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이 취한다. 걸어 나오는데 그이가 지었다는 늙은 관광호텔이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서 있다. 미지근한 시간이 또 이 지방 도시를 채우고 있다.

날씨는 지랄 맞게 추웠다. 난로에서 먼 자리는 4교시가 되도록 손이 곱아서 연필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아침에 이미 몸이 얼어서 등교했다. 등굣길에는 하필 바람이 매서운 하천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왜 볼을 감싸는 모자 하나 장갑 하나 변변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칼바람이 소맷부리를 파고들었고, 볼은 얼얼해서 감각이 없었다. 그때 언 살이 자주 터져서 약국에서 ‘글리세린’을 사다가 발랐다.
학교는 멀고도 멀어서 거의 한 시간을 걸었다. 서울에서 그렇게 먼 등굣길이 있을 수 있냐고 누가 그럴까 봐 스마트폰으로 현재 거리를 재보니 4킬로미터가 넘는다. 아이 걸음에 한 시간을 꼬박 걸을 수밖에. 내가 지금도 참 잘 걷는데 그때 단련된 걸음이 아닌가 싶다. 하기야 나중에 들으니 시골에서 20리 산길을 걸어 통학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살려고, 배우려고 다 기를 쓰던 시대였다. 아버지가 150원, 300원 하던 육성회비만 내주면 얼마든지 다닐 수 있었다.

하루쯤은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그러다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면 기억이 가물가물해진다. 의식도 몽롱해진다. 이틀인가 굶고는 어머니가 부엌을 샅샅이 뒤져서 마른 강낭콩을 찾았다. 소금 넣고 삶았는데, 주린 창자가 다 설사로 내보내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강낭콩을 싫어한다. 부잣집에서 먹던, 기름기 도는 하얀 쌀밥에 넣은 까만 콩만 좋아한다.

인생은 낯선 여행지의 식당 메뉴 같은 거라고 했다. 메뉴판에 적힌 것과 달리 뭐가 나올지 모른다고. 우리는 보통 ‘꼬였다’고 했다. 인생 꼬였네. 군대 생활 꼬였네. 회사 생활 꼬였네. 꼬인 줄을 풀다 보면 어느새 삶은 풀 수 없는 실타래 같은 거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감자탕을 한 그릇 시켜놓고 소주를 마셨다. 그 꼬인 인생들을 생각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어둠을 훑어보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하늘을 수놓는 수백 송이의 불꽃이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 저 불꽃을 볼 수 없다 해서 아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불꽃은 더 찬란하고 빛나기 때문이었다.
창을 닫고 반듯이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불꽃을 보았다. 땅에서 시작된 빛무리가 하늘에 올라 산산이 흩어지며 하얗고 노란 빛이 되어 쏟아졌다. 빛은 금방 사그라졌지만 내 가슴에 반짝이는 수를 놓았다.

나는 오랜만에 너를 생각했다.
너와 나는 궤도에서 벗어난 이탈자였다. 열여섯 너에게서는 고된 하루의 냄새가 났다. 너는 일찍이 아버지의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하루종일 양파를 까고,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다녀야 했다. 당연히 학교에 다닐 시간이 없었다. 너는 평범에서 벗어난 이탈자였다. 나도 그랬다.

