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의 영어는 성장을 멈출까요? 영어 말하기는 왜 이렇게 늘지 않는 거죠? 솔직히 이유는 간단합니다. 안 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분명 억울한 느낌이 들고, 반박하고 싶을 겁니다.

세상에 좋은 학습법은 이미 많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오래 꾸준히 하지 않으면 어차피 소용 없다.

결국 영어를 잘하고 싶고 특히 말하기 능력을 키우고 싶다면 실제로 많이 써보고 말을 해봐야 합니다. 물론 입을 움직여 소리 내 말하는 건 어색하고 불편해서 가장 하기 싫고 피하고 싶은 연습일 것입니다. 창피하고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하겠죠. 그렇다고 자꾸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학습 행위로만 숨으면 영어는 절대 늘지 않습니다. 문법 공부는 가끔 참고만 한다는 느낌으로 하세요.

영어를 배우기 위해 어떤 대단한 능력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 같은 일상적인 일들을 영어로 하려고 계속 노력하고, 그걸 장기적으로 지속할 수 있으면 누구나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을 피하고 건너뛸 방법만 연구합니다.
기억하세요.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나보다 더 용기를 내서 영어로 말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내가 하기 싫어한 일을 나보다 더 많이 한 사람입니다.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영어에 꾸준히 투자한 사람입니다.
이제 액션 페이킹이라는 달콤한 함정에서 그만 나와야 합니다. 영어가 쉽게 늘기를 바라는 마음, 마법 같은 방법이 있을 거라는 기대, 지식 쌓기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습관, 영어 말하기를 귀찮아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모두 버렸을 때 진정한 배움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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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否認)과 망각의 바다를 헤엄쳐, 세상에 승희와 단원고 학생들의 흔적을 그리고 진실을 전하고자 했던 그의 간절함이 활자의 징검다리를 건너 사람들의 가슴에 닿았으면 좋겠다. 그의 눈물이 진실과 고통에 대한 세상의 어루만짐으로 한자락 쉬어갈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이틀, 삼일 지나는 동안 나는 더 무섭고 두려웠던 게 뭐냐면, 구조하러 갔는데 내 딸은 죽고 다른 애들만 살아오면 흑과 백이 갈린다는 거였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누구는 카카오톡이 되네, 누구는 살아 있다고 연락이 왔네, 몇명은 구조할 수 있네 그러는데 우리 승희는 아무 연락도 안 되니까 귀를 막고 싶었죠. 근데 사실 한명이라도 살아오면 그건 행운아 아니에요? 그게 우리 딸이면 좋겠지만, 승희가 아니라면 왜 하필 내 딸이 죽었냐는 생각이 들 테고. 그때 그 비참함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환장할것만 같았어요.

사실 나도 이틀짼가 배 타고 사고현장에 갔었어요. 배꼬리만 겨우 보이는데 바닷물이 차갑잖아요. 이불을 둘러싸고 갔는데도 얼어죽을 만큼 추웠죠. 바다에 뛰어들어 죽어버릴까 그런 생각도 했는데 용기가 안 났어요. 죽으면 큰애는 어떻게 하지, 남편은… 그러면서 죽지도 못하고 배꼬리만 바라보다 왔어요. 아무도 승희를 지켜주지 않는데 나는 따라 죽지도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죠. 엄마라는 사람이 그랬어요.

맨 위쪽에 있어서 문만 열어줬으면, 나오라고만 했으면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게 그렇게 원통했는데, 찾을 때는 그나마 위쪽에 있어서 바닥에 안 깔리고 빨리 나왔으니 그거 하나는 낫다 싶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죽으면 영혼은 떠나고 육신만 남는데 합동장례를 치르기로 했으면 진상규명이나 특별법 만드는 게 더 빨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은 나처럼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죠. 차라리 그렇게 했으면 정부에서 어떻게 못했지 싶고.

승희 데리고 안산으로 올라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승희를 (안산병원 영안실) 냉동고에 안치하고 다음 날 장례식 치를 준비를 해야 해서 집으로 가려는데, 우리가 진도 내려갈 때 차를 단원고 옆에다 주차하고 갔었거든요. 차를 탔는데 승희 아빠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는 거예요. 매일 넷이 타다가 셋이 탄 그 느낌, 앞으로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화장하고 납골당에 안치할 때까지 정말 꿈만 같았죠.

