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 가족 찾기에 평생을 바쳐 온 그는 은퇴 후 백석대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선뜻 쉽게 수락하지 못했다. 다른 가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느라 정작 자신의 가정은 잘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그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했고, 그런 자신이 과연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나 싶었다.
아이들이 필요로 했던 건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훌륭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아버지란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어느 날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말했다. "학생들도 내 자식처럼 가르쳐야 하는데 그 전에 너희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고 싶다."
아이들이 너무 늦었다며 자신을 원망하고 거부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아이들은 무릎까지 꿇어 가며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삼켰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만 챙기느라 자신들을 외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동안 아버지도 참 힘들고 외로웠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뒤늦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 아버지에게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고, 용서한다는 말을 해 주었다. 이 교수는 아이들이 자신의 용서를 받아 주는 것이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가슴을 쳤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못 할 말이 있을까 싶지만 우리는 가깝다는 이유로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을 미루게 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겠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고맙다면 고맙다고 말해야 하고, 미안하다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이 언제든 증오와 허세와 자만심과 특권 의식에 빠져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를 수 있음을, 그것이 우리 모두를 멸망의 길로 이끌 수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곧 사라지겠지만 우리의 후손들은 지구 위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지구를 망칠 권리는 현재 살아 있는 80억 명의 사람 중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말한다. 일단 일이 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런데 하마구치 감독은 나에게 말하는 듯했다. 아무리 바빠도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한다면 우선 사람을 챙기라고. 바쁘다고 말하는 건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나에게 묻는다. 정말 일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하느냐고. 사람을 챙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말 한마디로도 충분히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데 나는 왜 그러지 못했는가. 하마구치 감독과 문재인 전 대통령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를 챙기는 데 거창한 이벤트나 특별한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그들의 수고와 노력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우리는 가족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요즘은 제삿상에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을 올리는 경우도 많다는데, 우리는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고 있을까. 자녀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냐’, ‘오늘 숙제는 다 했냐’는 말 대신 요즘 좋아하는 건 뭐냐고 물어본 적은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르면 더 늦기 전에 물어봐야 한다. 어떤 노래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으냐고, 어떤 죽음을 바라느냐고….
배우 윤여정, 그녀는 자신의 과거사 때문에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지만 그에 대해 억울하다고 소리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자신을 불쌍한 사람 취급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똑같이 대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낯선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실수를 저지를까 봐 조심하며 살았다.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어. 내 인생만 아쉬운 것 같고 내 인생만 아픈 것 같지만 다 아프고 다 아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세상이 나를 배척하고, 부당하게 거부하는 듯한 날이 찾아온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뾰족해져서 누가 나를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그에게 다 쏟아붓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라고 오늘이 쉬웠을까. 윤여정 배우의 말처럼 누구도 타인을 함부로 대할 권리는 없다. 그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어릴 적 나는 착하게 살면 복을 받을 거라고, 열심히 살면 좋은 일만 생길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착하게, 열심히 살아야지 했다. 그런데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불행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내 세상이 원래 불공평하고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때때로 화가 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특히나 ‘다큐 3일’과 ‘유 퀴즈’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들이 불행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끝끝내 버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눈물겹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모양 빠지고 추저분해 보여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라는 할머니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던 날 그 말은 내게 깊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인생의 겨울을 지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 말을 전해 주고 싶다.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것이라고. 그리고 한번 믿어 보면 어떨까. 지금은 너무 춥고 힘들지만 겨울은 지나갈 테고, 그러면 따스한 봄이 찾아올 것이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분명히 봄은 온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실수를 ‘부끄러운 것’, ‘벌받아야 할 것’으로 배워 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수와 실패를 하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사회적으로 망신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하게 될 텐데, 그럴 바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세계 기술 혁신을 이끄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는 오히려 실패를 권장한다. 그들은 "대박을 터트리기까지 평균 4회 가까이 실패한다"는 통계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실리콘밸리에서는 스타트업을 만들었다가 실패한 경험을 대기업에 취업한 경험 못지않게 좋은 경력으로 인정한다. 실수와 실패가 부끄럽거나 숨겨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취업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 역시 성공하려면 실패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실패를 견디는 능력부터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가 쉽게 바뀔 리 없다. 실패를 격려하는 문화 또한 단번에 생기기 어렵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어려울 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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