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이야기

기차는 태어나면서부터 세계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기차가 철로의 이음새들을 지나가며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리듬, 철도만의 음악 역시 있다. 그래서 기차는 인간의 역사를 기록한 예술이 될 수 있다.

또한 기차는 숨겨진 역사의 틈새들을 보여준다.

기차는 태어나면서부터 인간 삶에 깊이 들어섰다. 비행기나 자동차의 실용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19세기의 절대적 운송수단으로서 말이다.

반면 기차 여행은 쾌적하며, 그런 한에서 일단 상류 사회의 징표였다.

기차는 정념의 차원에서도 인간들의 이야기에 깊이 스며든다.

우리에겐 서정적인 교통수단인 기차가 근대에는 개인의 고유성을 말살하는 냉혹한 기계문명의 디스토피아적 상징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더욱 무시무시한 기계들을 얻게 되어, 기차 정도는 아주 인간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더 나아가 기차는 현대적인 ‘존재론’을 구현한다.

기차의 창문들 각각처럼 세계는 전체를 이루지 않는 파편들, 차이뿐이다. 전체성은 주인공이 한 창문에서 다른 창문으로 옮겨갈 때 그 ‘횡단선’에서 생성된다. 그러니 횡단선을 따라 생기는 이 전체는 파편들을 통일하는 원리 같은 것이 아니라, 파편들의 차이로 이루어진 전체이다. 그것은 하나의 원리도, 법칙도 없으며 오로지 다양성으로만 이루어진 우리 세계의 모습이다.

피젯스피너와너무 지친 인간

한때 피젯스피너의 인기는 대단했다. 처음 봤을 때 카프카가 묘사한 장난감이 탄생한 줄 알았다.

피젯스피너가 꼭 이렇다. 납작하며, 별 모양도 있고, 유난히 빨리 돈다. 피젯스피너도 저 오드라데크처럼 다른 목적이 있던 기계의 한 부속인지 별도의 사물인지 잘 판별이 안 된다. 한마디로 용도를 모른다.

이 물건의 용도에 대해 주의력 결핍 치료용이라는 옹호도 있다. ‘초조하게 꼼지락거리다’라는 뜻의 ‘피젯fidget’을 이름으로 가진 물건답게 불안감을 흡수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용도라고도 하며, 금연에 도움이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모두 확정적인 얘기는 아니다. ‘쓸모없다는 것’이 오히려 피젯스피너의 독창성 아닐까?

어떤 의미에서 반복은 무상하다. 행위가 뭔가를 성취한다면 반복이 있을 수 없고 행위는 종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무상한 반복을 좋아한다. 어느 휴양호텔에서는 밤이면 연못에 개구리 소리를 틀어놓는다. 개구리의 단순한 울음이 끝없이 반복되는데, 그 끝에 어떤 완성을 기다리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개구리 울음의 반복 자체를 그냥 좋아하고 만족을 얻을 뿐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목적을 향한 전진이 아니라 무상한 삶, 무위의 삶을 희구한다. 사전은 무위를 ‘이룸이 없음’으로, 무상을 ‘행위에 대한 대가 없음’으로 정의한다. 목적을 설정해 이루려 하지 않고, 대가를 예측해 행위하지 않는 것이 무위, 무상의 삶이다. 한 기업 임원이 자신의 노동 이유는 은퇴 후 쉬는 삶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은 왜 목적을 향해 조직의 부속품처럼 노동하는가? 더 이상 목적에 종속된 수단처럼 되지 않고 쉬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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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세주의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슬픔이 넘친다.

세상을 버리고 싶은 이들이 있다. 사랑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한다. 해결할 수 없이 어두운 곳에 숨어들어야만 하는 부정한 사랑에 빠진 트리스탄은 말한다. "사랑의 밤이여,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잊게 해다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의 노랫말이다.

염세주의를 생각하면서 근대의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의 근본에 ‘의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의지란 의도한 바를 행하는 자유의지 같은 것이 아니다. 의지라는 말은 쇼펜하우어에게서 맹목적인 충동을 가리킨다. 우리 삶은 이 맹목적인 의지의 지배를 받는 노예 상태이다.