옛날에 어른들이 자식 앞세우곤 못 산다고 했는데 그 말이 다 맞아요. 공원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건강하게 오래 사시겠다고 운동하는 걸 보면 우리 아이들은 열일곱에 죽었는데 하면서 분노가 막 치밀어올라요. 누가 마흔살에 죽었다고 하면 아 20년만, 우리 딸도 23년만 더 살았으면, 그렇게밖에 말이 안 나와요. 우리 승희는 없는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듯 돌아가고 사람들이 웃으며 돌아다니는 걸 보면 화가 나고. 억울하고 용납이 안 돼요. 왜 하필 내 딸이 그 나이에 죽었는지…

우리 애들은 갑자기죽은 것도 아니고 사고 나고서도 한참을 연락하다 죽었잖아요. 엄마가 걱정하니까 우리 살아서 갈 건데 왜 걱정하냐고 화내고 간 아이도 있는데. 그런데도 교통사고라느니, 놀러가다 죽은 건데 왜 그러냐느니 하니까 상처가 돼요. 세월호는 달라요, 뭔가 있다고요. 의문이 너무 많다고요.

그동안 힘들었죠, 지금도 힘들고. 그래도 끝까지 갈 사람들은 언젠가는 진상이 규명된다 그렇게 말해요. 10년이든 20년이든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고. 근데 마음은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못 나오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 반에서도 죽은 아이가 26명이니 부모만 해도 최소 마흔명이 넘는데, 반밖에 안 움직였어요. 제 나름의 사정이 있고 누구는 일 다니고 또 누구는 싫어서 안 나오기도 하고. 다른 반도 똑같거든요. 함께하지 못한 부모들은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나중에는 ‘나도 할 걸’ 하고 후회할 것 같아요. 내가 진도에서그랬잖아요. 나는 그 후회를 안 만들기 위해서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움직여요. 내가 오늘도 승희를 위해 뭔가 했구나, 내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이렇게라도 해야 내가 맘이 편해요. 그것도 안 하면 죄인이 될 것 같고… 언젠가는 이것도 끝이 있겠죠. 승희한테 엄마 진짜 열심히 했다고, 네가 헛되이 간 것만은 아니라고 말할 날이 오겠죠. 아,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요즘엔 거실에서 엄마랑 자요. 늘 동생이랑 같이 잤는데 한밤에도 너무 생각나고 외로워서. 동생 꿈을 자주 꾸는데 그냥 동생이 평소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제가 잠수부가 되어 애들 찾으러 가는 꿈도 꾸고. 제가 거인이 돼서 배를 끌어올리는 상상도 많이 하고. 꿈에서는 정말 현실같이 동생이랑 같이 있는데 깨어나면 동생이 없으니 그때가 엄청 힘들어요. 한번은 동생이 너무 보고 싶어서 눈 감고 동생을 만지는 느낌을 생각했어요. 눈 감고, 얼굴, 코, 입… 그뒤로 매일 동생의 촉감을 상상해요. 잠잘 때마다 동생의 하나하나 그 촉감. 매일 그런 상상밖에 안 해요. 아직 내 인생은 반도 안 넘었는데…
앞길이 뻔해요. 대학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그저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동생 곁에 갈 수 있겠지… 아, 그냥 그런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요.

소연이가 그렇게 되고 방 정리를 허는듸 상장이 많이 나왔시유. 그걸 정리허는듸 눈물이 얼매나 나오던지… 걸핏하면 눈물이 나왔어유.팽목항에서도 너무 울어서 가족 분들이 울보아빠라고 놀렸어유. 다른 건 기억이 잘 안 나고 울었던 기억밖에 없구만요.

제가 가장 궁금한 건 ‘우리 애를 살릴 수 있었는데 왜 못 살렸나’ 그거예요. 선장이 빠져나올 때 애들을 나오라기만 혔어도 다 살았는듸. 왜 그런 말을 안 혀서 죽였는지… 내일모레면 5개월이 다 돼가잖어유.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유. 힘이 있으면 바로 감방 보내잖아유. 빽 있으면 시민들을 갖고 놀려고 하고. 가끔 집에 들어가 있으면 술 생각밖에 안나유. 술만 먹어유.

