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품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수양이 부족한 사람은 잘 갈고닦은 인품을 보고 놀랄 일이 많지만 수양이 잘된 사람은 어떤 인품을 보더라도 담담하다. 내 본성의 상태와 인품의 현주소를 찬찬히 돌아볼 때 사람과 짐승의 분기점은 어디에 있는가,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면서 어짊과 정의로움, 예절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떤 이들은 인의예지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내고자 심혈을 기울이기도 한다. 자신이 깨달은 만큼의 인의예지를 삶 속에서 진실로 실천하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 역시 의외로 많다.
하지만 무언가에 대한 지극한 앎을 가진 사람도, 또 그 앎을 실천에 옮기고자 밤낮없이 노력하는 사람도 쉽게 따를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바로 무언가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앎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밤낮없이 노력하는 사람도 이것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사람은 쉽게 따를 수 없다.

어쩌면 큰 꿈을 갖는 것보다 값진 것은 온전한 나만의 꿈을 키우고 실현하는 일일 것이다. 원대한 꿈을 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편견과 선입관으로 얼룩지지 않은 꿈을 꾸는 일이다.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욕심이 실은 나의 욕심이 아니거나, 온통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욕심은 채우면 채울수록 충족되기는커녕 공허감만 낳기 때문이다.
되도록 원대한 꿈을 꾸며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교육은 숱하게 받아 왔다. 하지만 진짜 꿈을 찾기 위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확보하는 일의 중요성은 어디서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는 양날의 검을 잡고도 한쪽 날 쓰는 법만 배운 것과 같다.

유용함이 반드시 좋은 것도, 무용함이 덜 아름다운 것도 아님을 기억하자.

인간관계를 한마디로 줄이면 예절이 된다. 예절은 예의와 범절의 준말이다. 예의는 상호 존중을 위해 필요한 말과 행동이고 범절은 그 말과 행동에 절도가 있는 것이다. 예의만 있고 범절이 없으면 좁혀지지 않는 답답함이 생기고 범절만 있고 예의가 없으면 선을 넘을 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감돈다. 이 답답함과 긴장감 사이를 오가며 기진맥진하게 되는 것이 사회생활이다.

동양에서 중용은 균형과 같은 의미다. 서로를 대하는 마음에 중용이 깃들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중용이 없는 관계에서는 긴장감과 답답함만이 부각되기 쉽다.

적당한 답답함과 적절한 긴장이 있어야 예절이 성립할 수 있다. 담담하지 못함에서 오는 답답함과 아무런 긴장도 없는 달콤함은 결국 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예절을 실천할 수 있다.

스스로를 마음껏 사랑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오늘날이다. 한 주를 되돌아보면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수두룩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사람이 나보다 더 사랑받고 인정받기에 충분한 듯하다. 초라한 나를 보며 긍정적인 하루를 맞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날에 공자와 장자는 주눅 들 것 없다며 손을 내민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라며 조언한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점차로 남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준 사랑과 인정이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결국 세상의 다른 누구에게라도 돌아는 갈 것이다. 인정과 사랑은 그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경敬’이란 ‘진실로 삼가고 조심하여 정중함’을 뜻한다.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 앞에서도 그러하다. 스스로에게 정중하지 못한 사람은 좀처럼 남에게도 정중하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다.

남의 편안함만을 편하게 여기고 자신의 편안함은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의 삶에 우울과 부정은 필연적이다. 바꿔 말하면 생기가 넘치는 삶은 자신의 편안함을 얼마큼 긍정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내 삶의 첫 단추는 잘 끼워져 있는가. 내 삶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긍정하는 나를 만나는 길은 이 두 가지를 점검할 때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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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였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시커멓고 음흉함을 강조했다기보다 그만큼 마음이 자주 바뀜을 시사하는 속담이다. 나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내 마음이다.