두 가지 비관적인 방향이 제시되고 있다. 맹목적인 충동을 다 만족시켜주지 못해 삶은 늘 허기와도 같은 고통을 겪는다. 반대로 이 충동이 쉽게 충족되는 경우엔? 삶은 좌표를 읽고 무료함에 빠지게 된다.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 그리고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권태와 무료함. 인생은 어디로 가든 이 두 가지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참된 행복, 즉 삶과 고뇌로부터의 구원은 의지의 완전한 부정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11 의지의 부정과 함께 "모든 이성보다 높은 평화, 대양처럼 완전히 고요한 마음, 깊은 평정, 흔들림 없는 확신과 명랑함"12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처럼 염세주의를 인간의 타고난 충동이 겪는 결핍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기엔 염세주의는 훨씬 심오하다. 염세주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위대한 관점, 삶을 긍정하는 자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통찰이다. 현실이란 삶을 긍정하기보다는 반대로, 가벼운 쾌락에 욕심내며 태만, 복수심과 시기심을 만족시키려고 남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삶을 긍정하는 자라면 삶을 파괴하는 이 현실 앞에서 염세의 눈에 눈물을 담고 슬퍼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았던 저 예술가들의 슬픈 시와 음악이 그렇듯 말이다.

유머

유머는 타인과의 관계를 즐겁게 해준다. 대화가 다루는 주제의 무거움 때문에 생기는 상대자와의 경직된 관계를 풀어서, 쟁점에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는 지혜의 길을 열어준다. 그러니 유머는 축복이 아닌가?

유머는 이렇게 마비된 사회에 벌을 내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유머는 철학 속으로 파고든다.

유머의 위대함은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데만 있지는 않다. 그것은 인간 마음의 한 비밀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 성공했다고 웃을 수는 없다. 누구도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자신이 성공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인생을 체념한 자만이 이 정도면 성공했다고 되뇌며 삶과 타협한다. 우리는 인생이 행복해서 웃는 것도 아니다. 당신의 삶을 보라. 행복과 불행의 조각들이 설탕과 모래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뿐 인생 자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요컨대 성공이나 행복 같은 이념이 우리를 웃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은 웃음을 만들기엔 너무 추상적이다.

지적인 세계에서는 오로지 삶의 축복처럼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유머가 우리를 웃게 만든다. 그것은 액면가가 얼마 되지 않을지 모르나 손에 쥐고 무게와 촉감과 광채를 느껴볼 수 있는 진짜 금화이다. 지적인 세계 밖에서는? 아이들이나 강아지들이 우리를 웃게 할 것이다. 그들은 유머와 같은 자유를 보여주지만, 당연히 유머보다 위대하다.

사랑의말

세월은 계속 흐르니 아버지와 어머니께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드리고 싶다. 그러나 잘 되지 않는다. 그간 연습이 없었던 까닭이다. 아이에게는 태어나 요람에 누웠을 때부터 일부러라도 사랑한다라는 말을 계속 한다. 안 쓰면 잊히고 마는 외국어처럼 언젠가 말문이 막혀버릴지 모르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사랑한다와 같은 마음의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거 당연히 알 텐데 뭐하러 하나 하는 심정에서이다. 일상은 젖은 옷처럼 회색으로 처진 채 생기가 없는데, 그 일상에 한번 얹어보자니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화려해 어색하게 느껴져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말들은 생활 속에서 사용함으로써만 인공호흡으로 숨결을 얻듯 생명을 얻는다. 사랑의 말은 발화되지 않으면, 바람이 없을 때 죽는 바람개비처럼 고개를 숙이고 잠잘 뿐이다.

기도나 주문의 말 역시 비슷하다. 기도는 언제 기도가 되는가? 기도문이 짧은 몇 문장으로 되어 있어서 한번 외우고 나면 기도는 끝인가? 왜 신앙을 가진 이는 기도문을 완벽히 한번 외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늘 반복해서 기도하는가? 기도는 발화되는 그 순간에만 기도로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일회적 발화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발화가 이루어질 때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주문 역시 마찬가지다. 창과 칼이 무기고에 있다고 적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들고 휘둘러야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주문 역시 책에 적혀 있다고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가 발화하는 순간에만 현실이 된다.

