산이 유명한데, 유달산 노적봉도 이순신이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활용하여 적군을 물리치는 데 기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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