마음의 여유가 물적 여유와 상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꼭 물적 여유만이 마음을 여유롭게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마음의 여유는 인색함과 쩨쩨함으로 스스로를 한계 짓는 대신, 열린 자세로 주고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서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은 부족하다. 그렇기에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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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와 ‘라떼는’이라는 말은 오늘날 세대 차이를 언급할 때 자주 사용된다. ‘꼰대’란 자신의 경험과 생각만이 옳다는 입장을 굳게 지키며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가르치려 하는 사람을 말한다. ‘라떼는’은 꼰대라 불리는 이들이 주로 쓰는 말을 변형한 표현이다. ‘나 때는 말이지’로 운을 떼는 것이 꼰대들의 공통된 행동 양식이라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이 둘을 합쳐 아예 ‘꼰대라떼’라고 부르기도 한다.
얼핏 들으면 분위기 좋은 카페의 신메뉴 같기도 한 이 말은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실망을 투영하고 있다.

지금의 젊은이들도 언젠가는 기성세대가 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문득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체감할 때, 과거의 내가 기피했던 모습으로 남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기성세대에 대한 실망감은 잠시 내려놓자. 그 대신 앞으로 올 세대에게 자신이 느낀 실망감만은 안겨 주지 않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런 고민은 마냥 기성세대에게 변화를 촉구하는 것보다 세상을 더 효율적으로 바꿔 나가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변화가 빨라지면서 앞 물결과 뒷 물결을 구분하기가 모호한 세상이 되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한 사람의 경험이 지니는 가치는 점차 작아지고 있다. 세상은 진화하고 사람도 진화한다. 나보다 진화된 존재가 나를 쫓아올 때 인간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다가오는 세대를 두려워하여 잘 대우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그들을 무시하고 밀어낸다. 앞 물결이 뒷 물결을 밀어낼 수 없는 것은 자연의 순리다. 뒷 세대를 배척하는 앞 세대는 시대를 역행하는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들리다’는 뜻으로 잘 알려진 한자 문聞에는 ‘안다知’는 의미도 담겨 있다. 공자가 "사십이나 오십이 되었음에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사십이나 오십이 뒷 물결에서 앞 물결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살 만큼 살았는데 왜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좋은 스승일 수 있다. 훗날 내가 사십이나 오십이 되었을 때 저런 사람으로 남아서는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화를 잘 파악하여 훌륭한 경위서를 넘겨줄 수 있는 사람은 선배가 되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낡아 빠진 사람이 된다.

영원히 앞 물결일 수도 없고 언제까지나 뒷 물결일 수도 없다. 늘 앞선 사람도 없고 항상 뒤처진 사람도 없다. 모래톱에 스러지는 슬픔 대신 뒷 물결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기쁨에 사로잡힌 앞 물결은 바다로 돌아가 새로운 뒷 물결을 이룰 것이다. 빨리 앞 물결을 밀어내야겠다는 조바심 대신 아직 파도를 이루지도 못한 물방울들에게 진심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 주려는 뒷 물결은 아름다운 바다를 만드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물결이 서로를 배척하여 갈라지는 법은 없다. 앞 물결과 뒷 물결이 조화롭게 일렁이는 세상, 앞서 간 사람과 뒤따르는 사람이 화합할 수 있는 세상. 서로 끊임없이 배워 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런 세상을 꿈꿀 수 있다.

교권과 학생 인권, 상사와 부하 직원 간의 위계 등 세상을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맞닥뜨리게 된다. 학생의 인권과 교권이 균형을 잡지 못해 혼란스러운 오늘날, 쉽게 변하지 않는 가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었다. 쉽게 변하지 않는 가치는 부끄러움을 아는가 모르는가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좋은 사람은 뭘 해도 예뻐 보이고 싫은 사람은 뭘 해도 미워 보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절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수오지심이 생긴다. 남의 잘못을 미워하기 전에 진심으로 내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내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만큼 남의 잘못을 미워할 수 있다면 오늘날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배우지 않고도 난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나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며 배우고 또 남의 잘못을 미워하며 배운다면 누구나 참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불교의 경전 《반야심경》의260자를 다섯 글자로 줄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된다고 한다. ‘세상 일체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한 글자로 줄이면 ‘심心’이 된다고도 한다. 이런 까닭에 많은 사람이 불교 철학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마음’을 떠올리는 것 같다.
어쩌면 반야심경의 정수는 심心 한 글자에 오롯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교 철학 전체를 심 한 글자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법대로 해"라는 말이 판을 치는 오늘날이다. 대화로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소송을 하고 재판을 벌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명판사, 명검사, 승소율이 높은 변호사도 있다. 그래도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만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양보할 수 없다는 마음이 다툼을 부르고,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분쟁을 조장하며, 타협은 없다는 생각이 재판으로까지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나도 다치고 남도 다치며 세상도 다친다.