제가 걱정인 건… 일이 다 해결되고 함께혔던 분들이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면 저는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들어유. 여기 와서 그려도 히히덕거리고 웃고 있지만 다 해결된 다음에는 어떻게 이겨낼지 걱정이 돼유. 지금도 술기운에 사는데… 제가 앞으로 살 계획을 소연이허고 함께허것다고 꿈꿨는듸 이제 모든 게 사라져버린 것 같어유.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깜깜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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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중에 그런 말을 하셨어요. "정의를 위해 물러서지 말라." 저는 맨날 그러거든요. ‘아, 이거 싸워야 돼, 말아야 돼.’ 하느님은 늘 용서하라고 하시거든요. 무조건 용서하라구, 사랑하라구. 그런데 그게 너무 안 되는 거예요. 나는 평생 사랑하면서 그렇게 살았는데, 진짜 못된 짓 한 사람도 다 용서하고 그렇게 살았는데 이것만큼은 절대로 못하겠어요. 그래서 용서 못하겠다고, 이것만큼은 절대 용서가 안 된다고, 어떻게 이걸 용서하냐고, 이걸 내가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하냐고 계속 마음속에서 그랬는데,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 그분이 저한테 딱 답을 주시는 것 같더라구요. 정의를 위해 물러서지 말라고! 저는 그 말 한마디만 마음에 꽂혔어요. ‘아, 그래. 미워해도 되는구나. 진짜로는 못해도 마음속으로는 그 사람들 죽이든, 미워하든 내가 그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사회가 안전불감증에 빠져 있고 부조리하고 내 이익만 챙기는 세상인데 이런 세상에서 아이들을 내 이익만 챙기지 않는 아이로 키웠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이 사회는 문제가 크잖아요. 너무 나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득해서 이게 쉽진 않을 거라 생각해요. 죽어도 끝까지 하다가 그게 안 되더라도 엄마들이 그 정신을 포기하지 말고 내 자식들을 잘 키우는 것으로 이어갔으면 해요. 이렇게 이기적인 세상에 그렇지 않은 아이로 자식을 키우는 것이 이 투쟁의 연속이라고 봐요. 라익이가 살 세상은 이런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길게 천천히,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밖에 잘 나갈 수 없어서 진상규명 싸움에 동참은 못하고 있지만, 혼자 생각하다보면 ‘그래, 앞으로 이 사회의 정신세계가 바뀌게 우리 엄마들이 먼저 바뀌고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는 것이 이어져야 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들이 먼저 깨어 있어야지. 내 자식 내가 그렇게 키워야지. ‘내 자식만 잘살면 돼’라는 마음으로 아이들 키워서는 진상규명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이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고 봐요. 지금부터 그렇게 키우면 오래 걸리겠지만, 어쩌면 내가 죽기 전에 그런 모습을 못 보게 돼도 그렇게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가장 오래 남는 게 냄새라는데, 잘 없어지지도 않는다는데, 냄새가 안 나요. 이불에서도 냄새가 안 나요. 너무 너무 힘들면 길바닥에 건우 이름을 새기며 걸어보라던 수녀님 말씀을 생각해 어떤 때는 건우가 신던 신을 신고 걸어봐요. 도장 찍는다 생각하고. 매일 분향소에 걸어서 가요. 갈 때마다 눈물이 나서. 그래도 걸어보자 하며 나가봐요. 그런데 나가면 역시 우리 아들이 걸었던 길이다 생각하면 눈물이 막 나오죠. 바람이 불어도 우리 아들이 맞던 바람 같고. 여기 와동에서 태어나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녔으니 모든 곳에 건우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오래 살려구요. 오래 오래 살아서 우리 아들 기억해줘야죠. 시간이 지나면 우리 아들 잊는 사람들도 많아질 거고 벌써 잊은 사람도 있을 텐데 나는 오래 버텨야 되겠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은 그랬어요. "건우 아빠, 나는 아흔살 백살까지 살 거야. 내가 건우를 혼자서라도 끝까지 기억해줘야 할 것 같아"라고 했더니 "아흔살? 너무 많지 않아"라고 해요. 그래도 나는 그때까지 살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기억이 온전해야 하는데. 치매 걸리면 안 되는데… 하지만 나는 치매 걸려도 다른 사람은 다 기억 못해도 우리 건우는 생각할거야" 그랬더니 건우 아빠도 "그래, 그렇게 살아"라고 하대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또 다 살기 싫고 죽고 싶고 그래요. 너무 화가 치밀어오르는데 화를 가라앉힐 수도 없어요. 이게 반복돼요. 이 나라한테 화가 나… ‘아, 이 ○○ 같은 세상!’ 혼자 막 이래요. 그러면 또 건우 아빠가 다시 이래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건우는 안 돌아와. 그러니 하루 일찍 건우한테 간다는 마음으로 너무 오래 살려 버티지 말어. 그래도 사는 동안 우리 잘 버티고 살자. 누구도 어떻게 해줄 수 없으니 둘이서 잘 버티자" 그래요.

건우가 가고 제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니까 어느 날은 건우 아빠가 이렇게 물어요. "내가 자기를 안 만나고 그랬으면 건우가 안 태어났을 텐데,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나 안 만나고 싶지 않아? 그러면 이 고통의 시간을 안 당해도 되잖아."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나는 또 이 고통을 당한다고 해도 건우를 만나고 싶어. 다시 택한대도 나는 건우 엄마를 택할 거야"라고. 그 17년 동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에 다시 또 기회가 생기면 건우를 또 만나 그 시간을 다시 건너고 싶다고. 내 인생에서 건우와 보낸 17년은 너무도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조치원역 앞에서 서명을 받는데 인근 가겟집 주인이 불러 갔더니 대뜸 "1년에 사고로 천명, 이천명이 죽는데 삼백명 죽은 걸 가지고 왜 이렇게 난리냐? 당신들 때문에 가게 안 되는 거 안 보이냐? 나라를 거덜낼 거냐?"라고 했다. 길거리 서명을 숱하게 받아봤지만 이처럼 원색적인 비난은 처음이었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얘기하는 거 아니라고 소리 지르고 나니 내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때 "너무 상처받지 말아요, 다니다보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더라구요" 하며 어깨를 토닥이셨던 분, 미지 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감정을 우겨넣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 감정을 어떤 활자로도 새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의 언어와 감정을 책으로 만들겠다고 달려들었던 건 호기 같았다. 그러나 "딸은 그렇게 됐어도 딸이 한 일은 알려야 되지 않겠냐"던 아버지의 말씀을 저버리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펼치게 되었다.

