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1,000만 원과 경제적 자유, 그리고 불로소득. 요즘 시대에 이보다 더 달달한 단어가 있을까. ‘단시간에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그렇게 번 돈을 굴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을 만든다’니! 어딘가 비정상적인 꿈처럼 들린다. 그래서 이 단어를 만든 사람들은 한 가지 매우 강력한 조건을 내걸었다.
"내 강의만 들으면 돼."
나쁜 강연자는 희망을 팔아서 돈을 번다. 자신의 커리어가 아닌 타인의 성공을 예시 삼아 인생 역전의 용이함을 말하고 외제차와 아파트, 큰 매출만을 강조하며 듣는 사람들의 생각을 마비시킨다. 그들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경제적 자유와 불로소득을 위해 얼마나 많은 젊음을 갈아야 하는지. 더러운 꼴은 또 얼마나 많이 견뎌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성의 가능성은 얼마나 작은 바늘구멍 사이에 놓여 있는지.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그건 안 팔리기 때문이다.
희망을 파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솔직히 이로운 일에 가까울 것이다. 희망만큼 요즘 세상에 절실한 가치는 많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책임지지 못할’ 희망을 파는 것은 악질 행위다. 타인의 인생을 담보로 자신의 지갑만 채우는 이기적인 행위다.
그래서 우린 좀 더 신중하게 희망을 사야 한다. 그 잘난 비법들을 왜 생면부지인 나에게만 이토록 쉽고 저렴하게 알려주려 하는지,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한다. 단순히 돈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의심해야 한다. 내 감정과 시간, 그리고 희망이다.
슬프지만 성공은 어렵다. 쉬운 건 성공이 쉽다는 말 한마디일 뿐이다.
인생에도 족보가 있다는 간편한 한마디에 쏟아붓기에 우리의 시간과 감정은 너무 소중하다.
결혼이란 한 사람과 비정상적으로 가까워지는 걸 의미한다. 일주일에 한 번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카페에 들러 기분 좋게 바이바이 하는 관계가 아니라, 매일 아침 부은 얼굴을 보고 쌓여 있는 설거지 때문에 다투기도 하며 혼자만의 시간은 일탈이 되는, 그런 삶을 말한다. 연인이라는 멋들어진 단어로 감춰온 민낯들은 에누리 없이 적나라하게 공개된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든다. 그러나 집에 갈 수는 없다. 거기가 우리 집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서로가 서로의 땅을 따먹는 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은 내가 100이 되면 오히려 패배하게 되는 모순적인 게임이었다. 그걸 알고부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린 서로에게 기분 좋게 져주기로 했다.
10년의 연애를 끝내고 결혼하던 순간 우린 진지하게 고민했다.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협상일까, 거래일까, 사랑일까, 포기일까. 여전히 그 의미를 다 알기엔 부족하지만 누군가 꼭 답을 내려야 한다고 묻는다면 이렇게 정의해보고 싶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변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관계. ‘너를 위해’라는 말랑말랑한 이유로 나를 포기하는 게 싫지 않다면, 그런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 해도 괜찮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결혼이란, 가족이란 기분 좋게 패배할 수 있는 게임이니까.
나만 뒤처진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안 한 지가 벌써 몇 년째다.
아직 한참 먹고 배우고 움직이고 익혀야 할 나이인데 무엇이든 움직이려고만 하면 이런 생각이 함께 일어났다. ‘근데, 이거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턱걸이 하나에 근육질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건만. 오늘도 나는 철부지 소년처럼 헛된 기대를 품고 또 좌절한다. 결국 달라지는 것은 더 늘어진 뱃살과 생각밖에 없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특징은 간단하다. 뭘 하든 완벽을 추구하기에 반대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잘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내일로 미루는 것을 선택하고,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기 위해 결국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병은 슬픈 병이다. 문제를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생기는 병이기 때문이다.
마치 끊임없이 울리는 사이렌 속에서 사는 삶과 같달까. 불을 꺼야 하는 건 알지만 내 힘으로는 끌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강하게 지배된다. 그래서 미루고 또 미룬다. 이 거대한 불도 한 번에 소화시켜 줄 강력한 소방차를 기다리지만 소방차는 절대 오지 않는다. 결국 커질 대로 커진 화재 앞에서 나는 부랴부랴 생수통을 붓거나, 될 대로 돼라 자포자기하며 타 죽는다. 그런 우리에게 심리학이 내리는 처방은 이렇다.
"너무 잘하고 싶어지면 반대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게 돼."
우린 시작이 어렵지 끝을 맺지 못하는 놈들은 아니다. 일단 뭐든 시작만 하면 퍼펙트하게 끝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기에 시작만 하면 스스로를 멈출 줄 모른다.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린 할 수 있는 일들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내는 사람들이다.
완벽을 제거하는 순간 오히려 모든 것이 다 가능해지는 모순덩어리의 인간. 그게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참모습인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무언가를 또 미루고 있을 게으른 완벽주의자들이여. 일단 눈앞에 보이는 것들 중 가장 비실한 목표를 데려오자. 절대 질 수 없는 게임을 시작하자. 내가 당신들을 대신해 이렇게 외쳐주겠다. 준비…
땅! 자, 눈앞의 가장 만만한 놈을 쥐어 팰 시간이다.
질투와 열등감. 어쩌면 내 인생의 절반은 그 감정들이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내 질투심을 이겨낼 자신이 더 이상은 없다. 코인으로 인생이 피고 부동산으로 저 멀리 뛰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하지만 내 인생에는 나만의 행복이 있는 걸?(웃음)"이라고 말할 자신이 도저히 없다. 그래서 비겁하지만 내 해결책은 이렇다.
그냥 안 볼 거다. 내 마음의 건강을 위해 그들의 인생에서 과감히 눈을 돌릴 거다. 눈 감을 거다.
열아홉 살 래퍼가 한 달에 얼마를 버는지는커녕 당장 옆 동네 집값이 얼만지도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기에 우린 자신의 인생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다. 모르는 것에는 질투를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비겁해도 할 수 없다. 나는 내 세계관을 줄일 것이다. 나를 병들게 하는 너에게서 도망칠 것이다. 너의 성공에서 눈을 돌리고 네 행복에도 무관심할 것이다. 이 풍진 세상에서 내 마음이 더는 상하지 않도록, 나는 너를 보지 않을 거다.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내 인생을 살기 위해.
공감은 단순한 감성을 넘어 지적 능력까지 필요한 영역이 되었다. 요즘 시대의 공감이란 전혀 다른 상황에서도 비슷한 경험과 감정을 유추할 수 있는, 꼼꼼한 이해가 필요한 능력이 됐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타인의 취향을 무시하며 보기 흉한 우월에 젖겠지만(마치 나처럼), 사실 가장 저열한 지능의 소유자는 자기 세상밖에 없는 그 자신이다. ‘판다 한 마리가 뭐길래’ 조롱하며 웃겠지만 그 잔인한 논리는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 돌아올 뿐이다.
배려 없는 조롱의 종착지는 지금 웃고 있는 나의 입 앞이다.
S가 진심으로 자신을 믿게 된 순간은 의외로 주변의 응원을 마음껏 받은 순간이 아니라, 처음으로 학교 쪽지시험에서 만점을 받아냈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결국 받은 응원의 양이 아닌 해낸 성공들의 합이었다. 그게 아무리 작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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