물론 때때로 날 선 태도는 억압과 강제에 유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매 순간 남을 다스리고자 하는 백락이 될 필요는 없다. 시퍼렇게 날이 선 도구를 사용할수록 배움의 장은 좁아질 뿐이다.
《도덕경》에는 이런 대목도 실려 있다.
"말이 많을수록 금방 한계에 봉착한다."100
말을 많이 할수록 의도와 달리 궁색해지는 상황을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말과 지식은 금세 한계를 드러내지만 인내와 양보는 언제나 한계를 극복한다. 만약 자신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느낀다면 내가 다 안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자. 그런 뒤 세상으로부터 새로이 배울 자세를 정비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범하는 오류 가운데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지 않고 지레짐작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한 판단을 ‘사실 판단’, 가치에 대한 판단을 ‘가치 판단’이라고 한다. 사실 판단은 대개 객관적이며 보편적이다. 그러므로 실증이 가능하다. 반면 가치 판단은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경우가 많다.

살면서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판단은 대개 경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이 아무런 경험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당초 이 세상에 객관적인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우리는 그저 우리가 믿는 것을 사실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쉴 새 없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지,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은지를 판단하느라 공연히 마음을 수고롭게 하진 않았던가 돌아보게 된다.

하루쯤은 판단을 멈춰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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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흐름을 탈 줄 아는 사람은 섣불리 충고하지 않는다. 어제까지 좋다고 생각된 것이 오늘은 싫을 수 있고 오늘까지는 옳다고 생각된 것이 내일은 틀리게 여겨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과 조화를 이루려는 마음이 충고하고 싶은 마음을 앞서는 사람이 있다. 이들 주변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이 모여든다.
스스로를 타일러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 데 매진할 뿐 남에게 충고하지 않는 일. 남의 거슬리는 점을 바로잡기보다 갈등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에 평화를 추구하여 세상과의 조화를 도모하는 일. 비록 용모는 추했지만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던 능력과 덕은 이러한 애태타의 정신에 있었다. 충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땐 한 번쯤 애태타를 떠올려 보자. 지혜롭게 관계 맺는 첫걸음이 될지 모른다.

좋은 관계를 많이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좋은 인간이기도 하다. 인간人間은 ‘사람 사이’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는 그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이다. 좋았던 사이가 하루아침에 나빠지기도 하고 나빴던 사이가 어떤 계기로 호전되기도 한다. 결국 행복이란 좋은 사이를 얼마큼 잘 유지하는가에 달려 있다.

때때로 지나친 관심은 부담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문제시되는 스토킹이나 가스라이팅, 그루밍 성범죄도 왜곡된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많다. 장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다름을 인정하면 그동안 이해되지 않던 많은 것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러면 깨닫게 된다. 사실 세상엔 별의별 이상한 사람이 많은 게 아니라 별의별 이해받지 못한 사람이 많은 것일 뿐임을. 이상한 사람이 많은 세상엔 좋은 사이가 드물지만 이해하려는 사람이 많은 세상엔 나쁜 사이가 드물다. 나를 너로 만들고 너를 나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폭력이다. 하지만 나를 나답게, 너를 너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각기 다른 너와 내가 모여 우리를 이뤄 가는 것이 제물齊物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인仁이란 사람?둘二이 함께 잘 있는 것이다. 먼저 너와 나 두 사람이 잘 있어야 우리도 잘 있을 수 있다. 공자가 솜씨 있는 말과 꾸며진 얼굴빛을 경계한 이유는 이 두 가지에 욕심이 담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의리나 신뢰 등 나의 가치를 드러내고 싶다는 욕심이 앞설 때가 있다. 욕심을 따르는 말솜씨는 나도 모르는 새 좋아지고 얼굴빛은 자연스레 꾸며진다. 반면에 실천을 따르는 말과 얼굴빛은 자못 양심적이다. 양심이란 늘 인仁한 마음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기분 좋을 때 함부로 약속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좋은 기분에 말은 유창해지는 반면 실천은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말을 아끼되 실천에 힘쓰는 일.

