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 중에 그런 말을 하셨어요. "정의를 위해 물러서지 말라." 저는 맨날 그러거든요. ‘아, 이거 싸워야 돼, 말아야 돼.’ 하느님은 늘 용서하라고 하시거든요. 무조건 용서하라구, 사랑하라구. 그런데 그게 너무 안 되는 거예요. 나는 평생 사랑하면서 그렇게 살았는데, 진짜 못된 짓 한 사람도 다 용서하고 그렇게 살았는데 이것만큼은 절대로 못하겠어요. 그래서 용서 못하겠다고, 이것만큼은 절대 용서가 안 된다고, 어떻게 이걸 용서하냐고, 이걸 내가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하냐고 계속 마음속에서 그랬는데,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 그분이 저한테 딱 답을 주시는 것 같더라구요. 정의를 위해 물러서지 말라고! 저는 그 말 한마디만 마음에 꽂혔어요. ‘아, 그래. 미워해도 되는구나. 진짜로는 못해도 마음속으로는 그 사람들 죽이든, 미워하든 내가 그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사회가 안전불감증에 빠져 있고 부조리하고 내 이익만 챙기는 세상인데 이런 세상에서 아이들을 내 이익만 챙기지 않는 아이로 키웠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이 사회는 문제가 크잖아요. 너무 나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득해서 이게 쉽진 않을 거라 생각해요. 죽어도 끝까지 하다가 그게 안 되더라도 엄마들이 그 정신을 포기하지 말고 내 자식들을 잘 키우는 것으로 이어갔으면 해요. 이렇게 이기적인 세상에 그렇지 않은 아이로 자식을 키우는 것이 이 투쟁의 연속이라고 봐요. 라익이가 살 세상은 이런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길게 천천히,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밖에 잘 나갈 수 없어서 진상규명 싸움에 동참은 못하고 있지만, 혼자 생각하다보면 ‘그래, 앞으로 이 사회의 정신세계가 바뀌게 우리 엄마들이 먼저 바뀌고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는 것이 이어져야 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들이 먼저 깨어 있어야지. 내 자식 내가 그렇게 키워야지. ‘내 자식만 잘살면 돼’라는 마음으로 아이들 키워서는 진상규명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이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고 봐요. 지금부터 그렇게 키우면 오래 걸리겠지만, 어쩌면 내가 죽기 전에 그런 모습을 못 보게 돼도 그렇게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가장 오래 남는 게 냄새라는데, 잘 없어지지도 않는다는데, 냄새가 안 나요. 이불에서도 냄새가 안 나요. 너무 너무 힘들면 길바닥에 건우 이름을 새기며 걸어보라던 수녀님 말씀을 생각해 어떤 때는 건우가 신던 신을 신고 걸어봐요. 도장 찍는다 생각하고. 매일 분향소에 걸어서 가요. 갈 때마다 눈물이 나서. 그래도 걸어보자 하며 나가봐요. 그런데 나가면 역시 우리 아들이 걸었던 길이다 생각하면 눈물이 막 나오죠. 바람이 불어도 우리 아들이 맞던 바람 같고. 여기 와동에서 태어나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녔으니 모든 곳에 건우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오래 살려구요. 오래 오래 살아서 우리 아들 기억해줘야죠. 시간이 지나면 우리 아들 잊는 사람들도 많아질 거고 벌써 잊은 사람도 있을 텐데 나는 오래 버텨야 되겠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은 그랬어요. "건우 아빠, 나는 아흔살 백살까지 살 거야. 내가 건우를 혼자서라도 끝까지 기억해줘야 할 것 같아"라고 했더니 "아흔살? 너무 많지 않아"라고 해요. 그래도 나는 그때까지 살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기억이 온전해야 하는데. 치매 걸리면 안 되는데… 하지만 나는 치매 걸려도 다른 사람은 다 기억 못해도 우리 건우는 생각할거야" 그랬더니 건우 아빠도 "그래, 그렇게 살아"라고 하대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또 다 살기 싫고 죽고 싶고 그래요. 너무 화가 치밀어오르는데 화를 가라앉힐 수도 없어요. 이게 반복돼요. 이 나라한테 화가 나… ‘아, 이 ○○ 같은 세상!’ 혼자 막 이래요. 그러면 또 건우 아빠가 다시 이래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건우는 안 돌아와. 그러니 하루 일찍 건우한테 간다는 마음으로 너무 오래 살려 버티지 말어. 그래도 사는 동안 우리 잘 버티고 살자. 누구도 어떻게 해줄 수 없으니 둘이서 잘 버티자" 그래요.