사랑의 말도 말해지는 순간 비로소 현실이 된다. 현실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로 말하는 사람을 구속하는 ‘법’으로서 효력을 지닌다는 뜻이다. 이 점은 맹세한다라는 말에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맹세는 어떤 법의 문장에 근거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로지 맹세한다고 말하는 행위 자체가 말하는 자를 구속하는 법인 것이다. 그러니 맹세의 말과 더불어 지상에 없던 유일무이한 법, 오로지 맹세의 말을 한 사람만 구속하는 새로운 법이 탄생하는 셈이다.

그러니 부모와 아이와 반려자에 대한 사랑은, 한 가정의 장롱 안에서 잠자며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금덩어리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랑을 금덩어리로 믿고 보관해놓은 채 영영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 꺼내 보려 하면, 그것은 장롱의 나프탈렌처럼 다 녹아 사라지고 흔적도 보이지 않으리라. 오로지 입 위에 올려놓을 때만 사랑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사랑은 죽기 쉬운 생명체인 듯 끊임없이 발화를 통해 숨결을 불어넣어 주어야만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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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하이브리드의 삶 또는 AI

4차 산업혁명, AI 혁명의 시대이다. 물론 이런 혁명은 기술의 발전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비약적인 기술 발전의 기원은 무엇일까? 중세를 마감한 르네상스 시대 이후 화려하게 펼쳐진 과학의 힘이다. 그 힘의 원천은 당연히 ‘이성’이다.
과학이 보편적 진리인 까닭은 그 과학을 주관하는 이성이 보편적인 까닭이다.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지배력을 이성의 보편성에서 확인했다.

하나의 보편적 이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이라 여겨졌던 이성은 이런저런 역사와 맥락에 따라 출현하는 ‘한 경우의 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의사소통적 이성 역시 보편적인 것이 아니리라. 우리의 소통 자체가 인간 이성의 품을 떠난 시대에 들어서버렸다는 사실이 이를 잘 알려준다. 인간의 이성은 또 다른 인간 이성이 아니라 기계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근대는 인간 이성이 수학과 수학에 뿌리를 둔 기계기술을 통해 대상을 지배한 시대였다. 지배하는 능동적 인간 이성과 지배당하는 자연의 이분법이 근대의 바탕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런 지배하는 인간 이성과 지배당하는 자연의 구도는 허구적일 것이다.

우리는 벌써 근대를 지나쳤는데 여전히 근대적 인간 주체의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챗GPT는 이미 지식을 산출하고 유통하는 주체인데, 한낱 학생들이 부정 과제물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수단으로만 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래전 전자오락이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을 때 폭력이 난무한다며 도덕적 설교자의 어조로 이 기계의 폐해를 우려하던 목소리가 기시감 속에서 들린다.
새로운 기계만 나오면 인간 주체는 주체와 대상을 가르는 이분법, 그리고 주체로서 자신의 지위를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터미네이터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챗GPT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라 윤리 규정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누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일 수 있을까? 오히려 정의의 이름으로 챗GPT의 언론자유를 편드는 사람도 나오지 않겠는가? 우리는 인간 주체와 지배 대상의 구분, 원본과 복사물의 구분 등과는 멀어진 새로운 지식 환경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재래의 가족은 풍비박산 났다. 어른, 아이, 아버지, 어머니, 자식 역할도 이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AI와 인간의 관계도 그럴 것이다. 인간계는 풍비박산이 났다. AI는 문학 작품이든 미술품이든 만들어낸다. 이는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고, 홀릴 수 있으며, ‘유혹’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핵심은 작품의 수준이 높냐 아니냐, 독창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이다.

AI가 인간이란 예술적 갈구 이상으로 종교적 갈구가 심한 생물임을 알게 된다면? AI는 신을 발명해서 인간을 감동시킬(유혹할) 것이다. AI 앞에서 단지 예술가가 살아남을까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재래의 종교가 살아남을까 걱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도를 아십니까?" 하고 묻는 직업이 위협받게 되며, 이제 우리는 이런 정겹고도 짜증 나는 질문자가 없는 외로운 거리를 걸어가야 할 것이다.
죽어가는 내게 기도를 해달라고 하면, 챗GPT가 신부님, 목사님, 스님보다 더 영혼의 위로가 될 말을 해줄 것 같다. 그러면 이미 그는 하나의 기능이 아니라 동반자이다. 내가 아는 한 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그리고 챗GPT만큼 말 잘하는 자도 없다.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다.