공자가 말하는 중간 이상 되는 사람과 장자가 말하는 함께 갈 만한 사람은 적어도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 중간 이하 되는 사람과 함께 갈 수 없는 사람이란 귀로 들리는 것만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이다. 들리는 것만이 전부라는 말은 곧 내 마음대로만 듣겠다는 말과도 같다.

서로의 수준을 알기 위해선 대화가 필요하고 특히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동양에서 듣는 방법으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문聞이다. 이는 귀로 들어오는 모든 소리를 그저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이다. 둘째는 청聽이다. 이는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것이다. 셋째는 경청傾聽이다. 이는 마음을 기울여 상대방의 말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들리는 대로만 듣는 것은 귀가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의 깊게 듣고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리는 것은 상대방의 진정眞情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할 수 없다. 진정이란 진실하고도 애틋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상대방의 진정을 알기 위해선 내게도 진실하고 애틋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예민함은 잘 다루면 좋은 감정으로 승화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칫하면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무서운 감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민해지기 쉬운 날엔 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용기가 더욱 필요하다. 예민할수록 주의 깊게 듣고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릴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 중간쯤 이상 되는 사람들과 오래 함께 갈 수 있다. 어떤 관계를 맺어 나갈지는 나 스스로가 함께 갈 만한 사람인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가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상호 신뢰는 때때로 도저히 안 될 것만 같은 일을 성사시킨다. 믿음 없이는 아주 작은 일조차 실현될 수 없다. 먼저 스스로를 믿고 나를 믿듯이 남을 믿어 주는 일. 남에게 받은 믿음으로 다시 스스로에게 확신을 갖는 일. 어쩌면 우리의 예민함은 세상을 향한 신뢰를 재정비하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바보처럼 서로를 믿어 보는 것은 어떨까. 그 믿음이 새로운 국면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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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위적인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당위적인 신념이란 ‘여자는 이래야 돼’, ‘남자는 이래야 돼’, ‘애들은 그러면 안 돼’처럼 무조건적인 굳은 믿음을 말한다. 삶에서 나침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신념이 꼭 나쁘지만은 않지만 ‘무조건’ 그래야 한다거나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는 식의 믿음은 때때로 위험하다. 조화와 질서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없고 모든 것을 믿는 사람도 없다. 같은 믿음처럼 보이더라도 서로 전혀 다른 것을 믿는 경우도 있으며, 다른 것을 믿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꽤 비슷한 것을 믿는 경우도 많다. 진리는 모든 사람이 뭔가를 믿거나 의심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은 나의 믿음만 옳다고 고집하지 않는 열린 마음이다. 그리고 내가 믿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마음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남에게 나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다.

융통성이란 그때그때 알맞은 도리 편에 서고 알맞은 도리를 따르는 삶의 지혜를 말한다. 융통성은 나와 남 모두를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고집은 나와 남 모두를 수동적이며 강제적인 존재로 전락시킨다.
꼭 그래야 되거나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는 억지스러운 고집과 당위적인 신념 대신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여유와 융통성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떨까. 한없이 늘어지는 하루가 조금은 덜 피로해질지도 모른다. 공자는 "함께 따라 주는 것이 곧 바름이다"28라고 말했다. 고집의 다른 말은 고정관념이며 가장 깨기 어려운 고정관념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나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것. 큰 사람의 길은 이로부터 열릴 수 있다.

메아리를 그치기 위해선 소리를 멈춰야 하고 그림자를 바로 보기 위해선 움직임을 멈춰야 하듯이 두루두루 어울리기 위해선 비교를 멈춰야 한다. 비교도 세상의 지식처럼 끝이 없는 것이다. 남과 나를 비교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은 자신을 해치고 불행한 처지에 놓여 늘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공자와 장자는 세상을 내게 맞추는 대신 나를 세상에 맞추는 지혜를 소개한다. 동양에서 성인군자聖人君子란 대인大人과 같은 말이다. 대인이란 큰 사람을 뜻한다. 공자와 장자가 말하는 큰 사람의 기준은 체구가 아니라 마음에 있다. 넓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은 큰 사람이며 좁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은 작은 사람이다.
넓은 마음씨란 여유 있는 마음가짐을 말하며 좁은 마음씨란 급급한 마음가짐을 말한다. 여유 있는 마음은 남들이 나를 쫓아 살도록 만들지만 급급한 마음은 내가 남들을 쫓아 살도록 만든다. 장자는 ‘미삭삭연야未數數然也’라 하여 매사에 조급해하지 않는 삶의 태도야말로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하였다.

