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와 ‘라떼는’이라는 말은 오늘날 세대 차이를 언급할 때 자주 사용된다. ‘꼰대’란 자신의 경험과 생각만이 옳다는 입장을 굳게 지키며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가르치려 하는 사람을 말한다. ‘라떼는’은 꼰대라 불리는 이들이 주로 쓰는 말을 변형한 표현이다. ‘나 때는 말이지’로 운을 떼는 것이 꼰대들의 공통된 행동 양식이라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이 둘을 합쳐 아예 ‘꼰대라떼’라고 부르기도 한다.
얼핏 들으면 분위기 좋은 카페의 신메뉴 같기도 한 이 말은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실망을 투영하고 있다.

지금의 젊은이들도 언젠가는 기성세대가 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문득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체감할 때, 과거의 내가 기피했던 모습으로 남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기성세대에 대한 실망감은 잠시 내려놓자. 그 대신 앞으로 올 세대에게 자신이 느낀 실망감만은 안겨 주지 않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런 고민은 마냥 기성세대에게 변화를 촉구하는 것보다 세상을 더 효율적으로 바꿔 나가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변화가 빨라지면서 앞 물결과 뒷 물결을 구분하기가 모호한 세상이 되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한 사람의 경험이 지니는 가치는 점차 작아지고 있다. 세상은 진화하고 사람도 진화한다. 나보다 진화된 존재가 나를 쫓아올 때 인간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다가오는 세대를 두려워하여 잘 대우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그들을 무시하고 밀어낸다. 앞 물결이 뒷 물결을 밀어낼 수 없는 것은 자연의 순리다. 뒷 세대를 배척하는 앞 세대는 시대를 역행하는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들리다’는 뜻으로 잘 알려진 한자 문聞에는 ‘안다知’는 의미도 담겨 있다. 공자가 "사십이나 오십이 되었음에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사십이나 오십이 뒷 물결에서 앞 물결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살 만큼 살았는데 왜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좋은 스승일 수 있다. 훗날 내가 사십이나 오십이 되었을 때 저런 사람으로 남아서는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화를 잘 파악하여 훌륭한 경위서를 넘겨줄 수 있는 사람은 선배가 되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낡아 빠진 사람이 된다.

영원히 앞 물결일 수도 없고 언제까지나 뒷 물결일 수도 없다. 늘 앞선 사람도 없고 항상 뒤처진 사람도 없다. 모래톱에 스러지는 슬픔 대신 뒷 물결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기쁨에 사로잡힌 앞 물결은 바다로 돌아가 새로운 뒷 물결을 이룰 것이다. 빨리 앞 물결을 밀어내야겠다는 조바심 대신 아직 파도를 이루지도 못한 물방울들에게 진심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 주려는 뒷 물결은 아름다운 바다를 만드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물결이 서로를 배척하여 갈라지는 법은 없다. 앞 물결과 뒷 물결이 조화롭게 일렁이는 세상, 앞서 간 사람과 뒤따르는 사람이 화합할 수 있는 세상. 서로 끊임없이 배워 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런 세상을 꿈꿀 수 있다.

교권과 학생 인권, 상사와 부하 직원 간의 위계 등 세상을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맞닥뜨리게 된다. 학생의 인권과 교권이 균형을 잡지 못해 혼란스러운 오늘날, 쉽게 변하지 않는 가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었다. 쉽게 변하지 않는 가치는 부끄러움을 아는가 모르는가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좋은 사람은 뭘 해도 예뻐 보이고 싫은 사람은 뭘 해도 미워 보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절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수오지심이 생긴다. 남의 잘못을 미워하기 전에 진심으로 내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내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만큼 남의 잘못을 미워할 수 있다면 오늘날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배우지 않고도 난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나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며 배우고 또 남의 잘못을 미워하며 배운다면 누구나 참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불교의 경전 《반야심경》의260자를 다섯 글자로 줄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된다고 한다. ‘세상 일체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한 글자로 줄이면 ‘심心’이 된다고도 한다. 이런 까닭에 많은 사람이 불교 철학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마음’을 떠올리는 것 같다.
어쩌면 반야심경의 정수는 심心 한 글자에 오롯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교 철학 전체를 심 한 글자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법대로 해"라는 말이 판을 치는 오늘날이다. 대화로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소송을 하고 재판을 벌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명판사, 명검사, 승소율이 높은 변호사도 있다. 그래도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만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양보할 수 없다는 마음이 다툼을 부르고,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분쟁을 조장하며, 타협은 없다는 생각이 재판으로까지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나도 다치고 남도 다치며 세상도 다친다.

물론 때때로 날 선 태도는 억압과 강제에 유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매 순간 남을 다스리고자 하는 백락이 될 필요는 없다. 시퍼렇게 날이 선 도구를 사용할수록 배움의 장은 좁아질 뿐이다.
《도덕경》에는 이런 대목도 실려 있다.
"말이 많을수록 금방 한계에 봉착한다."100
말을 많이 할수록 의도와 달리 궁색해지는 상황을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말과 지식은 금세 한계를 드러내지만 인내와 양보는 언제나 한계를 극복한다. 만약 자신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느낀다면 내가 다 안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자. 그런 뒤 세상으로부터 새로이 배울 자세를 정비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범하는 오류 가운데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지 않고 지레짐작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한 판단을 ‘사실 판단’, 가치에 대한 판단을 ‘가치 판단’이라고 한다. 사실 판단은 대개 객관적이며 보편적이다. 그러므로 실증이 가능하다. 반면 가치 판단은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경우가 많다.

살면서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판단은 대개 경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이 아무런 경험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당초 이 세상에 객관적인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우리는 그저 우리가 믿는 것을 사실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쉴 새 없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지,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은지를 판단하느라 공연히 마음을 수고롭게 하진 않았던가 돌아보게 된다.

하루쯤은 판단을 멈춰 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