산책

걷기를 좋아한다. 걷는다는 것은 비효율적으로 느린 이동 방식 같지만, 실은 시간을 버는 일이다. 걷는 중에 생각할 수 있고, 나중에 사람들과 해야 할 말을 가다듬을 수도 있으며, 행운과도 같은 햇살을 만날 수도, 잎사귀에 부딪히는 빗소리도 들을 수 있다. 잘 아는 길도 최초의 길인 듯 관광객처럼 이것저것 구경할 수 있다. 차를 타면 이 모든 것이 일시에 사라진다. 일찍 도착해서 빨리 일해야 하고, 누군가와 빨리 복잡한 대화를 나눠야 할 뿐이다. 촉박한 일정으로부터 해방된 이런 걷기의 정수는 ‘산책’이 간직하고 있다.
산책을 다른 걷기와 헷갈려서는 안 된다. 산책은 이동이라는 실용적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

모르는 사이 자라난 화초처럼, 산책하는 동안 생겨나는 것은 뭘까? 바로 ‘생각’이다.

산책은 유쾌한 명상, 두서없는 생각들을 만들어낸다. 머리에 떠오른 상태 그대로의 생각이 산책길에는 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산책은 책상 앞에 앉아 계획을 세우고 하는 공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의 장場이라는 것이다.

맞다. 산책은 자유로운 생각의 폭죽을 만들어낸다.

산책이 한 인간의 삶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까? 그럴 것이다.

산책에는 삶의 중요한 진실이 있다. 산책에는 단조로움과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달리 말하면 반복과 반복을 통해 얻는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늘 똑같은 길로 들어서지만 그것은 늘 새로운 하루이다. 이것이 일상의 구조 자체라는 것, 반복이 새로움의 조건이라는 것은 산책의 귀중한 동반자인 우리 집 강아지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매번의 산책이 세상에서의 첫날인 것처럼 구름이는 너무 신나서 걸어간다. 산책이 그렇듯 반복이 새로움이 아니라면, 일상은 그저 형벌일 것이다.

산책은 지구 위를 걸어 다니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 자체이다. 산책 중 얻게 되는 착상 역시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이 꽃으로 피어나듯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어떤 억압적인 규칙에도 짓눌리지 않는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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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계몽군주

근대 철학의 황금기에 철학자들에겐 특별한 후원자, 주인, 또는 보는 관점에 따라선 성가신 학생이 있었다. 바로 계몽군주이다.

계몽군주가 탄생하길 열망하고 그를 직간접적으로 지도하는 일은, 단지 근대 철학의 관심사가 아니라 철학 자체의 오랜 꿈이 아닌가? 시라쿠사의 참주들을 방문하기 위해 평생 여행했던 플라톤이 잘 알려주듯, 군주를 철학으로 깨우치는 것은 철학자의 일생일대 소명이었다.

근대의 ‘계몽’은 자유를 추구하는 ‘비판적 태도’의 상속자이다.

칸트가 긍정과 인정 속에 인용하는 프리드리히 2세의 말이 알려주는 것은, 따지는 일이 복종이라는 한계 속에 자리 잡는다는 점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계몽의 용기는 통치자에 대한 복종이라는 한계 안의 용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계몽의 정신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통치자에게 복종하는 것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불화가 생긴다면? 칸트는 말한다. "국민이 자신에 대해서조차 내려서는 안 되는 결정을 하물며 군주가 국민에 대해서 내려서는 안 된다." 이 문장은 푸코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듯 칸트가 통치자 프리드리히 2세에게 제안하는 일종의 계약을 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복종은 하되, 복종해야 하는 정치적 원리가 보편적 이성에 부합하는 한에서 그럴 수 있다는 계약의 제안 말이다. 이럴 경우 "‘복종하라’는 명령이[복종하는 자의] 자율성 자체에 의거하게" 된다.

