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품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수양이 부족한 사람은 잘 갈고닦은 인품을 보고 놀랄 일이 많지만 수양이 잘된 사람은 어떤 인품을 보더라도 담담하다. 내 본성의 상태와 인품의 현주소를 찬찬히 돌아볼 때 사람과 짐승의 분기점은 어디에 있는가,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면서 어짊과 정의로움, 예절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떤 이들은 인의예지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내고자 심혈을 기울이기도 한다. 자신이 깨달은 만큼의 인의예지를 삶 속에서 진실로 실천하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 역시 의외로 많다. 하지만 무언가에 대한 지극한 앎을 가진 사람도, 또 그 앎을 실천에 옮기고자 밤낮없이 노력하는 사람도 쉽게 따를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바로 무언가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앎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밤낮없이 노력하는 사람도 이것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사람은 쉽게 따를 수 없다.
어쩌면 큰 꿈을 갖는 것보다 값진 것은 온전한 나만의 꿈을 키우고 실현하는 일일 것이다. 원대한 꿈을 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편견과 선입관으로 얼룩지지 않은 꿈을 꾸는 일이다.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욕심이 실은 나의 욕심이 아니거나, 온통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욕심은 채우면 채울수록 충족되기는커녕 공허감만 낳기 때문이다. 되도록 원대한 꿈을 꾸며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교육은 숱하게 받아 왔다. 하지만 진짜 꿈을 찾기 위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확보하는 일의 중요성은 어디서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는 양날의 검을 잡고도 한쪽 날 쓰는 법만 배운 것과 같다.
유용함이 반드시 좋은 것도, 무용함이 덜 아름다운 것도 아님을 기억하자.
인간관계를 한마디로 줄이면 예절이 된다. 예절은 예의와 범절의 준말이다. 예의는 상호 존중을 위해 필요한 말과 행동이고 범절은 그 말과 행동에 절도가 있는 것이다. 예의만 있고 범절이 없으면 좁혀지지 않는 답답함이 생기고 범절만 있고 예의가 없으면 선을 넘을 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감돈다. 이 답답함과 긴장감 사이를 오가며 기진맥진하게 되는 것이 사회생활이다.
동양에서 중용은 균형과 같은 의미다. 서로를 대하는 마음에 중용이 깃들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중용이 없는 관계에서는 긴장감과 답답함만이 부각되기 쉽다.
적당한 답답함과 적절한 긴장이 있어야 예절이 성립할 수 있다. 담담하지 못함에서 오는 답답함과 아무런 긴장도 없는 달콤함은 결국 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예절을 실천할 수 있다.
스스로를 마음껏 사랑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오늘날이다. 한 주를 되돌아보면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수두룩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사람이 나보다 더 사랑받고 인정받기에 충분한 듯하다. 초라한 나를 보며 긍정적인 하루를 맞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날에 공자와 장자는 주눅 들 것 없다며 손을 내민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라며 조언한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점차로 남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준 사랑과 인정이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결국 세상의 다른 누구에게라도 돌아는 갈 것이다. 인정과 사랑은 그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경敬’이란 ‘진실로 삼가고 조심하여 정중함’을 뜻한다.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 앞에서도 그러하다. 스스로에게 정중하지 못한 사람은 좀처럼 남에게도 정중하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다.
남의 편안함만을 편하게 여기고 자신의 편안함은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의 삶에 우울과 부정은 필연적이다. 바꿔 말하면 생기가 넘치는 삶은 자신의 편안함을 얼마큼 긍정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내 삶의 첫 단추는 잘 끼워져 있는가. 내 삶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긍정하는 나를 만나는 길은 이 두 가지를 점검할 때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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