미지는 마지막은 행복했던 것 같아요. 학교생활도 즐거워했고 집에 와서도 항상웃으면서 살았어요. 찡그린 거 못 봤어요. 근데 정작 한번도 저는 미지와 함께 손잡고 여행을 해본 적이 없어요. 가족과 함께 여행을 못해봤어요. 이제껏 가족여행 한번 못해본 게 너무 후회돼요. 가족이니까 여행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죠. 갓난애였을 때 말고 딸하고 찍은 사진이 핸드폰에 찍힌 이 사진 한장뿐이더라구요."

세월호 유가족들은 ‘16’이란 숫자만 봐도 가슴이 벌떡거린다.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몸서리쳐지는 고통이겠지만 어떻게든 기억을 남기기 위해,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미지 아버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2학년 1반 생존자 명단이 있긴 있는데 눈이 확 뒤집어져 그때는 잘 안 보이더라구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봤어요, 이렇게. 근데 없더라고. 그때부터는 제 정신이 아니었지. 애 못 찾은 부모들은 이성을 잃었어. 저만치 살아남은 애들이 체육관 뒤쪽에서 담요를 덮어쓰고 있더라고. 걔네들은 부모들이 다 데리고 나가고, 없는 사람들은 체육관을 빙빙 돌며 막 찾아 돌아다니는 거지. 상황실 가서 ‘어떻게 된 거냐’ 물어도 거기서는 누가 말 한마디 안 해줘요. 가족들이 기물을 들고 가서 ‘너희들 다 때려죽인다, 빨리 우리 아이들건져라, 왜 너네들 여기서 안 건지고 있냐’며 난리를 피웠죠.

팽목항까지 37킬로미터 정도 되는데, 한 30분 정도 걸려요. 왜 그렇게 멀게 느껴지던지, 가는 내내 부들부들 떨었어. 거기 갔는데도 그때는 부스라곤 텐트 하나랑 상황판 밖에 없었어. 해경에서 몇명 나와 있었거든. 우리가 그 앞에 대고 ‘너희들 빨리 가서 구하지 않고 뭐하냐’라고 하면 구한다고 맨날 그렇게 얘기만 했어요. 거짓으로. 우리도 처음에는 다 믿었지. 방송에 잠수부가 몇백명, 뭐 배가 몇대, 헬리콥터가 몇대다 해서 믿었다고. 근데 그렇게 믿을 일이 아니었어.

미지 엄마, 아빠에게 16일은 삶과 죽음이 한묶음으로 날아든 날이다. 미지의 생일은 3월 16일, 사고가 난 날은 4월 16일, 물에서 올라온 날이 5월 16일이다. 미지가 세상을 처음 본 날, 미지가 떠난 날, 미지의 마지막 모습을 본 날이 16일로 일치했다.

"5월 15일, 사고 난 지 한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못 올라온 사람들이 스물두명이었어요.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혹시나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자기일까봐 다들 공포에 떨었어요. 미지는 5월 16일, 한달만에 나왔어요. 미지가 하도 안 나오니까 아무개 엄마하고 나하고 군청에 들어갔어요.

해수부장관 붙잡고 욕도 해가며 엄청나게 싸웠죠. ‘왜 거기는 안 들어가느냐’ 그러면 해수부장관이 해경 국장 보고 ‘분명히 들어가서 오늘은 작업해라’ 명령을 딱내리거든.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줄 알았지. 근데 바지선을 타고 가서 보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야. 그러면 찾아가서 또 싸우고 멱살 잡고 때려죽인다고 난동을 부렸지. 왜 작업을 안 하냐고 하면 거긴 무너질까봐 위험해서 들어갈 수 없다고 해. 무너진다고 안 들어가면 나머지 애들 어떻게 찾을 거냐고 항의하면 그제서야 통로를 다시 개설하는 식이었어. 그렇게 며칠을 항의하고 찾아가니까 객실 창문을 절단했던 거고 그렇게 해서 들어가는 도중에 미지가 올라왔거든. 전전날인가 바람이 좀 많이 불었어. 바람 때문에 파도가 치면물결이 왔다갔다 하면서 쌓여 있던 것들이 움직이잖아. 그전까지 눌려 있던 애들이 그때 올라올 수 있다는 거지. 우리 딸 있던 데도 원래 수십번을 찾았어. 얘도 아마 어딘가에 눌려 있다가 물결에 쓸리면서 올라온 거 같아. SP1(객실 이름)에 있던 게 아니고 SP2에 눌려 있다가 올라온 것 같아요.