그러나 복종 자체가 이성의 자율성으로부터 유래할 때 여기에는 어떤 위험이 있지 않을까? 바로 이성 자체가 ‘자율적으로’ 통치자의 권력에 복종함으로써 권력에 불가항력적이 되는 위험 말이다. "바로 이성 그 자체가 권력의 남용과 통치화에 역사적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성 자신에 의해 정당화되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항력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9

철학자와 계몽군주 사이에, 또는 철학과 국가 사이에 계몽은 누구의 소유일까? 적어도 둘의 공동 소유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악마적인 기만이 침입하고 있지 않은지 사방을 둘러보아야 할 것이다. 계몽 또는 철학함이란 제한이 없는 것이고, 통치자는 제한을 만드는 자이다. 따라서 철학을 하되 제한에 복종하는 일, 정확히는 철학의 이름으로 자율적으로 복종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철학의 이름 아래는 제한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위반할 수 있는 길에 대한 세심한 검토가 자리 잡는다.

서유기와 혹성탈출의 정치

충직한 개들은 인간의 무용담에 출현하지만 영리한 원숭이들은 자신의 무용담을 만든다. 매력적인 원숭이 무용담은 고전부터 현대 작품에 이른다.

어두운 《서유기》가 우리 시대의 것이다. 화해와 조화의 이념에 내기를 거는 정치가 있고, 노골적인 이익 행사를 향해 걸어가는 정치가 있다. 오늘날 국제사회 어디를 돌아보건, 누구나 그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 동참하고 싶게 하는 이념을 제시하는 정치가 없다. 오로지 힘의 자랑과 토라짐과 위협이 있다. 글로 옮기기도 민망할 정도이긴 하지만, 가령 북한의 지도자와 눈높이를 맞추고서 "내 핵단추가 더 세다"고 했던 지난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인류가 바라볼 이념이 사라진 대신 동네 아이들이 주먹으로 투덕거려 골목을 제패하는 수준의 정치가 지배하는 현실을 말해준다. 그야말로 짐승들 사이의 ‘종의 전쟁’이 있을 뿐, 갈등이 상승된 화해에 가닿고, 이상에 드디어 손을 대보는 《서유기》 식 전망은 세상 밖으로 사라진 듯하다.

이런 전망은 관념적이라고? 관념 아닌 현실의 규칙에 대해서는 이미 고달픈 나날의 싸움으로부터 모두가 질리도록 체득했다. 반대로 정치만이 인간의 꿈에 귀 기울이고 그 꿈을 향해 오를 수 있는 계단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삶에는 권력가와 그가 만든 임의의 규칙, 규칙의 허점을 노린 축재蓄財, 위반에 대한 형벌, 그리고 보복으로서 ‘종의 전쟁’만이 있을 뿐이다.

근대와인간 주체의 탄생

우리는 ‘인간 주체’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는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한다. 도대체 ‘주체’가 뭐길래 우리는 자신이 ‘주체’이기를 열망하는 걸까? ‘인간 주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세계 속에 담겨 있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방향 짓는, 우리가 담겨 사는 요람은 무엇인가? 바로 ‘근대modern times’이다. 근대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인 연표에서 근대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중요한 점은 근대란 연표상의 객관적인 어떤 기간을 가리키기보다는 하나의 ‘태도’라는 점이다. ‘근대modern’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형용사 ‘modernus’(모데르누스)는 ‘가까운’이라는 뜻을 지닌다. 가까움이란 지금의 시점에 대해 가까운 것이니, 곧 새롭다는 뜻이다. ‘근대’란 자신의 현재를 새로운 시기로 감지하는 태도인 것이다. 이 점은 근대를 대표하는 저작들의 제목에서부터 표현된다.