건우가 가고 제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니까 어느 날은 건우 아빠가 이렇게 물어요. "내가 자기를 안 만나고 그랬으면 건우가 안 태어났을 텐데,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나 안 만나고 싶지 않아? 그러면 이 고통의 시간을 안 당해도 되잖아."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나는 또 이 고통을 당한다고 해도 건우를 만나고 싶어. 다시 택한대도 나는 건우 엄마를 택할 거야"라고. 그 17년 동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에 다시 또 기회가 생기면 건우를 또 만나 그 시간을 다시 건너고 싶다고. 내 인생에서 건우와 보낸 17년은 너무도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조치원역 앞에서 서명을 받는데 인근 가겟집 주인이 불러 갔더니 대뜸 "1년에 사고로 천명, 이천명이 죽는데 삼백명 죽은 걸 가지고 왜 이렇게 난리냐? 당신들 때문에 가게 안 되는 거 안 보이냐? 나라를 거덜낼 거냐?"라고 했다. 길거리 서명을 숱하게 받아봤지만 이처럼 원색적인 비난은 처음이었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얘기하는 거 아니라고 소리 지르고 나니 내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때 "너무 상처받지 말아요, 다니다보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더라구요" 하며 어깨를 토닥이셨던 분, 미지 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감정을 우겨넣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 감정을 어떤 활자로도 새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의 언어와 감정을 책으로 만들겠다고 달려들었던 건 호기 같았다. 그러나 "딸은 그렇게 됐어도 딸이 한 일은 알려야 되지 않겠냐"던 아버지의 말씀을 저버리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펼치게 되었다.
미지는 마지막은 행복했던 것 같아요. 학교생활도 즐거워했고 집에 와서도 항상웃으면서 살았어요. 찡그린 거 못 봤어요. 근데 정작 한번도 저는 미지와 함께 손잡고 여행을 해본 적이 없어요. 가족과 함께 여행을 못해봤어요. 이제껏 가족여행 한번 못해본 게 너무 후회돼요. 가족이니까 여행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죠. 갓난애였을 때 말고 딸하고 찍은 사진이 핸드폰에 찍힌 이 사진 한장뿐이더라구요."
세월호 유가족들은 ‘16’이란 숫자만 봐도 가슴이 벌떡거린다.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몸서리쳐지는 고통이겠지만 어떻게든 기억을 남기기 위해,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미지 아버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2학년 1반 생존자 명단이 있긴 있는데 눈이 확 뒤집어져 그때는 잘 안 보이더라구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봤어요, 이렇게. 근데 없더라고. 그때부터는 제 정신이 아니었지. 애 못 찾은 부모들은 이성을 잃었어. 저만치 살아남은 애들이 체육관 뒤쪽에서 담요를 덮어쓰고 있더라고. 걔네들은 부모들이 다 데리고 나가고, 없는 사람들은 체육관을 빙빙 돌며 막 찾아 돌아다니는 거지. 상황실 가서 ‘어떻게 된 거냐’ 물어도 거기서는 누가 말 한마디 안 해줘요. 가족들이 기물을 들고 가서 ‘너희들 다 때려죽인다, 빨리 우리 아이들건져라, 왜 너네들 여기서 안 건지고 있냐’며 난리를 피웠죠.