체육관에서 한사람 한사람 줄어가는데 그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초조하고… 내 딸이 유실됐나, 인원이 줄어드니까 머릿속이 온통 다 그런 생각밖에 안 나. 막상 내 딸이 나왔는데 나머지 유가족들을 못 보겠더라고. 여기 누구 엄마, 여긴 누구네, 여긴 선생 그다음에 나, 이렇게 넷이 다 같이 모여 있었어. 그중 나만 나왔어. 생각해봐. 다 안 나온 중에 나만 나왔다니까. 그날 미지 데리고 오는데 그간 동고동락했던 사람들 얼굴을 볼 수가 없더라고. 미안하고 죄스럽고. 지금도 다 안 나왔어. 그 사람들이 어깨 툭툭 치면서축하한다고 그래. 근데 거기서 축하한다는 인사를 받을 수 있냐고, 그 상황에서."

아빠와 딸은 사고 한달만에 다시 만났다. 수학여행 간다고 나갔던 자식이 바다에서 떠올라 아빠를 기다렸다. 시신을 찾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살아남은 자는 가족의 이름으로 죽은 자를 확인해야 했다.

아무리 부모가 확인했어도 정확치 않으면 안 되니까 DNA 검사를 받아야 한대. 그전에 시신이 몇번 많이 왔다갔다 했었거든.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 부모가 DNA 검사한 뒤에 시신을 내줬거든. 근데 미지가 관 속에 있는데 새마포라고 하나 하얀 옷을 덮었더라고. 거기서 일 하시는 분이 ‘아버님, 제가 이런 말씀 드리면 죄송하지만 생전에 좋은 모습만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러는 거야. 내가 왜 그러냐고 했더니 따님이 많이 그러하니까 그냥 보지 말고, 좋은 모습만 기억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 ‘만일 이거 보면 평생 기억에남고 후회할 거 같으니까 안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러더라고. 그래, 생각해보니까 우리 딸 어차피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좋은 모습만 기억하자고 마음먹고 안 봤어.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진 것만 봤지. 그때는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 왜 좋은 모습만 기억하려고 했나 모르겠는데 장례를 치르고 나니까 그게 또 후회가 되더라고. 혹여 나쁜 모습이더라도 내 딸 마지막 모습인데 그걸 왜 안 봤을까. 아무리 망가졌어도 볼 걸, 후회가 되더라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많아. 근데 본 사람은 보지 말라고 하더라고.이거는 봐도 후회, 안 봐도 후회, 너무 가슴이 아픈 거야. 본 사람은 자꾸 꿈에 보이는 게 싫어 차라리 괜히 봤다는 사람도 있고, 안 본 사람들은 내 아이의 마지막인데 그것도 안 봤다고. 참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아, 진짜 이런 사고 다시는 나선 안 돼."

미지 엄마가 사건 터지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일이 있다. 바로 미지가 반장 나간다는 걸 막지 못한 일이다.
"우린 미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몰랐어요. 근데 친구 한명이 유난히 많이 울더라고. 그리고 미지 책상에 ‘미지야 너무 보고 싶다. 너한테 너무 많이 미안해’ 이렇게 적어놨어. 우리는 그 아이가 왜 그렇게 통곡했을까 궁금해서 좀 만나고 싶었어요. 근데 2학년 1반 생존학생이 안산법정에서 증언을 했대요. ‘반장 때문에 살았다. 반장이 선장 역할 다 했다. 반장이 지금 우왕좌왕하지 말고 조금 있다가 나가자. 지금 문을 못 여니까 물이 좀 찬 다음에 나가자,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나가자’ 이랬다는 거야. 미지는 아마 위에 있다가 다시배 밑으로 들어간 것 같아. 밑에서 한사람씩 올리고. 근데 그 아이가 올라가려고 하는데 물에 쓸렸대요. 그래서 걔도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마침 봉을 잡고 있어 간신히 살았대. 자기까지만 살고 밑에 있는 애들은 쓸려 들어가버리고. 걔가 올라와서 해경한테 울면서 저 밑에 우리 친구들 많으니까 구해달라고 했는데 안 들어가더래요. 미지는 맨 밑에서 걔까지 올려주고 물에 쓸려서 소식이 없었던 거지. 생존자 말이 없으면 우리 딸이 그랬는지 몰랐을 거야.

