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문화/박수근

박수근(1914년~1965년)은 이중섭과 더불어 가장 저명한 현대 화가로, 음악가 슈베르트나 미술가 고흐와 유사한 인생을 살았다. 생전에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고, 유명한 화가도 아니었고, 작품이 비싼 값에 팔린 적도 없었다. 개인전을 열기는커녕 개인 화실이 없어서 전농동 소재 집 마루에서 그림을 그렸고 마루에 그림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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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유적•유물/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는 청동으로 만들고 금박을 입힌 것으로,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제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향로에 각종 백제의 종교 전통이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다. 용으로 묘사된 받침은 전통 신앙을 반영했고, 향로 하단부의 연꽃은 불교를 상징한다. 뚜껑부에는 주로 신선이 사는 이상 세계를 묘사했는데 불로장생하는신선이 살고 있는 삼신산, 다섯 마리의 새, 스물네 개의 산봉우리 그리고 나무, 바위, 폭포, 시냇물이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또 유교의 예악을 표현하기 위해 5악사를 넣었고 꼭지는 봉황으로 마무리했다. 4세기 이후 유교, 불교, 도교가 본격적으로 삼국에 들어와서 경쟁하고 갈등하며 어우러졌던 시대 상황이 예술품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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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이상한 일은 인생의 마지막에 다가가서야, 그제야 세상과 타인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의 실체, 자신의 목표와 목적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점이다.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을 더 낮은 위치로 보아야 하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더 높은 위치로 보아야 할 때도 있다. 이것은 세상의 천박함에 대해 충분한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보다 더 높은 곳에 자신의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열정이 행복을 가져올 수 없고 어느 특정한 쾌락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노년을 한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쾌락은 부정적이고 고통은 긍정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든 즐거움이란 어떤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즐거움도 없어진다는 사실은, 식사를 한 후에는 더 이상 먹을 수 없고 잠을 푹 자고 난 뒤에는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그렇게 한탄할 만한 일은 아니다.

청년기는 고난의 시기이고, 노년기는 휴식의 시기이다. 이것만으로도 두 시기가 행복하게 생각하는 환경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노년기에는 모든 것이 안정적이다. 피가 차가워져서 감각기관의 과민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경험으로 인해 사물의 가치나 쾌락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게 되어 예전에 사물의 가치에 대한 자유롭고 순수한 견해를 가리고 왜곡시켰던 환상이나 망상, 편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모든 것을 예전보다 더 정확하고 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또한 어느 정도는 세상 모든 것의 올바름을 이해하게 된다. 거의 모든 노인, 심지어 아주 평범한 능력을 갖춘 사람조차 어느 정도는 지혜롭다는 인상을 주어 젊은 사람들과 구별되는 겉모습, 지혜로워 보이는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노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가져온다. 이러한 평정심은 행복의 커다란 한 부분이며, 어쩌면 행복의 필수 조건이자 본질적인 요소이다.

시간과 공간, 그 두 가지의 상호적인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이러한 조건에서 지각하는 것은 단순한 겉모습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시간은 우리의 인식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실제로 칸트 철학의 핵심이다.

개개인의 사람은 모든 것의 나약함, 허무함, 꿈과 같은 본성을 더 분명히 인식할수록 자신의 내적 존재의 영원함을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 사물의 질은 실제로 다른 것들과 대조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현재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이렇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객관적인 현재는 시간이라는 직관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멈출 수 없이 계속 굴러간다. 주관적 현재는 확고해 늘 동일하게 고정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지나간 시간의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 그리고 존재의 덧없음을 인식하면서도 우리의 불멸을 의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생명이 왔던 곳으로 가는 것이다. 이집트인이 저승의 신인 오르쿠스를 아멘테스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아멘테스는 플루타르코스(<이시스와 오시리스에 대하여> 29장)에 따르면 "빼앗는 자이자 주는 자"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돌아가는 것과 모든 것이 나오는 것이 동일한 근원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받은 대출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잠은 이 대출의 하루 이자가 될 것이다.

세계라는 무대에서 작품과 가면이 아무리 바뀐다 해도 배우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우리는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자극하고, 눈이 빛나며, 목소리는 더욱 크게 퍼져나간다. 천 년 전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똑같은 상황이었고 똑같은 사람들이었으며, 천 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장치는 바로 시간이다.