팽목항까지 37킬로미터 정도 되는데, 한 30분 정도 걸려요. 왜 그렇게 멀게 느껴지던지, 가는 내내 부들부들 떨었어. 거기 갔는데도 그때는 부스라곤 텐트 하나랑 상황판 밖에 없었어. 해경에서 몇명 나와 있었거든. 우리가 그 앞에 대고 ‘너희들 빨리 가서 구하지 않고 뭐하냐’라고 하면 구한다고 맨날 그렇게 얘기만 했어요. 거짓으로. 우리도 처음에는 다 믿었지. 방송에 잠수부가 몇백명, 뭐 배가 몇대, 헬리콥터가 몇대다 해서 믿었다고. 근데 그렇게 믿을 일이 아니었어.
미지 엄마, 아빠에게 16일은 삶과 죽음이 한묶음으로 날아든 날이다. 미지의 생일은 3월 16일, 사고가 난 날은 4월 16일, 물에서 올라온 날이 5월 16일이다. 미지가 세상을 처음 본 날, 미지가 떠난 날, 미지의 마지막 모습을 본 날이 16일로 일치했다.
"5월 15일, 사고 난 지 한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못 올라온 사람들이 스물두명이었어요.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혹시나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자기일까봐 다들 공포에 떨었어요. 미지는 5월 16일, 한달만에 나왔어요. 미지가 하도 안 나오니까 아무개 엄마하고 나하고 군청에 들어갔어요.
해수부장관 붙잡고 욕도 해가며 엄청나게 싸웠죠. ‘왜 거기는 안 들어가느냐’ 그러면 해수부장관이 해경 국장 보고 ‘분명히 들어가서 오늘은 작업해라’ 명령을 딱내리거든.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줄 알았지. 근데 바지선을 타고 가서 보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야. 그러면 찾아가서 또 싸우고 멱살 잡고 때려죽인다고 난동을 부렸지. 왜 작업을 안 하냐고 하면 거긴 무너질까봐 위험해서 들어갈 수 없다고 해. 무너진다고 안 들어가면 나머지 애들 어떻게 찾을 거냐고 항의하면 그제서야 통로를 다시 개설하는 식이었어. 그렇게 며칠을 항의하고 찾아가니까 객실 창문을 절단했던 거고 그렇게 해서 들어가는 도중에 미지가 올라왔거든. 전전날인가 바람이 좀 많이 불었어. 바람 때문에 파도가 치면물결이 왔다갔다 하면서 쌓여 있던 것들이 움직이잖아. 그전까지 눌려 있던 애들이 그때 올라올 수 있다는 거지. 우리 딸 있던 데도 원래 수십번을 찾았어. 얘도 아마 어딘가에 눌려 있다가 물결에 쓸리면서 올라온 거 같아. SP1(객실 이름)에 있던 게 아니고 SP2에 눌려 있다가 올라온 것 같아요.
체육관에서 한사람 한사람 줄어가는데 그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초조하고… 내 딸이 유실됐나, 인원이 줄어드니까 머릿속이 온통 다 그런 생각밖에 안 나. 막상 내 딸이 나왔는데 나머지 유가족들을 못 보겠더라고. 여기 누구 엄마, 여긴 누구네, 여긴 선생 그다음에 나, 이렇게 넷이 다 같이 모여 있었어. 그중 나만 나왔어. 생각해봐. 다 안 나온 중에 나만 나왔다니까. 그날 미지 데리고 오는데 그간 동고동락했던 사람들 얼굴을 볼 수가 없더라고. 미안하고 죄스럽고. 지금도 다 안 나왔어. 그 사람들이 어깨 툭툭 치면서축하한다고 그래. 근데 거기서 축하한다는 인사를 받을 수 있냐고, 그 상황에서."