차는 가다 서기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차창 밖으로는 쓔우욱 쾅쾅쾅! 요란한 폭죽소리가 끝도 없이 울려퍼졌다. 나는 기억 속의 또다른 불꽃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때 드르륵, 안방 문이 열리더니 잠옷 차림의 엄마가 내게로 왔다. 엄마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내 앞에 쪼그려앉더니 노련한 형사처럼 추궁하기 시작했다. 나는 남은 불꽃을 엄마 앞에 대령하면서 이렇게 요란한 소리를 낼 줄 몰랐다고, 납작 엎드렸다. 엄마는 건네받은 불꽃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불꽃으로 내 머리통을 한번 툭 친 후 불꽃 세 가닥을 한꺼번에 모아쥐고는 불을 붙였다. 그때 본 일렁이는 불빛 너머의 엄마 얼굴은 아마 방금 전 내 표정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엄마와 나는 타오르는 불꽃을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벼락이 하늘을 세 번 두들겼다. 또다시 개들이 일제히 짖어댔다. 세상 모든 개가 다 죽기 살기로 짖는 것 같았다. 차들의 비상경보가 앵앵 울어댔다. 마을 사람들이 러닝 차림으로 뛰쳐나왔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펌프질했다. 엄마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댔다. 나도 입을 틀어막고 낄낄거렸다. 엄마는 제 몫을 다하고 꺼진 심지들을 내게 건네면서 불량배처럼 말했다.
"진~짜! 재밌다. 불꽃 더 없냐?"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옆집 할머니가 담 너머로 우리 마당을 건너다보았다. 엄마는 태연히 할머니를 상대했다.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르는 남동생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왔다가 우리를 보고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사고뭉치 모녀 때문에 남부끄러워 못 살겠어."

나는 일이 끝난 뒤 김 선배에게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나만의 별과 불꽃을 꺼내볼 수 있었노라고. 내 안에 살아 있는 별과 불꽃들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여전히 아름답고 생생하게 잘 있더라고, 말해야겠다.

열다섯 살의 내가 가장 두려웠던 사실은 앞으로 세상을 못 볼 거라는 선고보다 당장 이 사실을 어떻게 엄마에게 말해야 할지였다. 며칠을 끙끙 앓다가 엄마에게 몽땅 털어놓았을 때 엄마는 질 나쁜 농담을 들은 것처럼 믿지 않으려 했다. 엄마를 대동해 다른 병원에 가서 처음부터 검사를 다시 했다. 결과는 같았다. 엄마는 나보다 더 절망에 빠졌다. 내 담담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뭐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이 철딱서니야! 너 이제 장님 된다잖아!"
엄마가 굳이 확인해주지 않아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미래였다. 나는 애써 담담한 척 연기를 했을 뿐이었다.
‘내가 괴로워하면 엄마가 더 슬퍼할까봐 그랬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이처럼 친밀한 살인자 - 강압적 통제는 어떻게 관계를 지배하는가
허민숙 지음 / 김영사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나라의 법은 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가?!
2025년 미래를 이끌어갈 여성지도자상을 수상하신 허민숙 입법조사관님의 첫 단독 저서인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허민숙 입법조사관님은 그알의 엔딩요정이시고 난 그알이니까.
책 제목이 글쎄 “이처럼 친밀한 살인자”랜다!
친밀한 살인자라…소름이 돋는다. 내가 이렇게 소름이 돋는데 실제 피해자들의 고통은 감히 이루 말할 수도 없겠지!
그녀는 이 책을 경찰의 필독서라 했고, 자녀를 둔 부모님들도 읽으시길 권했으며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원했다.


난 소위 말하는 ‘그알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것이 알고싶다, 용감한 형사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궁금한 이야기Y, 히든 아이 등등.. 매주 본방을 사수하지는 못하지만 유투브를 통해 찾아 보는 편이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두 귀에 들리는 말이 의심스러우리만큼 무섭고 화가 난다.
게다가 몇 십년 전부터 등골이 오싹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심지어 현재도 진행형이라니! 그것도 엄청 많이.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 목숨을 함부로 해서는 안될 일이지!
사람이 사람을 해치면 가석방없는 무기징역으로 평생 감옥에서 못 나오게 해야해!!


-182p
국가가 완벽히 실패했다. 위험 신호를 알아차리지도 못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현장에서 가장 민첩해야 할 경찰은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책임을 미루고 있고, 법원은 가해자 우호적인 결정에 특화되어 있고, 국회는 실상을 잘 파악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다.