아무리 현실에서는 하찮은 현재라도 가장 중요했던 과거보다는 더 우월한 것이며, 현재와 과거의 관계는 유와 무의 관계와도 같다. 수천 년 동안이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여기에 존재하고, 잠시 뒤 똑같이 오랜 시간 동안 다시 존재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놀랍게도 존재하는 것이다.

현재를 즐기고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가장 큰 지혜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현실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정신적인 유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는 점점 사라져가는 현재 이외에는 그것을 기반으로 할 근거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 존재에는 형식을 향한 끊임없는 움직임만 있을 뿐, 우리가 항상 추구하는 안정을 얻을 가능성은 없다

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한 안식 속에서 생성하지도 흘러가지도 않고, 변화도 시간도 없고, 다수의 차이도 없다.(플라톤, <티메우스>) 이러한 소극적인 인식이 바로 플라톤 철학의 기초이다. 삶에 대한 의지의 부정이 생존으로 가는 길을 여는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 인생의 장면은 거친 모자이크 그림과도 같다. 가까이 가서 바라보면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서 보아야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한평생 일시적인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인생의 과제는 그 무엇보다 어떻게든 생계를 해결해서 자신을 보존하는 업무, 즉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가 해결되면 그렇게 얻은 것은 부담이 된다. 그리하여 맹금류처럼 안전하게 살아가는 생명체를 노리다가 공격하는 무료함을 방지하기 위해 그 목숨을 처리해야 하는 두 번째 과제가 생긴다. 첫 번째 과제는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고, 두 번째 과제는 그것을 얻은 후에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첫 번째 과제에서 얻은 것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이 일종의 일탈인 것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은 바로 인간은 욕구의 집합체이며 그의 욕구를 달성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욕구를 달성하면 고통이 없는 상태가 되지만 그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곧 권태감에 사로잡혀 버릴 뿐이다. 그렇게 되면 그 무료함은 우리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료함이란 사실 그의 존재가 공허한 것이라는 느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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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는 자신 앞에 놓인 인생이 왜 그렇게나 무한하게 길어 보이는 것일까?

첫 번째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은 희망을 지니고 살고 그러한 희망은 한없이 무한한 것이어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므두셀라(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므두셀라는969세까지 살았던 인물로 장수의 상징임-옮긴이)마저 너무 일찍 죽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을 실현하기 위한 여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겪었던 지난 몇 년을 인생의 잣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험은 무엇이든 그것을 의미 있게 보이게 하기 때문에 별로 길지 않은 짧은 인생의 추억은 언제나 새롭고 신기해 오랫동안 겪었던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나중에 떠올리고 회상하면서 기억 속에서 반복되고 그것이 기억에 새겨진다.

서른여섯 살까지 우리는 활력이라는 면에서 그 활력의 이자로 살아간다. 활력이 다 떨어진다 하더라도 내일이면 다시 생긴다. 하지만 서른여섯이 지난 이후부터는 자신의 자본을 조금씩 파먹기 시작하는 연금수급자의 생활과 같아진다.

사람이 보고 행동하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억과 정신에 더 적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은 젊었을 때만 완전히 의식적으로 살며, 노년기에는 반쯤만 의식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즉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덜 의식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모든 대상과 사건이 새롭고 신기하므로 모든 것을 의식한다. 그래서 하루가 헤아릴 수 없이 길게 느껴진다. 우리는 여행을 할 때도 똑같은 일을 경험한다. 한 달 동안의 여행 기간이 집에서 보낸 넉 달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사물이나 주위가 신기하게 느껴지더라도 어린 시절이나 여행할 때 길게 느껴지는 두 시간은 종종 노년기나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실제로 ‘더 길어지는’ 느낌을 받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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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장소/명동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코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한 극한 정오다.
-이상, <날개> 중

이 글에서의 ‘미쓰코시‘는 미쓰코시백화점, 오늘날 명동 신세계백화점을 말한다. 이상은 당대 유명한 모던보이였다고 한다. 그는 돈이 없어도 명동 거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낭만을 누렸다.
일제 강점기 때 명동은 대표적인 일본인 거주지로 ‘메이지마치‘라 불렸다. 근처 충무로 역시 일본인 거주지였는데 ‘혼마치‘라고 불렀다. 지금도 그렇지만 명동과 충무로, 을지로 일대는 일제 강점기부터 상업이 번창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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