미지 엄마는 애들의 증언 듣고는 너무 괴로워했어. 분명히 사고 당일도 아이들 챙기느라 자기를 돌보지 못했을 거라고. ‘저는 못 나왔으면서, 저는 좀 살아나와야지, 반장만 아니었으면 살아나왔을 텐데’ 하면서 많이 자책했어. 미지 엄마한테는 ‘미지 같은 성격은 반장 안 했어도 그 책임은 다했을 거다. 그러니까 당신은 애를 잘 기른 거다’ 그렇게 위로를 해주긴 했는데 잘 모르겠네. 책임감 있는 사람이 훌륭하다는 건 아는데 미지가 그렇게 가고 나니 잘 모르겠어. 훌륭한 게 뭔지."

일본 입장에선 이웃나라 일일 뿐이고 자기네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은 열과성의를 다해서 보도해주더라구. 우리나라 같이 이런 게 아니야. 해설위원하고 기자들이 진지하게 대화를 많이 하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솔직한 말을 다 하더라구. 우리나라는 감추기에만 급급한데…

방송 만든 거 봤는데 사실 자꾸만 그때 상황을 상상하게 되니까 우리들(유가족) 입장에선 정말 괴롭긴 하대. 아, 못 보겠더라고. 나도 그러려니 생각하고서 보기 시작했는데 속에서 울화가 치밀고 미치겠더구만. 저놈의 새끼들이 나가라고 했으면 다 살아서 지금도 막 웃으면서 대화했을 텐데 그렇게 없어졌다고 생각하니까. 지금도 집에 가 있으면 10시 반만 되면 꼭 문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애. ‘아빠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그 시간되면 쳐다봐. 우리 집안에 아주 고명딸인데. 애기였을 때부터 크는 내내 속을 안 썩였어. 애기였을 때는너무 편하게 잘 있었고 학교생활도 사춘기도 심하게 한 게 없어요. 생을 짧게 살고 간 게 그게…

지나고 나니 가슴을 후비는 기억이 많다. 참되게 살라고 가르쳤더니 다른 사람 구하고 정작 자신은 살지 못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일이지만 자식을 잃고 보니 죄를 지은 것 같다. 없이 살아도 티 없이 맑았고, 엄마 아빠의 속을 헤아렸던 듬직한 딸이었다. 아빠는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딸과의 달콤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미지가 나하고 농담을 잘해. 생전에 나랑 팔짱 끼고 드러누워서 ‘아빠, 이다음에 내가 아빠 비행기 태워줄게’ 했어. 그 말 많이 하잖아. 딸 낳으면 비행기 탄다고. 한 200번(시신 수습 순서) 전까지는 앰뷸런스 타고 올라왔을 거야. 그뒤부터는 훼손이 많이 돼서 바로바로 올라가야 하니까 헬리콥터를 타고 간 거야. 근데 미지가 나왔는데 그 생각이 딱 나는 거야. 헬리콥터를 딱 탔는데. 아유, 이 자식이 죽으면서까지 비행기를 태워주는구나. 내가 왜 연관을 거기다 지었는지,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때 딱 그 생각이 나더라니까.봐봐, 먼저 나왔으면 앰뷸런스 타고 올라왔을 건데 늦게 올라와갖고 헬리콥터 탄 거, 그것도 비행기잖아. 그죠? 그때 울음이 나더라고. 헬리콥터로 올라오는 동안 내내 관 옆에서 울었어. 와, 이 자식이 죽으면서까지도 약속을 지키려고 그랬을까."

한 배를 타고 가는 길이었으나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었다. 사고는 하나였지만 가족들이 받아들이는 삶의 무게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미지는 남을 구하려다 빠져나오지 못했기에 아빠의 아련함은 때로 질시로 번지기도 했다.

"생존자 가족들 보면 생각이 왔다갔다 해요. 내 새끼는 애 구하러 갔다 죽었고 얘는 살아나왔네. 너무 괘씸하잖아. 내 새낀 죽었는데 누구는 살았고 한편으론 내 새낀 죽었지만 누구는 살았으니 감사한 마음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솔직한 얘기지만 너무 괴로운 거잖아. 내 새끼도 살았으면 여기 있었을 텐데 누구는 저기 있고 내 새낀 없어졌는데, 다시 돌아오지도 못하는데 그걸 어떻게 보나. 이런 마음이 왔다갔다… 와, 이거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닌 거야. 너무 힘들어."

딸을 어이없이 떠나보낸 아빠는 요즘 들어 부쩍 어머니가 자주 생각난다.
"잠이 안 올 때면 가만히 생각을 해봐요. 내 사주팔자 이런 거 생각해보면 참 여러가지 생각이 들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사랑도 못 받았고, 자식도 사랑을 주려고 했는데 일찍 가버리고. ‘아, 나는 뭐가 부족해서 뭐가 안 돼서 자꾸 이러나’ 그러다가도 아버지가 일찍 가셨지만 어머니가 우리를 안 버려준 게 감사하기도 해. 어머니가 젊은 나이 서른둘에 과부가 되셨거든. 시골 살았을 때는 원래 소문이 잘 퍼지잖아.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기를 ‘너네들 애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 들으면 안 된다’, 늘 그렇게 주의를 줬어.