주체라는 말은 애초에 인간과는 상관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주체’를 소유하게 된 것일까? 어떻게 ‘인간 주체’가 탄생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근대 학문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

이성이 지닌 원리들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수數’이다. 이성은 수를 바탕으로 연구 공간을 열어놓고, 그 안에 들어서는 것을 대상으로 파악한다. 즉 수리물리학적 질서가 대상 세계의 본질로서 부여되는 것이다. 더불어 수적 계산의 ‘정밀성’은 학문이 갖추어야 할 이상이 된다. 수가 본질적인 것이 됨으로써, 근대는 어떤 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정밀함의 시대가 된다. 강물은 수량으로 측정되는 수자원으로, 임야는 생산할 수 있는 목재의 총량으로 계산된다. 자연에 대한 이런 수학적 파악을 바탕으로, 자연을 가공할 수 있는 근대 기술이 탄생한다. 근대 기술은 무엇을 위한 기술인가? 바로 인간에게 유용하기 위한 기술이다.

결국 인간 이성이 자연 속 모든 대상들의 원리(수학과 물리학)를 제공하는 대상 세계의 ‘근거’, 휘포케이메논(주체)이 된 것이다. 또한 수리물리학적으로 파악된 대상은 근대 기술을 통해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귀결된다. 세계의 근거와 귀결의 자리 모두에 인간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 주체’가 탄생한 것이다. 이 인간 주체의 등장을 ‘인간중심주의’라는 말로 불러도 좋겠다. 인간중심주의는 근대의 곳곳에서 목격된다. 예를 들어 근대 종교가 있다. 앞서 근대에 자연은 수리물리학적으로 파악되며, 이를 바탕으로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고 했다. 이는 곧 자연으로부터 신들이 떠나갔다는 뜻이다. 이제 숲에 사는 정령도 없고, 산을 지키는 신령도 없다.

인간중심주의는 예술의 영역으로도 파고들었다. 바로 ‘미학’이 근대에 등장한 사실이 이를 알려준다. 미학은 고대부터 있어왔던 예술철학 일반과 혼동하면 안 되는 특수한 의미의 근대 학문이다. 미학을 뜻하는 ‘Asthetik(esthetique)’의 원래 의미는 ‘아이스테시스‘에 관한 학문’이다. 그리스말 ‘아이스테시스’란 감각적 지각을 뜻한다. 그러므로 ‘에스테틱’이란 감각적 지각을 가능케 하는 인간 마음의 능력인 감성에 관한 학문, 즉 ‘감성론’이다. 그런데 어쩌다 감성론이 미학이 되었을까? 바로 근대는 아름다움의 척도를 인간의 감각하는 능력, 즉 감성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인식론과 존재론에서 일어난 근대의 혁명이 예술의 영역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데카르트와 더불어 시작된 이 혁명은 인간 주체의 생각함(코기토)을 모든 지식과 존재의 토대로 만들었다. 미美의 영역에서는 미학의 출현과 함께 인간의 감성이 아름다움의 척도로 등장한 것이다.

‘인간의 주체 되기’라는 이 프로그램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우리는 지금도 근대인이며, ‘근대’는 곧 ‘현대’를 뜻할 것이다. 반면 인간이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면, 즉 주체로서의 인간이 죽었다면, 우리는 근대라는 인간의 계획을 뒤로 한 채 미지의 시간으로 나아가는 현대인일 것이다.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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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인공양심

AI 시대가 도래하며 ‘판단력’의 정체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AI가 대체할 것으로 전망되기도 하는 전문적인 ‘법조인’이나 ‘의사’의 일은 판단력이 핵심인 까닭이다. AI가 자신의 영토로 삼으려 도전하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 바로 판단력이며,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갖출 수 있느냐에 따라 AI의 성공 여부도 결정되리라.
판단력은 인간 정신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한 번의 판단에 따라 개인이나 집단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우리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 ‘오판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판단은 그냥 천부의 능력으로서 판단력이 담당한다. 판단력은 학습될 수 없는 것임을

혹시라도 판단력의 계발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운전이나 테니스 같은 실제적인 ‘연습’의 문제이다. 판단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칸트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이다. 다소 낯선 명칭이지만 이 두 가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보편적인 규칙이 주어졌을 때 개별적인 것들을 그 규칙 아래 포섭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가령 법조문이 주어졌을 때 어떤 사건이 그 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지 판정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법의 적용 문제는 이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반성적 판단력은 규칙이 주어지지 않고 개별적인 것만 있을 때 이 개별적인 것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규칙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반성적 판단력은 의사의 진찰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전반에서 흥미롭게 작동한다. 어떤 사람들은 눈치가 빠른데, 이 눈치의 정체가 반성적 판단력이다.