아빠와 딸은 사고 한달만에 다시 만났다. 수학여행 간다고 나갔던 자식이 바다에서 떠올라 아빠를 기다렸다. 시신을 찾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살아남은 자는 가족의 이름으로 죽은 자를 확인해야 했다.
아무리 부모가 확인했어도 정확치 않으면 안 되니까 DNA 검사를 받아야 한대. 그전에 시신이 몇번 많이 왔다갔다 했었거든.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 부모가 DNA 검사한 뒤에 시신을 내줬거든. 근데 미지가 관 속에 있는데 새마포라고 하나 하얀 옷을 덮었더라고. 거기서 일 하시는 분이 ‘아버님, 제가 이런 말씀 드리면 죄송하지만 생전에 좋은 모습만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러는 거야. 내가 왜 그러냐고 했더니 따님이 많이 그러하니까 그냥 보지 말고, 좋은 모습만 기억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 ‘만일 이거 보면 평생 기억에남고 후회할 거 같으니까 안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러더라고. 그래, 생각해보니까 우리 딸 어차피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좋은 모습만 기억하자고 마음먹고 안 봤어.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진 것만 봤지. 그때는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 왜 좋은 모습만 기억하려고 했나 모르겠는데 장례를 치르고 나니까 그게 또 후회가 되더라고. 혹여 나쁜 모습이더라도 내 딸 마지막 모습인데 그걸 왜 안 봤을까. 아무리 망가졌어도 볼 걸, 후회가 되더라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많아. 근데 본 사람은 보지 말라고 하더라고.이거는 봐도 후회, 안 봐도 후회, 너무 가슴이 아픈 거야. 본 사람은 자꾸 꿈에 보이는 게 싫어 차라리 괜히 봤다는 사람도 있고, 안 본 사람들은 내 아이의 마지막인데 그것도 안 봤다고. 참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아, 진짜 이런 사고 다시는 나선 안 돼."
미지 엄마가 사건 터지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일이 있다. 바로 미지가 반장 나간다는 걸 막지 못한 일이다. "우린 미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몰랐어요. 근데 친구 한명이 유난히 많이 울더라고. 그리고 미지 책상에 ‘미지야 너무 보고 싶다. 너한테 너무 많이 미안해’ 이렇게 적어놨어. 우리는 그 아이가 왜 그렇게 통곡했을까 궁금해서 좀 만나고 싶었어요. 근데 2학년 1반 생존학생이 안산법정에서 증언을 했대요. ‘반장 때문에 살았다. 반장이 선장 역할 다 했다. 반장이 지금 우왕좌왕하지 말고 조금 있다가 나가자. 지금 문을 못 여니까 물이 좀 찬 다음에 나가자,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나가자’ 이랬다는 거야. 미지는 아마 위에 있다가 다시배 밑으로 들어간 것 같아. 밑에서 한사람씩 올리고. 근데 그 아이가 올라가려고 하는데 물에 쓸렸대요. 그래서 걔도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마침 봉을 잡고 있어 간신히 살았대. 자기까지만 살고 밑에 있는 애들은 쓸려 들어가버리고. 걔가 올라와서 해경한테 울면서 저 밑에 우리 친구들 많으니까 구해달라고 했는데 안 들어가더래요. 미지는 맨 밑에서 걔까지 올려주고 물에 쓸려서 소식이 없었던 거지. 생존자 말이 없으면 우리 딸이 그랬는지 몰랐을 거야.
미지 엄마는 애들의 증언 듣고는 너무 괴로워했어. 분명히 사고 당일도 아이들 챙기느라 자기를 돌보지 못했을 거라고. ‘저는 못 나왔으면서, 저는 좀 살아나와야지, 반장만 아니었으면 살아나왔을 텐데’ 하면서 많이 자책했어. 미지 엄마한테는 ‘미지 같은 성격은 반장 안 했어도 그 책임은 다했을 거다. 그러니까 당신은 애를 잘 기른 거다’ 그렇게 위로를 해주긴 했는데 잘 모르겠네. 책임감 있는 사람이 훌륭하다는 건 아는데 미지가 그렇게 가고 나니 잘 모르겠어. 훌륭한 게 뭔지."