우리는 엄마 말씀이 법이야. 사춘기도 없었어. 시골이니까 일만 했어. 어머니가 부지런하셔서 새벽 3시면 들에 나가셔, 캄캄한 밤에. 어머니는 애들을 깨워서 몇시까지 들로 나오라고 하셨어. 그때가 4시반, 5시. 일할 때는 캄캄해. 그러면 우리는 눈 비비고 나가. 나는 어느 때고 가도 엄마 말을 거역하지 못했어, 단 한번도. 어머니가 그때 우리를 버리고 가셨다면 어찌 됐을까? 자식들 안 버리고 키워주셔서 감사하고. 이렇게 결혼도 해서 애도 낳고, 웬만하면 애들이 보고 싶어하는 거, 해달라는 거 우리 나름 해주며 살았어. 근데자식이 이제 세상에서 없어졌네. 화가 나고 정말 미칠 것 같았어. 그래도 하나님이 무슨 뜻이 있는 건 아닌가 싶고, 더 부패되기 전에 뭘 밝히라는 뜻 아닐까도 싶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것도 감사하다 싶고. 우리한테 미지 몫까지 살아가라고 짐을 주신 것도 같고. 딸 자식에게 쏟은 정성을 이제 동생한테 쏟으라고 하는 것도 같고. 이게 다 뜻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요즘 부부는 간신히 끼니를 챙긴다. 아직은 시장에 가는 것도 힘들다. 자식 죽은 집에서 음식냄새 풍기며 밥상을 차리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웃들이 ‘괜찮냐’고 묻는 질문이 야속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냐, 당신이면 괜찮겠냐’고 되묻고도 싶지만 누가 우리 마음을 알까 싶어 집밖으로 나가는 일을 줄였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침몰은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야속한 일이지만 세월호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사건들이 그렇게 묻히고 사라졌다. 다른 사람은 다 잊는다 해도 이대로 끝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미지 아버지는 그걸 딸과의 약속으로 여긴다. 절대로 깰 수 없는 마지막 약속이라 다짐한다.

바닷물이 그리 찰 줄 몰랐던 봄날을 지나 뜨겁던 아스팔트 위에서 여름을 보내고, 청운동 바닥에서 한기를 느끼며 가을을 지냈다. 이제 겨울이고 그다음엔 미지가 떠난 봄이 찾아올 것이다. 직장도 잃고 미지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건지, 흔들리고 있는 아내와 미지 동생을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치지 않는다. 효원공원에 누워 있는 미지를 생각하면 힘들 틈이 없다. 가슴에 묻어둔 미지가 갈수록 더 많이 보고 싶어지고 자꾸만 그립다. 딸이 옆에서 불쑥 ‘아빠, 나 왔어. 그동안 잘 있었어? 아빠 보고싶었어’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그래서 아빠는 미지를 위해 아직 할 일이 많다. 할 일을 해야 먼 훗날 미지를 만나서도 한달 동안 바닷속에서 외롭게 했던 시간들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밤도 아빠는 분향소에서 미지를 보고 마음을 다잡는다.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미지가 바라던 세상, 그 길을 가느라 아빠는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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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마을이 상가(喪家)였다. 안산은 250여명의 아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슬픈 도시가 되었다. 가슴에 통증이 계속 몰려왔다. 그 순간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도 영혼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생자들과 우리 하나하나는 뿌리가 같은 영혼의 나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 한 사회에서 함께 산다는 건 이렇게 서로 깊게 연결되는 것이구나.’ 아이들의 영혼과 다른 희생자 분들의 영혼을 위해 우리 작가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록하는 것뿐이었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울음을 울었다. 사진 속 아이들을 보면서 작가들은 서서히 큰 사건과 마주하는 법을 배웠다. 세월호 참사는 워낙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작가 한둘이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영상팀과 사진팀, 구술과 기록관리를 위한 학자팀들이 함께 모였다. 그분들과 함께 시민기록위원회를 만들었고 그 안에 작가기록단을 꾸렸다. 우리는 부모들이 자식을 잃은 후 그 순간순간을 어떻게 견뎌왔는지, 그 떨리는 숨소리까지 기록하려 노력했다. 몸부림치면서 겪은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지.