만일 AI 의사가 가능한 시대가 온다면, 그것은 저 천부의 능력인 반성적 판단력과 규정적 판단력을 AI가 습득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AI는 이런 판단력을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판단력은 우리가 다룬 것보다 훨씬 풍부한 작용을 담고 있다. 판단력은 단지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그것이 속하는 보편적인 규칙을 발견하거나, 보편적인 규칙이 주어졌을 때 그에 따라 개별적인 것을 판단하는 능력에 그치지 않는다. 판단력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가치가 관철되기를 ‘요구’한다.

판단은 실현해야 할 정당하고 건전한 가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판단력은 능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제기될 수 있는 요구이다."

판단력의 위대함은 지식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바로 도덕적 이념에 비추어 이런 사태가 일어나도 괜찮은지 심판하고 비난하는 데 있다. 도덕적 가치에 입각한 이런 판단(심판)은 인간의 운명을 다루는 의학과 법학의 핵심을 이룬다. 판단력을 습득한 AI가 보편적 규칙을 발견하거나 적용하는 지식의 획득 차원에 그치지 않고, 가치라는 심급에 따라 ‘이렇게 되어서는 안 돼’라고 요구하는 판단력의 화신이 될 수 있을까? 만일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공양심’일 것이다.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

우리는 참 많은 시험을 보고 살아왔으며, 그만큼 우리 주변에는 늘 문제가 있어왔다. 문제를 푸는 일은 어려웠지만, 문제 자체는 자동적으로 늘 앞에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해온 것이 인류이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한 집단의 사활이 걸려 있었다고 해도 좋겠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일이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진정 중요한 것인 ‘문제 자체’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대해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구별되는,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무엇인가?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가령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난점들을 요약하는 ‘하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결코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매우 난감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은 바로 문제를 발명해내는 일인 것이다. 사람들은 문제의 해결이 인생의 가장 어려운 모험인 듯 도전하지만, 자신이 매달리는 그 문제란 누군가가 더 험난한 길 속에서 이미 창안해낸 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혹시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힘은 비범한 다른 이의 몫이고, 애초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없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 누구나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소질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교육의 의미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진정한 교육이란, 문제에 답안 하나를 공들여 제출하는 길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창안해내는 소질을 빛나게 해주는 것이다.

철학과 매스미디어

매스미디어란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잡지, 영화, 광고 등 불특정 다수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를 뜻한다. 물론 전달되는 정보는 진실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매스미디어는 철학의 친구이다. 철학philosophy이 ‘진실한 앎sophia’에 대한 ‘사랑philos’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철학과 매스미디어, 둘 다 진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철학이 궤변에 시달리는 것처럼 매스미디어 역시 거짓과 경박함에 시달린다.

매스미디어는 새로운 것에서 또 새로운 것을 쫓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뭔가 진기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듯이 철학자를 제공한다. 이때 철학자는 세계의 위협적인 비판자가 아니라, 안전하게 유지되는 세계의 일부이다. 그저 세계가 관리하는 ‘문화’의 한 진기한 모습이다. 그가 아무리 신랄하게 비판하더라도 문화는 그 비판조차 너그럽게 자신의 일부로 흡수한다. 문화와 함께 모든 것은 제자리이다. 처음엔 흥미를 끌다가 곧 사라져버리는 많은 것들처럼, 철학자는 그의 사상이 미처 이해되기도 전에 낡은 것으로 버려지고 또 잊힌다.

진실을 전달한다는 그 기본적인 사명에 비추어 보자면, 역설적이게도 미디어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게 한다. 그런 점에서 미디어는 진리를 거짓으로부터 가려내는 일을 사명으로 삼는 철학의 경쟁자이다.

신문과 텔레비전 등 매스미디어는 흔히 말하듯 정보의 홍수를 이룬다. 모든 자료와 그에 대한 모든 반박 자료, 그리고 수많은 관점이 공존한다.

매스미디어가 사라진 세계를 꿈꿀 수 있는가? 그런 꿈은 공허하다.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매스미디어가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편이 좀 더 현실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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