일본 입장에선 이웃나라 일일 뿐이고 자기네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은 열과성의를 다해서 보도해주더라구. 우리나라 같이 이런 게 아니야. 해설위원하고 기자들이 진지하게 대화를 많이 하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솔직한 말을 다 하더라구. 우리나라는 감추기에만 급급한데…
방송 만든 거 봤는데 사실 자꾸만 그때 상황을 상상하게 되니까 우리들(유가족) 입장에선 정말 괴롭긴 하대. 아, 못 보겠더라고. 나도 그러려니 생각하고서 보기 시작했는데 속에서 울화가 치밀고 미치겠더구만. 저놈의 새끼들이 나가라고 했으면 다 살아서 지금도 막 웃으면서 대화했을 텐데 그렇게 없어졌다고 생각하니까. 지금도 집에 가 있으면 10시 반만 되면 꼭 문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애. ‘아빠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그 시간되면 쳐다봐. 우리 집안에 아주 고명딸인데. 애기였을 때부터 크는 내내 속을 안 썩였어. 애기였을 때는너무 편하게 잘 있었고 학교생활도 사춘기도 심하게 한 게 없어요. 생을 짧게 살고 간 게 그게…
지나고 나니 가슴을 후비는 기억이 많다. 참되게 살라고 가르쳤더니 다른 사람 구하고 정작 자신은 살지 못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일이지만 자식을 잃고 보니 죄를 지은 것 같다. 없이 살아도 티 없이 맑았고, 엄마 아빠의 속을 헤아렸던 듬직한 딸이었다. 아빠는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딸과의 달콤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미지가 나하고 농담을 잘해. 생전에 나랑 팔짱 끼고 드러누워서 ‘아빠, 이다음에 내가 아빠 비행기 태워줄게’ 했어. 그 말 많이 하잖아. 딸 낳으면 비행기 탄다고. 한 200번(시신 수습 순서) 전까지는 앰뷸런스 타고 올라왔을 거야. 그뒤부터는 훼손이 많이 돼서 바로바로 올라가야 하니까 헬리콥터를 타고 간 거야. 근데 미지가 나왔는데 그 생각이 딱 나는 거야. 헬리콥터를 딱 탔는데. 아유, 이 자식이 죽으면서까지 비행기를 태워주는구나. 내가 왜 연관을 거기다 지었는지,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때 딱 그 생각이 나더라니까.봐봐, 먼저 나왔으면 앰뷸런스 타고 올라왔을 건데 늦게 올라와갖고 헬리콥터 탄 거, 그것도 비행기잖아. 그죠? 그때 울음이 나더라고. 헬리콥터로 올라오는 동안 내내 관 옆에서 울었어. 와, 이 자식이 죽으면서까지도 약속을 지키려고 그랬을까."
한 배를 타고 가는 길이었으나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었다. 사고는 하나였지만 가족들이 받아들이는 삶의 무게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미지는 남을 구하려다 빠져나오지 못했기에 아빠의 아련함은 때로 질시로 번지기도 했다.
"생존자 가족들 보면 생각이 왔다갔다 해요. 내 새끼는 애 구하러 갔다 죽었고 얘는 살아나왔네. 너무 괘씸하잖아. 내 새낀 죽었는데 누구는 살았고 한편으론 내 새낀 죽었지만 누구는 살았으니 감사한 마음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솔직한 얘기지만 너무 괴로운 거잖아. 내 새끼도 살았으면 여기 있었을 텐데 누구는 저기 있고 내 새낀 없어졌는데, 다시 돌아오지도 못하는데 그걸 어떻게 보나. 이런 마음이 왔다갔다… 와, 이거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닌 거야. 너무 힘들어."