부모들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더이상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외면했던, 사회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실은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진실을 통렬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부모들이 평범한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회의 문제를 외면할 때 결국 화살이 돌아오는 곳은 자기 자신이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침묵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터득한 이 성찰 이후 부모들은 우리의 가장 밑바닥인 ‘영혼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번 인터뷰는 유가족들뿐 아니라 이 사회의 평범한 이들을 위한 작업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이토록 쉽게 또다른 ‘유가족’이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유가족들의 삶을 깊게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아이들은 가고 없지만 유가족들의 몸부림이 헛된 기다림만은 아니었음을 약속하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부모들이 많이 아픈데 기록하는 우리가 아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인터뷰 내내 울다가 한 글자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많았다. 아픔을 견디는 부모들이 있었기에 우리도 견딜 수 있었다. 이 세상 포기하지 않고 살아도 좋다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었다. 부모들은 고통을 온몸으로 통과해오면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긍정적인 가치들을 많이 얻었다. 모두 그분들의 인터뷰 안에 촘촘히 박혀 있다. 우리에게 남은 건 그 진실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이 인터뷰 기록이 마찬가지로 평범한 이웃들에게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

여기 적은 것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이야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그 이야기와 마음을 어찌 종이 몇 장의 기록에 담아낼 수 있을까. 그래도 활자의 한계를 넘어 적어보고자 애쓰는 것은 어머님 혼자 건우를 기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 모두가 같이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 식구가 다 그래. ‘나한테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 건우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교통사고라거나 병이라면 운명이라고 하겠는데, 이건 사고라지만 국가가 죽인 거죠. 그리고 어떻게 한 학교 아이들이 그렇게 많이, 한날 한시에 죽는 운명이 있을 수 있겠어요. 말이 안 되죠. 이번 사고에 김건우만도 세명이에요. 세명의 김건우가 같은 운명이라구요? 그걸 받아들이라구요? 말도 안 되지요. (단원고 김건우 셋은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도 사무치게 마음 아픈 게, 생존자 아이들이 전하는 말이 아이들이 서로 밀치지도 않고 구해줄 줄 알고 줄 서서 있었다고 그래요. 그 말 들으니까 애들은 다 자신들이 구해질 줄 알았는데, 게다가 그 애들이 얼마나 성숙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나오라는 정보도 안 주고… 아이들이 어려서, 말 잘 들어서 그랬다는 거 들으면 억울하고 분하고…

그때 아직 구조 안 됐다고 누구 하나만 말했어도 좀더 구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정말 그전까지 기자들이 현장에서 발로 뛰고 그걸 보도하는 걸로 알았어요. 그런데 그때 처음 알았어요. 다 거짓말이에요. 인터뷰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 말만 담는 것 같아요. 뉴스가 진실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런데 이번에 여실히 알았지요. 이 나라가 얼마나 무능한지. 아니 무책임한지. 못 구한 게 아니구 안 구했다는 것이 정말 믿기지가 않는데 이게 현실인 거죠. 이런 세상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내가 너무 몰랐다는 것이…

다른 실종자 가족들한테 우리 아들 나와서 간다고 하는데… 미안한 거예요. 우리 아들이 이렇게 나와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기도 하고. 그러다 내가 미쳤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아들이 이렇게 나온 것이 감사할 일인가요. 실은 거기(팽목항)서 우리가 마지막이 될까봐 너무 힘들었어요. 나만 남으면 어떡하지. 우리 아들만 못 찾으면 어떡하지… 죽었어도 좋으니 못 찾는 거보다는 찾아서 몸뚱이라도 찾아 만났으면 좋겠다 이 생각밖에 없었어요. 포기하고 나니까, 나온 것이 그렇게 고맙고 감사하더라구요. 그래서 짐 챙기면서 그랬어요. "하느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돌아와줘서, 아들, 고마워." 옆에서 다들 부러워하더라구요. 이게 부러워할 일인지. 그런데 그게 부러워요, 거기에선. 그리고 서로 축하를 해요. 이게 말이 돼요? 그런데 그래요. 그러니 내가 미치겠는 거예요. 내가 왜 이게 감사해요? 도대체 왜? 그런데 감사하다고 하고, 아 미쳤구나. 뭐가 감사해. 애가 죽어서 나오는데 뭐가 감사할 일이야. 이게 미친 세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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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물론 우리는 죽은 자들을 기리지만 그렇게 기리면서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을 훨씬 더 죽어 있게 만든다. 하지만 죽은 자들을 기쁘게 하면 그들이 다시 살아난다. 그게 말이 될까? 내가 EF를 기쁘게 하고 싶다는 것은 옳았고 나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건 옳았다. 그리고 나는 약속을 지켰다. 다음이 내가 쓴 것이다.

율리아누스는 공개적으로 폭력적 방법에 반대했다. "나는 갈릴리인들을 인도적으로 부드럽게 상대하기로 결심했다. 어떤 식으로든 폭력에 의존하는 것은 금한다……. 사람을 설득하고 가르치는 일은 주먹질이나 모욕이나 고문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이성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에서 잘못을 범하는 불운한 사람들에게는 증오보다는 연민을 느껴야 한다".
이것은 원칙인 동시에 실용주의이기도 했다. 기적과 순교는 초대 기독교가 잘 팔리게 한 두 가지 중요한 장점이었다. 종교를 위해 죽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 있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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