-183p
어떠한 글과 말, 그리고 어떠한 입법이나 판결을 통해서도 피해자를 다시 살릴 수는 없다. 간절한 소망과 깊은 애통함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과거를 외면하거나 지워버리려 하지 않고, 수많은 상처의 흔적을 세밀히 복기하려는 이유는, 유사한 죽음을 막아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친밀한살인자 #허민숙 #입법조사관 #그것이알고싶다 #그알 #짧은그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부에서 살펴봤듯 교제폭력과 교제살인은 한국만의 이례적인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응은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통제, 스토킹, 목조름 행위가 피해자 사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 만큼, 우리나라도 이러한 범죄 유형을 신속히 별도의 범죄로 규정하고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는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

우리나라처럼 교제폭력이 가정폭력과 분리되어 별도로 다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가정폭력의 적용 대상에 현재 또는 과거의 연인 관계도 포함한다. 따라서 가정폭력법에 따라 접근금지명령이 내려질 수 있으며, 가해자는 엄격히 처벌된다. 만일 우리나라도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처벌 대상에 교제 관계인 사람들이 포함되었다면, 경찰 신고 후에도 별다른 조치를 받지 못하고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는 여러 사례를 예방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외국에서처럼 교제 관계를 포함한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강압적 통제를 폭력 행위로 간주해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효과적인 방안을 마련하려면 법률 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연인, 배우자, 파트너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통제 행위’를 범죄화하는 법적조항을 마련해야 한다.

만일 통제 행위를 범죄화하는 법률이 마련된다면, 피해자는 가해자의 강압적 통제를 수사기관에 신고할 수 있고, 공권력으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법적 보호는 피해자 사망과 같은 참극을 예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둘째,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통제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친밀한 관계’에 대한 법적 정의가 필요하다.

셋째, ‘친밀성’이라는 관계의 특수성을 반영해 가해자 처벌을 규율하기 위해서는 ‘반의사불벌죄’ 배제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교제 관계가 법률의 적용 대상으로 포괄될지라도 범죄 신고 시 피해자에게 가해자 처벌을 결정하게 하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피해자가 처벌불원을 할 우려가 높다.

스마트워치 지급은 경찰의 범죄피해자 안전 조치 유형 중 하나다.피해자가 위급한 상황에서 스마트워치 버튼을 눌러 경찰에 보호를 요청하면, 경찰은 실시간 위치추적을 통해 피해자가 있는 곳으로 출동한다는 것이 스마트워치의 핵심 기능이다. 하지만 스마트워치가 과연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을까? 현재까지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이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자유롭게 활동하는 상황에서 스마트워치라도 지급받기를 원한다. 다른 안전장치가 거의 없는 현실에서 경찰과 즉시 연락할 수 있는 기기를 착용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법무부의 홈페이지에는 스마트워치를 피해자가 6개월간 사용할 수 있다고 안내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피해자가 스마트워치를 지급받은 후 한 달 동안 가해자로부터 별다른 위협이 없으면 연장이 허용되지 않아 반납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비공식으로 면담한 경찰관 역시 ‘스마트워치 개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한 달 이후 평가를 거쳐 가해자의 별다른 위험 동향이 관찰되지 않으면 반납받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스마트워치의 어떤 기능도 접근금지명령을 받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가해자에게 위치추적장치를 부착하지 않는 이상, 가해자가 접근금지명령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지 알 방법은 없다. 결국,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가해자가 스토킹 행위를 멈추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필자는 2022년도에 접근금지명령의 실효성을 강화하기 위해 가해자 GPS 추적 제도의 도입 필요성을 주장했는데,18 스토킹 처벌법에 반영되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교제폭력 및 가정폭력은 여전히 그 적용 대상이 아니다.

GPS 위치추적장치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일정 거리 이내로 가까워지면 경보가 울리는 시스템을 말한다. 피해자는 경보를 통해 가해자가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즉시 안전한 장소로 도피해 경찰에 신고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스마트워치처럼 가해자가 이미 눈앞에 나타난 후 버튼을 눌러 구조를 요청하는 사후적 조치와는 차별화된다. GPS 설치 및 운영 비용은 대부분 가해자가 부담하며, 피해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94년 미국 워싱턴주에서 최초로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한 GPS 감시 관련 조항이 마련되었다. 이는 현재 기준으로도 우리나라보다 30년 이상 앞선 조치다.