딸을 어이없이 떠나보낸 아빠는 요즘 들어 부쩍 어머니가 자주 생각난다. "잠이 안 올 때면 가만히 생각을 해봐요. 내 사주팔자 이런 거 생각해보면 참 여러가지 생각이 들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사랑도 못 받았고, 자식도 사랑을 주려고 했는데 일찍 가버리고. ‘아, 나는 뭐가 부족해서 뭐가 안 돼서 자꾸 이러나’ 그러다가도 아버지가 일찍 가셨지만 어머니가 우리를 안 버려준 게 감사하기도 해. 어머니가 젊은 나이 서른둘에 과부가 되셨거든. 시골 살았을 때는 원래 소문이 잘 퍼지잖아.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기를 ‘너네들 애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 들으면 안 된다’, 늘 그렇게 주의를 줬어.
우리는 엄마 말씀이 법이야. 사춘기도 없었어. 시골이니까 일만 했어. 어머니가 부지런하셔서 새벽 3시면 들에 나가셔, 캄캄한 밤에. 어머니는 애들을 깨워서 몇시까지 들로 나오라고 하셨어. 그때가 4시반, 5시. 일할 때는 캄캄해. 그러면 우리는 눈 비비고 나가. 나는 어느 때고 가도 엄마 말을 거역하지 못했어, 단 한번도. 어머니가 그때 우리를 버리고 가셨다면 어찌 됐을까? 자식들 안 버리고 키워주셔서 감사하고. 이렇게 결혼도 해서 애도 낳고, 웬만하면 애들이 보고 싶어하는 거, 해달라는 거 우리 나름 해주며 살았어. 근데자식이 이제 세상에서 없어졌네. 화가 나고 정말 미칠 것 같았어. 그래도 하나님이 무슨 뜻이 있는 건 아닌가 싶고, 더 부패되기 전에 뭘 밝히라는 뜻 아닐까도 싶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것도 감사하다 싶고. 우리한테 미지 몫까지 살아가라고 짐을 주신 것도 같고. 딸 자식에게 쏟은 정성을 이제 동생한테 쏟으라고 하는 것도 같고. 이게 다 뜻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요즘 부부는 간신히 끼니를 챙긴다. 아직은 시장에 가는 것도 힘들다. 자식 죽은 집에서 음식냄새 풍기며 밥상을 차리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웃들이 ‘괜찮냐’고 묻는 질문이 야속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냐, 당신이면 괜찮겠냐’고 되묻고도 싶지만 누가 우리 마음을 알까 싶어 집밖으로 나가는 일을 줄였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침몰은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야속한 일이지만 세월호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사건들이 그렇게 묻히고 사라졌다. 다른 사람은 다 잊는다 해도 이대로 끝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미지 아버지는 그걸 딸과의 약속으로 여긴다. 절대로 깰 수 없는 마지막 약속이라 다짐한다.
바닷물이 그리 찰 줄 몰랐던 봄날을 지나 뜨겁던 아스팔트 위에서 여름을 보내고, 청운동 바닥에서 한기를 느끼며 가을을 지냈다. 이제 겨울이고 그다음엔 미지가 떠난 봄이 찾아올 것이다. 직장도 잃고 미지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건지, 흔들리고 있는 아내와 미지 동생을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치지 않는다. 효원공원에 누워 있는 미지를 생각하면 힘들 틈이 없다. 가슴에 묻어둔 미지가 갈수록 더 많이 보고 싶어지고 자꾸만 그립다. 딸이 옆에서 불쑥 ‘아빠, 나 왔어. 그동안 잘 있었어? 아빠 보고싶었어’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그래서 아빠는 미지를 위해 아직 할 일이 많다. 할 일을 해야 먼 훗날 미지를 만나서도 한달 동안 바닷속에서 외롭게 했던 시간들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밤도 아빠는 분향소에서 미지를 보고 마음을 다잡는다.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미지가 바라던 세상, 그 길을 가느라 아빠는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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