공자가 끊었다고 알려진 네 가지를 한마디로 줄이면 ‘융통성’이 된다. 융통성은 일종의 균형 작용이며 동양철학에서는 중용의 좋은 방법론이기도 하다. 일과 삶에 ‘워라밸’이 필요하듯이 세상 모든 일에는 중용이 요구된다. 사사로운 의견을 함부로 표출하지 않을 것, 반드시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상통 가능한 고집을 부릴 것, 내가 아니면 안 되리라는 마음을 비울 것. 이는 공자가 소개하는 삶의 중용을 실천하기 위한 기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욕심의 특징 중 하나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간절히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면 금세 또 다른 일이 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끝이 없는 앎을 뒤쫓는 것은 위태롭다는 장자의 말처럼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가 무한한 것을 추구하게 되면 스스로를 해칠 수밖에 없다.

살다 보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어찌해 볼 수 없는, 그저 눈을 감고 간절히 빌며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일들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또 누구의 책임인지조차 알 수 없기에 더욱 괴롭고 답답하다. 이럴 때 동양의 철학자들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은 그대로 둔다’는 마음을 강조했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분수에 맞는 높이를 설정하여 나를 보전한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닿지 못할 높이로 나를 쏘아 올리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닳아 없어진 나는, 겨울이 되어 앙상해진 나무가 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를 부러워하듯 후회하게 될 것이다. 멀리 쏘려면 힘껏 당겨야 하고 힘껏 당긴 뒤에는 힘을 비축할 시간이 필요함을 기억하자.

최근 들어 사이코패스니 소시오패스니 하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나밖에 모르는 성향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사이코패스가 되고, 사람을 도구화하려는 성향이 극에 달하면 소시오패스가 된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마음은 평화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불안과 혼란은 이들이 스스로에게 내린 저주인 셈이다.

많은 사람이 입을 모아 잘못됐다고 하는 게 꼭 틀린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좋다고 하는 게 꼭 옳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옳고 그름보다 중요한 건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세상이란 서로 다른 너와 내가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중용을 지키는 네 가지 기술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끊으셨으니 사사로운 의견이 없으셨으며, 반드시 해야 된다는 것이 없으셨으며, 고집함이 없으셨으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없으셨다.38
──────── 《논어》 〈자한〉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말이 있다. 전성기가 끝나기 전에 미련 없이 욕심을 그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곤 한다. 이 말에는 사실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남들이 박수를 쳐 줄 때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박수를 칠 수 있을 때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돋보이듯이, 내가 희미해진 다음에야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된다. 공자는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추위는 어려운 고비와 시련을 상징한다.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은 나를 잃었을 때 닥쳐온다. 나로 태어나 나로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세상을 다 얻어도 나를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메아리는 소리를 멈춰야 그치고 그림자는 내가 멈춰야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리 고군분투하더라도 결국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양주의 사상은 ‘위아爲我주의’로 잘 알려져 있다. 위아란 나를 위한다는 뜻이다. 위아주의와 이기주의는 다르다. 이기주의가 남들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이익만 챙기는 것이라면 위아주의는 ‘먼저 나 자신을 잘 챙기는 것’을 의미한다. 양주가 먼저 나 자신을 잘 챙기라고 충고하는 이유는 내가 없으면 남도 없고 내가 없다면 이 세상도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남들과 힘을 합쳐서 공을 이루는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사람이다. 위대한 사람은 남의 의견을 들었을 때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내 생각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날씨는 제각기 다르지만 결국 한 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합쳐서 이루어진다.

조급한 생각이 들도록 부채질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고집이다. 물론 모든 고집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고집에도 좋은 고집이 있고 나쁜 고집이 있다. 좋은 고집을 의지라 하고 나쁜 고집을 억지라 한다. 의지란 나를 극복하는 데 열중하는 것이다. 억지란 남을 이기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억지 고집을 덜어 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융통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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