특히 빈곤과 폭력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은 가해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어, 폭력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폭력으로 인해 입원이 필요하거나, 얼굴이 붓고 멍이 들어 출근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 결국 직장을 잃게 되기도 한다. 직장을 잃으면 경제적 자립 기반이 무너져 자신을 지킬 힘을 잃고, 그만큼 폭력에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친밀한 관계에서 폭력을 경험한 근로자가 직장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러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다양한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앞서 살펴봤듯 외국에서는 우리에게 생소한 가정폭력 사망검토domestic violence death review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가정폭력 관련 사망사건에서 피해자가 결국 사망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를 체계적으로 조사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단순히 사건의 결과를 통해 가해자를 체포하고 피해자를 애도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막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분석해 일정한 패턴과 원인을 파악하고, 피해자의 도움 요청 과정, 개입이 실패한 이유,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시달렸던 학대 유형 등을 조사한다.

또한 가정폭력 피해자를 지원해야 하는 직군에 대한 훈련과 교육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피해자를 직접 응대한 경찰에 대한 조사에서는 경찰들이 신고된 사건에 대해 주로 신체적 피해 사실에 집중해 피해자가 겪고 있는 가정폭력의 심각한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도 밝혀졌다.28
가정폭력에 개입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사회적 자원들이 충분히 마련되지 못했다는 점 역시 지적되었다. 가정폭력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의 부족,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안이한 태도 등이 제도, 양식과 규칙, 절차 등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피해자 지원 업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관련 제도들이 시행되었다 해도 그에 대한 관리가 부족하다는 점 또한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제22대 국회에서는 교제폭력을 가정폭력 처벌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하고, 강압적 통제를 가정폭력 행위로 처벌하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심사 중에 있다.

또한 가정폭력 사망검토제 도입의 내용을 담은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개정안도 발의되었다.

무엇보다 법률을 개정하는 데 있어서 유의할 점은 ‘어떤 특정 행위’ ‘어떤 관계’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다. 교제폭력 및 가정폭력과 같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기저에는 친밀한 관계의 여성을 통제·지배·착취하려는 여성에 대한 차별, 무시, 폄하가 놓여 있다. 이것을 간과한 채, 지금 목격되는 어떤 현상에 대한 조치를 취하는 데만 급급하여 법률을 제정·개정한다면, 여성에 대한 폭력의 근본적인 속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특정 행위의 금지나 일회적인 처벌만을 강화하는 데 그칠 수 있다. 따라서 ‘교제폭력’만을 별도로 규율하는 개별 법의 입법은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분절적 접근은 폭력의 구조적 특성을 식별하지 못하고, 피해자에 대한 통합적 지원을 오히려 방해할 수 있다. 이 범죄를 바라보는 모든 사회 구성원은 이것들이 각기 다른 일탈 행위가 아니라, 여성을 목표물로 하는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차별범죄이자 혐오범죄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 범죄의 근절을 위한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할 것이다.

책을 쓰면서 그녀들에게 부당하게 씌워진 편견을 걷어내고 싶었다. 그녀들은 여느 누구와 같이 평범한 삶을 살다, 가면을 쓴 채 다가온 살인자들을 우연찮게 곁에 두게 된,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공포와 두려움을 헤치며 용기 내 관계를 빠져나오고자 했던 강한 삶의 의지를 가졌던,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일 뿐이다.

국가가 완벽히 실패했다. 위험 신호를 알아차리지도 못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현장에서 가장 민첩해야 할 경찰은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책임을 미루고 있고, 법원은 가해자 우호적인 결정에 특화되어 있고, 국회는 실상을 잘 파악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다.

어떠한 글과 말, 그리고 어떠한 입법이나 판결을 통해서도 피해자를 다시 살릴 수는 없다. 간절한 소망과 깊은 애통함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과거를 외면하거나 지워버리려 하지 않고, 수많은 상처의 흔적을 세밀히 복기하려는 이유는, 유사한 죽음을 막아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나와 주변 사람의 위험 신호를 더 민감하게 감지하고,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비난받아야 할 행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며,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더욱 강력히 요구하는 힘의 원천이 되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해자가 도움을 받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경찰이 둘 사이를 연인 관계로 파악해 이를 스토킹으로 인정하지 않았거나, 가해자의 행위를 위협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